반야심경 _ 그래서 어떡하라고
최근 반야심경을 깊이 읽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보았다(맨 아래에 첨부).
반야심경의 내용 전체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근접하였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So What? 그래서 어떡하라고?'
내 깨우침이 아직 한참 모자랐던 것이다.
머리 속으로만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했을 뿐, 그 가르침이 내 의식으로부터 상당히 유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반야심경을 깊이 읽는 도중에 이해되지 않은 의문이 많았지만, 다 읽고 내 나름의 번역을 완성해놓고 나서도 궁금한 점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의문들을 나름 대체로 해소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충분히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의문점들을 상정하고 하나씩 자문자답하며 풀어보고자 한다.
반야심경 약해
세상 만물은 부단히 변하고 있고 모두 서로 관계로 엮여 있으니,
이를 무상(無常) 및 무아(無我)라 하며, 한 마디도 '공(空)'이라 이른다.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 방식들은 언제나 변하고 다른 존재와의 상호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니, 바로 '공'이며,
또 '공'이 그들을 만들어내니 '공'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우주의 가동 원리인 이 '공'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 무엇에 대한 직간접적인 인연의 윤회를 따지는 것,
고통과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인과에 집착하는 것, 및 앎이나 얻음을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의미가 없다.
그런 무의미하고도 추상적인 생각은 제쳐두고, 오직 인간이 바로 실천가능한 '반야바라밀'에만 의존하라.
반야바라밀은 베풂, 절제, 역경, 성장, 균형, 통찰과 같은 실천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들을 깊이 실천하면 매사에 거리낌과 두려움이 없어지고,
뒤집어진 헛된 생각도 멀리하게 되어 지극한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 함께 주문을 외어보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0. 반야심경을 간략하게 설명해보라.
반야심경은 간단히 말하면 '변화 리더십' 경전이다.
우주 만물은 모두 서로 인연에 의해 엮여서 생멸하고 존재하며(無我), 부단히 변해간다(無常).
이 우주의 진리를 '공(空)'이라 이름 붙였다.
'공(空)'을 온전히 깨닫지 않고서는 고통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공(空)'의 깨달음은 그저 오지 않는다.
'반야 바라밀'을 깊이 실천한 결과로 '공(空)'의 경지를 알 수 있다.
'공(空)'을 알고 보면, 인간이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五蘊, 十八界)은 공허한 것이니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공(空)'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하는 십이연기(十二緣起)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도 아무 의미가 없다.
'공(空)'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십이연기나 사성제에 아무리 매달려 심력을 다하여도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상적인 교리를 버리고 현실적이고도 직접적인 반야 바라밀을 따르도록 하라.
그러면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고 헛된 망상도 멀리 할 수 있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럼 '반야 바라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건너가기'이다.
'건너가기'는 현실의 무상 무아함을 알고 그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이며,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부단한 움직임이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쉬지않고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며 행동하는 과정이다.
이는 곧 질문과 심사숙고, 창의력과 실행력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탁월한 삶의 태도이다.
그 구체적인 실천 요령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바라밀이다.
결론적으로,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내 나름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이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변화를 행동을 통해 선제적 및 적극적으로 이끌라.
그러면 걸림과 두려움이 없고 헛된 망상도 하지 않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다시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변화하라!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그 속에 행복이 있다."
1. 혹 반야심경은 반불교적(反佛敎的)인가?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없다'가 무척 많이 나온다.
오온이 없고, 십팔계가 없고, 십이연기도 없고, 고집멸도 사성제도 없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상징하는 '공(空)'의 개념도 사실은 없음을 설득하려는 표현이다.
반야심경 전체에서 능동적인 언어가 매우 귀하다.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다(行深)',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다(照見)', '반야바라밀다를 따르다(依般若波羅蜜多)' 등에서만 적극적인 동사를 쓰이고 있다.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에 관한 오온(五蘊)이나 십팔계(十八界)를 부정하는 말은 별 거부감 없이 수긍할 수 있다.
인간의 생각이나 인식 혹은 기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시간, 장소, 상황 혹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상태를 유지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 苦集滅道) 등과 같이,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근간이 되는 개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 혼란스럽다.
혹시 반야심경은 반불교적(反佛敎的)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나름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설명을 할 수 있겠다.
반야심경이 대승불교의 상징적인 경전으로서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승불교는 개인의 수행과 해탈을 중시하는 한편, 대승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중시한다.
소승불교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여하히 벗어날 것인지를 추구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로 하기에, 초기 불교의 이론적 배경인 십이연기와 사성제 등에 기초하여 내적 탐구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그에 반해 대승불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는 고통의 원인을 우주나 자연의 가동원리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공(空)'이다.
자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진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전제 혹은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열반의 기회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2. '공(空)'의 관점에서 본다니?
무상, 무아의 '공(空)'은 자연 혹은 우주의 가동원리이다.
자연이나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 혹은 그 내적 갈등은 너무도 보잘 것 없다.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 속에서 수초에 갇혀 사는 작은 피라미를 생각해보라. 혹은 거대한 우주 속에 먼지조차에도 비교 되기 힘든 인간이란 생명체들을 상상해보라.
무엇이 변치 않고 있으며 무엇이 내 고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겠나.
그러니까, 우주의 가동 원리인 '공'의 관점에서 보면,
개개 인간이 느끼고 인식하는 오온, 십팔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를 지금에 이르게 한 십이연기도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발버둥 치며 파고드는 고집멸도 사성제 역시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_도덕경 제5장"과 상통한다.
하늘과 땅은 인간에게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런 천지 우주의 섭리를 겸허히 받아들인 위에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가능한 노력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이 가르침은
십이연기, 사성제 등과 같은 멀고도 추상적인 문제에 매달려 심력을 다하지 말고,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며 당장 실천가능한 문제 해결 방법(반야바라밀다의 수행)에 집중하여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부처님의 설법 중 '독화살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마라구마라여, 내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마.
어떤 사람이 사냥 나갔다가 독화살을 맞았다 하자.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급히 의사를 불러와 독화살을 뽑으려 하니,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네.
'화살을 쏜 사람이 내게 원한이 있는지 실수로 쏘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디 사는 사람이며, 신분은 어떠한가? 화살은 곧은 것인가, 굽은 것인가?
화살대는 갈대인가 대나무인가? 화살깃은 독수리 깃털인가 매의 깃털인가?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독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3. '공(空)'은 허무(虛無)함을 이르는 말인가?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을 가지고,
속세의 부와 명예, 성공 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초탈하게 살라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공(空)'은 우주의 진리인 연기, 무상, 무아를 한 마디로 표현한 키워드에 불과하다.
가끔 '비어있다'는 뜻과 같은 용도로 쓰일 경우도 있지만, 허무, 염세 등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리고 '무소유'와도 관련이 없다.
물질(色)이 공(空)한 것이니 그에 집착하지 말라는 취지에서는,
무소유의 관념이 '공'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공'은 소유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소유'가 갖는 '공'의 개념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많이 소유한다 하더라도 반야심경의 관점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권장할 일이라 할 것이다.
'공' 사상이 가르치는 것은, 다만 부나 명예 등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공'한 것이니 그에 집착할수록 고통은 커지고 종내 지키지 못하게 된다.
부와 명예 등을 마음껏 추구하되, 그에 내재된 '공'의 성질을 잘 알고 대응한다면,
부와 명예라는 감각적인 개념을 초월한 더 높고 큰 가치를 추구하며 건너뛸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기업의 예를 들면, 기업이 이익 추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지만, 이익 추구 자체만을 목적으로 해서는 좋은 기업, 지속가능한 경영을 이루지 못한다.
이익 추구를 뛰어넘는 상위 개념의 고귀한 가치를 비전으로 앞세우고 그를 위해 매진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모든 조직원이 열정을 다해 동참할 수 있고,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그를 통해 기업의 성장과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오히려 허무나 염세의 반대편에 있다.
더 적극적이고 더 능동적으로 더 치열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반야바라밀의 구체적인 여섯 실천 덕목(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이 그러하다.
4. '공(空)'의 깨달음이 먼저인가?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이렇다.
"관자재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서, 일체의 고통을 벗어났느니라(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도 '공'을 먼저 알았던 것이 아니다.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行深)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을 비추어 볼 수 있었다(照見).
그러니, '공'을 깨닫고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수행의 결과로 '공'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헤겔이 말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질녘이 되어야만 날개를 편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지혜나 철학은 경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밝은 모습으로 정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의 깨달음은,
단순히 머리를 써서 지적인 작용만으로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온몸과 마음을 써서 적극적으로 행동한 후(行深般若波羅蜜多)에
비로소 '공'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럼, '공'을 알고 나면,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다. 반야바라밀에 따라야 한다(依般若波羅蜜多).
그렇게 해야만, 걸림과 두려움이 없고, 전도몽상에서 멀어지고, 마침내 열반에 이를 수 있다.
5.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인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지혜로운 건너가기'이다.
'반야'는 '지혜'를, '바라'는 '저쪽' 혹은 '피안'을, '밀다'는 '건너가다'라는 뜻이다.
'건너가기'이므로,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행동이며,
이룬 성취나 결과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옮겨가는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한다.
'건너가기'는 타인에 의해 강제된 행동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이다.
그래서 주체성, 자유, 결단, 용기를 갖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의적인 역량을 요구한다.
왜 건너가야 하는지, 어디로 어떻게 건너야 할지,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찾아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단한 질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니, '질문하는 자'만이 수행할 수 있다.
타인의 목표나 방법을 모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공'에 반하기에 반야바라밀다의 올바른 실천이 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는 자신이 깨달아야 할 '공'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라밀(바라밀다)은 6바라밀, 10바라밀, 4바라밀 등으로 구분하지만, 6바라밀이 가장 일반적이다.
반야바라밀은 바라밀 중 하나이기도 하면서, 모든 바라밀을 통칭하는 개념이기도 한다.
1. 보시 바라밀(布施波羅蜜) : 재시(財施), 법시(法施: 진리를 가르침) · 무외시(無畏施: 마음을 편하게 하여 두려움을 없게 함)의 실천
2. 지계 바라밀(持戒波羅蜜) : 계율을 지키기. 자기 반성과 행동 규율
3. 인욕 바라밀(忍辱波羅蜜) : 고난을 참고 견디며 이겨 나가는 것
4. 정진 바라밀(精進波羅蜜) : 보살로서의 수행에 정진
5. 선정 바라밀(禪定波羅蜜) : 마음을 안정시켜 반야의 지혜(무분별지)를 얻기 위해 마음을 닦는 수행
6. 반야 바라밀(般若波羅蜜) : 앞의 다섯 바라밀을 가동시키는 무분별지(無分別智, 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지혜)를 작용시키는 것
위의 6바라밀은 현대 기업의 리더들이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덕목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 보시 바라밀은 베풂의 철학에,
- 지계 바라밀은 리더의 절제에,
- 인욕 바라밀은 역경 극복 역량에,
- 정진 바라밀은 리더와 조직의 핵심역량 구축 및 강화 및 성장과 혁신에,
- 선정 바라밀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 역량과 균형 감각에,
- 반야 바라밀은 리더의 통찰력에
각각 대응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6. '무상(無常)'은 어찌 건너가는가?
무상(無常)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만물은 부단히 변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말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판타 레이'(만물은 유전한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혹은 "변화한다는 말 만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로 달리 표현되기도 한다.
변화의 수레바퀴를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대처는 대충 세 가지 방법이 있다.
AOL의 테드 터너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수레를 앞에서 끌고 가거나,
수레의 뒤를 따라가거나,
수레가 지나가도록 비켜서는 것이다.
물론 변화의 수레에 질질 끌려가거나, 혹은 수레바퀴에 치여 희생되는 비극도 있을 수 있다.
변화를 주도하거나, 적어도 변화에 보조를 맞추는 전략도 가능하다.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서는 관망자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끌려다니거나 수레바퀴에 깔려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라밀다' 즉 '저쪽으로 건너가기'는 어떤 선택을 상정하고 있을까?
바라밀의 실천 내용을 보면, 필시 변화의 수레를 앞에서 끌고 가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내가 리더들에게 항상 보여주는 슬로건이 있다.
"두가지 기업이 있다. 변화하는 기업과 사라지는 기업!"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언급할 게 있다.
'변화'라고 하여, 무턱대고 지금으로부터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모두가 떠내려가는 거센 강물 속에서, 홀로 떠내려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 것도 '변화'다. 더 크고 힘든 변화일지 모른다.
제프 베조스의 말처럼 "바뀌지 않는 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 그것도 반야심경이 말하는 훌륭한 '건너가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7. 무아(無我)는 '나'가 없다는 말인가?
무아(無我)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나'는 무가치한 존재인가?
'공'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존재는 연기(緣起)의 결과로서,
'나'라고 내세울 만한 고유의 것이 없다(本無自性).
그러니 지금의 자신 모습을 가지고 자만하거나 오만하여서는 안 되고, 비하 혹은 비관하여서도 안 된다.
무아(無我)의 진정한 가르침은 자신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정한 자아, 참 나(眞我)를 찾으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서이다.
반야바라밀의 수행이야말로 '무상', '무아'한 자아에게 참다운 존재 가치를 부여한다.
반야바라밀의 수행은 온전히 주체성, 자유, 용기, 창의력을 발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天上天下唯我獨尊(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 가장 존귀하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말은 붓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 존귀하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누구나 존귀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존귀함을 증명하는 방법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정하고 매진하는 것이다(그것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이다).
붓다는 "三界皆苦 我當安之(과거 현재 미래 세계가 모두 고통이나 내가 마땅히 이를 평안케 하리라.)"고 선언하고,
평생을 그 비전에 매진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참 나'를 찾은 이라 할 것이다.
8. '공'함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는가?
관자재보살은 '공'함을 깨닫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관자재보살은 영원히 고통 없는 행복을 누리셨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모든 것은 반드시 변한다.
고통도 변하고 행복도 변한다. 피안도 열반도 공하니.. 필시 변한다.
다른 고통이 오고, 행복은 퇴색하고, 피안과 열반도 다시 중생의 땅으로 변해갈 것이다.
깨달음은 '건너감'이다. 건너감 그 행위 자체도 무상(無常)하고, 건너간 그 곳 피안 역시 무상(無常)하다.
그곳에는 또 다른 고통이 있고,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며 다시 새로운 '공'을 밝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한번의 깨달음을 평생 지고 다니며 써먹을 수 없다.
어떤 고통도 그 역시 무상(無常)한 것이기에 동일한 깨달음을 반복하여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뗏목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겠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의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나는 너희들이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뗏목의 비유를 들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배가 없어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생각했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바다를 건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뗏목에 대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_ 아함경
9. 열반(涅槃)은 지속가능한 절대적인 상태인가?
반야심경에 따르면,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반야마라밀'의 깊은 수행과 '공'의 깨달음을 필요로 하고,
부단히 반야바라밀에 따라야 한다(依般若波羅蜜多).
그리하여야만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전도몽상을 멀리 할 수 있어 열반(涅槃)에 들 수 있다.
열반(涅槃)은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놓인 상태'로 정의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지적 및 정서적으로 지극히 행복한 상태일 것이다.
이런 '지극한 행복'의 열반 상태는 지속가능할까? 추가의 수행이나 깨달음이 없이도 열반을 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요인이 필요없는 절대적인 상태일까?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열반'을 '행복'으로 대치하여 생각해보면 그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에 썼던 칼럼의 내용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불행을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행복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치통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 치통이 없어지기만 하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평소의 아침에 일어났는데 치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행복을 느끼지는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불안이나 고통 혹은 어려운 도전을 극복하였을 때에만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며,
행복한 상태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순 없다.
행복은 언제나 순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고, 고통 없이는 행복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이란 좋은 순간이 지속되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고통이나 불행의 상태를 벗어나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동적인 과정에서 느끼는 정서라는 말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순간변화율' 혹은 미분값으로 설명해야 적절할 것 같다.
행복이 동적 개념이라는 데에는 수긍이 간다. 매일 그렇고 그런 좋은 날만 계속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맑은 날만 지속되면 세상이 사막으로 변해버리고 말듯이,
우리는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절망하거나 스스로 파멸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행복에는 반드시 고통이나 불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10. 어디로 건너가란 말인가?
'바라밀다'는 '저쪽으로 건너가기'이다.
반야심경은 '저쪽'에 대해 아무런 가르침도 암시도 주지 않는다. 그저 건너가라고만 한다.
사실 '저쪽' 즉 목적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하더라도 그건 의미가 없다.
'저쪽' 역시도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라고 정하는 순간 곧 집착해서는 안 되는 무상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그저 지금 현재의 상태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에 무력하게 머무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정하는 것은 각자 본인의 소관이다.
어디로 건너갈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재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항상 깊이 생각하고 많은 질문을 하여야 한다. 어디로 갈 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부단히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답을 아는 자가 아닌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죽여라(殺佛殺祖).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가르침도 그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으라는 말이다.
살부살조(殺佛殺祖)가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 <반야심경 원역문>
지혜로운 건너가기 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관자재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서, 일체의 고통을 벗어났느니라.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라.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이와 같으니라.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세상 모든 것이 공이니라. 그래서생겨남도 사라짐도 없고,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고,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느니라.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그러니 공(空)의 관점에서 보라~
(인간이 감각하고 경험하는)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는 없고,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명(無明)에서부터 노사(老死)까지의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없고, 그 다함도 없고,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없고, 앎도 얻음도 없고, 또 얻을 것도 없느니라.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그래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따르니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고,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라.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를 따르니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러니 반야바라밀다는 매우 신비하고 밝고 비할 바 없이 높은 주문이라,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헛됨이 없으리니, 이에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읊겠노라.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가세 가세 저기로 건너가세 저기로 건너가 깨달음을 이루세
가세 가세 저기로 건너가세 저기로 건너가 깨달음을 이루세
가세 가세 저기로 건너가세 저기로 건너가 깨달음을 이루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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