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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스타트업 약탈 사례 _ 픽션

by 변리사 허성원 2026. 6. 4.

스타트업 약탈 사례 _ 픽션

 

오지세는 박사 과정에서 개발한 새 촉매를 바탕으로 아테나컴퍼니를 차린다. 태양광으로 물을 분해해 그린 수소를 만드는 시스템이다. 시드와 시리즈 A를 거쳐 회사 가치 600억이 되었을 때, 보르자 그룹의 후계자 채사라가 부산의 한 학회에서 그를 발견한다. 보르자 그룹은 재계 12위, 회장 최상도는 패도적 인수합병으로 그룹을 키운 인물이다.
채사라는 같은 또래의 와튼 MBA 출신이다. 부산까지 두 번 내려와 정중하게 다가온다. 인수가 아닌 협력을 약속한다. 시리즈 B 300억 투자, 창원 보르자 그룹 부지로 본사 이전, 함안에 100MW 공장 준공이 이어진다. 오지세는 자기 머리를 믿고 변호사 없이 텀시트에 사인한다. 채사라는 그가 변호사 자문을 거부했다는 서면 확인까지 받아둔다. 이 한 줄이 모든 길을 막는다.
시리즈 C 단계에서 채사라가 우선매수권과 매각 거부권을 무기로 다른 모든 글로벌 VC를 차단한다. BEV, 미쓰비시UFJ, PIF가 모두 떠난다. 결국 보르자가 lead로 시리즈 C에 들어오고, 풀 래칫, Pay-to-play, 이사회 과반, CEO 평가 조항, 베스팅 변경 같은 함정 조항이 박힌다. 이어 핵심 인재 빼가기, 함안 공장 효율 저하 문제, 미국 진출 9개월 연기, 사업계획 미달, CEO 평가 발동으로 이어진다.
오지세가 마침내 고향 출신의 변리사 도둔만 형님을 찾는다. 평생 처음 거는 전화다. 도둔만이 그를 안아주며 너무 늦게 왔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70대 노변리사 소구라 선생과 같은 또래의 신참 변리사 허소린을 만난다. 소 선생은 잃은 것을 되찾으려 인생을 쏟지 말고 머릿속에 키우고 있는 다음 기술을 지키라고 한다. 도둔만은 마지막 사임 때 경업금지와 영업비밀 동의서를 절대 사인하지 말라고 한다. 허소린은 다음 5년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한다.
마지막 이사회에서 채사라가 5년 경업금지와 광전기화학 기술 귀속까지 요구하는 동의서를 내민다. 오지세가 처음으로 폭발한다. "누가 이걸 요구했습니까. 채사라 씨입니까. 최상도 회장입니까." 그가 동의서와 자문 계약을 모두 거부하고 빈손으로 회의실을 나간다. 최상도가 채사라에게 전화로 말한다. "빈손으로 나간 사람이 가장 위험해.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자유로워."
오지세는 머릿속의 다음 기술과 함께 자유롭게 나간다. 그 옆에 도둔만, 소구라, 허소린이 있다. 다음 5년이 시작된다.

 

한 발명가의 5년: 친구의 얼굴을 한 약탈

들어가는 말

이 이야기는 가상의 인물들로 구성된 시나리오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각 단계는 실제로 한국과 미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모은 것이다. 한 사람의 발명가가 자기 회사에서 빈손으로 쫓겨나는 데 5년이 걸렸다. 그 5년 동안 누구도 명시적으로 위법을 저지르지 않았고, 모든 일이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함정의 무서움은 거기에 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약탈자가 자기를 약탈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기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녀의 선의는 진실이었다. 시스템이 그녀를 통해 한 청년의 회사를 흡수했다. 그녀는 그 시스템의 정교한 부품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깊은 비밀이고, 동시에 그녀의 가장 깊은 면죄부다.


등장인물 소개

오지세: 우리의 발명가

오지세는 30세 남성이다. 경남 창원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작은 한식당을 했고, 아버지는 창원의 한 기계 공장에서 일했다. 형제 없는 외아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자기 고향에서 멀리 가지 않았다. 부산에서 학부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박사 과정 동안 전기화학 분야 최고 학술지에 제1저자 논문 두 편을 발표했다. 27세에 박사를 마치고 미국 포스트닥 자리를 마다하고 자기 학교의 창업보육센터에서 회사를 차렸다. 회사 이름은 아테나컴퍼니. 지혜의 여신 이름이다.

오지세의 핵심 기술은 태양광 패널로 만든 전기를 이용해 물을 분해(수전해)하여 수소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박사 과정에서 그가 개발한 새로운 촉매가 기존 백금 촉매의 1/100 비용으로 비슷한 성능을 낸다. 태양광 패널과 수전해 장치를 하나로 통합한 모듈식 설계로 시스템 효율이 기존의 1.6배다. 그린 수소 생산 단가를 kg당 8달러에서 2.5달러까지 낮출 수 있다.

회사를 차릴 때 부산 친구들 다섯 명이 엔젤로 5억을 모아 주었다. 회사 가치 50억으로 평가, 친구들 지분 10%, 오지세 지분 90%. 시드 단계라고 부르기에도 작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5억이 그의 첫 한 해를 살렸다.

오지세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성격이다. 그는 머리가 매우 좋고, 자기가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안다. 한 번도 학문적으로 누구에게 뒤져본 적이 없다. 그의 박사 지도교수가 그를 "내가 40년 가르치면서 만난 가장 빠른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며칠 안에 답을 찾아낸다. 그것이 그의 자신감의 원천이다.

이 자신감은 두 얼굴을 가진다. 한 얼굴은 그를 위대한 발명가로 만든 동력이다. 다른 한 얼굴은 그를 함정으로 이끄는 약점이다. 그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법률, 회계, 협상 같은 것을 만나면, 며칠 책을 읽고 자기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나 회계사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다.

노재현: 오지세의 후배

노재현은 28세. 오지세의 박사 과정 후배다. 오지세가 박사를 마치고 회사를 차릴 때 박사 과정을 중단하고 따라 나섰다. 시스템 설계와 운영의 핵심 책임자다.

뛰어난 엔지니어다. 시스템 도면을 보면 어디서 효율이 새는지 일주일 안에 찾아낸다. 그러나 그도 법에 대해서는 오지세와 마찬가지로 문외한이다. 두 사람 모두 평생 과학과 공학만 했다.

노재현이 오지세보다 한 가지 더 갖춘 게 있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영역에서 더 겸손하다. 오지세는 자기가 모르는 것이 거의 없다고 믿는다. 노재현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가 박사 과정을 중단하고 회사에 합류한 것 자체가 그 겸손의 표현이다.

채사라: 우리의 약탈자, 그러나 약탈자가 아닌

채사라는 32세 여성이다. 보르자 그룹 회장 최상도의 외동딸이다. 보르자 그룹은 국내 재계 순위 12위의 종합 그룹으로, 매출 18조, 직원 4만 명. 화학, 건설, 에너지, 물류, 식품 등 다양한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그룹의 핵심 산업 단지가 창원과 함안에 걸쳐 있다.

최상도 회장은 한국 재계에서 패도적이기로 유명하다. 작은 화학 공장에서 시작해 50년 동안 그룹을 일군 인물이다.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왔고, 그 과정에서 합법의 경계선을 자주 건너다녔다. 그의 별명은 "조용한 알렉산드로"다.

채사라는 어머니 성을 따라 채씨다.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미국 와튼 MBA를 거쳐 골드만삭스 홍콩 지사에서 3년간 일했다. 30세에 한국으로 돌아와 보르자 그룹의 신사업본부장 겸 그룹 투자 부문 대표를 맡고 있다. 보르자 그룹의 CVC인 보르자이노베이션은 2,500억 원 규모.

채사라의 외양과 성품을 깊이 짚어 두자. 이것이 이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그녀의 외모는 한국적 미인의 결과는 약간 다르다. 키 168cm. 짙은 눈썹, 곧은 콧대, 도톰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입술. 피부는 약간 황갈색의 건강한 톤. 화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옷은 정교하게 절제되어 있다. 명품 로고가 보이는 옷은 입지 않지만, 옷의 재질과 재단을 보면 보통 사람이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게 보인다. 향수는 옅은 시트러스. 액세서리는 왼손 약지의 작은 백금 반지 하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반지다.

이 모든 디테일이 한 인상을 만든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것의 깊이는 측정이 안 된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눈빛이다. 그녀의 눈은 검다. 그리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 정말로 상대방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른 어떤 것에도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그 집중의 깊이가 사람을 흔든다. 그녀와 대화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 그 미소가 입가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눈가의 작은 주름이 함께 움직인다. 그 미소는 만들어 낸 미소가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그 미소를 자기 의지로 통제한다. 어떤 순간에 어떤 강도의 미소를 보일지 그녀가 정확히 안다.

그녀의 눈빛과 미소에는 한 가지 묘한 요기가 있다. 한국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단순한 매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판단을 흔드는 일종의 마법에 가깝다. 그녀 앞에 앉은 남자는 그녀의 말이 모두 진실로 들린다. 그녀가 자기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제안이라고 느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이것이 이 시나리오의 가장 깊은 결이다.

채사라는 오지세의 회사를 탈취하려는 악의적 의사가 없었다. 한 번도. 5년 동안 단 한 순간도.

그녀는 자기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보르자 그룹의 신사업본부장으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룹의 미래 사업을 발굴하고, 좋은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그 투자가 그룹의 핵심 사업과 시너지를 내도록 만들고, 시장 환경에 따라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일. 그녀가 이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충실히, 합법적으로 수행했다.

오지세에 대한 그녀의 감정도 진실이었다. 그녀가 부산의 학회에서 오지세의 발표를 들었을 때, 그녀가 그의 기술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국에서 글로벌 수준의 그린 수소 기술을 가진 청년 박사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진심으로 흥분시켰다. 그녀가 오지세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존경과 연민은 진심이었다. 그가 자기 고향에서 회사를 만들고, 자기 후배들을 모아 함께 밤을 새는 그 결을 그녀가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가 부모님 가까이 살 수 있도록 회사를 창원으로 옮기는 것을 제안한 것은 진심의 배려였다.

그렇다면 왜 5년 뒤 그가 빈손으로 회사에서 쫓겨나는가.

답은 시스템이다. 보르자 그룹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의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 기계가 한 청년의 회사를 흡수하는 데 5년이 걸렸다. 채사라는 그 기계의 정교한 부품이었다. 그녀가 자기 업무에 충실하면 할수록, 기계가 더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그녀의 진심도, 그녀의 존경도, 그녀의 배려도 모두 기계의 작동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들이 기계가 더 부드럽게 작동하게 했다.

채사라가 5년 뒤 자기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그녀는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가 정당화해야 할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녀는 매 단계에서 합리적 사업 결정을 했을 뿐이다. 텀시트 조항을 정상적으로 협상했고, 보르자케미컬의 사업 일정을 정상적으로 조정했고, 함안 공장 효율 저하 문제에 정상적으로 대응했고, CEO 평가 조항을 정상적으로 발동했다. 그 모든 결정이 그룹의 이익에 부합했고, 동시에 한국 그린 수소 산업의 발전에 부합했다고 그녀가 본다. 오지세 한 사람의 비극은 안타깝지만,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의 결과지 그녀의 의도가 아니다.

이 자기 인식이 채사라를 가장 위험한 약탈자로 만든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오지세에게 한 모든 말이 어떤 의미에서 진심이었다. "처음으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어요"라는 말도 진심의 한 조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진심이 그녀의 약탈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진심과 그녀가 부품으로 작동하는 기계의 약탈은 같은 자리에 공존한다.

이것이 한 가지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채사라 같은 사람의 자리에 다른 누구를 놓아도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채사라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약탈이 더 부드럽고 더 정교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더 거칠고 더 직접적이었겠지만, 결국 회사는 흡수되었을 것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지세가 5년 뒤 마지막에 깨닫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채사라 한 사람이 아니라, 보르자 그룹이라는 기계 전체라는 것을. 그러나 그 기계는 이름이 없고 얼굴이 없다. 그래서 그가 그 분노를 어디에도 내려놓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비극의 가장 깊은 자리다.


1막: 친구의 얼굴로 다가오기

첫 만남: 부산의 학회

봄의 부산. 그린에너지 산업학회. 오지세의 발표가 끝나자 채사라가 다가온다. 명함을 건네며 말한다.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오 박사님께 우리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한 번 뵙고 싶군요."

채사라가 부산까지 직접 내려와 자기 발표를 들었다는 점이 오지세의 마음을 움직였다. 보르자 그룹 후계자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한 청년 박사의 발표를 들었다. 그 정성이 그의 의심을 풀어버린다.

그가 그녀의 눈을 처음 봤을 때, 한 순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가 명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눈빛이 평생 본 어떤 사람의 눈빛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부정했다. 자기는 사업적 관계로 그녀를 만나는 거다. 그녀는 보르자 그룹의 후계자다. 다른 어떤 감정도 끼어들면 안 된다.

두 번째 미팅: 부산의 창업보육센터

한 달 뒤, 채사라가 직접 부산까지 다시 내려온다. 오지세의 작은 사무실을 방문한다. 비서나 임원을 데려오지 않는다.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KTX를 타고 내려온다.

사무실에 마주 앉아 채사라가 말한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르자 그룹은 그린 수소를 다음 50년의 주력으로 보고 있어요. 자체 R&D로는 5년이 걸려도 오 박사님 수준의 기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글로벌 수준의 그린 수소 기술을 가진 분이 오 박사님이세요."

그녀가 잠시 멈춘 뒤 말한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인수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오 박사님이 회사를 키워가시는 것이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그림이에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오지세의 회사를 인수할 생각이 없었다. 5년 뒤 회사가 그녀의 손에 들어왔지만, 그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그쪽으로 흘러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 흐름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녀가 그 흐름을 의도했다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녀는 자기가 한 모든 결정이 그 시점에서 합리적이었다고 본다.

그녀가 회사를 둘러본다. 부산대 창업보육센터의 좁은 공간. 일곱 명이 함께 일하는 책상들. 한쪽 벽에 그린 수소 시스템의 도면이 붙어 있다. 그녀가 그 도면 앞에 잠시 멈춘다.

"한 가지 제안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시리즈 A를 진행하면, 회사를 좀 더 큰 곳으로 옮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보르자 그룹이 창원에 부지가 있어요. 보르자케미컬 공장 단지 옆에 비어있는 공간이 있는데, 거기를 R&D 센터와 사무실로 쓰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임대료는 받지 않고요. 그리고 부모님 가까이 사실 수 있으면 좋잖아요."

오지세가 한 가지를 느낀다. 그녀가 자기 부모님이 창원에 산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가. 그러나 그가 그것을 깊이 의심하지 않는다. 보르자 그룹이 그를 조사한 것이 당연하다고 그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 정보를 자기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그를 안심시킨다.

오지세는 안도한다. 그가 가장 의심했던 것이 최상도 회장의 패도적 성향이었는데, 채사라가 그것을 정확히 지목하고 부정한다. 그녀가 부산까지 직접 내려와 자기 회사를 둘러본 정성. 같은 또래 동지의 외피. 창원으로 이전하면 부모님 가까이 살 수 있다는 매력. 이 모든 것이 그의 경계심을 풀어버린다.

시리즈 A와 창원 이전

보르자이노베이션이 시리즈 A에 들어온다. 회사 가치를 200억 원으로 평가하고, 40억 원을 투자해 지분 20%를 가져간다. 친구 엔젤들의 5억(지분 10%)이 희석되어 8%가 된다. 오지세 지분은 90%에서 72%로 줄어든다.

이 시점의 텀시트는 비교적 단순했다. 우선매수권, 정보 권리, 보드 옵저버 정도. 시리즈 A 단계의 표준 조항이었다. 노재현이 한 주 동안 텀시트를 봤다. 그가 챗GPT에 묻고, 부산의 창업 선배 몇 명을 찾아갔다. 모두 "시리즈 A 표준이다"라고 답했다. 노재현이 오지세에게 보고했다. "형, 이 정도면 표준이에요. 큰 문제는 안 보여요." 오지세가 사인했다.

회사가 부산에서 창원으로 옮긴다. 보르자 그룹 신산업단지 내의 깨끗한 새 건물. 사무실 공간이 부산 시절의 다섯 배다. R&D 장비도 새로 들였다. 직원이 15명으로 늘었다. 오지세의 부모님이 창원에 사니까 그가 가끔 어머니 한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는다. 어머니가 행복해한다.

채사라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창원에 내려온다. 그녀가 보르자케미컬과 보르자에너지를 둘러보러 올 때, 오지세의 회사에도 들른다. 짧게 차 한 잔. 그녀가 회사 진행 상황을 묻고, 오지세가 답한다. 이 짧은 만남이 오지세에게는 한 달의 큰 사건이 된다. 그녀를 만난 날 저녁이면 그가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다.

그가 자기 마음의 흐름을 부정한다. 자기는 사업적 관계의 그녀를 만나는 거다. 다른 어떤 감정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그렇게 자기를 다잡는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매혹이 그의 판단을 천천히 흔들기 시작한다.


2막: 시리즈 B와 함안 공장

첫 성공

회사가 창원으로 옮긴 뒤 1년 만에 첫 성공이 온다. 보르자케미컬의 충남 대산 단지에 1MW급 파일럿 플랜트 건설. 결과는 놀랍다. 수소 생산 효율 71%, 그린 수소 생산 단가 kg당 2.7달러.

오지세는 시리즈 B를 준비한다. 채사라가 직접 제안한다. 보르자이노베이션이 시리즈 B를 리드하고 싶다고. 회사 가치 1,000억 원으로 평가, 200억 투자, 지분 20% 추가 확보. 시리즈 A의 20%와 합쳐 보르자 지분이 40%가 된다. 오지세 지분은 72%에서 58%로 줄어든다.

텀시트와 전량 구매 계약

보르자 그룹 법무팀이 50페이지 분량의 시리즈 B 텀시트를 보낸다. 그리고 별도로 한 가지 더. 보르자케미컬이 향후 5년간 회사 제품 전량을 구매하는 계약서다.

오지세가 그 텀시트를 받은 날 저녁, 노재현을 사무실에 부른다.

"재현아. 이거 한 번 봐 줘. 시간이 일주일 있어. 같이 보자."

노재현이 묻는다. "형. 변호사한테 안 보여줘요?"

오지세가 답한다.

"솔직히 변호사 비용도 부담이고, 시간도 빠듯해. 내가 직접 보면 될 것 같아. 너랑 같이 보면 더 좋고. 시리즈 A 때도 우리가 잘 봤잖아."

노재현이 일주일 동안 진심으로 노력한다. 그가 자기 머리만 믿지 않는 사람이기에, 한 단계씩 밟는다. 챗GPT에 영어 원문을 붙여 넣고 질문한다. 챗GPT가 친절하게 답한다. "표준적 조항입니다." "통상적 조항입니다." 부산의 창업 선배들에게 다시 찾아간다. 이번에는 시리즈 B 이상을 받은 선배들. 디스콰이엇과 로켓펀치 같은 커뮤니티의 후기를 읽는다.

일주일 뒤 노재현이 A4 종이 세 장에 메모를 정리해 들고 온다.

"형. 솔직히 저도 완전히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몇 가지 걸리는 조항이 있어요."

그가 다섯 가지를 짚는다. 우선매수권 범위, 매각 거부권, 정보 권리 범위, 퍼스트 룩 권리, 그리고 사이드 레터의 시리즈 C 참여 약속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

오지세가 그 메모를 본다.

"재현아. 잘 봤다. 이건 보르자 변호사한테 직접 물어보자."

오지세가 보르자 법무팀의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한다. 그 변호사가 이튿날 창원으로 직접 내려온다. 김앤장 출신의 30대 후반 남성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서서 노재현이 정리한 메모를 본다. 그가 진지하게 한 시간을 들여 각 조항을 해명한다.

"오 박사님, 노 박사님. 좋은 질문이세요. 하나씩 답을 드리겠습니다."

변호사의 해명은 정교했다. 각 조항이 왜 필요한지, 시장 표준에서 어떻게 벗어나지 않는지, 다른 글로벌 VC들도 비슷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점, 보르자 그룹 내에 그린 수소 관련 사업부는 없다는 점, 사이드 레터는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그룹의 신뢰의 표현이라는 점.

여기서 약탈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 작동한다. 각 조항이 개별적으로는 모두 합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조항이 한 텀시트에 모이고 한 투자자의 손에 집중되었을 때 생기는 누적 효과는 어느 개별 조항의 해명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변호사는 한 개씩 묻는 질문에 한 개씩 답했다. 누가 "전체적으로 이 조항들이 결합되었을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가"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변호사는 자기 클라이언트인 보르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심으로 해명한 모든 답변이 보르자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역할이다. 오지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측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측 변호사를 부르지 않았다.

오지세가 변호사에게 답한다. "잘 알겠습니다. 사인하겠습니다."

변호사가 답한다. "그러시면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행정적 절차가 있어요. 박사님께서 외부 법률 자문 없이 본 텀시트에 사인하신다는 점을 서면으로 확인해 주시면 좋겠어요. 우리가 강요했다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요. 그리고 노 박사님의 검토 보고서도 그 서면 확인에 첨부될 거예요."

오지세가 그 서면 확인서에 사인한다.

"본인은 본 텀시트의 모든 조항을 충분히 이해하였으며, 회사 내부 검토(노재현 박사)와 보르자 측 법무 담당자의 설명을 통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음을 확인합니다. 별도의 외부 법률 자문을 받지 아니하고,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본 텀시트에 동의합니다."

여기서 이 한 줄이 결정적이다. "회사 내부 검토(노재현 박사)와 보르자 측 법무 담당자의 설명을 통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음을 확인합니다." 노재현의 이름이 그 서면에 들어간다. 노재현은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노력이 기록에 남는다.

이 서면 확인의 진짜 의미를 짚어 두자. 이것이 5년 뒤 모든 길을 막는다.

첫째, 강박이나 사기에 의한 의사표시가 아니라는 점이 문서화된다. 한국 민법상 강박이나 사기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의사로 사인했다는 서면 확인이 있으면, 사후에 그 주장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둘째,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표현이 핵심이다. 사후에 오지세가 "특정 조항의 의미를 몰랐다"고 주장하려 해도, 그가 충분한 정보를 받았다는 자기 서면이 있다. 그가 "보르자 변호사가 잘못 설명했다"고 주장해도, 그가 그 설명을 들은 뒤 자유로운 의사로 사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셋째, 노재현의 검토 보고서가 첨부된다는 점이 가장 잔인하다. 이것이 노재현의 노력을 오지세를 함정에 빠뜨리는 도구로 전환시킨다. 사후에 누가 "오 박사님은 법률 검토를 받지 않았다"고 지적해도, 보르자는 답할 수 있다. "회사 내부의 박사급 인력이 일주일 동안 검토했고, 그 결과를 보르자 변호사가 한 시간 동안 답변했습니다. 박사님은 자유로운 의사로 사인하셨습니다." 노재현이 자기도 모르게 함정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채사라가 그를 위해 일부러 설계한 것인가. 아니다. 이것이 보르자 그룹 법무팀의 표준 절차다. 어떤 외부 투자자와도 이런 식으로 거래를 진행한다. 채사라는 자기 변호사들에게 "오 박사를 함정에 빠뜨려라"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 단지 "표준 절차로 진행해라"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보르자의 표준 절차가 그 자체로 약탈의 무대가 된다. 채사라는 그 무대 위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전량 구매 계약

시리즈 B 클로징과 함께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보르자케미컬이 향후 5년간 회사 제품 전량을 구매하는 계약이다.

채사라가 직접 제안한다.

"오 박사님. 한 가지 더 좋은 제안이 있어요. 보르자케미컬이 박사님 회사 제품을 전량 구매하는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향후 5년간 박사님 회사가 생산하는 모든 그린 수소를 보르자케미컬이 사들이는 거예요. kg당 가격은 시장가의 95% 수준으로 고정하고요."

오지세가 놀란다. 매출이 처음부터 100% 확보되는 거다. 글로벌 그린 수소 시장이 아직 형성 중인 단계에서, 5년간의 전량 구매 보장은 사업의 위험을 거의 0에 가깝게 만든다.

"정말 그렇게 해 주시는 거예요?"

채사라가 미소 짓는다. 그녀의 눈빛에 진심이 있다. 그녀가 이 계약을 진심으로 제안하는 거다. 그녀가 보르자케미컬의 친환경 전환을 위해 그린 수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지세 회사의 기술이 그것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가 양 측의 이익을 동시에 보았다.

"네. 우리 보르자케미컬이 친환경 전환을 위해서 그린 수소가 필요해요. 박사님 회사가 우리에게 그걸 공급하는 게 가장 안정적이에요. 다만 계약에 한 가지 표준 조항이 들어갑니다. 사정 변경 조항이에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발생하면 납품을 중단할 수 있다는 조항인데, 이건 어떤 장기 공급 계약에도 들어가는 표준 조항이에요."

오지세가 그 계약서를 본다. 노재현과 같이 본다. 다시 보르자 변호사가 와서 해명한다. 사정 변경 조항이 발동되는 세 가지 경우(품질 미달, 안정적 공급 불가, 시장 상황 근본 변화)를 설명한다. "정상적 상황에서는 절대 발동되지 않는 조항이에요."

오지세가 사인한다. 이 전량 구매 계약이 그가 다음 단계로 결정적으로 나아가게 한다.

함안 공장

시리즈 B 자금 200억과 전량 구매 계약을 바탕으로, 오지세가 함안에 100MW급 본격 상용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다. 보르자가 함안의 산업용지를 회사에 임대해 준다. 임대료는 시장가의 70%. 또 한 번의 호의다.

함안 공장 건설이 시작된다. 보르자건설이 시공을 맡는다. 1년 안에 공장이 들어선다.

공장 준공식 날, 오지세의 부모님이 함안에 온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말없이 공장 건물을 한참 본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지세야. 잘 했다."

오지세가 그 자리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누구도 모른다. 자기 인생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온 순간이다.

채사라도 함안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다. 그녀가 오지세 부모님에게 인사한다. 어머니에게 "한식당이 영광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다음에 꼭 가 볼게요"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감격한다. 보르자 그룹의 후계자가 자기 식당에 오겠다고 한다.

그날 저녁 채사라는 자기 호텔로 돌아간다. 그녀가 그날의 일을 일기에 짧게 적는다(그녀는 매일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다). "오 박사님의 함안 공장 준공식. 한국 그린 수소 산업의 큰 진전. 그의 부모님을 뵈었다. 오 박사님이 만든 길의 깊이를 봤다. 우리가 함께 만든 일이 자랑스럽다."

이 일기가 그녀의 진심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시점에서 오지세의 회사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만든 길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이 시스템의 결과로 회사를 그녀의 손으로 가져온다. 그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기가 회사를 빼앗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막: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시기

시리즈 C를 향한 길과 미국 VC의 이탈

함안 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직후, 오지세가 시리즈 C로 가서 더 큰 자금을 받아 글로벌 확장에 들어갈 시점이라고 판단한다. 그가 글로벌 VC들에게 접촉을 시작한다. 미국의 Breakthrough Energy Ventures, 일본 미쓰비시UFJ 캐피탈, 사우디 PIF가 관심을 보인다. 회사 가치가 2,000억 원 수준으로 평가될 수 있다.

BEV와 텀시트가 합의된다. 회사 가치 2,000억, 투자 400억. 오지세가 보르자에 통보한다. 우선매수권 조항에 따라 30일 검토 기간이 시작된다.

15일 차에 채사라가 미팅을 청한다.

"오 박사님. 우리가 우선매수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BEV가 lead 하는 것이 글로벌 진출에 더 좋을 거예요. 다만 한 가지 짚을 게 있어요. 보르자케미컬과의 전량 구매 계약 때문에 한 가지 우려가 있어요. BEV가 lead 하면, 회사가 미국 시장에 진출할 텐데, 그 경우 우리 전량 구매 계약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어요. 우리가 follow-on으로 들어가면서 미국 시장에 우리도 공동 사업 파트너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50대 50으로요."

오지세가 충격을 받는다. BEV에 보르자의 요구를 전달한다. BEV의 답변은 단호하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지세는 채사라에게 미국 시장은 양보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채사라는 "이해한다"고 말하고 follow-on에서 빠진다.

BEV가 결국 deal에서 떠난다. 미쓰비시UFJ와 PIF도 마찬가지다. 모두 "보르자의 우선매수권과 매각 거부권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떠난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두자. 채사라는 BEV를 직접 막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 권리를 강하게 주장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한 동기는 "오지세의 회사를 가두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녀가 진심으로 보르자케미컬의 전량 구매 계약의 안정성을 걱정했다. 그녀의 그룹이 5년간의 그린 수소 공급을 약속받았는데, 회사가 미국 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하면 그 공급이 흔들릴 수 있다. 그녀는 자기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기 업무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의 이 정상적 업무 수행이, 다른 모든 글로벌 VC를 차단했다. 오지세에게 다른 자금 출처가 사라졌다. 채사라는 이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그 결과를 이용했다.

보르자 lead의 시리즈 C

오지세의 자금이 마른다. 함안 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가면서 운영비가 매월 18억으로 늘었다. 시리즈 B 200억 중 잔액이 80억으로 줄었다. 5개월치 자금이 남았다.

채사라가 새 제안을 한다. 보르자이노베이션이 시리즈 C를 lead 하겠다는 것이다. 회사 가치 2,000억, 500억 투자, 지분 25% 추가 확보. 보르자 총 지분이 40%에서 약 55%로 뛴다. 과반이다.

오지세가 그 의미를 본다. 보르자가 회사의 과반 주주가 된다는 뜻이다. 다른 옵션이 없다.

채사라가 말한다.

"오 박사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lead 하는 게 부담스러우실 거 알아요. 그런데 다른 글로벌 VC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시간이 없으세요. 5개월치 자금밖에 안 남으셨잖아요. 우리가 lead 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과반을 갖더라도, 우리가 회사 운영에 깊이 개입할 의사가 없어요. 오 박사님이 계속 CEO로 회사를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요. 다만 텀시트에 lead 투자자로서 표준적인 권리는 들어가야 해요."

이 말도 진심이었다. 채사라는 시리즈 C 시점에서도 오지세를 CEO 자리에서 밀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회사가 글로벌로 가는 것을 진심으로 원했다. 그러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보르자가 lead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그녀가 판단했다. 그녀의 판단에 악의가 없었다.

오지세가 사인한다. 그가 시리즈 C 텀시트에 변호사 자문 없이 사인한다. 이번에도 노재현이 검토하고, 보르자 변호사가 해명하고, 오지세가 서면 확인을 한다.

시리즈 C 텀시트의 함정 조항들이 박힌다. 풀 래칫 anti-dilution, Pay-to-play 강제, 이사회 과반(보르자 4명, 오지세 2명, 독립 이사 1명), CEO 평가 조항, 오지세 vesting 변경, 미국 시장에 대한 우선매수권. 이 모든 조항이 lead 투자자로서의 표준 조항이라고 변호사가 해명한다. 노재현이 그 해명을 듣고 끄덕인다. 오지세가 사인한다.

채사라가 그날 저녁 일기에 적는다. "시리즈 C 클로징. 오 박사님과 우리 그룹의 더 깊은 동반자 관계 시작. 이제 함께 글로벌로."

이 일기도 진심이었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글로벌 진출을 진심으로 꿈꿨다. 회사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시스템이 다음 단계로 흘러간다.


4막: 회사가 손에 들어오는 시기

보르자 lead 이후의 흐름

시리즈 C가 마무리된 뒤 보르자 측 신규 이사 두 명이 보드에 합류한다. 신 전무(재무 담당)와 윤 부사장(글로벌 사업 담당). 이사회가 7인 구조로 재편된다. 보르자 4명이 과반.

이 시점부터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작동한다. 채사라가 매 단계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자기 논리로 흘러갔다.

첫 번째 흐름: 신 전무가 매월 재무 검토를 요구한다. 이전 이사회는 분기별이었다. 매월 사업계획 대비 진척도를 평가하고, 미달 시 책임을 묻는다. 이것은 보르자 그룹 본사의 표준 운영 방식이다. 보르자이노베이션이 투자한 모든 회사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신 전무는 자기가 평생 그렇게 일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오지세에 대한 어떤 악의도 없다.

두 번째 흐름: "회사 운영 효율 개선"을 명분으로 베인앤컴퍼니 6주 컨설팅을 진행한다. 이것도 보르자 그룹의 표준 절차다. 보르자이노베이션이 lead 한 모든 회사에서 6개월 안에 외부 컨설팅을 진행한다. 비용은 보르자 부담이다. 베인이 회사를 6주 동안 분석한다. 결과 보고서는 객관적으로 작성된다. 그러나 그 객관성이 오지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운영 효율 평균 이하. 인력 25% 감축 필요. 외부 CFO 영입 시급. 함안 공장 일정 관리 리스크." 채사라가 이 보고서를 베인에게 의도적으로 그렇게 쓰게 한 것이 아니다. 베인이 자기들 기준에서 정직하게 평가한 결과다. 그러나 그 평가가 5년 뒤 오지세 해임의 객관적 근거가 된다.

세 번째 흐름: 핵심 인재 이탈. 보르자에너지가 그린 수소 사업본부를 신설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시리즈 C 시점에서 채사라가 약속한 "회사 운영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는다. 보르자에너지의 사업본부 신설은 그룹 전체의 친환경 전환 전략의 일부일 뿐, 오지세 회사와 직접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업본부에 인재가 필요하다. 보르자에너지가 채용 공고를 낸다. 오지세 회사의 핵심 연구원 김 박사가 그 공고를 본다. 보르자에너지는 김 박사가 오지세의 후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채용을 막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김 박사가 지원한다. 인터뷰가 진행된다. 보르자에너지가 그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김 박사가 받아들인다.

오지세가 채사라에게 항의한다. "보르자가 우리 회사 핵심 인력을 빼간 것 아닙니까."

채사라가 답한다. "오 박사님. 김 박사님이 공개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하신 거예요. 우리가 직접 컨택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김 박사님은 자기 미래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막을 권리가 없잖아요."

채사라의 말이 사실이다. 보르자에너지가 김 박사를 직접 빼가려고 한 것이 아니다. 보르자 그룹이 그린 수소 사업본부를 신설하기로 결정했고, 거기에 김 박사가 자기 의사로 지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지세 회사의 핵심 인재가 빠진다. 한 달 안에 두 명이 더 보르자에너지로 이직한다.

이것이 시스템의 작동이다. 채사라가 김 박사를 빼가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보르자에너지의 인사팀이 김 박사를 빼가라고 지시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보르자 그룹이 그린 수소 사업본부를 신설했다는 사실 하나가, 김 박사의 이직을 가능하게 만든다. 시스템이 자기 논리로 작동한다.

네 번째 흐름: 함안 공장의 효율 문제. 100MW 시설의 효율이 1MW에서 71%였던 것이 100MW에서 62%로 떨어진다. 이것은 스케일업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핵심 인재가 빠진 상태에서 그 문제를 분석하기 어렵다. 그리고 운영 데이터 시스템이 보르자에너지와 통합되어 있어 자유롭게 접근하기 어렵다. 데이터 분석에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사업계획 미달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 흐름: 전량 구매 계약의 사정 변경 조항 발동. 보르자케미컬이 한 통의 공문을 보낸다.

"전량 구매 계약 제8조 사정 변경 조항에 따라, 향후 6개월간 그린 수소 납품 물량을 70% 축소하고자 합니다. 사유: 보르자케미컬의 친환경 전환 일정 조정으로 인한 그린 수소 수요 감소."

오지세가 그 공문을 받고 절망한다. 함안 공장의 가동률이 70% 떨어지면 매출이 70% 떨어진다. 운영비는 그대로 들어간다. 회사가 매월 큰 폭의 적자를 내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시작된다. 이 공문은 채사라가 직접 보낸 것이 아니다. 보르자케미컬의 사장이 자기 그룹 본사의 친환경 전환 일정 조정 결정에 따라 발송한 정상적 사업 공문이다. 보르자케미컬의 사장 입장에서는, 그룹 본사가 친환경 전환 일정을 조정하라고 결정했으니 그에 따라 그린 수소 수요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면 그룹 본사의 친환경 전환 일정 조정은 누가 결정했는가. 그룹 전략기획실이다. 그룹 전략기획실은 글로벌 친환경 시장의 변화를 분석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그 결정을 했다. 그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그룹 전략기획실의 한 과장이다. 그 과장은 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면 채사라는 어디에 있는가. 채사라는 신사업본부장이다. 그녀는 그룹 전략기획실의 결정에 따라 자기 부서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조정한다. 그녀의 부서가 투자한 오지세 회사가 보르자케미컬의 납품 축소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의 직접 결정이 아니다.

그러나 채사라는 이 모든 흐름을 안다. 그녀는 그룹 전략기획실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자기 부서의 투자 회사인 오지세 회사의 어려움을 그룹 본사에 호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인가.

이 자리가 채사라라는 인물의 가장 깊은 자리다. 그녀는 자기 업무의 경계를 정확히 안다. 그룹 본사의 친환경 전환 일정 조정은 그녀의 부서의 업무가 아니다. 그녀가 그것에 개입하면 자기 권한 밖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권한 안에서 자기 업무에 충실하다. 자기 권한 밖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직업 윤리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 윤리가, 결과적으로 오지세 회사를 약탈하는 시스템의 부드러운 작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가 자기 권한 안에서 자기 업무에 충실하면 할수록, 시스템이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 그녀의 진심도, 그녀의 존경도, 그녀의 배려도 모두 시스템의 작동을 막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들이 시스템이 더 부드럽게 작동하게 한다.

다운라운드의 메커니즘

매출이 70% 줄어들면서 회사가 적자를 낸다. 6개월 안에 운영 자금이 바닥날 것이다. 이사회에서 신 전무가 안건을 올린다.

"회사 매출이 사업계획 대비 30%로 급락했습니다. 이 추세가 계속되면 6개월 안에 운영 자금이 바닥납니다. 긴급 자금 조달이 필요합니다. 시리즈 D 라운드를 진행해야 합니다."

오지세가 다른 투자자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회사의 재무 상태가 악화된 상태에서, 그리고 보르자의 우선매수권과 매각 거부권이 여전히 작동하는 상태에서, 어떤 외부 투자자도 들어오지 않는다.

채사라가 시리즈 D 제안을 한다. 회사 가치 700억 원으로 평가, 200억 투자, 지분 약 22% 추가 확보.

오지세가 충격을 받는다. 시리즈 C 때 2,000억이었던 회사 가치가 시리즈 D에서 700억으로 떨어진다. 다운라운드다. 그리고 시리즈 C 텀시트에 박혀 있던 풀 래칫 anti-dilution이 발동된다. 보르자의 시리즈 C 전환 가격이 자동으로 시리즈 D 가격 기준으로 떨어진다. 보르자가 받는 주식 수가 폭증한다.

결과: 보르자 지분이 시리즈 C 직후 55%에서 시리즈 D 직후 75%로 뛴다. 압도적 과반이다. 오지세 지분은 시리즈 C 직후 약 25%에서 시리즈 D 직후 약 10%로 떨어진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두자. 이 모든 일이 채사라의 의도된 결과인가.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아니다.

채사라는 보르자케미컬의 납품 축소 결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룹 본사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오지세 회사의 다운라운드로 이어질 것을 그녀가 알았다. 그리고 풀 래칫이 발동되어 보르자 지분이 폭증할 것을 그녀가 알았다.

그녀가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룹 본사의 결정에 그녀가 개입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권한 밖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리즈 D를 lead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른 투자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기 우선매수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보르자의 지분 폭증을 피하기 위해 풀 래칫을 발동시키지 않는 합의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인가. 그것이 그녀의 업무에 충실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르자이노베이션의 신사업본부장으로서, 그녀가 시리즈 D를 lead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회사가 자금 부족으로 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풀 래칫은 시리즈 C 텀시트에 박힌 조항이다. 그것을 발동시키지 않는다면 그녀가 자기 부서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녀는 자기 부서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자기 업무라고 본다.

그래서 그녀가 시리즈 D를 lead 한다. 풀 래칫이 발동된다. 보르자가 75% 지분을 갖는다. 시스템이 자기 논리로 흘러간다. 그녀가 그것을 막지 않는 것이, 그녀가 자기 업무에 충실한 것이다.

CEO 평가와 해임

보르자 지분이 75%가 된 상태에서, 이사회의 모든 결정이 보르자의 의지대로 흘러간다. CEO 평가 조항이 발동된다. 사업계획 대비 30% 매출, 함안 공장 효율 저하, 미국 진출 좌초.

이사회에서 윤 부사장이 말한다.

"오 박사님은 훌륭한 발명가이지만 CEO로서의 능력에 의문이 있습니다. 사업계획 대비 70% 미만이 두 분기 연속입니다. 텀시트 조항대로 CEO 교체를 검토해야 합니다."

오지세가 반박한다. "매출 미달은 보르자케미컬의 납품 축소 때문입니다. 인재 이탈도 보르자에너지가 빼간 거고요. 그 결과의 책임을 저에게 묻는 건 부당해요."

윤 부사장이 차분히 답한다. "보르자케미컬의 납품 축소는 시장 변화에 따른 정상적 사업 결정입니다. 인재 이탈은 자유 의사에 의한 이직이고요. 결과적으로 사업계획이 미달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한 책임은 CEO에게 있습니다."

투표. 보르자 측 4명 찬성, 오지세 측 2명 반대, 독립 이사 1명 찬성. 5대 2로 CEO 평가가 다음 이사회 정식 안건으로 상정된다.


도둔만 형님을 찾아 서울로

오지세가 마침내 자기 머리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도둔만 형님을 떠올린다. 창원 출신의 전설적 변리사. 17년째 서울 서초동 뱅뱅사거리의 아레테특허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형님.

그가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 평생 처음 거는 전화를 한 뒤 도둔만이 그를 사무실에서 기다린다.

"지세야. 너무 늦게 왔어, 인마."

오지세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긴다. 5년 동안 혼자 짊어진 짐이 잠시 내려간다.

도둔만이 그의 자료를 밤새 본다. 다음 날 그가 자기 분석을 들려준다.

"지세야. 한 가지를 말해 주마. 이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어느 한 사람이 너를 약탈한 게 아니라는 거야. 보르자 그룹이라는 시스템 전체가 너를 흡수한 거지. 채사라 한 사람이 모든 걸 설계한 게 아니야. 그녀는 자기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고, 그 충실함이 시스템의 일부였어. 보르자케미컬의 납품 축소도, 보르자에너지의 인재 채용도, 그룹 본사의 친환경 전환 일정 조정도, 모두 정상적 사업 결정이었어. 그런데 그 모든 정상적 결정이 한 방향으로 모이면서 너의 회사를 흡수한 거지."

오지세가 묻는다. "그러면 누구를 미워해야 하나요?"

도둔만이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답한다.

"그게 가장 어려운 거야. 너를 약탈한 사람이 누구라고 한 명을 가리킬 수 없어. 채사라를 미워해도 그녀는 자기 업무를 했을 뿐이고, 신 전무를 미워해도 그도 자기 업무를 했을 뿐이고, 베인 컨설턴트를 미워해도 그들도 정직하게 평가했을 뿐이야. 시스템 전체를 미워해야 하는데, 시스템은 얼굴이 없어. 미워할 대상이 없는 거지.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야."

도둔만이 책상 위의 텀시트들을 짚어가며 말한다.

"그런데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 한 가지가 필요했어. 그게 너야. 네가 변호사 없이 텀시트에 사인한 거. 네가 자기 머리만 믿은 거. 시스템이 너를 흡수하기 위해서 너의 어떤 약점을 활용한 건데, 그 약점이 너의 자만심이었어. 그걸 알아야 다음에 그걸 막을 수 있어."

도둔만이 잠시 멈춘 뒤 말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채사라가 너에게 보인 진심도 진짜였을 거야. 그녀가 너를 존경한 것도, 너의 부모님을 진심으로 대한 것도. 그런데 그 진심이 시스템의 작동을 막지 못했어. 오히려 그 진심이 시스템이 더 부드럽게 작동하게 했지. 너를 의심하지 않게 만들었으니까. 가장 위험한 약탈자는 자기가 약탈자라는 것을 모르는 약탈자야. 채사라가 그런 사람이지. 그녀가 너를 미워하지 않아. 지금도. 너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할 거야. 그러나 그게 시스템의 작동을 멈추지 않아."

오지세가 그 말을 듣고 한참 침묵한다. 그가 처음으로 채사라라는 인물의 본질을 본다. 그녀는 사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시스템의 정교한 부품이다. 그것이 그녀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

도둔만이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제 너의 다음 5년을 어떻게 살지를 결정해야 해. 회사를 되찾는 길은 사실상 없어. 직무발명 보상금 소송은 가능한데 5년에서 7년 걸리고, 그 사이 너 인생이 묶여. 추천 안 한다. 그러면 남은 길은 한 가지야. 잃은 것을 받아들이고, 남은 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지."

도둔만이 응접실 밖으로 나가 두 사람을 데려온다. 소구라 선생과 허소린 변리사.

소 선생이 오지세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 "자네 머리 속에 다음 기술의 씨앗이 있는 걸 내가 봤네. 그것을 지키게."

허소린이 오지세에게 약속한다. "박사님 다음 5년에 제가 함께하게 해주세요. 박사님이 또 혼자 결정하지 않으시게요."

도둔만이 행동 계획을 짚어 준다. 마지막 사임 때 절대 사인하지 말아야 할 동의서들. 경업금지, 영업비밀, 기술 귀속. 그것이 다음 5년을 살해하는 칼이라는 것.


마지막 이사회: 폭발과 자유

마지막 이사회. 창원의 회사 본사 회의실. 채사라가 직접 내려왔다. 그녀 옆에 보르자 법무팀 두 명이 두꺼운 파일을 들고 앉아 있다.

오지세가 먼저 사임 의사를 밝힌다. "저는 발명가입니다. 경영자가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CEO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채사라가 부드럽게 답한다. "오 박사님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사임에 따른 일반적 절차로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해 주셔야 합니다."

법무팀이 동의서를 내민다. 오지세가 그것을 본다.

5년 경업금지. 3년 경쟁사 취업 금지. 영업비밀 유출 금지 및 3배 손해배상. 사임 후 5년 이내 개발하는 청정에너지 기술의 회사 귀속.

오지세의 손이 떨린다. 분노의 떨림이다. 5년 동안 한 번도 진심으로 폭발한 적이 없는 그가, 이 자리에서 마침내 폭발한다.

오지세가 그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진다.

"이게 뭡니까. 누가 이걸 요구했습니까. 채사라 씨입니까. 최상도 회장입니까. 누가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요구했습니까."

회의실이 얼어붙는다. 채사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오지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5년 동안 쌓인 모든 것을 토해낸다.

"내가 부산에서 박사를 받았어요. 내가 부산의 창업보육센터에서 회사를 만들었어요. 내가 후배 일곱 명을 모았어요. 그 다음 채사라 씨가 와서 회사를 창원으로 옮기자고 했어요. 부모님 가까이 살 수 있다고. 그래서 옮겼어요. 그 다음 함안에 공장을 짓자고 했어요. 보르자 부지가 있다고. 그래서 지었어요. 어머니가 함안 공장 준공식에 오셨어요. 우셨어요. 아버지가 잘 했다고 하셨어요. 그게 제 인생 가장 행복한 날이었어요."

그가 한 걸음 다가선다.

"그런데 그 모든 게 5년 동안 한 단계씩 빼앗기는 거였어요. 보르자케미컬이 납품을 줄였어요. 보르자에너지가 핵심 인재를 빼갔어요. 함안 공장이 효율 저하라고 했어요. 미국 진출은 막혔어요. 그래서 다운라운드가 됐고, 풀 래칫이 발동됐고, 보르자 지분이 75%가 됐어요. 모두 정상적 사업 결정이었다고요? 그래요. 그렇게 보일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모든 정상적 결정이 한 방향으로 모여서 제 회사를 통째로 가져갔어요."

오지세가 채사라를 똑바로 본다.

"채사라 씨. 한 가지만 묻겠어요. 그날 한정식 식당에서 어머니 식당에 가 보고 싶다고 하신 거.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채사라가 잠시 침묵한다. 그녀의 검은 눈에 한 순간 무언가가 스친다. 진심의 흔들림이다. 그녀가 자기를 다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답한다.

"오 박사님.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지금도 가 보고 싶어요. 다만 이제 갈 수 없는 자리가 되었네요."

오지세가 그녀를 본다. 그녀의 답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가 안다. 그것이 그를 더 깊이 베인다. 차라리 거짓말이었다면 그녀를 미워하기 쉬울 텐데, 그녀의 답이 그를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든다.

그가 답한다.

"네. 갈 수 없는 자리예요. 영원히."

그가 동의서를 책상 위에 다시 한 번 던진다. 자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한다.

"이 서류에 사인 안 합니다. 영원히. 자문 계약도 받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나가겠어요. 그게 자유로운 거니까요."

그가 회의실을 나간다. 문이 닫힌다.

회의실 안

오지세가 나간 뒤 회의실에 침묵이 흐른다. 채사라가 천천히 일어선다. 그녀가 책상 위에 던져진 서류를 본다.

그녀가 한 가지를 느낀다. 처음으로 자기 업무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를 깨닫는다. 자기는 매 단계에서 합리적 결정을 했다. 그러나 그 결정들이 모여 한 청년의 인생을 바꿨다. 그가 자기를 짐승이라고 부른다. 그 말이 그녀에게 박힌다.

그러나 그녀가 그 박힘을 오래 두지 않는다. 그녀가 자기를 다잡는다. 그녀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법무팀에게 다음 단계를 지시한다.

"신임 CEO 선임 절차 진행하세요. 그리고 회사 이름 변경도 검토하세요. '아테나컴퍼니'에서 '보르자그린에너지'로 바꾸는 게 그룹 통합 차원에서 자연스럽습니다."

법무팀이 끄덕인다. 채사라가 회의실을 나간다.

그날 저녁, 서울로 돌아가는 KTX 안에서, 채사라가 일기를 쓴다. 그녀는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이다. 그날의 일기에 그녀가 한 줄을 적는다.

"오 박사님이 회의실에서 화내며 나갔다.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그가 자유롭게 다음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다행이다. 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일기도 진심이다. 그녀는 오지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그 진심이, 그녀가 그를 5년 동안 한 청년에서 빈손의 사람으로 만든 시스템의 부품이었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는다. 그녀는 그 모순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두 가지가 같은 마음 안에 공존할 수 있다.

이것이 채사라라는 인물의 가장 깊은 자리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악하지 않다. 그녀는 자기 업무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가 충실한 그 업무가,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한 사람의 회사를 흡수하는 일이다. 그녀는 그것을 약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것이 사업이라고 믿는다.

KTX 창밖으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가 일기장을 덮는다. 그녀는 잠시 후 다음 투자 건의 검토 자료를 꺼낸다. 또 다른 청년 스타트업이다. 의료 AI 분야. 그녀가 그 자료를 읽기 시작한다. 그녀의 업무가 계속된다. 시스템이 계속 작동한다.


사임 후

오지세가 회사를 떠난다. 그가 가지고 나간 것은 머릿속의 다음 기술의 씨앗과, 사인하지 않은 동의서가 만든 자유다. 경업금지 없음. 경쟁사 취업 금지 없음. 기술 귀속 조항 없음.

그가 다시 KTX를 타고 서울로 간다. 서초동 뱅뱅사거리의 아레테를 다시 찾는다. 도둔만 형님과 허소린 변리사가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린다.

도둔만이 그를 본다.

"지세야. 어떻게 됐어?"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요. 동의서 안 사인했어요. 자문 계약 안 받았어요. 빈손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채사라 앞에서 화 냈어요."

도둔만이 웃는다. 큰 소리로 웃는다. "잘 했다, 지세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허소린이 미소 짓는다. "오 박사님. 시작하실 준비 되셨어요?"

"네. 다만 시간이 필요해요. 다음 기술을 완성하는 데 2년에서 3년이 걸릴 거예요. 그 사이 자취를 감출 거예요. 그 작업이 끝났을 때 다시 와도 될까요?"

허소린이 끄덕인다. "언제든 오세요. 그리고 그 사이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요?"

"가끔 차 한 잔 하러 와 주세요. 사건 의뢰가 아니라, 그냥 친구로요. 박사님이 혼자 너무 오래 있지 않으셨으면 해요."

오지세가 처음으로 진심의 미소를 짓는다. "가끔 들리겠습니다. 소린 씨."

도둔만이 옆에서 웃는다. "이놈들 잘 어울리네."


이 시나리오의 가장 깊은 통찰

이 시나리오가 보여주는 가장 깊은 통찰은 한 가지다.

약탈자가 자기를 약탈자로 인식하지 않을 때, 약탈이 가장 정교해진다.

채사라는 5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자기가 약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업무에 충실했다. 보르자 그룹의 신사업본부장으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녀의 선의는 진실이었다. 그녀가 오지세에게 보인 존경과 연민과 배려는 모두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이 시스템의 작동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진심이 시스템이 더 부드럽게 작동하게 했다. 오지세가 그녀를 의심하지 못한 가장 깊은 이유는, 그녀가 의심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 순간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했을 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비밀이다. 시스템이 사람을 약탈자로 만든다. 그러나 그 시스템 안의 사람들은 자기가 약탈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가 정상적 사업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의 일기에는 진심이 적혀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선의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진심과 선의가 모여 한 청년의 회사를 흡수한다.

오지세가 마지막에 폭발하면서 채사라에게 "누가 이걸 요구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답은 사실 한 사람이 아니다. 답은 시스템 전체다. 보르자케미컬 사장, 그룹 전략기획실 과장, 베인 컨설턴트, 보르자에너지 인사팀, 신 전무, 윤 부사장, 그리고 채사라. 그 모든 사람이 자기 일을 했고, 그 일들이 모여 한 회사를 가져갔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가 약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적 비극의 현대적 형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썼을 때, 권력은 한 사람의 얼굴을 가졌다. 군주가 의지를 가지고 결정을 했다. 그가 잔인했고 그가 자비로웠다. 그러나 21세기의 권력은 얼굴이 없다. 시스템이 작동할 뿐이다. 그 시스템 안의 사람들은 부품이고, 부품은 의지가 없다. 의지가 없는 부품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오지세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마지막 자유다. 그가 채사라 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가 시스템 전체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미워해도 시스템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다음 5년을 자기를 위해 사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그가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이다.

만드라골라적 결로 말하자면, 채사라는 마키아벨리의 어떤 등장인물보다 더 정교한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자기가 살던 시대의 권력자들을 묘사했다. 그들은 잔인하고 명료했다. 채사라는 그 잔인함의 진화형이다. 잔인함이 시스템 속으로 녹아 들어가, 누구의 얼굴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더 깊이 작동한다.

오지세가 살아남았다. 빈손으로 살아남았다. 그것이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자리다. 그가 다음에 무엇을 만들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그가 다음에 만들 것을, 그가 다시는 시스템에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5년 만에 그 자유를 얻었다. 비싼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가 그의 다음 5년을 시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