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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르쌍티망을 극복하라

by 변리사 허성원 2026. 5. 10.

르쌍티망을 극복하라

르쌍티망의 극복은 두 전선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자기 안의 발효를 멈추는 작업은 인지에서 시작해 적극적 망각의 훈련, 비교에서 자기 긍정으로의 가치 정초, 신체와 작업을 통한 능동의 회복, 좋은 적의 발견, 사랑의 질서와 용서의 회복을 거친다. 타자의 르쌍티망을 다루는 작업은 화신의 다섯 신호를 식별하고, 적이 되지 않는 거리를 설계하며, 도덕화 함정을 피하는 단정한 응대, 정보의 비대칭, 비례에 맞는 정면 대응, 그리고 그를 닮지 않는 자기 점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처방의 앞에 놓여야 할 것은 예방이다. 회피 가능한 관계라면 처음부터 들이지 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모두를 같은 깊이로 받아들이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의 무너짐이며, 정과 의리의 명분은 종종 빠져나오지 못하는 무능의 합리화다. 손자의 부전이굴인지병보다 한 단계 높은 자리는 싸움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이다. 들이지 않은 것이 자기를 가장 깊이 지킨다.

<니체의 르쌍티망>

(* 르쌍티망은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삼키지 못한 감정이 내부에서 발효되어 가치 체계 자체를 뒤집는 심리의 운동이다. 니체는 이를 노예도덕의 뿌리로 지목했다. 강자 앞에서 무력한 약자가 강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편에 자신을 선으로 재정의하는 상상적 복수가 수천 년의 도덕 질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셸러는 이 감정이 형식적 평등이 선포된 근대 시민사회, 특히 상승이 좌절된 중간층에서 가장 농밀하게 발효된다고 진단했다. 들뢰즈는 르쌍티망을 반응이 작용의 자리를 차지한 힘의 병리로, 과거에 점령당한 현재의 시간성으로 해석했다. 이 구조는 초기 기독교의 가치 전도, 프랑스 혁명의 자기 숙청, 나치즘의 부상, 문화대혁명에서 역사적으로 반복되었고, 오늘의 포퓰리즘과 소셜미디어의 도덕적 군중 심리에서 다시 증폭된다. 불교의 진에, 한국의 한, 순자의 쟁이 각기 다른 인접 개념을 이룬다. 극복의 길은 태도의 운명애, 감정의 사랑의 질서, 시간의 용서, 행위의 능동적 되기라는 네 축에서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르쌍티망의 두 전선, 자기 안의 발효 타자의 발효

르쌍티망은 두 방향에서 한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안에서 자라나는 자기의 르쌍티망과, 밖에서 다가오는 타자의 르쌍티망이 그것이다. 첫 번째 전선에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자기와 싸워야 하고, 두 번째 전선에서는 자기를 지키되 상대를 닮지 않는 방식으로 거리를 설계해야 한다. 이 보고서는 니체와 셸러와 들뢰즈와 아렌트의 통찰을 더 구체적인 실천의 층위로 끌어내리고, 손자와 한비자와 장자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를 동원하여 르쌍티망의 화신과 마주한 자가 취해야 할 자세를 정리한다.

1. 첫 번째 단계, 자기 안의 르쌍티망을 알아보는 능력

극복의 모든 작업은 인지에서 시작한다. 르쌍티망은 한 번도 자기를 르쌍티망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의 가장 무서운 특성이다. 그것은 언제나 정의감, 도덕적 분노, 정당한 비판, 진실에 대한 충성이라는 외피를 쓰고 자기를 등장시킨다.

따라서 첫 번째 작업은 자기 감정의 미세한 신호를 읽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누군가의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구석이 미세하게 가라앉는 그 감각, 그러나 즉시 그 사람의 결점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을 평형으로 되돌리는 그 다음 동작. 이 두 동작 사이의 간격이 르쌍티망이 자라기 시작하는 정확한 자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매일 아침 자기 점검의 습관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그는 오늘 자신이 마주칠 인간들이 어떤 부류이며 자신이 어떤 충동에 휩쓸릴 수 있는지를 미리 점검했다. 르쌍티망의 인지 또한 이런 일상적 의례 안에서 가능해진다. 저녁에 그날의 감정 가운데 어떤 순간이 자기의 균형을 흔들었는지를 짧게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르쌍티망이 자라기 전에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의 정념(正念) 수행, 즉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거기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작업이 같은 기능을 한다. 알아차림 자체가 치료는 아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감정만이 인간을 점령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이 여기 작동한다.

2. 시간의 회복, 적극적 망각의 훈련

니체가 르쌍티망의 인간에게서 결정적으로 결여된 능력으로 지목한 것은 망각이다. 건강한 인간은 어떤 사건을 겪고 그것을 소화한 뒤 잊을 줄 안다. 르쌍티망의 인간은 잊지 못한다.

여기서 망각은 사건의 부정이나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을 충분히 마주하고 충분히 다룬 뒤에 그것을 자기의 현재로부터 놓아주는 능력이다. 들뢰즈는 이를 적극적 망각(oubli actif)이라 불렀다. 수동적 망각이 단순한 기억의 흐려짐이라면, 적극적 망각은 의식의 의도된 작업이다.

실천의 차원에서 이것은 몇 가지 형태로 가능하다. 글쓰기의 의례가 그 하나다. 자기를 분노케 하거나 모욕한 사건을 한 번 정면으로 기록하는 것. 그 기록의 과정에서 사건을 자기의 언어로 정리하고, 정리된 그 기록을 다시 읽지 않는 것. 어떤 작가들은 이런 글을 봉투에 넣어 봉인하거나 일정 기간 뒤에 태우는 의례를 가진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시간의 매듭을 짓는 정신적 기술이다.

또 하나는 신체적 경계의 변경이다. 같은 장소에 머물면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같은 감정의 회로가 반복적으로 활성화된다. 르쌍티망의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서 멀리 떠나는 여행, 새로운 도시에서의 한 주,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의 노동은 의식의 차원에서 도달하지 않는 깊이까지 시간의 매듭을 끊어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코르크로 방을 두른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작동시킨 작업이다.

장자가 말한 좌망(坐忘)의 사상도 이 자리에서 만난다. 자기를 잊고 만물을 잊는다는 것은 외부 사건에 묶인 자기 동일성을 풀어 시간의 흐름 안에 다시 놓는 작업이다.

3. 가치의 자기 정초, 비교에서 긍정으로

르쌍티망의 핵심 메커니즘은 자기 가치를 타자와의 비교에서 끌어오는 데 있다. 약자의 도덕은 자신이 강자가 아님을 먼저 확인하고, 강자가 아닌 자신을 선이라 규정하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 성립한다. 따라서 극복의 결정적 작업은 자기 가치의 좌표를 비교의 평면에서 자기 긍정의 평면으로 옮기는 것이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라 부른 자세가 이것이다. 지금 이 삶이, 이 한계와 이 결함과 이 상처를 모두 포함한 채로,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자에게 타자와의 비교는 더 이상 자기 정의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자기 역량의 충만한 발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상적 결단이 아니라 일상의 조직 방식의 문제다. 매일의 시간 가운데 얼마만큼이 자기의 능동적 작업에, 자기가 진심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에 쓰이고 있는가. 그 비율이 충분하지 않을수록 비교의 충동은 강해진다. 자기 안에서 의미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인간은 의미를 외부에서 얻으려 하고, 외부에서 의미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비교다. 거꾸로 자기 안에 의미의 광맥이 충분히 가동되고 있을 때 비교의 충동은 자연스럽게 사그라진다.

공자가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한 것,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고 한 것의 한 의미가 이것이다. 그릇은 비교의 대상이 된다. 큰 그릇이냐 작은 그릇이냐, 귀한 그릇이냐 천한 그릇이냐. 그릇이 아닌 자는 자기를 그릇의 척도 위에 두지 않는다.

4. 신체와 행위, 능동적 힘의 일상적 회복

들뢰즈가 르쌍티망을 반응적 힘이 능동적 힘의 자리를 차지한 상태로 정의한 것은 매우 구체적인 함의를 가진다. 인간이 머릿속에서만 살고 있을 때,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만 시간을 보낼 때, 르쌍티망은 가장 잘 자란다. 따라서 능동의 회복은 우선 신체와 행위의 차원에서 일어나야 한다.

규칙적인 신체 활동, 특히 자기의 몸을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활동이 결정적 의미를 가진다. 달리기, 등산, 무술, 정원 가꾸기, 목공. 이런 활동의 공통점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외화라는 점이다. 몸이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 정신도 능동의 모드를 회복한다.

또 하나는 작업의 차원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구별한 통찰이 여기서 빛난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이고, 작업은 자기의 능력으로 세계에 무엇인가를 남기는 일이며, 행위는 타자와 더불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인간에게 결여되는 것은 작업과 행위의 시간이다. 자기의 흔적을 세계에 남기는 작업,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행위가 일상에 충분히 들어와 있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우화가 이 차원을 정확히 보여준다. 포정의 칼이 소의 결을 따라 막힘없이 움직일 때, 그는 비교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자기 작업의 충만함이 그 자체로 그를 르쌍티망 너머의 자리에 두기 때문이다.

5. 좋은 적의 발견, 르쌍티망과 다른 적개심의 형식

니체는 흥미롭게도 적(敵)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구별했다. 르쌍티망의 인간은 적을 만들지만 그 적을 진정으로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는 적을 단죄하고 비방하지만, 그 적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반면 귀족적 인간은 좋은 적을 갖는 것을 일종의 영광으로 여긴다.

좋은 적이란 자기를 자라게 하는 적이다. 자기보다 강하거나 자기와 다른 미덕을 가진 자, 자기에게 결여된 것을 가지고 있어 자기로 하여금 더 높이 도달하게 자극하는 자. 이런 적과 마주할 때 인간은 비방의 충동이 아니라 학습의 욕망을 느낀다.

검도와 유도의 도장에는 오래된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가장 많이 패배시키는 자를 가장 깊이 존경하라는 것. 그가 자신을 가장 빠르게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자세는 르쌍티망과 정반대 방향에 있다. 자신을 패배시킨 자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르쌍티망이라면, 자신을 패배시킨 자를 자기의 스승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이 능동적 자세다.

일터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자기보다 뛰어난 동료를 발견했을 때 첫 반응이 그의 결점을 찾는 것이라면 르쌍티망의 회로가 가동된 것이고, 첫 반응이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라면 능동의 회로가 가동된 것이다.

6. 사랑의 질서, 그리고 용서의 정치

셸러가 르쌍티망의 극복 처방으로 제시한 사랑의 질서(ordo amoris)는 매우 구체적인 함의를 가진다. 모든 대상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의 크기와 순서가 있고, 이 질서가 흐트러질 때 인간은 병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의 실천적 번역은 자기 시간과 정성의 분배를 점검하는 일이다. 르쌍티망에 사로잡혔을 때 인간은 자기 시간의 상당량을 자기를 모욕한 자, 자기와 비교되는 자,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 대한 생각으로 채운다. 그 시간에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자기가 정성을 들여야 할 작업, 자기가 돌보아야 할 자기 자신은 방치된다.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다.

질서의 회복은 의식적 결정에서 시작한다. 오늘 하루 내가 가장 깊이 정성을 들여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누구의 안부가 내게 가장 중요한가. 어떤 작업이 내 삶의 핵심에 자리하는가. 이 질문을 정기적으로 던지고, 답에 따라 시간을 다시 분배하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르쌍티망의 시간 점령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용서를 인간 행위의 핵심 능력으로 제시한 것 또한 여기에 닿는다. 용서는 종교적 미덕이기 이전에 정치적 능력이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미래를 결정짓는 끈을 끊어내는 행위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잊는 것도, 그 사건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사건이 자기의 미래를 더 이상 결정짓지 못하게 하는 결단이다. 르쌍티망의 가장 깊은 뿌리가 과거에 점령된 현재라면, 용서는 그 점령을 해제하는 정치적 행위다.

이로써 자기 안의 르쌍티망 극복을 위한 여섯 갈래의 길이 정리되었다. 인지, 시간의 회복, 가치의 자기 정초, 신체와 행위, 좋은 적, 사랑의 질서와 용서. 이 여섯은 서로를 보강하는 동심원이다.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여섯이 함께 움직일 때 르쌍티망의 회로는 약해진다.

7. 르쌍티망의 화신을 식별하는 법

여기서부터는 다른 전선이 시작된다. 자기 밖에서 다가오는 르쌍티망의 인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첫 번째 작업은 그를 알아보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화신은 몇 가지 일관된 신호를 보낸다. 첫째, 그는 대화의 상당 부분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에 대한 평가로 채운다.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보다, 누가 잘못되었고 누가 부도덕하며 누가 부당하게 성공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언어를 점령한다.

둘째, 그의 비판은 일관되게 도덕화의 외피를 쓴다. 그는 누군가의 능력이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부정직하고 비윤리적이며 사악하다고 말한다. 능력의 차이를 도덕의 차이로 번역하는 것이 르쌍티망의 가장 일관된 작동이다.

셋째, 그의 분노는 좀처럼 직접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비판하지만, 자기가 비판하는 자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무대는 언제나 그 사람이 없는 곳, 그 사람의 등 뒤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가 옛 동창들을 향해 던질 말을 밤새 다듬으면서도 정작 그들 앞에서는 더듬는 장면이 르쌍티망의 행동학적 표본이다.

넷째, 그의 시간 의식이 과거에 묶여 있다. 어떤 대화든 결국 오래된 사건, 오래된 모욕, 오래된 부당함으로 회귀한다. 5년 전, 10년 전, 20년 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그의 언어 안에 살아 있다. 들뢰즈가 말한 망각의 무능이 한 인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이 이것이다.

다섯째, 그는 타자의 성공에 대해 첫 반응으로 의심을 보낸다. 누군가가 좋은 일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는 그것이 진짜인지를 묻거나, 그 뒤에 어떤 부정이 숨어 있을지를 추측하거나, 그 사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는 이유를 찾는다. 타자의 좋음을 그대로 좋음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이 다섯 가지 신호 가운데 셋 이상이 일관되게 나타난다면, 그 인간은 르쌍티망의 화신일 가능성이 높다.

8. 거리의 설계, 적이 되지 않는 거리 두기

르쌍티망의 인물을 알아본 다음의 작업은 거리의 설계다. 여기서 결정적 원칙이 있다. 그를 적으로 만들지 말 것. 적이 되는 순간 그의 르쌍티망의 정확한 표적이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가까이 두지도 말 것. 가까이 둘수록 그의 발효된 감정이 자기에게 옮아오기 때문이다.

손자가 병법에서 말한 가장 높은 단계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 가장 좋은 대응은 그와 정면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되 그 거리를 적대로 표현하지 않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남의 빈도를 줄이되 만났을 때는 평정하게 응대하고, 깊은 정보의 공유는 피하되 표면적 예의는 지키며, 협업이 필요할 때는 명확한 경계 안에서 협업하되 사적 친밀의 영역으로는 끌어들이지 않는다.

장자의 산목(山木) 편에 빈 배의 비유가 있다. 강에서 배를 저어 가다 다른 배와 부딪쳤을 때,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분노가 일지만, 그 배가 빈 배라면 분노가 일지 않는다는 우화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대할 때 가장 유용한 자세 가운데 하나가 그를 빈 배로 다루는 것이다. 그의 비방과 의심과 도덕적 단죄가 흘러올 때 거기에 자기를 단단한 사물로 두고 부딪치는 대신, 자기를 비워 그 흐름이 자기 앞을 그냥 통과하게 하는 것. 이것은 비겁이 아니라 정교한 무공이다.

9. 단정한 응대, 그러나 도덕화 함정에 빠지지 않기

르쌍티망의 인물과 직접 대화해야 할 때, 가장 흔한 함정은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는 것이다. 그가 보이는 비열함, 비합리, 비일관에 분노하여 그것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충동에 굴복하는 순간, 자기 또한 그와 같은 회로에 들어선다.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를 선으로 정의하는 그 동작이 정확히 르쌍티망의 동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대의 원칙은 단정함이다. 그의 말에 정서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실의 차원에서만 응답하며, 도덕적 평가를 자기의 입에 담지 않는 것. 그가 누군가를 비방할 때 동조하지도 반박하지도 않고, 그저 다른 화제로 옮기는 기술. 그가 자기에게 모욕을 던질 때 그 모욕을 받아치지 않고 마치 그것이 거기 없는 것처럼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는 평정.

공자가 이직보원(以直報怨), 정직으로 원한에 답한다고 한 것의 한 의미가 이것이다. 노자식의 무대응도 아니고 함무라비식의 보복도 아닌, 사태의 결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응대. 그가 부당한 비난을 던질 때 그 비난의 사실관계만을 차분히 정정하고 그 이상의 감정은 싣지 않는 것이 직(直)의 응답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매일 아침 자기에게 일러두었다. 오늘 나는 무례한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거짓된 자, 시기하는 자를 만날 것이라고. 그들이 그러한 것은 그들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분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자세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자기 보호의 기술이다. 상대의 본성에 놀라지 않으면 자기의 균형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10. 정보의 비대칭, 노출하지 않는 것의 무게

한비자가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법을 논한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정보의 비대칭이다. 군주는 신하의 마음을 읽되 자기의 마음을 신하에게 읽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대할 때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르쌍티망의 인물에게 자기의 약점, 자기의 상처, 자기의 진로 계획, 자기의 진심을 노출하는 것은 그것을 무기고에 적재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 정보를 즉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자기가 그를 추월하거나 그가 자기에게 르쌍티망을 작동시킬 빌미를 얻었을 때, 그 정보는 정확히 자기에게 가장 아픈 자리를 찌르는 송곳이 된다.

따라서 노출의 깊이를 의식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일과 사실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소통하되, 자기의 내면, 자기의 감정, 자기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신중하게 다루는 것. 친밀의 외피를 가지고 접근해 오는 르쌍티망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 원칙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친밀의 깊이는 시간과 검증을 거친 자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 불신의 권유가 아니다. 인간을 그의 실제 능력과 실제 자세에 맞게 다루어야 한다는 분별의 권유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깊이의 신뢰를 주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분별의 결여다.

11. 정면 대응의 시점과 방법

거리 두기와 단정한 응대로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즉 르쌍티망의 화신이 직접적인 가해의 단계로 들어왔을 때는 정면 대응이 필요하다. 이때의 원칙은 신속, 명확, 비도덕화다.

신속함이 결정적인 이유는 르쌍티망의 가해가 시간과 함께 누적되기 때문이다. 첫 가해를 묵인하면 두 번째 가해의 문턱이 낮아지고, 두 번째를 묵인하면 세 번째는 거의 자동화된다. 따라서 명백한 가해의 첫 사례에서 분명한 응답이 가야 한다.

명확함이란 자기가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모호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다. 비유나 암시가 아니라 사실관계와 행위의 차원에서 그 행위가 있었고 그 행위가 자기에게 어떤 손해를 끼쳤으며 자기는 그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는 명료한 진술. 이때 도덕적 단죄의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를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는 대신, 그의 어떤 행위가 어떤 사실적 결과를 초래했는지만을 말하는 것. 이것이 비도덕화의 원칙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일관된 강도의 응답이라는 원칙도 여기서 작동한다. 가해에 대한 응답은 가해의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 약한 가해에 과도한 응답을 하면 자기가 르쌍티망의 인물로 보이게 되고, 강한 가해에 약한 응답을 하면 가해는 계속된다. 비례의 정확성이 신뢰의 자리를 만든다.

이 정면 대응의 결과 그가 자기를 더 강하게 미워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야 할 결과다. 르쌍티망의 화신과의 관계에서 그의 호의를 얻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다. 가능한 목표는 그가 자기에게 가해할 수 있는 영역을 좁히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12. 그를 대하며 내가 르쌍티망에 빠지지 않는 길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오래 상대하다 보면 자기 안에 그를 향한 르쌍티망이 자라나는 위험이 있다. 그가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도 그를 미워하게 되고, 그의 비방을 곱씹으며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자기 언어를 키우는 것. 이렇게 되면 르쌍티망의 화신과 마주한 자기가 또 하나의 르쌍티망의 화신이 된다.

이를 막는 첫 번째 원칙은 그에 대한 생각의 시간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그가 자기 의식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것. 그를 다루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를 생각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그를 자기 마음 밖에 두는 것. 이것은 의식적 훈련을 요구하지만 가능하다.

두 번째는 그에 대한 자기 언어를 점검하는 것이다. 친구나 가족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기가 사용하는 어휘가 그가 사용하는 어휘와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언어, 그의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언어, 그의 사소한 결점을 부풀리는 언어. 이런 언어가 자기 입에서 자라나면 르쌍티망의 회로가 가동되기 시작한 신호다.

세 번째는 그에 대한 우월감의 함정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기는 르쌍티망의 화신이 아니므로 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그 의식 자체가 새로운 르쌍티망의 자리다. 자기를 그와 비교하여 평가하는 순간, 자기 또한 비교의 평면 위로 끌려 들어간 것이다. 자기 가치의 좌표를 자기 작업과 자기 사랑의 차원에 놓고, 그를 그 좌표 안에 두지 않는 것. 그가 자기의 풍경에서 가장 먼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 이것이 자기를 지키는 마지막 기술이다.

장자가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말한 것은 이 자리에서도 빛난다. 르쌍티망의 화신은 자기에게 어떤 쓸모도 없고 어떤 자라남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통해 자기가 르쌍티망의 회로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운다면, 그 자체가 무용 가운데의 큰 쓸모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강력한 반면교사가 된다. 자기가 무엇이 되지 말아야 하는지를 매일 가르쳐주는 살아 있는 거울. 이렇게 다룰 수 있을 때,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자기의 적이 아니라 자기 수련의 도구가 된다.

13. 예방의 원칙,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만남을 만들지 않는 것

여기까지의 모든 작업, 자기 안의 발효를 멈추는 여섯 길과 타자의 발효에 휘말리지 않는 여섯 길을 다시 돌이켜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두 전선 모두에서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만남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자기 안에 르쌍티망이 자라는 가장 큰 원료는 르쌍티망의 화신과의 반복된 접촉이다. 그의 비방을 듣고, 그의 의심을 받아내고, 그의 도덕적 단죄에 노출되면서, 자기 안에도 그를 향한 동일한 회로가 만들어진다. 르쌍티망은 전염성이 있고, 그 전염은 가까이 있을수록 깊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이 원료의 공급 자체가 끊어진다.

거꾸로 타자의 르쌍티망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그 타자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선 다음에 거리를 설계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그 자장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비용이 적다.

따라서 모든 처방의 맨 앞에 놓여야 할 것은 예방이다. 앞 12개의 길은 이미 관계가 시작된 자리에서 작동하는 기술이지만, 가장 깊은 지혜는 그 관계 자체를 시작하지 않는 안목이다.

예방의 첫 동작은 관계의 초기에 르쌍티망의 신호를 읽어내는 것이다. 7장에서 정리한 다섯 신호, 즉 타자에 대한 평가가 대화를 점령하는가, 비판이 일관되게 도덕화되는가, 분노가 등 뒤에서만 작동하는가, 시간 의식이 과거에 묶여 있는가, 타자의 성공에 첫 반응이 의심인가. 이 신호들은 처음 몇 번의 대화에서 이미 드러난다. 그 단계에서 관계의 깊이를 더 들이지 않는 결단이 모든 후속 비용을 절감한다.

여기서 회피 가능한 관계와 회피 불가능한 관계의 분별이 결정적이다. 친밀한 사적 친구의 자리, 사업의 동업자, 깊이 의지하는 멘토, 영혼을 나누는 동료. 이런 자리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리다. 르쌍티망의 신호가 보이면 그 자리에 그를 들이지 말 것. 반면 가족, 직속 상사, 이미 시작한 동업, 좁은 공동체의 구성원처럼 회피가 어려운 관계는 거리의 정밀한 설계로 가야 한다. 분별의 첫 작업은 자기 앞의 관계가 어느 쪽인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다.

만남을 회피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거두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보아서야"라는 자기 검열이 종종 작동한다. 이 검열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 모든 사람을 동등한 깊이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이라는 가정이 잘못이다. 셸러가 사랑의 질서라 부른 것의 한 함의는 사람을 그의 실제 자세에 맞게 서로 다른 깊이로 다루는 분별이다. 이 분별은 차별이 아니라 사랑의 한 형식이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자기 삶의 가까운 자리에 들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의 무너짐이다.

둘째, 정과 의리와 과거의 인연이라는 명분이 회피를 막을 때, 그것은 종종 진정한 정이나 의리가 아니라 자기가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무능에 대한 사후적 합리화다. 진정한 의리는 자기를 갉아먹는 관계 안에서 자기를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바깥에서도 그가 잘 살기를 비는 거리감 있는 자세에 더 가깝다.

장자의 무용지용도 여기서 한 번 더 점검해야 한다. 앞서 12장에서 르쌍티망의 화신마저 반면교사로 활용하라고 말했지만, 이 가르침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무용한 것이 큰 쓸모를 가지지는 않는다. 어떤 무용함은 그저 무용하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자기 풍경의 일부로 굳이 끌어들여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려 하는 결심은, 종종 자기를 그 관계에 묶어두는 또 하나의 사슬이 된다. 12장의 가르침은 회피 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마지막 안전장치이지, 회피 가능한 관계를 굳이 유지하라는 권유가 아니다.

시간의 분별도 필요하다. 한두 번 거쳐가는 일시적 관계라면 짧게 견디고 흘려보내는 편이 낫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있는 관계라면 초기에 분명한 거리를 두는 것이 비용이 가장 적다. 르쌍티망의 화신은 시간이 갈수록 자기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자기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서사를 정교화한다. 5년 동안 묵인한 관계는 5년 분의 무기고를 그에게 적재시킨 셈이 된다. 단호함의 시점은 언제나 지금이지 나중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회피의 결정 자체가 또 하나의 르쌍티망이 되지 않게 하는 분별이 필요하다.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를 그 악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분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순히 그 관계가 자기의 사랑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는 차분한 판단으로 떠나는 것. 그를 비난하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떠나는 것. 그가 자기 풍경의 주변부에서 자연스럽게 흐려져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떠남의 가장 정갈한 형식이다.

손자가 병법의 가장 높은 단계로 든 것이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 싸우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리가 있다. 적과의 싸움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 손자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 더 높은 단계가 르쌍티망에 대해 적용되는 마지막 지혜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것. 처방을 잘하는 것보다, 처방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 머무는 것.

맺음, 예방이 모든 처방의 앞에 선다

자기 안의 르쌍티망 극복과 타자의 르쌍티망 다루기, 그리고 이 두 작업의 가장 효과적 형식인 만남의 예방. 이 셋이 하나의 통합된 자기 보호의 체계를 이룬다.

니체와 셸러와 들뢰즈와 아렌트가 보여준 정교한 처방들은 이미 르쌍티망이 자라기 시작한 자리에서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러나 손자와 장자가 가리키는 더 깊은 지혜는 그것이 자라기 시작할 자리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두 지혜는 서로를 보강한다. 예방이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처방의 기술이 필요하고, 처방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예방의 안목이 더 중요하다.

매일의 자기 점검에는 세 질문이 함께 들어 있어야 한다. 오늘 자기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 르쌍티망의 싹은 무엇인가. 오늘 자기에게 다가오는 르쌍티망의 화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리고 오늘 자기 삶에 처음부터 들이지 말아야 할 르쌍티망의 인물은 누구인가. 이 세 질문이 의식의 일상이 될 때, 르쌍티망은 더 이상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일부로 거기 있되, 자기의 풍경을 점령하지는 못한다.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 부른 상태는 르쌍티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르쌍티망이 자라날 수 있는 조건이 자기 안과 자기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자기의 시간을 점령하지 못하게 매일 다시 만들어내는 자리다. 이 자리는 만들어진 적이 없으므로 매일 다시 만들어야 하고, 그 만들어냄의 가장 큰 부분은 무엇을 들이지 않을 것인가의 결정이다. 들이지 않은 것이 자기를 가장 깊이 지킨다. 동서 철학자들이 다른 어휘로 가리켜온 자유의 한 모습이 이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