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세우는가 _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을 '몰아세움'(Gestell)이라 불렀다. 옛 풍차는 바람을 기다렸으나, 현대의 수력발전소는 강을 가두어 전기를 강요한다. 자연이 내어주기를 기다리는 태도가, 자연을 닦달해 빼내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이 시선 아래 모든 존재자는 '부품'(Bestand)으로 전락한다. 산은 매장량이 되고 강은 수압이 되며, 사람마저 '인적 자원'이 된다. 가장 큰 위험은 이 시선이 유일한 진리로 굳어져 시적·명상적 시선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한다는 데 있다. 데이터 자본주의와 AI 시대는 그 진단의 정점이다. 답은 기술의 폐기가 아니라 '내맡김'(Gelassenheit), 곧 사물을 그 자신으로 두는 거리감이다. 특허제도 또한 이 몰아세움의 법적 표현으로 보이지만, 실은 댐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댐의 사무처이며, 동시에 약자의 몫을 지키는 룰북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말: 두 개의 강
같은 강을 두 사람이 보고 있다. 한 사람은 시인이고, 한 사람은 발전소 설계자다.
시인에게 라인강은 그 자체로 흐르는 무엇이다. 강은 자기 리듬을 가지고 있고, 양안의 풍경을 만들고, 인간의 노래를 길어 올리게 한다. 발전소 설계자에게 라인강은 다르다. 그에게 강은 일정한 낙차를 가진 수압의 공급원이다. 댐을 세우고 터빈을 돌리면 메가와트 단위의 전기가 산출된다. 강은 발전 시스템의 한 부품이 된다.
이 두 시선의 차이를 끝까지 밀고 들어간 사람이 마르틴 하이데거다. 그는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 1953)에서 묻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강을 발전소의 부품으로 보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그렇게 보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하이데거의 답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현대 기술의 본질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모든 것을 한 줄로 세워 부려 먹는 거대한 짜임새. 그가 이것을 가리키기 위해 끌어온 독일어가 'Gestell'이다. 일상 독일어에서는 선반이나 책꽂이를 뜻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단어에 '몰아세우는 틀'이라는 무게를 실었다. 한국어로는 '몰아세움'으로 옮긴다. 이 낯선 말 한마디가 그의 기술 철학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본 글은 그 낯선 말을 풀어 보려는 시도다.
I. 자연이 내어주는 시대에서, 자연을 닦달하는 시대로
옛 그리스 사람들은 기술을 테크네(techne)라고 불렀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예술'과 '기술'을 동시에 가리켰다. 그들에게 기술이란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 주는 일이었다. 목수가 나무로 의자를 만든다고 할 때, 그것은 나무를 정복하는 일이 아니다. 나무 안에 잠재해 있던 형상을, 목수가 손길로 거들어 세상에 나오게 하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태도를 '가져와 앞에 놓음'이라고 풀이했다. 그리스 말로는 포이에시스(Poiesis)다. 시(poetry)의 어원이기도 한 이 단어가, 본래는 기술과 예술과 시를 한 식구로 묶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만듦은 도와줌이고, 끌어냄이고, 보살핌이었다.
이런 만듦은 기다림을 안다. 풍차는 바람이 불 때 돌고, 바람이 멎으면 멈춘다. 풍차는 바람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이 내어주는 만큼만 받는다.
현대 기술은 그렇게 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을 향해 명령한다. 숨겨놓은 에너지를 내놓으라고,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닦달하여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독일어로는 헤라우스포르데른(Herausfordern). 'heraus'(밖으로)와 'fordern'(요구하다)이 결합된 말이다. 자연 안에 갇혀 있는 것을 강제로 밖으로 끄집어내라는 요청. 보살핌이 닦달이 된 것이다.
자연이 내어주기를 기다리던 시대가, 자연을 닦달해 빼내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것이 고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라인강의 수력발전소가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댐은 강물을 가두고, 갇힌 물은 더 이상 자유롭게 흐르지 않는다. 강은 전력 생산이라는 단일한 목적에 종속되며,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이다. 강의 신비도, 양안의 풍경도, 강을 노래한 횔덜린의 시도, 발전량 그래프 뒤로 가려진다.
II. 부품이 된 세상
자연을 닦달하는 태도가 일상화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우리 앞에 나타난다. '나중에 쓰이기 위해 줄 서서 대기하고 있는 무엇'으로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베슈탄트(Bestand)라고 불렀다. 우리말로는 '부품'으로 옮긴다. 영어 번역어 standing-reserve는 그 뜻을 잘 살린다.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름을 기다리며 서 있는(standing) 비축물(reserve).
산은 산이 아니다. 매장량으로 환산된 광석이고, 입목 축적량으로 정리된 임자다. 숲은 숲이 아니다. 탄소 흡수원이고 펄프 원료다. 석탄은 그저 검은 돌이 아니다. 칼로리로 환산된 열량 단위다.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는 자율적 기계가 아니다. 운송 스케줄의 한 항목, 가용성 100퍼센트로 대기 중인 부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을 해 두자. '대상'(Gegenstand)과 '부품'(Bestand)의 구분이다. 독일어를 들여다보면 두 단어가 형제처럼 닮아 있다. 'gegen'(맞서)이 붙으면 대상이 되고, 'be-'(고착)이 붙으면 부품이 된다. 대상은 우리 앞에 마주 서서 자기를 드러내는 무엇이다. 그것은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응대를 요구한다. 부품은 그렇지 않다. 부품은 마주 서지 않는다. 부품은 시스템의 부름에 즉시 응답할 수 있도록 줄을 서 있을 뿐이다. 부품에게 '자리'는 없다. '위치'만 있다.
이 차이가 사소해 보일지 모르나, 한 사회 전체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
III. 인간도 부품이 된다
이 논리의 가장 섬뜩한 종착점은, 같은 도식이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회사의 인사부서가 어느 날부터 '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잠시 멈춰 그 말의 결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한 시대의 전환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적 자원. 사람이 자원이 된 것이다. 광석과 입목과 동일한 범주에 인간이 들어선 것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것은 우연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현대 기술이 자연을 부품화하던 그 동일한 논리가, 마침내 인간에게로 화살을 돌린 결과다.
현대인은 휴식조차 그렇게 한다. 우리는 '재충전'이라는 이름으로 휴가를 보낸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다음 분기의 성과를 위해, 일시적으로 정비창에 들어가는 부품처럼. 우리는 자신을 도구로 다루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이상한 일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여기에 현대 기술 문명의 가장 깊은 역설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기술을 지배한다고 믿지만, 정작 그 지배의 논리에 의해 인간 자신이 지배되고 있다. 모든 것을 부품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도 부품으로 보게 된다.
IV. 가장 큰 위험은 어디 있는가
하이데거는 몰아세움을 '최고의 위험'이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말하는 위험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위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전쟁의 파국, 기후 붕괴, AI의 통제 불능. 이 모든 것이 무서운 일이지만, 하이데거가 '최고의 위험'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차원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단 하나로 굳어지는 일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시인의 눈, 농부의 눈, 신앙인의 눈, 아이의 눈. 같은 한 그루의 나무를 두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 그런데 몰아세움의 시대에는, 오직 한 가지 눈만 진리로 인정받는다. 효율과 산출의 눈이다. 측정과 계산의 눈이다.
문제는 이 눈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유일하게 옳은 시선'이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시적 시선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명상적 시선은 한가한 것으로, 종교적 시선은 미신으로 치부된다. 다른 시선의 가능성 자체가 봉쇄된다.
이 봉쇄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최고의 위험이다. 핵폭탄은 도시를 무너뜨리지만, 이 봉쇄는 인간의 정신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봉쇄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봉쇄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V. 두 가지 사유
이 봉쇄에 맞서기 위해 하이데거는 두 가지 사유 방식을 구별한다.
하나는 '셈하는 사유'다. 독일어로 레히넨데스 덴켄(rechnendes Denken). 'rechnen'은 계산하다, 셈하다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유 양식이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려는 사유.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고, 효율로 평가하고, 문제와 해결책의 쌍으로 정리하려는 사유. 이 사유 없이 현대 사회는 한 순간도 굴러가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되새기는 사유'다. 독일어로 베진리헤스 덴켄(besinnliches Denken). 'Sinn'은 의미라는 뜻이며, 'besinnen'은 의미를 곱씹는다는 동사다. 우리 곁에 있는 사물이 우리에게 말 거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유. 농부가 씨앗을 심고 자라기를 기다리듯, 즉각적인 답을 강요하지 않고 사물이 스스로를 드러낼 시간을 주는 사유.
하이데거는 셈하는 사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 그가 경고한 것은, 셈하는 사유가 사유의 유일한 표준이 되어 되새기는 사유를 짓밟을 때다. 그때 우리는 사유의 절반을 잃는다. 그리고 그 절반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절반이다.
현대인이 사유 능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되새기는 사유를 그저 방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멈추기만 하면 된다. 잠깐의 멈춤이 다른 사유의 입구다.
VI. 디지털 시대의 몰아세움
하이데거가 「기술에 대한 물음」을 발표한 것은 1953년이다. 그가 지금 우리 시대를 보았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짐작컨대 그는 자신의 진단이 점점 더 정확해지고 있음에 침통해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데이터 자본주의는 몰아세움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다. 우리의 일상적인 클릭과 좋아요와 체류 시간이 행동 잉여라는 이름의 원료로 채굴된다. 우리는 무료로 서비스를 받는다고 믿지만, 실은 우리 자신이 상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행동 데이터가 상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이 부품화되던 그 과정을 인간 내면에서 그대로 목격한다. 강의 흐름이 수압으로 환원되었듯, 인간의 주의(注意)와 감정과 욕망이 데이터 포인트로 환원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선호를 학습하지만, 그 학습된 선호는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의 다음 행동을 유도한다. 인간은 시스템에 데이터를 공급하고, 시스템은 인간에게 행동을 지시한다. 강물이 댐 앞에서 갇혀 전기를 내놓도록 다그쳐졌듯, 이제 인간이 화면 앞에서 클릭을 내놓도록 다그쳐지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던 영역들이 차례로 알고리즘에 의해 시뮬레이션되고 있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음악 작곡, 의사결정. 하이데거가 우려했던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부품으로 취급하게 되는" 사태가, 이제 인간의 창의성과 판단력마저 부품화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이데거의 답은 의외로 평범하다. 그러나 평범하기에 어렵다.
VII. 내맡김, 그리고 시적 거주
그의 답은 '내맡김'이다. 독일어로는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 'lassen'은 영어 'let'에 해당하는 동사로 '내버려 두다, 그대로 두다'라는 뜻이다. 거기에 명사형 어미가 붙어 '내버려 두는 태도'가 되었다. 사물을 시스템의 부품으로 몰아세우지 않고, 그것이 그것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가만히 두는 자세를 말한다.
내맡김은 기술을 거부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을 폐기하고 풍차 시대로 돌아가자고 말한 적이 없다. 그가 권한 것은 기술 장치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동시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쓰되, 스마트폰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효율을 추구하되, 효율이 모든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있다. 이 동시적 견지가 내맡김이다.
내맡김의 구체적인 실천 통로 가운데 하나로 하이데거가 제시한 것이 예술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과 기술은 같은 이름이었다. 테크네. 두 단어가 갈라져 나간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다. 하이데거는 이 분기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술이 본래 어떤 일을 했는지 상기시킨다.
예술은 사물을 부품에서 해방시킨다. 반 고흐가 그린 농부의 구두는 그저 발에 신는 도구가 아니다. 그 구두 안에는 농부의 고단함과 대지의 무게와 시간의 결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부품의 반대편에 있다. 사물이 자기 자신으로 빛나는 자리다.
이런 시선이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시적으로 거주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을 부품의 창고로 보지 않고, 신비를 머금은 거주의 장소로 본다는 뜻이다.
맺는 말: 하이데거가 특허제도를 본다면
이 글은 변리사의 글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데거가 만약 21세기에 살아 변리사의 사무실에 한 번이라도 들렀다면, 그는 특허제도를 보고 무어라 했을까.
그의 시선은 두 단계로 움직였을 것이다.
먼저 그는 익숙한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자연법칙을 '이용한' 기술적 사상에 사유재산권을 설정한다는 발상. 발명을 청구항이라는 양식으로 분해해 치환 가능한 구성요소들의 집합으로 만드는 작업. 전 세계 특허 데이터베이스에 인류의 모든 기술 지식이 검색 가능한 부품으로 정렬되어 있는 광경. 그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자신이 진단한 몰아세움의 법적·제도적 표현을 거기서 또렷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하이데거를 도식적으로 따르는 일이지 그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하이데거 자신도 우리에게 가르친다. 단 하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일이야말로 그가 경계한 최고의 위험이었다. 그러므로 특허제도를 '몰아세움의 정점'이라고 단번에 단죄하는 자세는, 정작 하이데거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한 발 더 들어가면 풍경은 달라진다.
특허제도는 강에 댐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댐은 변리사가 세우지 않았다. 댐을 세운 것은 발전소 사업자였고, 자본이었고, 산업 사회 전체의 에너지 욕망이었다. 변리사가 등장하는 자리는 댐이 세워진 뒤다. 누가 댐의 어느 부분을 발명했는지를 가려, 그 부분에 일정 기간의 배타권을 인정해 주는 절차. 닦달의 정점이라기보다는 닦달의 사무처에 가깝다. 비판의 화살이 닦달 자체로 향한다면, 그 화살이 멈춰야 할 자리는 사무처가 아니라 댐을 세우라고 명령한 그 욕망의 구조다.
그리고 이 사무처에는 또 한 겹의 얼굴이 있다. 룰북의 얼굴이다. 거대 자본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흡수하려 할 때, 그 중소기업이 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가 한 장의 특허증이다. 회사에 종속된 연구원이 자신의 발명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정당한 몫을 요구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의 유일한 장치가 직무발명보상금 제도다. 거대 서사로 보면 사소한 분쟁들이지만, 그 안에 한 사람의 노동과 한 가족의 생계와 한 인생의 자존이 걸려 있다.
하이데거의 거대 진단은 이 미시적 정의의 자리를 잘 비추지 못한다. 그는 시인의 거리에서 문명을 진단했고, 그 거리에서는 한 발명자의 몫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변리사는 매일 그 자리에 선다. 자본주의적 혁신 명령이 거대한 닦달이라는 진단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닦달 안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익명의 부품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청구항에 새겨 넣는 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 닦달 안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거의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변리사가 하이데거에게 배울 자리는 다음과 같다.
특허제도가 어떤 형이상학 위에 서 있는지를 잊지 말 것. 자연을 닦달해 빼낸 결과를 사유화하는 절차의 한복판에서, 그 절차가 모든 사유의 표준이 아님을 알 것. 청구항을 정확히 쓰면서도, 청구항이 발명의 전부가 아님을 알 것.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한 줄의 서지정보 뒤에, 그 발명을 떠올린 한 사람의 어떤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할 것.
이것은 변리사를 분열시키는 자세가 아니다. 청구항을 쓰는 일이 곧 부품화 작업이라는 죄책감으로 살라는 권고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청구항이 그 발명자의 몫을 정확히 담아내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야말로 가장 변리사다운 일이고, 그 물음 안에 라인강을 강으로 기억하는 자세가 이미 들어 있다.
라인강은 강이다. 그러나 그 강 위에 댐이 세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시대에 강을 강으로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댐이 만들어낸 전기가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되는가를 따지는 일도 필요하다. 변리사는 후자의 일을 한다. 그것은 강을 잊는 일이 아니다. 강 위에 세워진 댐의 시대에 강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하이데거의 말은 결국 단순하다. 잠시 멈춰라. 그리고 사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 멈춤이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하이데거의 진단이 옳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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