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이 아니라 적당생존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누구나 아는 이 말의 가르침에 따라, 개인은 어디서나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기업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 최적화를 하여야 하며, 변화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 가장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고 믿고 그렇게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다윈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최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타인의 표현을 받아들여 자신의 저서에 언급하긴 했으나, 그가 이해한 진화는 '더 적응한 자의 생존(survival of the fitter)'에 가까웠다. 어제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되는 것이 자연의 일상이라는 이유에서다. 빙하기에 가장 잘 적응했던 매머드가 기후가 풀리고 인간이 등장하자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이 그 예다.
이 오해를 본격적으로 풀어낸 책이, 현장생물학자 대니얼 브룩스와 살바토레 에이고스타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살아남는다(원제: A Darwinian Survival Guide)'이다. 저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적자생존'이 아니라 '적당생존(survival of the fit enough)'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적으로 적응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적응하고 다른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 명제는 단순하면서도 도발적이다. 자연이 작동하는 이유는 유기체와 환경이 완벽하게 들어맞아서가 아니라,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다윈의 필수 부적합(Darwin's necessary misfit)'이라 부른다. 환경에 어딘가 어정쩡하게 덜 들어맞는 존재,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절히 '부적합한 자'야말로 진화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유기체가 사는 적합도 공간(fitness space)은 본래 헐겁다(sloppy). 어느 종(種)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과 실제로 활용하는 공간 사이에는 항상 여유 간격이 있고, 그 간격 내에 변이가 축적된다. 이 축적된 변이가 곧 '진화적 잠재력'이다. 환경이 격변할 때 종을 살리는 것은 가장 효율적이었던 변이가 아니다. 평소에는 간당간당하게 겨우 적응했던 주변부의 어정쩡한 변이들이다.
육지로 올라온 물고기 사례가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물속 환경에 가장 완벽하게 적합한 물고기였다면, 그 물고기는 결코 육지로 올라올 수 없었다. 부레를 폐처럼 어정쩡하게 쓰고 지느러미로 물빠진 바닥을 어정쩡하게 짚고 몸을 세웠던, 물속에서는 어딘가 어설펐던 물고기들이 결국 육상으로 진출하여 척추동물의 길을 열었다. 그 어정쩡함이 미래를 연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한 줄로 정리한다. '진화의 성공 기준은 효율성(efficiency)이 아니라 충분함(sufficiency)이다'라고.
최적화 즉 가장 효율적인 변이를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다양성이 줄어든다. 환경 조건이 달라졌을 때 대처할 수단이 사라진다. 그저 당장 살기에 충분한 변이를 선택하면 다양성을 지킬 수 있어, 앞으로 닥쳐올 환경 문제에 쓸 카드가 늘어난다. 단기 효율의 극단화가 장기 생존을 갉아먹는 것이다. 지금 가장 잘 맞는 자에게 모든 자원을 몰아주면 그 종은 다음 빙하기에 가장 먼저 사라진다.
다양성을 잃지 않은 진화를 '적당생존'이라 한다. 이처럼 적당생존은 생물권에서 40억 년간 검증된 진화의 원리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이를 정반대로 읽고 '최적생존' 혹은 '적자생존'을 추구하게 된 것일까. 앞의 저자들은 인류가 진화의 흐름을 거스르기 시작한 시점을 약 9,000년 전으로 짚는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며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환경이 악화되어 떠나야 할 시점에, 떠나지 않는 혹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혼자 살아갈 능력을 잃은 사람들은 자원 부족을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조직적 전쟁이 인간 삶의 양식이 된 것이 이 시기를 인류의 대비극(Great Tragedy)이라 부른다.
그 후 인류는 9,000여 년 동안 환경 변화에 따라 자신을 맞추는 대신, 환경을 자기에게 맞추는 길을 고집해왔다. 산업혁명도, 1950년대의 '기술 대가속'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이 식량을 빼앗기 위한 무기 개발로 흘러갔다는 지적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 책이 묻는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개념 자체가 지극히 잘못된 것 아닌가.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에는 한 가지 암묵적 가정이 깔려 있다. 생물권의 '정상' 상태가 '정적' 상태라는 가정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조금만 덜 하면, 조금만 더 효율적으로 하면, 환경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평소대로 살면서도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관성적 사고방식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생물권은 결코 정적이지 않다. 인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미 스스로 변화하면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중이다. 인류가 해결사가 될지 낙오자가 될지 결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위기관리는 늘 변화에 한 박자 늦다. 새로운 문제가 우리의 노력을 계속 앞질러 발생한다.
그래서 '지속 가능성' 대신 '생존 가능성(survivability)'이란 말을 써야 한다고 한다. 변화에 저항하지 말고 스스로를 바꾸어 변화에 대처하라는 것. 그것도 최적이 아니라 좀 어정쩡하게 적응하면서. 이것이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에 너무 과도하게 잘 적응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장 효율적인 조직, 가장 빠른 의사결정, 가장 군더더기 없는 인력 구조. 모든 경영서가 권하는 처방이고, 그렇게 깎아낸 조직은 평시에 빛난다. 그러나 환경이 흔들리는 순간, 깎아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했던 변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모든 군더더기를 잘라낸 회사는 가장 효율적인 회사이면서 동시에 다음 빙하기에 가장 먼저 사라질 회사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다. 1등을 향해 자신을 깎아온 사람은 1등의 자리가 사라지는 순간 갈 곳이 없다. 한 분야에서만 최적화된 전문가는 그 분야가 저물면 함께 저문다. 가장 잘 맞춰 살아온 사람이 가장 먼저 부서진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적당히 살아야 한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명료한 가르침은 이것 하나이다.
이 말은 게으르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 안에 어정쩡한 변이를, 지금 당장은 쓸모 없어 보이는 능력을, 한 분야에 다 쏟지 못한 관심사를 의도적으로 남겨두라는 뜻이다. 평소에는 비효율로 보이던 것들이 변화의 순간에 미래를 여는 카드가 된다. 진화 40억 년이 검증한 원리가 이것이다.
다윈의 관점에서 적자(適者)란 1등이 아니다. 그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 만한 모든 종'이었다. 우리는 이 단순한 가르침을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안에 어떤 어정쩡함이 남아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어정쩡함, 부적합, 불완전함을 효율의 이름으로 자꾸 깎아내고 있지 않은가..
진화는 가장 잘난 자를 고르지 않는다. 다음 환경을 살아갈 '어정쩡한 부적합의 카드'를 가장 많이 쥔 자를 고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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