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學而/토피카

[허성원 변리사 칼럼] # 투키디데스의 함정

by 변리사 허성원 2026. 5. 17.

투키디데스의 함정

 

"중미 양국이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국 관계의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역사의 질문이자 세계의 질문이며, 인류의 질문이다."

얼마 전(2026년 5월 14일)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여기서의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말은 2014년 이래 언론 인터뷰, 시애틀 연설, 제네바 UN 연설 등에서 시진핑이 거듭 사용해 왔던 말이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졌기에 시진핑이 반복하여 언급하는가.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본질적 원인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아테네의 부상과 그것이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즉 신흥국의 부상은 기존 패권국의 두려움을 유발하고, 그것이 전쟁의 동력이 되어 파국의 원인이 된다는 통찰이다.

이 진단을 현대 국제정치학으로 옮긴 사람이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다. 그는 2012년 파이낸셜타임스 사설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고, 15세기 이후의 16개 패권 경쟁 사례 중 무려 12개가 전쟁으로 귀결되었다고 했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함정'이 1차대전과 2차대전이다.

'함정(trap)'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있다. 여기서의 함정은 통상의 경우와 달리, 빠지는 자가 합리적 판단을 내렸을 때 스스로 빠져드는 구조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가 전쟁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테네가 부상하는 것을 방치하면 그들의 안보가 위협받는다는 타당한 계산에서였다. 문제는 그 합리적 판단으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긴 소모 끝에 이긴 쪽과 진 쪽을 포함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쇠퇴를 불러왔고 결국 마케도니아에 흡수되었다. 빠지지 않아야만 합리적임을 알지만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 이것이 '투키디데스 함정'의 본질이다.

함정은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첫 단계는 형성이다. 신흥국이 부상하고 패권국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는 작동이다. 두려움이 견제로 옮겨지고, 견제가 신흥국의 반발과 추가 부상을 부르며, 다시 패권국의 더 큰 두려움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세 번째 단계는 폐쇄다. 양쪽 모두 "지금 양보하면 더 큰 손해를 본다"는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다. 합리적 후퇴의 길이 사라지고, 충돌이 오히려 유일한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는 도착 증상이 일어난다. 회피가 가능한 시점은 1단계와 2단계까지다. 일단 함정에 들면 그 폐쇄 시점을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다.

함정이 작동한 결과, 신흥국의 공격이 성공할 수도, 패권국의 방어가 성공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성공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충돌의 비용이 패권의 동력을 심대히 손상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그러했다. 독일의 부상과 영국의 견제로 함정이 가동되었지만, 결국 독일은 패전하였고, 그런 한편 충돌의 비용을 가장 크게 치른 쪽은 견제 역할의 영국이었다. 그로 인해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지금의 미중 관계는 17번째 함정으로 분석되고 있다. 중국 GDP는 2021년 미국의 76%까지 따라갔다가 최근 일부 후퇴했다. 트럼프 1기의 무역전쟁, 바이든의 반도체 수출통제, 트럼프 2기의 디커플링은 모두 전형적 봉쇄 패턴이다. 함정의 2단계가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이번 시진핑의 베이징 발언에는 세 겹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첫째는 협력 촉구라는 유화적인 제스처의 표면 메시지다. 둘째는 위상 선언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두 패권국 사이의 관계를 다루므로, 이 용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발언자는 자신을 패권국으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셋째는 책임 분담의 함의다. 함정은 두 당사자가 함께 빠지는 것이므로, 회피의 책임도 함께 있다. 미국의 일방적 봉쇄는 함정의 폐쇄를 앞당기는 행위로 프레이밍된다.

'함정'은 기업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작동하며, 훨씬 빠르고 무자비하게 결판이 난다. 신흥 강자가 명확히 부상하고, 패권 기업이 그것을 인식하고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이 과잉 견제로 이어진 경우에 함정이 등장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넷스케이프의 충돌이 교과서적 사례다. 1994년 등장한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는 1995년 초 웹 브라우저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매출이 없는 1년차 회사의 상장 시가총액이 29억 달러에 달했다. 빌 게이츠는 사내 메모에서 넷스케이프를 명시적 위협으로 지목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5에 무료로 끼워 팔고, PC 제조사 라이선스에 우선 탑재 조항을 넣었다. 결국 견제는 성공했다. 익스플로러는 95%의 점유율을 회복했고, 넷스케이프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견제의 비용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반독점 소송이 제기되고, 회사 분할 명령이 내려졌다. 회사 분할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소송 방어에 회사의 손발이 묶였다. 그러는 동안 구글, 페이스북이 창업하고, 이어서 아이팟과 아이폰이 발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한 회사를 봉쇄하는 데 골몰하는 동안 검색과 모바일과 소셜이라는 세 개의 새로운 거대한 패권이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견제 성공에 큰 비용을 쓴 셈이다.

보잉과 에어버스의 사례도 깊은 함정이었다. 2003년 에어버스의 인도 대수가 처음 보잉을 넘어선 후 양강 구도가 굳어졌다. 보잉의 전통 고객사들이 줄지어 에어버스로 발길을 돌렸다. 마음이 급해진 보잉은 부족한 예산과 짧은 일정으로 에어버스 신제품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둘러 내놓은 737 MAX는 기체 균형이 불안했고 그것을 소프트웨어로 보완하려 했으나, 결국 2018년과 2019년 두 차례 추락 사고로 이어져 346명이 사망했다. 단기 시장 점유율을 방어한다는 견제 목표는 일정 부분 달성했지만, 그 방식이 100년간 쌓아온 안전 신뢰라는 핵심 자산을 갉아먹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다음 패권의 자리를 놓친 것이 함정이었다면, 보잉은 자기 패권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린 더 깊은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그나마 함정을 적절히 빠져나간 사례가 삼성이다. 2007년 아이폰 등장 시점에 삼성은 피처폰 기준 2위였고 스마트폰 종목에서는 후발주자였다. 2011년 애플의 디자인 특허 소송에서 패소하여 조 단위의 엄청난 배상 판결을 받고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삼성은 소송에 매몰되지 않았다. 다양한 독자 기술의 제품을 출시하여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고, 동시에 아이폰의 메모리, 디스플레이를 공급하는 부품 공급자 정체성도 유지했다. 충돌과 협력의 이중 전략이었다.

삼성의 함정 회피 전략은, 그저 도전자를 힘으로 막는 데 집중하지 않고, 자기를 갱신하여 우회하는 길을 개척하는 데 있다는 점을 보여준 매우 드문 사례다.

기업 현실에서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도전자는 도전하지 않을 수 없고, 패권자는 견제하지 않을 수 없다. 함정 이야기가 싸움을 피하라는 권고로 들린다면 그것은 오독이다. 진짜 교훈은 싸움 자체가 아니라, 싸우는 동안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는 눈에 있다.

함정과 정상적인 경쟁의 차이는 퇴로의 유무다. 정상적인 경쟁에는 이기든 지든 다음 라운드가 남는다. 그러나 함정 안의 싸움은 견제든 도전이든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고, 멈추는 일이 더 큰 손해처럼 느껴지는 순간 닫힌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넷스케이프 봉쇄에 매달리다 다른 패권의 자리를 놓친 것도, 보잉이 737 MAX 출시에 쫓겨 안전 신뢰를 잃은 것도, 멈추지 않는 결단이 멈추는 결단보다 쉬워 보인 결과였다.

그래서 경쟁자와 부딪힐 때 리더가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이기고 나서도 잃을 것이 더 큰 싸움은 아닌가. 견제나 도전의 목적이 처음 그대로 살아 있는가, 아니면 도전자를 막는 것이 자기 토대를 지키는 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이 기존 패권을 흔드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는가. 지금 멈춰도 회사가 살아남을 퇴로가 있는가. 상대만 보고 있는가, 자기 안의 두려움과 조급함도 보고 있는가.

노자가 도덕경에서 일찍이 적었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을 뿐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라야 진정 강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싸움을 피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싸우는 동안에도 자기를 놓치지 말라는 권고다. 상대를 보는 만큼 자기를 보는 자가 결국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앨리슨이 강조한 것도 결국 그것이다. 함정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싸움 한복판에서 자기 위치를 묻고 퇴로를 점검하는 습관으로 아는 것이다. 시진핑이 베이징 회담장에서 던진 "함정을 함께 넘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결국 모든 경영자가 다음 결단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함정은 빠지는 자가 만든다. 상대가 만드는 것은 도전이지만, 함정은 자기 안에서 만들어진다. 싸움을 피할 수는 없으나, 싸움 속에서 자기를 보는 눈은 가질 수 있다. 거기에 함정 밖으로 나가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