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_ '리듬 제로' 실험
1974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나폴리에서 여섯 시간 동안 자신을 객체로 내놓고, 72개의 물건을 관객이 마음대로 쓰도록 한 퍼포먼스 리듬 제로를 감행했다. 저항이 없고 책임이 면제되자 평범한 관객은 옷을 자르고 살갗을 긋고 권총까지 겨누었다. 밀그램 복종 실험, 스탠퍼드 감옥 실험, 제노비스 사건의 방관자 효과도 같은 진실을 증언한다. 잔혹함은 특별한 악인의 속성이 아니라 저항 없음, 책임 면제, 보는 눈의 부재라는 조건이 보통 사람에게서 끌어내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다스려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이 놓이는 자리다. 조직과 사회의 품격은 구성원이 얼마나 선한가가 아니라, 가장 선한 사람조차 악해질 조건을 얼마나 잘 차단하는가에 달려있다.
1974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출신의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스튜디오 모라에서 미술사상 가장 위험하고 또 가장 많은 것을 폭로한 실험 하나를 감행했다. 제목은 리듬 제로(Rhythm 0). 1973년 리듬 10으로 시작해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이어진 리듬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자, 인간 본성을 향한 일종의 임상 실험이었다.
방식은 단순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여섯 시간 동안(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갤러리 한가운데 미동도 없이 서 있기로 했다. 탁자 위에는 안내문이 놓였다. 자신은 하나의 객체이며,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것. 그리고 그 곁에는 72개의 물건이 있었다. 관객은 그것을 그녀의 몸에 어떤 방식으로든 쓸 수 있었다.
물건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장미, 깃털, 꿀, 포도, 향수 같은 쾌락의 도구가 한쪽이었고, 가위, 사슬, 채찍, 면도날, 그리고 장전된 권총이 다른 한쪽이었다. 사회적 제약과 법적 책임이 모두 걷힌 자리에 인간의 무의식이 무엇을 꺼내 드는지를 보기 위한 무대였다.
여섯 시간 동안 벌어진 일
처음 몇 시간은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거나 자세를 바로잡아 주거나 손에 장미를 쥐여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결코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군중이 깨닫는 순간, 분위기가 무너졌다. 옷이 잘려 나갔고, 면도날이 살갗을 그었으며, 누군가는 목 부근에서 흐르는 피를 마셨다. 한 사람은 장전된 권총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그 손가락을 방아쇠에 감기게 한 채 총구를 그녀의 머리로 향하게 했고, 이를 막으려는 관객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섯 시간이 끝나 아브라모비치가 다시 움직이며 가해자들의 눈을 마주 보기 시작하자, 군중은 자기들이 저지른 일을 차마 직시하지 못한 채 황급히 도망쳤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잔혹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풀어놓은 조건이다. 저항이 사라지고, 책임이 면제되고, 보는 눈의 제약이 걷히자 인간의 공감 능력은 놀라운 속도로 부식했다. 평범한 관객을 가해자로 바꾼 것은 특별한 악의가 아니라 단지 안전하게 악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같은 진실을 증언한 다른 실험들
리듬 제로가 예술의 형식을 빌려 드러낸 것을, 사회심리학은 거의 같은 시기에 실험의 형식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세 가지 사례가 특히 정확하게 포개진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1961~1963). 예일대의 스탠리 밀그램은 평범한 시민을 모아 "교사" 역할을 맡기고, 옆방의 "학생"이 답을 틀릴 때마다 점점 강한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했다. 학생은 사실 배우였고 충격도 가짜였지만, 교사는 그 사실을 몰랐다. 충격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경고에도 참가자의 약 3분의 2가 흰 가운을 입은 실험자의 지시에 따라 최고 450볼트까지 올렸다. 결정적 장치는 단 한 마디였다. "책임은 제가 집니다." 책임이 면제되는 순간 도덕의 제동이 풀렸다는 점에서, 이것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가 책임진다"던 아브라모비치의 안내문과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이다. 밀그램은 결론을 이렇게 요약했다. 평범한 사람도 특별한 적의 없이, 그저 자기 일을 하다가 끔찍한 파괴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1971). 필립 짐바르도는 평범한 대학생들을 동전 던지기로 간수와 죄수로 나누어 모의 감옥에 넣었다. 며칠 만에 간수 역을 맡은 학생들은 죄수를 모욕하고 학대하기 시작했고, 실험은 예정보다 일찍 중단되었다. 다만 이 사례는 그대로 인용하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2018년 프랑스 과학사가 티보 르 텍시에가 아카이브 자료를 발굴해 밝힌 바에 따르면, 간수들의 잔혹함은 상황에 휩쓸린 자연스러운 결과라기보다 연구진이 사전에 적대적 환경을 만들도록 지시하고 부추긴 결과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실험은 "상황이 사람을 바꾼다"는 단순한 증거이기보다, 권위가 무엇을 부추기고 무엇을 묵인하느냐가 행동을 좌우한다는 더 정교한 교훈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어느 쪽으로 읽든, 역할과 익명성이 주어지고 위에서 그것을 용인할 때 보통 사람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제노비스 사건과 방관자 효과(1964). 뉴욕 퀸스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새벽에 자택 앞에서 살해당하는 동안, 다수의 이웃이 비명을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당시 언론은 보도했다. 이후 그 보도의 세부에 과장이 있었음이 밝혀졌지만, 이 사건이 촉발한 심리학 연구는 견고한 진실 하나를 남겼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오히려 개입이 줄어든다는 방관자 효과, 그리고 책임이 여러 사람에게 흩어질 때 누구도 나서지 않는 책임 분산이다. 리듬 제로에서 권총에 손을 댄 사람은 한 명이었지만 침묵한 사람은 다수였던 그 구조가, 현실의 거리에서 반복된 셈이다.
세 실험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잔혹함은 예외적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이 평범한 인간에게서 끌어내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리듬 제로는 그 조건을 갤러리 안에 압축해 보여준 한 편의 살아 있는 실험이었다. 예술가의 무대와 심리학자의 실험실이 반세기에 걸쳐 따로 도달한 결론이 같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실험이 남긴 네 가지 통찰
악은 성격이 아니라 상황의 산물이다. 그날 갤러리에 모인 이들은 사디스트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들을 가해자로 바꾼 것은 내면의 어둠이 아니라 외부의 조건, 곧 저항 없음, 책임 면제, 보는 눈의 부재였다. 그러므로 "나는 저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확신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어떤 상황에 두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제도와 견제 장치는 인간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에 만든다. 법과 권력 분립, 감사와 투명성 같은 고삐들은 종종 사람을 잠재적 악인 취급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 실험이 보여주듯, 고삐는 악인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악인이 되는 조건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한비자가 형명(刑名)으로 신하를 통제하려 한 것도, 근대가 견제와 균형을 발명한 것도 결국 같은 통찰 위에 서 있다. 인간이 선해서가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상대 앞에 선 인간이 무엇이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미리 고삐를 만든다.
견제의 핵심은 보는 눈이다. 관객이 잔혹해진 결정적 순간은 책임이 사라졌다고 믿었을 때였고, 그들이 도망친 순간은 아브라모비치가 눈을 떠 그들을 마주 본 때였다. 시선의 회복이 곧 가해의 중단이었다. 악을 멈추게 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직시당함, 즉 책임의 회복이었다.
악을 키우는 것은 가해자의 손이 아니라 다수의 침묵이다. 권총을 겨눈 사람은 한 명이었지만, 옷이 잘리고 살갗이 그어지는 동안 침묵한 사람은 다수였다. 부정한 일에 침묵하는 것은 그 일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옛말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다만 압도적 힘의 불균형 앞에서 약자에게 영웅적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침묵을 깨는 일을 한 사람의 용기에만 떠맡기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저항의 수단을 남겨두는 설계가 필요하다.
조직 경영의 자리로 옮겨오면
이 실험은 갤러리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 책임이 면제된 권력, 보는 눈의 부재라는 세 가지 조건은 모든 조직 안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무책임 권한이 가장 위험하다. 리듬 제로의 방아쇠는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내문이었다. 조직에서도 권한은 큰데 책임은 묻지 않는 자리, 즉 결정은 하되 그 결과를 떠안지 않는 위치가 생기는 순간 같은 부식이 시작된다.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는 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약자가 저항할 수단을 구조적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신입사원, 하청업체, 내부고발자처럼 힘의 불균형에서 아래에 놓인 쪽의 안전을 상급자의 자제심에 맡기면, 그 자제심은 이 실험이 증명했듯 쉽게 증발한다. 익명 신고 채널, 우회 보고 라인, 권력자를 거치지 않는 감사 경로는 약자의 용기에 기대지 않고도 저항이 작동하게 만드는 안전판이다.
보는 눈을 제도화해야 한다. 가해가 멈춘 순간은 시선이 회복된 때였다. 조직에서 이것은 투명성과 추적 가능성을 뜻한다. 의사결정 기록, 감사 추적, 정기적 외부 점검은 누군가 보고 있고 그 시선이 응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시화한다. 다만 이 시선은 처벌의 위협이 아니라 책임의 환기로 작동할 때 더 효과적이다.
침묵하는 다수가 진짜 문제다. 부정을 저지르는 소수보다, 그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 다수가 조직을 무너뜨린다. 다수가 침묵하는 이유는 대개 악해서가 아니라 말해도 소용없거나 말하면 손해라고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영자가 만들 것은 용감한 개인이 아니라, 문제 제기가 보복이 아니라 보상으로 돌아오는 환경이다. 심리적 안전(psychological safety)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문화는 사건이 아니라 조건에서 자란다. 조직의 윤리적 붕괴는 어느 날 갑자기 터지지 않는다. 작은 무책임이 묵인되고, 작은 침묵이 학습되고, 작은 불균형이 방치되는 동안 서서히 진행된다. 리듬 제로의 첫 몇 시간이 평온했듯, 부식의 초기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인다. 경영자가 주시해야 할 것은 사고가 난 뒤의 처벌이 아니라,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쌓이고 있는지 여부다.
맺으며
우리는 악을 거울 속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악인은 늘 저 바깥의 누군가, 뉴스 속의 얼굴, 역사의 괴물이라고 믿는 편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듬 제로가, 그리고 그것과 한목소리를 낸 세 실험이 한결같이 가리키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안이다. 가해자는 따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조건은 누구의 인생에나 어느 날 문득 갖추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선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번지수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정작 다스려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이 놓이는 자리다. 책임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약자에게 저항할 길을 남겨 두고, 누군가 늘 지켜보게 하는 것. 결국 한 사회와 한 조직의 품격은 구성원이 얼마나 선한가가 아니라, 가장 선한 사람조차 악해질 수 있는 조건을 얼마나 부지런히 닫아 두었는가로 판가름 난다. 손자가 이긴 뒤에 싸우려(先勝而後求戰)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진 싸움을 수습하는 자가 아니라, 질 수 없는 자리를 먼저 만드는 자가 이긴다.
아브라모비치가 눈을 떴을 때 군중이 달아난 것은, 그 시선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리듬 제로가 반세기가 지나도록 섬뜩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괴물을 보여주지 않았다. 거울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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