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길이 닫혀야 비범한 길이 열린다
스필버그가 '죠스'를 찍을 때 기계 상어가 자꾸 고장 났다. 그래서 그는 상어를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지느러미, 부표, 두 음짜리 테마. 영화사를 바꾼 연출은 풍요가 아니라 결핍에서 나왔다.
윤여정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연기를 가장 잘한다." 손자병법은 더 일찍 말했다. 정교하지만 늦은 것은 서툴지만 빠른 것만 못하다고. 시대도 분야도 다르지만 같은 진실에 부딪힌 사람들이다.
평범한 길이 열려 있을 때 인간은 굳이 비범한 길을 찾지 않는다. 그것이 효율이다. 그러나 바로 그 효율 때문에 우리는 비범한 해법에 도달하지 못한다.
풍요는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고, 결핍은 우리를 발명가로 만든다. 한계 앞에 선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다. 이 한계를 적으로 볼 것인가, 동지로 볼 것인가.
I. '죠스'의 상어가 보이지 않은 이유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죠스'를 찍을 때, 일정은 세 배로 늘어지고 예산은 최소 두 배로 부풀었다. 작업이 워낙 진척되지 않자 스필버그 본인이 자기 경력은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본인은 나중에 회고에서 자신이 할리우드의 웃음거리가 될 거라 믿었고 경력이 시작도 전에 끝날 거라고 두려워했다고 털어놓았다.
문제는 상어였다. 기계로 만든 상어가 자꾸 고장 났다. 물에 들어가면 작동을 멈추고, 짠 바닷물에 부속이 부식되고, 카메라 앞에서 움직임이 어색했다. 감독은 상어를 마음껏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어를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수면 위로 솟은 지느러미, 갑자기 흔들리는 부표, 물속에서 다리만 잡아끄는 어떤 힘. 그리고 존 윌리엄스가 만든 두 음짜리 테마. 관객의 상상이 진짜 상어보다 훨씬 무서운 상어를 만들어냈다.
만약 기계 상어가 처음부터 멀쩡히 작동했다면 어땠을까. 스필버그는 분명 상어를 신나게 보여줬을 것이고, '죠스'는 그저 잘 만든 괴수 영화 한 편으로 남았을 것이다. 영화사를 바꾼 연출은 풍요가 아니라 결핍에서 나왔다.
이 경험은 스필버그라는 감독 자신을 다시 만들었다. '죠스' 이전의 그는 예산을 초과하고 일정을 어기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죠스'에서 한 번 죽음 직전까지 몰린 그는 그 다음부터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압박이 그를 마비시키지 않고 오히려 결정하게 만들었다는 것, 시간이 부족하고 돈이 떨어져 갈 때 비로소 진짜 해법이 나온다는 것을 그는 자기 영화 안에서 직접 발견한 것이다. 풍요는 그를 망설이게 했고, 결핍은 그를 영화사에 남는 연출자로 만들었다. 그 이후의 스필버그는 빨리 찍고 정확히 찍는 감독으로 평생을 걸어갔다.
II. 무한한 선택지의 마비
'죠스'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우리는 보통 자원이 충분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돈이 더 있었더라면, 사람이 더 있었더라면. 우리의 모든 변명은 이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스필버그가 자기 작품에서 마주한 것은 정반대였다. 시간과 돈이 충분했더라면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진짜 해법은 영영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진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비된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에서 '선택의 역설'로 정리된 현상이기도 하다. 마트의 잼 진열대 앞에서 여섯 종류가 놓여 있을 때보다 스물네 종류가 놓여 있을 때 사람들은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다. 가능성이 너무 많으면 어느 가능성도 절박해지지 않는다.
결정한다는 것은 본래 '잘라낸다'는 뜻이다. 영어 decision의 어원이 그렇다. 무엇을 고른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잘라낸다는 의미다. 그런데 잘라낼 것이 무한히 많아지면 잘라내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한계는 우리가 잘라내야 할 것을 미리 잘라주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으면 한 달치 작업은 자동으로 빠진다. 예산이 절반이면 절반의 옵션은 자동으로 사라진다. 남은 선택지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결정할 수 있게 된다.
III. 결핍이 찾아내는 진짜 해결책
스필버그가 '죠스'에서 발견한 "진짜 해결책"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기계 상어가 멀쩡히 작동했다면 '죠스'에 등장했을 해결책은 '상어를 잘 찍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해결책이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고, 누구나 그렇게 한다.
기계 상어가 고장 났을 때 비로소 발견된 해결책은 '상어를 보여주지 않고도 공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자원이 충분했다면 절대 떠올리지 않았을 해법이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해결책은 평범한 길이 막혔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평범한 길이 열려 있는 한 우리는 굳이 비범한 길을 찾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게으른 존재다. 게으름을 탓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효율이다. 굳이 어렵게 갈 이유가 없는데 어렵게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바로 그 효율 때문에 우리는 비범한 해법에 도달하지 못한다. 비범한 해법은 평범한 해법이 차단되었을 때만 발견된다. 그래서 한계는 비범한 해법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전쟁사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은 해상로가 막혔기 때문이고, 한국전쟁에서 인천 상륙이 선택된 것은 낙동강 전선이 더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길이 열려 있었다면 누구도 알프스를 넘거나 인천 갯벌에 상륙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깨달음이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거의 똑같은 문장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한국 배우 윤여정은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자신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연기를 가장 잘한다."
이혼 후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가 절박하던 시절, 다른 배우들이 손사래를 친 노출 연기를 집 수리비 때문에 받아들였고, 그 연기가 그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본인은 나중에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부연했다. "뭐든 절실할 때 제일 잘 하지 않나. 제일 급할 때, 제일 절실할 때 최선, 최악을 다하지 않나."
스필버그가 연출자의 자리에서 한 말과 윤여정이 연기자의 자리에서 한 말은 사실상 같은 문장이다. 풍요는 우리를 평범하게 만들고 결핍은 우리를 비범하게 만든다는 것. 영화감독과 배우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자기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해 본 사람은 같은 진실에 부딪힌다.
IV. 한계가 만드는 실행의 가속
선택의 마비를 풀어주고 비범한 해법을 끌어낸다는 것은 결국 한 가지로 모인다. 한계는 실행을 가속한다.
자원이 충분할 때 우리는 무한히 검토할 수 있다. 더 좋은 안이 있을지 모르니 한 번만 더 보자. 더 나은 시점이 있을지 모르니 좀 더 기다리자. 검토는 가치 있는 행위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면 행위 자체가 검토로 대체된다.
기업이 의사결정에서 실패하는 가장 흔한 경로가 이것이다.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가 시장의 창이 닫힌다. 의사결정 자체에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시간이 너무 흘렀을 뿐이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한한 자원을 가진 팀이 무한한 검토를 하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본다. 반면 제약 안에서 일하는 팀이 놀라운 결과를 내는 모습도 자주 본다. 페이스북 본사 벽에 "Done is better than perfect"라는 문장이 칠해져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이 살아남는 방식은 완벽 대신 완료를 택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통찰은 2,500년 전 손자(孫子)에게서 이미 발견된다. 손자병법 작전편(作戰篇)은 이렇게 말한다.
"兵聞拙速, 未睹巧之久也(병문졸속 미도교지구야). 전쟁은 서툴러도 빨리 끝낸다는 말은 들었으나, 정교하게 한답시고 오래 끄는 것은 본 적이 없다."
후대에 이 구절의 취지를 한 줄로 압축한 격언이 *교지불여졸속(巧遲不如拙速)*이다. 정교하지만 늦은 것이 서툴지만 빠른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손자가 갈파한 것은 단순한 속도주의가 아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어떤 정교한 작전도 국력을 갉아먹기 시작한다는 것, 그래서 완벽을 추구하는 자세 자체가 패망의 길이 된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본사의 영어 문장과 손자의 한문이 2,500년의 시차를 건너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계 안에서 빨리 결정하고 빨리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 부딪치는 거의 모든 분야의 공통 진리라는 것이다. 전쟁터에서도, 영화 촬영장에서도, 실리콘밸리의 회의실에서도 같다.
V. 위기가 사람을 단련시킨다
이것은 한 명의 영화감독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기를 통과한 사람은 위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 번 한계 안에서 비범한 해법을 발견한 사람은 그 다음부터 한계를 다르게 본다. 한계가 적이 아니라 동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통과한 한국 기업이 그 이후로 다른 체질이 되었고, 2008년 금융위기를 통과한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그 이후로 다른 리스크 관리를 하게 된 것도 같은 패턴이다. 풍요의 시간에는 불가능했던 체질 변화가 결핍의 시간에 강제된다. 살아남은 자는 위기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그들을 단련시킨 것은 평온이 아니라 부서질 뻔한 경험이다.
VI. 발명의 자리에서
이 패턴은 발명사를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발견된다.
1901년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글라이더가 계산한 양력의 3분의 1밖에 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다. 그들이 의지하던 것은 당시 항공학의 권위였던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이 제시한 공기역학 데이터였다. 모두가 그 데이터를 쓰고 있었고,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그 데이터로는 비행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 윌버는 인류가 자기들 생애에는 하늘을 날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평범한 길이 막힌 순간이었다. 형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권위자의 데이터를 의심하고, 자기들 손으로 풍동을 만들어 100개에서 200개에 이르는 날개 형상을 직접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릴리엔탈의 데이터가 옳았다면 형제는 풍동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풍동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는 권위자의 데이터로 충분히 만들어졌을 것이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더 빨리 날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데이터가 틀렸기 때문에, 그리고 형제가 그 틀림에 부딪혔기 때문에, 그들은 항공학의 기초를 새로 놓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1903년의 비행은 1901년의 좌절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다.
더 극단적인 사례가 1970년 4월의 아폴로 13호다. 달로 향하던 우주선이 산소 탱크 폭발 사고를 일으키자 세 명의 우주비행사는 좁은 달 착륙선으로 옮겨 타야 했다. 문제는 그 착륙선이 두 명을 위해 이틀 동안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세 명이 나흘을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 이산화탄소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해법은 자명했다. 사령선에 충분히 있던 이산화탄소 필터를 가져와 끼우면 된다. 그런데 두 필터의 모양이 달랐다. 사령선 필터는 사각형이었고, 착륙선 흡입구는 원형이었다. 사각 못을 원형 구멍에 끼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휴스턴의 엔지니어들은 우주선에 실려 있는 물건만으로 해법을 만들어야 했다. 비닐봉투, 절연 테이프, 우주복의 호스, 비행 매뉴얼의 표지, 양말 한 짝. 이것들만으로 두 필터를 연결할 어댑터를 발명해야 했다. 시간은 몇 시간밖에 없었다.
NASA가 평소에 사각 어댑터와 원형 어댑터를 호환시키는 장치를 미리 설계해 두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령선과 착륙선의 필터를 호환시켜야 할 시나리오를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다. 풍요의 시간에는 그런 발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극한의 제약이 발명을 강제했다. 엔지니어들은 우주선에 있는 물건의 목록을 펼쳐놓고, 그 안에서만 작동하는 해법을 찾아냈다. 이것은 우주 공학의 어떤 정규 교과서에도 없는 발명이었다. "사서함"이라고 별명 붙은 그 임시 장치는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발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위대한 발명은 자원이 풍부한 실험실에서 차분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평범한 길이 막혀버린 순간에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릴리엔탈의 데이터가 맞았더라면 라이트 형제의 풍동은 없었을 것이고, 사령선 필터가 착륙선에 맞았더라면 그 임시 어댑터는 발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길이 닫혀야 비범한 길이 열린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비행기에서도, 우주선에서도 같다.
VII. 풍요와 결핍의 자리바꿈
우리는 보통 풍요를 축복으로, 결핍을 저주로 본다. 풍요해지기를 원하고 결핍을 피하려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러나 창의와 실행이라는 영역에서는 이 통념이 자주 뒤집힌다. 풍요는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고, 결핍은 우리를 발명가로 만든다. 풍요는 결정을 미루게 만들고, 결핍은 결정을 강제한다. 풍요는 평범한 해법으로 충분하게 만들고, 결핍은 비범한 해법을 찾게 만든다.
물론 모든 결핍이 창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결핍은 그저 좌절로 끝난다. 어떤 압박은 사람을 부순다. 결핍이 창의로 전환되려면 그것을 동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의 태도가 필요하다. 스필버그가 위대한 것은 결핍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결핍을 만났을 때 그것을 적이 아니라 동지로 본 그 태도에 있다.
그렇다면 한계 앞에 선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다. 이 한계를 적으로 볼 것인가, 동지로 볼 것인가. 이 압박을 짐으로 받을 것인가, 동력으로 받을 것인가.
스필버그는 기계 상어가 고장 났을 때 그것을 영화의 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이 영화의 비밀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몰랐지만, 적어도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길은 택했다.
우리는 우리의 고장 난 상어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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