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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칼 포퍼의 '관용의 역설'

by 변리사 허성원 2026. 5. 23.

칼 포퍼의 '관용의 역설'

 

'관용의 역설'은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1945) 각주에서 제시한 명제다. 관용을 무제한으로 베풀면 관용 자체가 사라진다. 비관용 세력이 그 관용을 이용해 자라나 결국 관용을 폐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용을 지키려면 반드시 한계가 필요하다.
다만 포퍼가 그은 선은 좁다. 합리적 논변을 거부하고 폭력으로 답하겠다고 선언한 세력에 한정된다. 견해의 불쾌함이나 거친 정치 스타일이 기준이 아니다. 적용 순서도 분명하다. 합리적 반박이 우선이고, 여론의 차단이 다음이며, 법적 강제는 최후 수단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가 이 명제가 태어난 자리다. 관용적 체제가 자기방어 의지를 잃은 결과 나치에게 길을 내주었다. 전후 독일의 방어적 민주주의는 그 반성에서 나왔다. 관용은 호혜성이라는 조건 위에서만 미덕이다. 그러나 그 한계를 자의적으로 넓히면 명제 자체가 닫힌 사회의 도구로 전락한다.

원전과 배경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1945)의 각주 4에서 제시한 명제다. 본문이 아니라 각주, 그것도 한 단락에 불과하다. 그러나 20세기 정치철학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가 되었다.

포퍼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계 철학자였다. 나치를 피해 뉴질랜드로 망명한 상태에서 이 책을 썼다. 그가 말한 '비관용 세력'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던 헌정 체제가 어떻게 나치라는 자기파괴 세력에게 길을 내주었는가에 대한 직접적 응답이다.

명제의 핵심

관용을 무제한으로 베풀면 관용 자체가 사라진다.

관용 사회가 비관용 세력에게까지 끝없이 관용을 베풀면, 비관용 세력이 그 관용을 이용해 자라난다.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관용 자체를 폐기한다. 결국 관용을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시도가 관용을 소멸시킨다.

따라서 관용을 보존하려면 관용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 비관용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유보해야 한다. 이것이 '역설'이라 불리는 이유다.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그 원칙이 무너지는 자기파괴적 구조 때문이다.

포퍼가 그은 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포퍼는 '비관용'의 기준을 매우 좁고 명확하게 잡았다. 견해의 불쾌함이나 거칠음이 아니다. 토론 태도의 좋고 나쁨도 아니다.

기준은 단 하나다. 합리적 논변에 응할 의사가 있는가, 아니면 합리적 논변을 거부하고 폭력으로 답하겠다고 선언하는가.

포퍼 자신의 표현으로는 "주먹과 권총으로 답하겠다"고 선언하고 추종자들에게 이성적 논의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치는 세력이다. 이런 세력에 한해 관용의 보호가 거두어진다.

이 기준이 좁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짓말하는 정치인, 인신공격하는 논객,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후보, 막말하는 지도자, 이들은 분명 정치적으로 문제이지만 포퍼가 말한 비관용 세력과는 층위가 다르다. 이 차이를 흐리면 관용의 역설은 자기 진영의 비관용을 정당화하는 만능 무기로 전락한다.

포퍼의 세 가지 단서

포퍼 본인은 이 명제를 적용할 때 매우 신중했다. 그가 명시한 단서가 셋이다.

첫째, 합리적 논변으로 반박할 수 있다면 그쪽이 우선이다. 비관용 견해라도 토론장에 끌어내 논리로 격파하는 것이 최선이다.

둘째, 억압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상대가 합리적 토론 자체를 거부하고 폭력을 도구로 삼겠다고 선언했을 때다.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견해는 아무리 불쾌해도 관용의 보호 안에 있다.

셋째, 이때조차 여론에 의한 차단이 우선이고 법적 강제는 최후 수단이다. 형사처벌과 같은 강제 수단은 '선동·살인·납치 부추김'을 처벌하듯 신중히 적용되어야 한다.

이 단서들이 자주 잊힌다. 관용의 역설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종종 "내가 싫어하는 견해는 비관용이니 억압해도 된다"는 식으로 단순화한다. 포퍼의 본의는 그게 아니다.

역사적 시연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1919-1933)가 포퍼가 직접 보고 쓴 사례다. 나치당은 합법적으로 세력을 키웠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5년형 중 9개월만 살고 나왔고,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나치는 한 번도 다수당이 된 적이 없다. 1932년 7월 37.3%로 정점을 찍은 뒤 11월 33.1%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1933년 1월 30일 합법적으로 총리가 되었고, 3월 수권법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폐지했다. 관용적 체제가 자기방어 의지를 갖지 못한 결과다.

전후 독일은 이 실패에서 직접 배웠다. 기본법(1949)에 '방어적 민주주의(streitbare Demokratie)'를 명문화했다. 헌법재판소가 1952년 신나치 성향 SRP, 1956년 공산당 KPD를 해산했다. 두 정당 모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한다는 이유였다. 2017년 극우 NPD 해산 청구는 기각되었다. "적대적이지만 실현할 잠재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 판결은 포퍼의 단서를 정확히 반영한다. 견해의 불쾌함이 아니라 실질적 위협 능력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1954년 매카시 청문회는 다른 종류의 시연이다. 매카시는 거짓 고발과 인격 살해를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무너진 것은 법적 강제가 아니라 여론이었다. 1954년 6월 9일 군청문회에서 조지프 웰치 변호사의 한마디, "당신은 마침내 일말의 예의도 없는가"가 전국에 방송되면서 매카시의 정치적 신뢰는 붕괴했다. 그해 12월 상원은 67대 22로 비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포퍼가 말한 '여론에 의한 차단'이 작동한 사례다.

다만 매카시 사례는 포퍼가 말한 비관용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매카시는 거짓과 인신공격을 도구로 삼았지만 폭력으로 답하겠다고 선언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무너진 것은 관용의 역설이 작동했다기보다 정치 공동체가 그의 방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의미가 있다. 모든 추한 정치 행태가 관용의 한계 밖으로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미셸 오바마의 "When they go low, we go high"(2016)는 현대적 시험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진영의 정치문법 앞에서 작동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여기서도 신중한 구분이 필요하다. 트럼프 진영의 막말과 거짓말은 정치적으로 문제이지만, 그것만으로 포퍼식 비관용 세력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진짜로 관용의 역설이 발동되는 순간은 2021년 1월 6일 의사당 난입처럼 폭력이 토론을 대체하려 한 그 지점이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저쪽이 거칠게 말하니 우리도 관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진영 논리로 전락한다.

한국의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은 헌법 제8조 제4항의 방어적 민주주의 조항이 처음 적용된 사례다. 헌법재판소는 8대 1로 해산을 결정했다. 옹호하는 쪽은 포퍼식 자기방어의 정당한 행사라 보고, 비판하는 쪽은 견해의 불쾌함을 비관용 세력으로 단정한 과잉 적용이라 본다. 이 논쟁이 보여주는 것은, 포퍼의 명제가 추상적으로는 명확하지만 구체적 적용에서는 항상 판단의 문제가 따른다는 점이다.

종합

관용의 역설이 남기는 교훈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관용을 보존하려면 관용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이 한계가 없으면 관용 사회는 자신을 파괴하려는 세력에게 무력하게 길을 내준다. 바이마르가 그 시연이었다.

둘째, 그러나 한계의 기준은 매우 좁고 엄격해야 한다. 포퍼가 그은 선은 폭력에 의한 토론의 대체다. 그 선 앞에서 멈추는 모든 견해는, 아무리 불쾌하고 거칠어도, 관용의 보호 안에 있다. 이 기준을 넓혀 잡으면 '내가 싫은 견해'가 곧 '비관용'이 되는 자의적 적용으로 미끄러진다.

셋째, 한계를 적용할 때조차 절차가 중요하다. 합리적 논변에 의한 반박이 우선이고, 여론의 차단이 다음이며, 법적 강제는 최후 수단이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관용의 역설은 자신이 막으려던 닫힌 사회의 도구가 된다.

미셸 오바마의 호소가 트럼프식 정치문법 앞에서 약해진 경험이 우리에게 관용의 역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다만 그 적용은 신중해야 한다. 거친 정치 스타일에 대한 분노와 진짜 비관용 세력에 대한 판단은 다른 층위의 일이다. 이 둘을 혼동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진짜 비관용 세력이 나타났을 때 망설이지 않는 것, 이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관용의 역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치적 성숙함이다.

한비자의 형명참동(刑名參同)이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약속을 어긴 자에게 약속대로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약속 자체가 무너진다. 다만 한비자도 모든 약속 위반을 동일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관용의 역설도 그러하다. 모든 비관용을 같은 무게로 다루는 명제가 아니다. 게임판 자체를 엎으려는 자에 한해, 그것도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할 명제다.

"Less well known is the paradox of tolerance: Unlimited tolerance must lead to the disappearance of tolerance. If we extend unlimited tolerance even to those who are intolerant, if we are not prepared to defend a tolerant society against the onslaught of the intolerant, then the tolerant will be destroyed, and tolerance with them. We should therefore claim, in the name of tolerance, the right not to tolerate the intolerant."

덜 알려진 명제가 있다.
'관용의 역설'이라는 말이다.
무제한의 관용은 결국 관용을 소멸시키게 된다.
비관용에까지 끝없이 관용을 베풀고,
비관용의 공세로부터 관용 사회를 지킬 의지조차 갖추지 않는다면,
관용적인 자들은 파멸하고 관용도 그들과 함께 묻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비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