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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211 신은 왜 악을 없애지 않는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6. 1. 11.

신은 왜 악을 없애지 않는가? 

 

"전지전능한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는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을 어린 시절에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에게 짓궂게 들이밀곤 한 적이 있다.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그런 볼촉맞은 질문에 대해 독실한 신자였던 친구들은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하며 난감해 하였다. 친구들을 놀리려는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세상에는 고통과 불평등, 그리고 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신은 왜 그들을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심지어 그 악조차 신이 창조한 것일까?

이 질문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기원한 이른바 '에피쿠로스의 역설(Epicurean Paradox)'이다. 이 역설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토록 많은 악과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서 출발한다. 초기 기독교 호교론자인 락탄티우스가 정리한 이 딜레마는 다음과 같은 논증 구조를 갖는다.

-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선하지 않다.
-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악은 왜 존재하는가?

이 논증에 따르면, '전능하고 선한 신''악의 존재'는 양립할 수 없다. 진정 전능한 신이라면 인간이 항상 악을 회피하고 오로지 선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었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신의 전능함''악의 존재'가 모순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반박 논리들을 제시하였다.

첫째 논리는 '신의 무간섭적 초월성'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신이 악을 제거하지 않는 것은 무능하거나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사의 사소한 불행에 개입하지 않을 만큼 초월적이고 완벽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신의 개입 자체가 신의 완벽한 평정(Ataraxia)을 깨뜨리는 행위이므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악의 존재는 신의 부재가 아닌, 신의 무관심(초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둘째 논리는 '지혜와 덕의 형성 조건으로서의 악'의 개념이다. 락탄티우스는 "악을 먼저 알지 못하면 선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지혜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인데, 악이 없다면 선을 인식할 수 없고 따라서 지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인내, 용기, 절제와 같은 인간의 덕목은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악이 제거된 온실 같은 세상에서는 인간의 지혜와 덕이 생겨날 여지가 없다. 결국 악이 존재하기에 지혜와 덕이 생겨나는 것이다.

셋째,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의 논리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보았다. 어둠이 빛의 부재이고 침묵이 소리의 부재이듯, 악은 '선의 결핍(Privation of Good)'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신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피조물이 본래 가져야 할 선함이 훼손되었을 때, 그 상태가 바로 악이 된다. 이는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악도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방어 논리이기도 하다.

넷째는 '자유의지 변증(Free Will Defense)'이다.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가 제시한 이 논리는 '사랑''자유'의 관계에 주목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최고의 목적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 프로그램된 로봇의 고백을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듯, 선택의 여지없이 선만을 행하도록 강제된 존재는 도덕적 가치를 지닐 수 없다. 결국 가장 큰 선(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야 하며, 자유의지는 부득이 본질적으로 악을 선택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플랜팅가의 변증은 "신과 악의 공존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모든 선택이 가능한 자유로운 존재에게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하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둥근 사각형'을 만드는 것과 같은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 악의 존재는 신의 무능력이나 악의 탓이 아니라, 인간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할 논리적 비용인 셈이다.

전능한 신과 악의 공존 문제는 위의 논리들로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마음 한구석은 불편하다. 논리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듯하면서 이해할 수도 없는 악이 우리 주변에 엄연히 널려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로우(William Rowe)의 사고 실험처럼,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벼락을 맞아 며칠간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 새끼 사슴을 떠올려보자. 그 사슴의 고통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며, 선의 결핍, 혹은 지혜와 덕의 조건 등 무엇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수억 년의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겪어야 했던 잔혹한 생존 경쟁과 그에 따른 고통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기판의 말 하나가 전체 대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낱 초보자가 감히 모두 알아볼 수 없듯,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 무한한 신의 '큰 그림'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기에 무의미한 고통일지라도 신의 관점에서는 필수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겸손한 불가지론' 외에는 뾰족한 변명 거리가 없어 보인다.

에피쿠로스의 역설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신의 침묵은 단순한 방관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여백일 수 있다. 신이 왜 악을 허용하는지 묻는 그 순간에도, 세상은 우리가 버티고 극복해야할 악과 고통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하늘을 향해 던졌지만, 부득이 그 대답은 지상에서 우리가 완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오래된 역설은 그저 머리로 풀어보는 논리의 유희가 아니다. 매일 어디에서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모든 악에 대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할 지를 결정하여, 신이 침묵으로 비워둔 그 여백을 우리 스스로 채우라고 촉구하는 엄중한 메시지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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