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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투키디데스의 함정: 두려움이 만드는 충돌의 구조

by 변리사 허성원 2026. 5. 16.

투키디데스의 함정: 두려움이 만드는 충돌의 구조

2026년 5월 베이징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호명하며 트럼프에게 협력을 청했다. 기원전 5세기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진단한 이 함정은 신흥국의 부상과 패권국의 두려움이 부르는 구조적 충돌이다. 그레이엄 앨리슨에 따르면 지난 500년간 16번의 사례 중 12번이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함정은 형성, 작동, 폐쇄의 3단계로 진행되며, 회피의 기회는 2단계까지만 열려 있다. 시진핑의 호명은 협력 촉구이자 G2 위상 선언이며, 미국 일방 봉쇄에 대한 책임 분담 요구이기도 하다. 함정은 기업에도 작동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넷스케이프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사이 구글·애플·페이스북을 놓쳤다. 보잉은 에어버스 견제를 위해 737 MAX를 강행하다 안전 신뢰를 잃었다. 삼성만이 애플과 충돌하면서도 자기를 스마트폰 회사로 재정의해 함정을 빠져나갔다.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도전자를 막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갱신하는 데 있다.

 

2026년 5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시진핑이 트럼프와 마주 앉은 모두발언에서 한 고대 그리스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중미가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국 관계의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지, 이 질문은 역사의 질문이자 세계의 질문이며, 인류의 질문이다." 회담의 첫 인사가 끝나자마자 던진 화두였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가 21세기 양대 패권국의 회담장에 호명되는 일이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시진핑이 이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3년 오바마와의 회담, 2015년 시애틀 연설, 2017년 다보스 포럼 등에서 그는 같은 용어를 거듭 사용해 왔다. 13년에 걸친 일관된 화법이다. 중국이 미국을 향해 던지는 가장 일관된 외교 메시지가 바로 이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 시진핑이 호명한 그 함정의 정체부터 살펴보아야 할 이유다.

유래: 한 문장의 통찰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본질적 원인을 단 한 문장에 압축했다. "아테네의 부상과 그것이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케르키라 분쟁이나 메가라 봉쇄 같은 사건은 도화선이었을 뿐, 권력 이동 그 자체가 구조적 동력이었다는 통찰이다. 이 통찰의 무게는 표면적 사건이 아니라 그 아래에 흐르는 구조를 본 데 있다.

이 고대의 진단을 현대 국제정치학으로 옮긴 사람이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다. 그는 2012년 파이낸셜타임스 사설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고, 이후 15세기 이후의 16개 패권 경쟁 사례를 추적해 그중 12개가 전쟁으로 귀결되었다고 보고했다. 2017년 단행본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으로 이론을 완성했다.

왜 '함정'이라 부르는가

이 개념의 핵심 단어는 '함정(trap)'이다. 단순한 '충돌'이나 '경쟁'이 아니라 굳이 함정이라 부른 이유가 있다.

함정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빠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장치다. 둘째, 빠지는 자가 스스로 빠진다는 점이다. 누가 강제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자의 합리적 판단이 함정으로 향한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정확히 이 두 의미를 담고 있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정한 것은 비합리적 충동이 아니었다. 당시 스파르타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판단이 합리적이었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통해 해상 패권을 키우는 것을 더 두면 그리스 세계의 질서가 아테네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스파르타의 안보가 위협받을 것이었다. 지금 막지 않으면 영영 막지 못한다는 계산은 당시로서는 타당했다. 동맹국 코린토스의 압박도 정당한 이유였다.

문제는 그 모든 합리적 판단의 합이 결국 스파르타의 몰락을 부른 전쟁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스파르타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27년의 소모 끝에 그리스 도시국가 체제 자체가 쇠퇴했고, 결국 마케도니아라는 외부 세력에 그리스 세계 전체가 넘어갔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잃는 결과. 이것이 함정의 본질이다.

각 단계의 판단은 합리적인데, 그 판단들이 누적된 결과는 모두에게 파국이다. 빠지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조. 죄수의 딜레마와 유사한 메커니즘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회피의 여지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더 잔혹하다.

함정의 3단계 구조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한순간에 작동하지 않는다.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첫 단계는 함정의 형성이다. 신흥국이 부상하고 패권국이 이 부상을 인식하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기다. 양국의 국력 격차가 좁혀지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 충돌의 압력은 작지 않다. 회피의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는 단계다. 1890년대 미국 GDP가 영국을 막 추월하기 시작한 시기, 1990년대 중국이 본격적인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오른 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는 함정의 작동이다. 두려움이 견제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 견제가 신흥국의 반발과 추가 부상으로 돌아오며, 다시 패권국의 더 큰 두려움을 부르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시기다. 양측 모두 후퇴할 경우 약점을 노출한다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은 멈출 수 있다. 1895년 베네수엘라 국경 분쟁 시기의 영국과 미국은 이 단계에서 외교적 양보로 멈추었다. 1차 대전 직전의 영국과 독일은 멈추지 못했다.

세 번째 단계는 함정의 폐쇄다. 양쪽 모두 "지금 양보하면 더 큰 손해를 본다"고 판단하는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다. 합리적 후퇴의 길이 사라지고, 충돌이 오히려 유일한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는 도착(倒錯)이 일어난다. 양측 모두 함정에 들어선 것을 알지만, 함정 안에서의 행동만이 가능한 선택지로 좁혀져 있다. 1914년 7월 위기의 마지막 며칠, 사라예보 암살(6월 28일)부터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선전 포고(7월 28일)까지의 한 달이 이 단계의 전형이다. 각국 지도자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하면서도, 동맹 의무와 동원령의 연쇄 반응 안에서 전쟁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3단계 구조에서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점은 1단계와 2단계까지다. 3단계에 들어서면 외교적 회피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함정의 가장 잔혹한 특성은, 그 폐쇄 시점이 외부에서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후적으로 돌아보아야만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구나"가 분명해진다. 1914년 6월의 유럽 지도자들 중 누구도 자기들이 7월 말에 세계대전을 시작할 줄 몰랐다. 함정의 입구가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앨리슨이 굳이 함정이라는 단어를 고른 이유가 여기 있다. 충돌이라고만 하면 책임이 분명한 가해자가 있는 것 같지만, 함정은 가해자가 없다. 구조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 앨리슨의 메시지다.

함정의 두 시나리오

함정이 작동하고 폐쇄된 이후, 그 결과는 두 갈래로 갈린다.

첫 번째는 신흥국의 공격이 성공하는 시나리오다. 패권국의 견제가 늦었거나, 약했거나, 잘못된 방향이었거나, 혹은 신흥국의 부상 속도가 견제 능력을 압도한 경우다. 패권은 신흥국으로 넘어간다.

두 번째는 패권국의 방어가 성공하는 시나리오다. 다만 여기서 '성공'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신흥국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 봉쇄의 비용이 패권의 동력을 갉아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정한 방어 성공은 견제와 자기 갱신을 동시에 해낸 드문 경우에 한한다.

국가 사이의 사례들

신흥국의 공격이 성공한 사례부터 본다. 19세기 말 통일 독일의 부상이 대표적이다. 1871년 통일된 독일은 40년 만에 영국의 산업 생산을 추월했고, 빌헬름 2세의 함대 건설은 영국 해상 패권에 정면 도전이었다. 영국의 견제는 늦었고 분산되었다. 결국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쳐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양되었다. 영국이 직접 미국에 패한 것이 아니라, 독일을 견제하느라 소진된 영국이 자연스럽게 패권을 놓은 형태다. 신흥국 독일은 결국 패전했지만, 그 충돌의 비용을 가장 크게 치른 쪽은 견제에 매달린 패권국 영국이었다.

태평양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부상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동아시아의 새 강자로 등장했다. 미국은 일본의 부상을 견제했으나 결정적 충돌을 외교로 막지 못했고,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사례는 일본의 공격이 군사적으로 실패했음에도, 미국이 일본을 봉쇄하는 과정에서 태평양 질서 자체가 재편되었다는 점에서 복잡한 결과를 남겼다.

방어가 성공한 사례는 훨씬 드물다.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국과 미국이다. 1890년대 미국의 GDP는 이미 영국을 넘어섰지만, 두 나라는 1895년 베네수엘라 국경 분쟁 같은 위기를 외교로 처리했다. 영국이 신중하게 양보하고 미국이 점진적으로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패권은 큰 전쟁 없이 이양되었다. 다만 이것을 영국의 '방어 성공'이라 부르긴 어렵다. 패권은 결국 넘어갔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평화적 이전 성공'이다. 함정의 2단계에서 양국이 함께 멈춰 선 결과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또 다른 변형이다. 핵억지력이라는 새 조건 위에서 직접 충돌은 피했고, 소련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신흥국이 스스로 무너지는 드문 결과를 만들었다. 패권국 미국이 적극적 방어로 이긴 것이라기보다, 신흥국이 자기 무게로 무너진 사례에 가깝다.

시진핑의 호명, 그 다층적 의미

이제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관계는 17번째 함정으로 분석된다. 중국 GDP는 2021년 미국의 76%까지 따라갔다가 최근 67~68% 수준으로 일부 후퇴했다. 트럼프 1기의 무역전쟁, 바이든의 반도체 수출통제, 트럼프 2기의 디커플링과 고율 관세는 모두 전형적인 패권국의 봉쇄 패턴이다. 함정의 2단계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시진핑이 2026년 5월 베이징 회담장에서 던진 발언이 외교적으로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세 겹의 메시지가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겹은 표면 메시지다. 협력 촉구다. "우리가 충돌하지 말고 함께 새 질서를 만들자"는 청유다. BBC를 비롯한 외신은 이 측면을 부각해 해석했다.

두 번째 겹은 위상 선언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두 패권국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용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발언자는 자기를 패권국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통일연구원 조한범 석좌연구위원은 이를 정확히 짚었다. "투키디데스라는 말 자체가 둘 모두 패권국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 시진핑은 협력을 청하는 모양으로 "우리도 패권국이다"라는 선언을 했다. 외교사적으로 보면 이는 중국이 G2 지위를 공식적으로 자임한 발언이다.

세 번째 겹은 책임 분담의 함의다. 함정은 두 당사자가 함께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함정을 회피하는 책임도 두 당사자에게 함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미국의 일방적 봉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시진핑은 함정이라는 단어 자체를 통해, 미국의 견제 정책이 패권국의 정당한 방어가 아니라 함정의 폐쇄를 앞당기는 행위라는 프레임을 깔았다.

평가는 갈린다. 유로뉴스는 2026년 회담 결과를 냉정하게 정리했다. "큰 돌파구 없이, 관계를 안정화하고 강대국 경쟁의 추가 악화를 막는 데 그쳤다." 시진핑이 호명한 함정의 회피는 아직 외교적 수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2단계에서 멈춰 설 것인지, 3단계로 진입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업 사이의 함정

함정은 국가 사이에만 작동하는 법칙이 아니다. 기업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작동한다. 그리고 기업 단위의 함정은 국가 단위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무자비하게 결판이 난다. 국가에는 영토와 국민이 남지만, 기업은 함정에 빠지면 흔적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기업 사례를 다룰 때는 분별이 필요하다. 단순히 신기술에 밀려 무너진 회사가 모두 투키디데스적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다. 외부의 신흥 강자가 명확히 부상하고, 패권 기업이 그것을 인식하고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이 과잉 견제로 이어진 경우만이 진짜 함정이다. 견제할 시간조차 없이 쓰나미처럼 휩쓸린 경우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대 넷스케이프: 견제에 성공했으나 잃은 것이 더 컸던 사례

1994년 4월, 짐 클라크와 마크 안드레센이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스를 설립했다. 같은 해 12월 첫 제품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1.0이 출시되었고, 1995년 초까지 웹 브라우저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했다. 그해 8월 9일 상장 첫날 주가가 발행가의 두 배 이상으로 마감하며 시가총액 29억 달러를 기록했다. 매출도 거의 없는 1년차 회사였다. 이것이 닷컴 버블의 출발 신호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장이 인터넷에 얼마나 큰 권력 이동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빌 게이츠는 그 부상을 정확히 읽었다. 1995년 5월 26일, 그는 사내 임원들에게 "The Internet Tidal Wave"라는 제목의 메모를 보냈다. 메모는 인터넷을 "1981년 IBM PC 출시 이래 가장 중요한 단일 진화"로 규정했다. 그리고 넷스케이프를 명시적으로 지목했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우리가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클라이언트를 위한 호환성을 제공해야 하는 위치로 우리를 몰아넣는 것이다." 1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성이 독일 함대 건설을 분석한 보고서와 정확히 같은 구조의 문서다. 부상하는 신흥 강자에 대한 패권자의 두려움이 명시적으로 기록된 순간이었다. 함정의 1단계가 끝나고 2단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대응은 신속하고 다층적이었다. 첫째, 이미 1995년 8월 출시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5에 무료로 끼워 팔았다. 30~50달러에 팔리던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의 가격 경쟁력을 즉시 무력화했다. 둘째, PC 제조사와의 윈도우 라이선스 계약에 익스플로러 우선 탑재 조항을 넣었다. 컴팩이 1996년 자사 PC에 넷스케이프를 기본 브라우저로 설정하려 하자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라이선스 취소를 위협했다. 셋째, AOL과의 계약을 통해 5,000만 명에 달하는 AOL 가입자를 익스플로러 사용자로 묶었다.

견제는 그야말로 성공했다. 1998년 익스플로러 점유율이 50%를 넘어섰고, 2002년에는 95%를 넘었다. 같은 해 넷스케이프는 AOL에 헐값으로 매각된 후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견제의 비용이 시작되었다. 1998년 5월 18일, 미국 법무부와 20개 주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셔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제소했다. 핵심 쟁점이 바로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에 끼워 판 행위였다. 2000년 6월 7일, 토머스 펜필드 잭슨 판사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운영체제 회사와 응용프로그램 회사로 분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항소심에서 분할 명령은 뒤집혔지만, 2001년 11월 최종 합의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업 관행에 상당한 제약이 부과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1998년 9월 4일, 스탠퍼드 박사과정생 두 명이 구글을 창업했다. 2001년 1월 9일, 애플이 아이튠즈를 발표했고, 같은 해 10월 23일 아이팟을 출시했다. 2004년 2월, 하버드 기숙사에서 페이스북이 시작되었다. 2007년 1월 9일,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넷스케이프 한 회사를 봉쇄하는 데 골몰한 5년 동안, 검색과 모바일과 소셜이라는 세 개의 새 패권이 동시에 태어났다.

1999년 12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종가는 60.38달러였다. 10년이 지난 2009년 12월 종가는 30.48달러였다. 같은 기간 S&P 500이 횡보한 것을 감안해도 마이크로소프트만의 잃어버린 10년이 분명했다. 회사는 분할되지 않았고 시장 점유율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패권의 자리는 모두 놓쳤다. 빌 게이츠가 2008년 회사를 떠나고 사티아 나델라가 2014년 CEO가 되어 클라우드로 회사를 재정의하기까지 거의 15년이 필요했다. 견제 자체는 성공이었지만 그 성공의 대가가 더 컸다.

이 사례는 19세기 후반 영국이 독일을 견제하다가 미국의 부상을 놓친 구조와 동형이다. 신흥국을 봉쇄하는 데 모든 자원을 쓰는 순간, 패권국은 다음 신흥국의 등장을 보지 못한다. 함정의 가장 잔혹한 형태다.

보잉 대 에어버스: 견제 전략이 핵심 자산을 갉아먹은 사례

1970년 12월 18일, 프랑스 아에로스파시알, 독일 도이체 에어로스페이스, 영국 호커시들리, 스페인 카사가 4개국 컨소시엄으로 에어버스 인더스트리를 설립했다. 미국 보잉의 독점에 대한 유럽의 대응이었다. 출발은 미약했다. 첫 모델 A300은 1974년 운항을 시작했지만 1979년까지 누적 주문이 256대에 그쳤다. 같은 기간 보잉 747은 천 대 가까이 팔렸다.

상황은 1988년 A320의 등장으로 바뀌었다. 항공기 최초로 플라이바이와이어(전자식 비행 제어) 시스템을 채택한 이 단일통로기는 보잉 737의 직접 경쟁자로 부상했다. 더 결정적인 순간이 2003년에 왔다. 에어버스의 연간 인도 대수가 305대로 보잉의 281대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이후 두 회사는 매년 1~2위를 다투는 양강 구도로 굳어졌다.

보잉이 이 부상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2000년대 중반 보잉 내부에는 차세대 단일통로기 개발 논의가 있었다. 'Yellowstone Project'로 불린 신모델 구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결정적 시점에 보잉은 다른 길을 택했다.

2010년 12월 1일, 에어버스가 A320neo를 발표했다. 기존 A320 기체에 더 연료 효율적인 신형 엔진을 장착한 파생 모델이었다. 발표 직후 주문이 폭주했다. 6개월 만에 천 대를 넘는 주문이 들어왔고, 그중 상당수가 보잉의 전통적 고객사였다. 결정타는 2011년 7월 20일 아메리칸 항공의 발주였다. 100년 가까이 보잉 단일통로기만 사용해 온 아메리칸 항공이 A320neo 260대와 보잉 737 200대를 동시에 발주했다. 보잉 독점 고객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보잉의 대응은 신모델 개발이 아니라 737 플랫폼의 추가 파생 모델이었다. 2011년 8월 30일, 737 MAX 출시가 공식 발표되었다. Yellowstone Project는 무기한 보류되었다. 결정의 동력은 단순했다. 새 기체 설계에는 100억 달러 이상과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사이 에어버스가 시장을 가져갈 것이었다. 737 MAX는 25억 달러와 6년이면 충분했다. 견제의 합리적 선택이었다.

문제는 1967년 설계의 737 기체와 신형 LEAP-1B 엔진이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엔진이 너무 커서 기존 위치에 달 수 없었기 때문에 날개 앞쪽 위로 옮겨 달았다. 그 결과 비행 중 기체가 위로 들리는 경향이 생겼고, 이를 자동으로 보정하기 위해 MCAS(Maneuvering Characteristics Augmentation System)라는 소프트웨어가 들어갔다. 조종사들에게는 이 시스템의 존재가 제대로 고지되지 않았다. 기존 737 조종사가 추가 시뮬레이터 훈련 없이 MAX를 몰 수 있어야 한다는 마케팅 목표 때문이었다. 사우스웨스트 항공과의 계약에는 시뮬레이터 훈련이 필요해지면 기체당 100만 달러를 보잉이 보상한다는 조항까지 있었다.

2018년 10월 29일, 라이언에어 610편(자카르타발)이 이륙 13분 후 자바해에 추락했다. 189명 전원 사망. 2019년 3월 10일, 에티오피아 항공 302편이 이륙 6분 후 추락했다. 157명 전원 사망. 두 사고 모두 MCAS의 오작동이 직접 원인이었다. 전 세계 737 MAX 기단이 운항 정지되었고, 정지 기간은 20개월에 달했다.

보잉의 손실은 직접 비용만 200억 달러를 넘었다. 2024년 1월 알래스카 항공 1282편의 동체 패널 탈락 사고로 보잉의 품질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고, 2024년 7월 보잉은 법무부와 사기 혐의에 대한 유죄 인정에 합의했다. 100년간 쌓아온 안전 신뢰가 흔들렸다.

가장 아이러니한 결과가 시장에서 나타났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6년간 에어버스의 연간 인도 대수는 매년 보잉을 압도했다. 견제로 막으려 했던 바로 그 시장 역전이, 견제의 부작용 때문에 더 큰 규모로 일어났다. 신모델 개발이라는 어려운 길을 피하려고 했던 보잉은, 더 어려운 신뢰 회복의 길을 강제로 걷게 되었다.

견제 자체는 단기 시장 점유율 방어라는 목표를 일정 부분 달성했다. 그러나 그 견제 방식이 자기 패권의 토대인 안전 신뢰를 갉아먹는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함정의 또 다른 변형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다음 패권의 자리를 놓친 것이 함정이었다면, 보잉은 자기 패권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린 더 깊은 함정에 빠진 셈이다.

삼성 대 애플: 함정에서 빠져나간 드문 사례

방어가 진짜로 성공한 기업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그나마 삼성과 애플의 충돌이 한 단서를 보여준다.

2007년 1월 9일 아이폰 발표 당시 휴대폰 시장 1위는 노키아였다. 삼성은 노키아에 이어 2위였지만 어디까지나 피처폰 기준이었다. 스마트폰이라는 새 종목에서 삼성은 후발주자였고, 애플이 신흥 패권자였다. 2010년 6월, 삼성은 갤럭시 S 시리즈의 첫 모델을 출시했다. 그러나 디자인과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상당 부분이 아이폰과 유사하다는 비판이 처음부터 따라붙었다.

2011년 4월 15일, 애플이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삼성을 제소했다. 디자인 특허와 트레이드 드레스 침해가 핵심 쟁점이었다. 둥근 모서리 직사각형 디자인, 검은 베젤, 그리드 형태의 앱 아이콘 배열 등이 다투어졌다. 글로벌 10개국 50건 이상의 소송이 동시 다발로 진행되었다. 2012년 8월 24일, 1차 평결에서 배심원단은 삼성에 10억 5천만 달러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추후 일부 감액되었지만 삼성의 견제 시도는 법적으로 실패했다.

여기서 결정적 분기점이 나타난다. 삼성은 소송에 매몰되지 않았다. 같은 기간 갤럭시 노트 시리즈(2011년 10월)와 갤럭시 S3(2012년 5월)가 연달아 출시되었고, 시장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갤럭시 노트는 5.3인치 대화면이라는 애플이 거부하던 영역을 개척했다. 갤럭시 S3는 2012년 한 해에만 4천만 대 이상 팔리며 단일 모델 기준 아이폰을 일시적으로 추월했다.

2014년 2분기, 삼성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25.2%로 정점에 달했다. 같은 분기 애플은 11.9%였다. 노키아는 이미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되어 사라진 뒤였다. 삼성이 살아남은 비결은 애플을 무너뜨리려 한 데 있지 않았다. 애플과 정면으로 같은 영역에서 경쟁하지 않고, 대화면, 안드로이드 생태계, 갤럭시 S 시리즈와 노트 시리즈의 이원 라인업, 글로벌 통신사 협업이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만든 데 있었다.

여기에 더해 삼성은 부품 공급자라는 두 번째 정체성을 유지했다. 아이폰의 핵심 부품인 메모리, 디스플레이, 일부 시기에는 AP까지 삼성이 공급했다. 신흥 패권자와 직접 충돌하는 동시에 그 패권자의 공급망 일부가 되는 이중 전략이었다. 19세기 영국이 미국에 패권을 평화적으로 넘기면서 동시에 영연방과 금융 패권을 유지한 것과 유사한 다층 구조다.

삼성이 함정에서 빠져나간 결정적 이유는 견제와 학습을 분리하지 않은 데 있다. 보잉처럼 견제 비용으로 핵심 자산을 갉아먹지도 않았고, 마이크로소프트처럼 견제에 모든 자원을 쏟아 다음 패권을 놓치지도 않았다. 자기를 스마트폰 회사로 재정의하면서, 그 새 정체성을 자기 방식으로 채워 넣었다. 함정의 회피는 도전자를 막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갱신하는 데 있다는 점을 보여준 드문 사례다.

구조적 통찰: 함정이 폐쇄되는 순간

기업 사례들은 국가 사례와 다른 시간 척도에서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19세기 영국이 독일 견제에 매달리다 미국에 패권을 내준 50년의 드라마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넷스케이프 견제에 매달리다 구글에 검색 패권을 내준 10년의 드라마와 동형이다. 보잉의 견제 전략이 안전 자산을 잃은 과정은, 일본이 미국 견제에 자원을 소모하다 전쟁의 도화선이 된 과정과 닮아 있다.

함정이 폐쇄되는 순간, 즉 회피 불가능한 충돌 구조로 굳어지는 순간은 정해져 있다. 패권자가 도전자의 부상을 단순한 부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그 순간 견제는 도전자를 막는 것에서 자기 패권의 토대를 지키는 것으로 목적이 옮겨가고, 정작 자기 갱신을 위한 자원과 시야가 사라진다. 영국이 해군력을 지키려다 산업 혁신을 놓쳤듯,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생태계를 지키려다 모바일과 검색을 놓쳤듯, 보잉이 737 플랫폼을 지키려다 안전 신뢰를 잃었듯.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전자와의 직접 충돌을 외교나 협력으로 우회하는 길이다. 영국이 미국에 패권을 평화적으로 넘긴 길, 그리고 시진핑이 베이징에서 호명한 길이다. 또 하나는 자기를 도전자의 토대 위에 다시 세우는 길이다. 삼성이 스마트폰 회사로 자기를 재정의한 길이다.

두 길 모두 함정의 2단계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3단계, 즉 함정이 폐쇄된 이후에는 선택지가 사라진다. 따라서 함정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조건은 자기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1단계라고 착각하면 안일해지고, 3단계라고 착각하면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정확히 2단계에 있다는 인식만이 결단의 동력이 된다.

앨리슨이 정말 강조한 것은 함정의 필연성이 아니다. 함정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회피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다만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식을 결단으로 옮기는 데까지 가야 비로소 함정 밖으로 나간다. 영국이 19세기 후반 그 결단을 내리는 데 실패했고, 마이크로소프트가 2000년대 초반 그 결단을 내리는 데 실패했다. 시진핑이 베이징 회담장에서 던진 질문, "함정을 함께 넘을 수 있겠는가"는 결국 결단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모든 시대의 모든 패권자가 자기 자신에게 매일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