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인가, 상인가, 동기인가 _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
프리드리히 대왕은 백성에게 감자를 먹이고 싶었다. 코와 귀를 자르겠다는 칙령에도 백성은 따르지 않았고, 설득에도 외면했다. 그러나 왕실 정원에 감자를 심고 군대로 지키며 밤에는 눈감아 주자, 백성들은 훔쳐다 제 밭에 심었다.
한비자는 강제와 보상을 군주의 두 칼자루(二柄)라 했다. 강력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이다. 할로우의 원숭이와 데시의 학생은 오히려 보상이 흥미를 빼앗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보상의 배신'이다.
같은 행위라도 시켜서 하면 벌이고, 스스로 원해서 하면 권리가 된다. 사람을 가장 멀리 데려가는 동력은 벌도 상도 아닌 스스로 원하는 마음이다. 자율성·유능감·관계성이 살아 있을 때 사람은 보지 않아도, 떠난 뒤에도 일한다.
명령은 사람의 발을 묶고 보상은 손을 빌리지만, 동기는 마음을 얻는다. 이병 너머의 칼자루는, 사람의 마음에서 일이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기술이다.
같은 일임에도, 매를 맞으면서도 하기 싫은 일이 있는가 하면, 벌을 받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넉넉한 보상이 보장되는 데도 즐겁지 않은 일이 있는가 하면, 아무 보상이 없음에도 스스로 즐겨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심리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행위 자체는 같은데 심리가 정반대로 갈리는 이 분기점을 찾는 일은, 사람을 움직이려는 모든 자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부모, 교사, 리더, 정치인, 마케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행동하게 만들려는 모든 사람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군주의 두 칼자루
사람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고전적 기법이 있다. 바로 강제와 보상이다. 한비자는 이를 '이병(二柄)', 곧 군주의 두 칼자루라 했다.
"밝은 군주가 신하를 이끌어 제어하는 데에는 두 개의 칼자루가 있을 뿐이다. 그 두 개의 칼자루는 형(刑)과 덕(德)이다.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_ 한비자 '이병(二柄)'
벌과 상. 강제와 보상. 한비자는 이 둘을 군주가 절대 신하에게 넘겨서는 안 되는 통치의 최후 수단이라 했다. 범이 개를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발톱과 어금니가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개에게 내어주면 범이 개에게 복종당한다는 비유다. 인사권과 상벌권은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온다.
이 두 칼자루는 분명 강력한 통치 수단이다. 어떤 조직도 이것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비자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칼자루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이라는 사실이다. 강제는 저항하지 않게 할 수는 있으나 헌신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보상은 움직이게 할 수는 있으나 자신의 일로 몰입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강제와 보상은 사람의 발은 묶을 수 있지만 마음은 묶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병의 한계는 옛 군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모든 조직이 매일 그 한계 안에서 작동한다. 벌과 상이 아닌 방법으로 조직원들을 움직이는 비결을 알아보자.
백성들이 감자를 먹도록 하는 방법
18세기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은 백성에게 감자를 먹이고 싶었다.
당시 프로이센은 거듭된 전쟁과 흉작으로 굶주림이 일상이었다. 밀과 호밀은 기후에 취약했고, 한 번 흉년이 들면 백성이 죽어 나갔다.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자랐고, 같은 면적에서 곡물보다 몇 배의 칼로리를 냈다. 왕에게 감자는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는 구휼 식량이며 전략 자원이었다.
그래서 왕은 먼저 한비자의 형(刑)이라는 칼자루를 들었다. 1756년 그는 감자 재배를 명령하는 칙령(Kartoffelbefehl)을 내렸다. 평생 그가 발한 감자 관련 칙령은 무려 열다섯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 단순히 권장한 것이 아니었다. 어기는 자에게는 코와 귀를 자르겠다는 위협까지 따랐다. 그러나 백성은 따르지 않았다. 어떤 마을에서는 관리들이 감자를 나눠주고 떠나면 그날 밤 모조리 파묻어 버렸고, 어떤 마을에서는 "개도 안 먹는다"는 답장을 왕에게 보냈다. 매를 맞아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왕은 설득했다. 감자의 영양과 가치를 알리는 안내문을 뿌렸고, 자신이 직접 감자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왕실 식탁에서 감자를 매끼 올렸다. 백성은 외면했다. 이유는 많았다.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작물이라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음식이 아니다. 가지과 식물이라 독이 있다. 흙 속에서 자라 울퉁불퉁한 모양 때문에 나병을 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이센의 오래된 속담으로서 "농부는 모르는 것을 먹지 않는다." 왕의 말은 옳았지만, 그 옳음만으로는 한 사람의 입에도 감자를 넣을 수 없었다.
왕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강제로 안겨도 소용 없고, 아무리 정성껏 설득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아무리 막아도 가져간다는 것이다. 강제와 설득은 인간의 자발적 욕망의 방향에 거스른다. 그렇다면 욕망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강제'의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는 감자를 '왕실의 채소'로 선포했다. 왕실 정원에 감자밭을 만들고 군대를 세워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보초병들에게는 은밀히 두 가지 지시가 내려졌다. 낮에는 엄격히 지킬 것, 그리고 밤에는 눈을 감아줄 것. 막되, 새어나가게 하라. 백성들은 밤마다 몰래 '왕실의 채소' 감자를 훔쳐다 자기 밭에 심기 시작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같은 감자, 같은 백성, 그러나 정반대의 행동.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었는가. 그것은 백성들에게 일어난 세 가지의 심리적 변화였다.
첫째, 왕실이 지키는 작물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것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강력한 신호가 되었다. 왕이 직접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는 통하지 않았던 메시지가, 왕이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자 통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그것도 보호하는 행동이 가치를 증명했다.
둘째, 같은 감자를 심는 일이 의미가 뒤바뀌었다. 칙령을 따라 심으면 그것은 강요된 순종이지만, 훔쳐다 심으면 그것은 권력에 대한 작은 거역이자 자기 의지의 행사가 된다. 행위는 같지만 주체가 달라졌다.
셋째, 위험을 무릅쓰고 얻어낸 것은 더 귀해진다.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 얻은 것에 비합리적으로 높은 가치를 매긴다. 거저 받은 감자는 천하지만, 훔쳐 온 감자는 귀하디 귀한 것이다.
먹지 않으면 코와 귀를 베겠다는 엄중한 나라의 칙령도 사람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가리고 숨겨 그들이 스스로 원하게 만드니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하였다.
이 현상을 희소성의 힘, 금지의 역설 등으로 설명한다. 그 흔한 해석은 거기까지다. 그러나 본질은 더 깊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한 일은 감자를 희소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를 바꾼 것이다. '왕이 강제로 먹이려는 것'에서 '내가 갖고 싶은 것' 으로 바뀌었다. 칙령을 받았을 때 백성은 객체였고, 훔쳤을 때 백성은 주체가 되었다. 주체가 된 사람만이 비로소 움직인다.
톰 소여의 담장 페인팅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는 같은 원리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톰 소여는 이모에게서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라는 벌을 받는다. 페인트 칠을 하면서도 구경하러 온 친구들에게 떠넘기거나 부탁하지 않는다. 다만 친구들이 다가올 때 그 일이 굉장히 재미있고 영광스러운 일인 것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결국 그 일이 너무도 궁금했던 친구들은 사과를 바치기까지 하며 페인트칠할 권리를 사 갔다. 톰은 그늘에 앉아 사과를 먹었고, 담장은 세 번이나 새 칠을 입었다. 트웨인은 이 장면에 한 줄의 통찰을 붙였다.
"사람이든 아이든 무엇을 갈망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얻기 어렵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같은 페인트칠이었다. 톰에게는 벌이었지만, 친구들에게는 사과를 바쳐서라도 해보고 싶은 권리였다. 행위는 같은데 심리는 정반대였다. 도입에서 던진 첫 번째 질문의 답이 여기 어디쯤에 있다.
노자 도덕경 17장에도 그 비슷한 말이 있다. "넌지시 이르되 말을 아끼면,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어도 백성은 '내가 스스로 그리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최상의 통치라고 하였다. 통치자의 존재마저 잊은 채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라 믿게 하는 것이야말로 절정의 다스림이다. 이는 한비자가 말한 이병의 통치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보상의 배신
벌이 아닌 상은 어떨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상은 필시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얼마나 지속적인 행동과 진정을 일으킬까?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보상이 있어도 즐겁지 않거나, 보상이 없는데도 즐거운 심리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1949년,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F. Harlow)는 8마리의 붉은털원숭이에게 기계적 퍼즐을 주었다. 수직 핀을 빼고, 고리를 해제하고, 덮개를 여는 퍼즐이었다. 푼다고 음식을 주지도 않았고, 풀라는 지시도 없었다. 그저 우리 안에 퍼즐만 넣어두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원숭이들은 자발적으로 퍼즐에 몰두했다. 2주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가 퍼즐을 풀었고, 그 중 3분의 2는 60초 안에 해결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보상을 바라서도 아니었다. 그저 하고 싶어서였다.
할로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두 번째 실험에서 보상을 도입했다. 퍼즐을 풀면 건포도를 주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보상을 받자 성과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빠졌다. 원숭이들은 더 많은 실수를 했고, 문제를 푸는 빈도도 줄었다. 건포도는 행동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분산시켜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이것이 '보상의 배신'이다.
22년 후, 1971년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는 사람을 대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대학생들에게 소마(Soma)라는 입체 퍼즐을 풀게 했다. 학생들은 자유 시간에도 퍼즐을 계속 풀 만큼 그 일을 즐겼다. 데시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다시 실험했다. 한 그룹에는 퍼즐을 풀 때마다 돈을 주었다. 다른 그룹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며칠 후 데시가 실험을 끝내고 학생들을 방에 혼자 두었을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퍼즐을 계속 푸는 학생은 누구였을까. 돈을 받지 않은 그룹이었다. 보상을 받은 학생들은 보상이 사라지자 흥미마저 잃었다.
원숭이의 건포도와 학생의 돈은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 가버렸다. 그건 흥미와 즐거움이다. 보상은 외부에서 오지만 즐거움은 내부에서 우러나온다. 외부의 보상이 내부의 즐거움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즐거움은 사라지고 보상에 대한 의존만 남는다. 데시는 이 현상을 '내재적 동기의 약화'라 불렀다.
인간이 '내재적 동기'에 기반하여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원하고 행하게 만드는 동력은 세 가지다. 그것은 자율성(스스로 선택했다는 감각), 유능감(잘하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관계성(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이 셋이 갖춰지면 사람은 보상 없이도 움직인다. 이 셋이 없으면 아무리 보상을 해도 결국은 멈추게 된다.
다니엘 핑크는 이 발견을 동기 이론의 진화로 정리했다. 동기 1.0은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욕구였고, 동기 2.0은 보상과 처벌에 기반한 외재적 동기였으며, 동기 3.0은 자율성과 숙달과 목적에 기반한 내재적 동기다. 한비자의 이병은 동기 2.0의 완성형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일은 동기 3.0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프리드리히의 울타리는 백성에게 자율성을 돌려주었다. 시켜서 심는 것이 아니라 훔쳐서 심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백성 자신의 선택이 되었다. 톰의 페인트솔은 친구들에게 유능감을 주었다. 아무나 칠할 수 없는 일이라는 신호가 그들을 장인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같은 페인트칠이 톰에게는 벌이었고 친구들에게는 권리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톰에게는 자율성이 없었고, 친구들에게는 자율성이 있었다. 톰은 시켜서 했고, 친구들은 사서 했다. 같은 행위라도 그 행위를 둘러싼 구조가 자율과 유능과 관계의 감각을 주느냐 빼앗느냐에 따라, 사람은 벌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싶어 하거나 매를 맞으면서도 하기 싫어한다.
프리드리히와 톰은 원숭이든 인간이든 그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관으로 먼저 알고 있었던 셈이다. 미국의 군 사령관이자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그것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리더십이란, 당신이 원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전쟁터에서 수십만 명을 움직여본 사람의 결론이다. 명령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명령으로 움직인 군대는 명령이 끊기는 순간 무너지기 때문이다.
양날의 칼
어느 조직에서나 비슷한 방식으로 조직원을 움직인다. 명령하는 리더는 한비자의 형(刑)으로 다스리고, 보상하는 리더는 한비자의 덕(德)에 기댄다. 둘 다 이병의 칼자루를 쥔 자들이며, 그 칼자루로 끌어내는 것은 최소한의 성과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리더는 스스로 원하게 하는 리더다. 이병 너머의 한 칼자루를 더 쥔 자다.
원하게 하는 리더는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일이 만들어낼 변화를 보여준다. 직원이 스스로 방법을 정하게 두고(자율성), 잘하고 있다는 신호를 정확히 주고(유능감), 함께 가고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게 한다(관계성). 그의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움직이고, 그가 자리를 비워도 일은 계속된다.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말한다. "내가 해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양날이다. 누군가는 이 원리를 이용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돕고, 누군가는 같은 원리로 사람들이 회사에 이로운 것을 스스로 원하도록 조작한다. 좋은 리더와 능숙한 조작자의 차이는 기법이 아니라 방향에 있다. 끌어낸 욕망이 결국 누구의 것이 되는가, 그것이 갈림길이다.
프리드리히는 백성이 감자를 훔치게 만들어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했다. 그가 한 일은 조작에 가까웠지만, 그 결과는 백성의 생존이었다. 만약 그가 같은 기술로 백성에게 해로운 무엇을 원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기술은 같다. 방향이 다를 뿐이다.
두 갈래 질문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같은 일이 누구에게는 벌, 누구에게는 욕망인 이유는 어디서 오는가. 같은 일이 보상을 받아도 즐겁지 않거나 보상이 없어도 즐거운 이유는 어디서 오는가.
답은 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행위와 사람 사이의 관계, 그 관계 안에서 자율성과 유능감과 관계성이 살아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사람을 이끄는 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시키고 있는가, 보상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하게 하고 있는가. 당신의 사람들이 당신을 떠나서도 그 일을 계속할 만큼,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당신이 끌어낸 그 욕망은, 결국 누구의 것인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회사에서 하고 있는 그 일은, 누가 원하게 만든 것인가. 그 야망은 당신 안에서 자라난 것인가, 위에서 심어진 것인가. 당신은 매를 맞으면서도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가, 벌을 받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가. 최근 당신이 원했던 것 중, 정말 당신의 이유로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이들에 대한 답이 바로 당신의 리더십이며 당신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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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군주가 신하를 이끌어 제어하는 데에는 두 개의 칼자루가 있을 뿐이다. 그 두 개의 칼자루는 형(刑)과 덕(德)이다.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明主之所導制其臣者, 二柄而已矣. 二柄者, 刑德也. 殺戮之謂刑, 慶賞之謂德. _ 한비자 '이병(二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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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든 아이든 무엇을 갈망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얻기 어렵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In order to make a man or a boy covet a thing, it is only necessary to make the thing difficult to attain.) _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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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17장에도 그 비슷한 말이 있다. "넌지시 이르되 말을 아끼면,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어도 백성은 '내가 스스로 그리하였다'고 말한다(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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