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215 미용실 언니

by 변리사 허성원 2026. 3. 17.

미용실 언니

 

지난해 한 모임의 행사에 강의를 요청받아 갔었다. 강의에 앞서 그 모임의 회장님이 직접 나와 청중들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오늘 강의를 해주실 강사님을 저는 '미용실 언니'라 부릅니다. '미용실 언니'일까요?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선발된 미스코리아에게 지금 누가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미용실 언니가 생각납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는 오랫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분쟁 해결, 인증 등 수많은 난관을 만났습니다. 그 난관들을 하나씩 무사히 넘길 때마다 이 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겁니다. 그렇게 날아갈 듯 기쁜 순간에 왜 항상 이 분이 생각났을까요?"

그 위트 넘치는 설명을 듣고 보니 미용실 언니라는 말은 참으로 황송한 별호다. 그 회장님과 고객과 대리인으로 만나 인연을 맺은 게 근 35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기술 개발, 특허 출원이나 분쟁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일을 가지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공감하고 격려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일이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그 감동을 가장 먼저 나와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난관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에서 쌓인 동지애과 의리도 적잖이 두터웠던 모양이다.

살아오면서 사람들이 나를 평가한 여러 가지 호칭을 들어본 적이 있다. 잡다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잡학다식이라 불리기도 하고, 젊은 시절에 특허 소송에서 워낙 치열하게 덤벼들었기에 '백전불패 싸움닭'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객의 성공을 돕는 일을 존재이유로 하는 우리 같은 전문직에게는 '미용실 언니'라는 호칭만큼 영광스런 평가는 없을 것 같다

이와 달리 가끔 가슴 뜨끔한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우리 사무실에서 실무를 하다 오래 전에 개업한 변리사가 놀러와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가 사무실 담당자들을 사정없이 혼내고 있을 때, 문득 허 변리사님이 생각났습니다. 허 변리사님에게 혼날 때는 나는 훗날 절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는데, 어느새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라곤 합니다." 술자리에서 편하게 웃으며 한 말이긴 하지만, 듣는 내 가슴은 서늘했다. 사실 신참 변리사들을 워낙 모질게 교육을 했었기에, 사무소가 변리사 사관학교혹은 유격훈련장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내가 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불리는가에 대해 가급적이면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써왔다. 내 개인이나 내 삶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오직 나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라 믿으며 그렇게 좀 낯 두껍게 살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미용실 언니' 혹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등과 같은 나에 대한 평판을 듣고 보면, 내 삶의 질이나 행복이 혹은 내 삶의 의미가 타인의 시선이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나보다 남이 보는 내가 진정한 ''가 아닐까? 내가 꾸준히 노력하는 이유는 남이 보는 나를 더 좋은 모습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이 없어도 내 삶의 모습은 지금과 같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많이들 그러겠지만 남들이 내게 내린 판단이나 평가에 쉬이 휘둘린 적이 적지 않다. 남의 작은 비판에 분노하여 유리그릇처럼 깨져버리기도 하고, 따뜻한 격려 한 마디에 종일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촐싹대며 좋아하고, 입에 발린 뻔한 칭찬에 교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내 정체성을 결정할 전권이 오직 나에게만 있는 것이니 타인의 평가는 의미가 없다고 아무리 우겨본다 하더라도, 그건 나의 억지나 오만이고 게으름일 따름이다.

진정 탈속한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타인의 평가에 무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人間)이란 말 자체가 '사람 사이'라는 뜻이니,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사람됨이 결정되며,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면서 살 수밖에 없다. 나도 지금까지 많은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름 이만큼 성장해왔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든 나쁘든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이 없다. ‘미용실 언니처럼 긍정적인 영향이라면 너무도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 반면에 나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하거나 연상하는 사람도 필시 적지 않을 터, 그건 부끄럽고도 미안한 일이다

맛있는 음식을 봤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증거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 기쁜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은 그 일에 가장 애를 많이 썼거나 좋은 영감을 준 사람일 것이다. 혹은 가장 힘든 시기에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함께 나눈 사람일 것이다. 여하튼 어쩌다 잠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보니 그건 전문가의 삶에서 더없이 행복한 경험이더라. 그런 행복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혹 누군가의 '미용실 언니'가 되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

(* 이 글은 뉴스1의 낙동포럼(240502)에 게재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그곳에서 지워져있다. 기록 관리를 위해 일부 내용을 수정하여 경남매일에 싣는다.)

김동환 대표의 (주)가이아 마당에 배열되어 있는 장독들.. 건물 내에는 이보다 더 많이 있다.

** 덧붙임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Through others, we become ourselves."

소련의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말이다.

타인이 없으면 나 자신도 없고, 타인이 있기에 나 자신이 지금의 모습으로 빚어졌다는 말이다.
흔히 '나'라고 여기는 것들, 내 가치관, 내 사고방식, 내 사람됨은 사실 오롯이 혼자 창조하고 다듬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을 거치며 서로를 비추고 다듬어온 결과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반대로 내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의 거울이 되었던 것도, 모두 그 관계의 힘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결국 '나'는 내 안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내가 맺어온 모든 관계의 총합이다.

* 레프 세묘노비치 비고츠키(Lev S. Vygotsky, 1896~1934)는 러시아 출신의 발달심리학자로, 인간의 사고와 언어, 자아의식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사회문화이론을 창시하였다. 불과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나 교육학·심리학·언어학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이 인용문의 출처는 그의 사후에 편집·출판된 저작 The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Higher Mental Functions(1987, Plenum Press)이다.

**
https://athenae.tistory.com/448388

 

'나'라고 해도 좋고 '나'가 아니라 해도 좋다 _ 추사 김정희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_ 추사 김정희 '나'라고 해도 좋고 '나'가 아니라 해도 좋다.나라고 해도 나고 나가 아니라고 해도 나다.나인가 아닌가를 두고 나라고 우길 일도

athenae.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