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의 사람들: 마키아벨리의 관복과 흄의 백개먼
마키아벨리는 1513년 산탄드레아에 유배된 뒤 낮에는 농부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저녁에는 궁정복으로 갈아입고 서재에 들어가 고대인들과 대화했다. 그 네 시간의 산물이 『군주론』이다. 200년 뒤 흄은 서재에서 인과와 자아를 의심해 광기에 가까운 고독에 다다른 뒤, 식탁과 백개먼 보드로 내려와 평정을 되찾았다. 인과를 의심하던 손이 주사위 게임에 몰두한 셈이다.
두 사람의 동선은 반대지만 구조는 같다. 두 세계 사이에 문턱이 있고, 그 문턱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몽테뉴는 그 사이에 한 구석이라는 작은 왕국을 두었다. 부부도 자식도 시민적 의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자리, 가장 작은 곳에서의 가장 큰 자유다. 도연명의 율리, 소동파의 동파, 공자의 향당이 모두 같은 풍경이다.
문턱을 세울 줄 아는 자만이 두 세계 모두를 잃지 않고, 한 구석을 가진 자만이 모든 관계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
I. 두 장면
마키아벨리는 1513년 메디치 정권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난 뒤 피렌체 남쪽 산탄드레아의 시골 농장에 유배되었다. 그해 12월 10일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하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낮 동안 그는 새 사냥을 하고, 농부들의 나무를 베어 팔며, 마을 여관에서 푸줏간 주인과 방앗간 주인을 상대로 카드놀이를 했다. 흙과 먼지를 뒤집어쓴 일상이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는 서재 문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외교관 시절에 입던 궁정복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서재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리비우스, 타키투스, 폴리비오스 등 고대 저자들과 네 시간 동안 대화했다고 적었다. 그 네 시간 동안에는 가난도, 죽음의 두려움도, 정치적 몰락의 굴욕도 사라진다고 했다. 이 시기 그의 서재에서 집필된 저작이 바로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로부터 약 200년 뒤,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흄은 첫 대작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1739~40) 제1권 4부 7절에서 자기 회의의 끝을 직접 기록했다. 그는 인과관계를 반복된 경험에서 형성된 습관으로 환원했고, 외부 세계의 실재와 단일한 자아의 존재까지 의심에 부쳤다. 이 회의의 절벽 끝에서 그는 "모든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된 듯한 절대적 고독"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같은 절(節)에서 흄은 그 절망의 해소 과정을 함께 기록했다. 그는 서재를 떠나 식사를 하고, 백개먼이라는 보드게임을 두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서너 시간의 오락 뒤에 다시 서재로 돌아오면,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사변들이 차갑고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고 했다. 이 일화에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서재에서 인과의 필연성을 의심하던 손이, 응접실에서는 주사위가 굴러가는 게임에 몰두한 것이다. 인과의 환상을 해체하던 자가 우연의 환상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백개먼이라는 게임 안에 흄의 두 얼굴이 압축되어 있다.
II. 거꾸로 된 동선, 같은 구조
두 장면은 동선이 정반대다.
마키아벨리는 일상에서 서재로 올라가며 옷을 갈아입었다. 흙 묻은 평상복을 벗고 궁정복을 입었다. 흄은 서재에서 일상으로 내려오며 사변을 내려놓았다. 회의주의자의 시야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노는 평범한 자리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방향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두 세계 사이에 문턱이 있고, 그 문턱에서 의식적 전환이 일어난다. 옷을 갈아입는 행위는 단지 외양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역할과 모드를 바꾸는 신호다. 마키아벨리에게 궁정복은 고대인들과 대등하게 대화할 자격의 표시였고, 흄에게 백개먼은 회의의 무게를 내려놓는 의식이었다.
두 세계는 섞이면 안 된다. 농부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고대 정치를 논했다면 어색했을 것이며, 친구와 백개먼을 두는 동안에도 인과의 회의를 멈추지 못했다면 사교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 세계에는 그 세계의 결이 있다. 일상의 결은 직접성, 신체성, 사회성이다. 사유의 결은 추상성, 정밀성, 고독이다. 이 두 결이 섞이면 둘 다 망가진다.
문턱은 그래서 섞이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경계를 지키는 의식이 두 세계 모두를 지킨다.
III. 동양의 짝
이 구조는 동양에도 깊은 짝을 가진다.
도연명(陶淵明)은 405년 팽택령(彭澤令) 직을 사임하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고향 율리(栗里)로 돌아갔다. 불위오두미절요(不爲五斗米折腰), 다섯 말의 쌀을 위해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것이 사임의 이유였다. 베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농사를 짓는 한편 시를 짓고 술잔을 들고 책과 대화했다. 외양은 농부이되 내면은 시인이었던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산탄드레아와 도연명의 율리는 같은 구조의 풍경이다.
소동파(蘇東坡)는 1080년 황주(黃州)로 유배된 뒤 동파(東坡)라는 호를 얻었다. 동쪽 비탈에서 직접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낮에는 흙을 만지고 밤에는 「적벽부」(赤壁賦)와 같은 명문을 썼다. 진흙 묻은 손과 천하의 문장을 쓰는 손이 같은 손이었다.
공자(孔子)에게서도 같은 구조가 확인된다. 『논어』 「향당」(鄕黨)편은 공자의 일상을 별도로 기록한다. 조정에서 예법에 따라 엄숙하게 행동하던 공자가 향리에서는 순순여(恂恂如) — 어수룩하고 말이 적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자리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가질 줄 아는 것이 공자에게는 인격의 분열이 아니라 예(禮)의 완성이었다.
IV. 몽테뉴의 한 구석
마키아벨리와 흄의 두 장면 사이, 그리고 동양의 짝들 위에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 있다. 몽테뉴는 1571년 서른여덟의 나이에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직을 사직하고 가문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는 영지의 한 탑(tour) 3층에 자기 서재를 마련하고, 천 권이 넘는 책과 함께 들어앉았다. 천장 들보에는 그리스·라틴 고전에서 따온 쉰일곱 개의 격언을 새겼다. 그 서재가 바로 『수상록』(Essais)이 태어난 자리다.
그가 그 서재에 들어가며 『수상록』 1권 「고독에 관하여」에 남긴 한 구절이 이 칼럼 전체의 주춧돌이 될 만하다.
"그곳이 바로 나의 왕국이며, 나는 그곳에서 나 자신을 절대 군주로 만들고, 이 한 구석만큼은 부부관계, 자식과의 관계, 시민적 관계를 포함한 모든 사회로부터 격리된 곳으로 만들어 두려 한다. 다른 곳에서 내가 가진 권위란 말뿐인 권위일 뿐이고, 그 실체도 모호할 뿐이다."
이 한 문장 안에 네 가지 결정적 통찰이 압축되어 있다.
가장 작은 곳에서의 가장 큰 자유
몽테뉴는 자기 서재를 왕국이라 불렀다. 그것도 제한 군주가 아니라 절대 군주가 되는 곳이라고 했다. 당시 프랑스는 종교전쟁의 한복판이었고 절대 군주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단어였다. 몽테뉴는 이 거대한 정치 개념을 자기 서재 한 구석에 끌어다 놓았다.
여기에 그의 통찰이 있다. 바깥세상에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은 늘 제한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러나 자기 서재 안에서는 누구나 절대 군주가 될 수 있다. 가장 작은 곳에서 가장 큰 자유가 가능하다는 역설이다.
마키아벨리가 궁정복을 입고 서재에서 고대인들과 대등하게 대화한 것이 바로 이 결이다. 바깥세상에서 마키아벨리는 추방된 관료에 불과했으나 서재 안에서는 리비우스·폴리비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료였다. 두 사람의 서재는 정확히 같은 종류의 왕국이었다.
가장 친밀한 것까지 떼어 놓다
이 구절의 진짜 무게는 떼어 내는 관계의 목록에 있다. 몽테뉴가 격리하고자 한 것은 멀리 있는 적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랑이다.
먼저 부부 관계를 떼어 낸다. 16세기 가부장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존재였으나, 몽테뉴는 그 그림자조차 들어올 수 없는 자리를 두려 했다.
자식과의 관계도 떼어 낸다. 그는 자식 사랑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책임과 걱정이 영혼을 잠식할 수 있음을 알았다. 몽테뉴는 자식 다섯을 어린 나이에 잃었으며, 이 개인사가 해당 구절의 배경에 놓여 있다.
시민적 관계도 떼어 낸다. 명예, 평판, 공직, 사교, 정치적 의무 — 그 모든 사회적 가면을 벗어 두는 자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통상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휴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몽테뉴는 사적 영역인 가족까지 떼어 낸다. 그가 찾은 것은 공적인 자기도 가족적인 자기도 아닌, 순수한 혼자의 자기였다.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수신(修身)의 자리이지 제가(齊家)의 자리도 아니다. 가족과 사회 이전의, 오직 나 자신과 만나는 자리다.
말뿐인 권위 — 바깥세상에 대한 회의
세 번째 구절이 더 깊은 통찰을 담는다. 다른 곳에서 자기가 가진 권위란 말뿐인 권위일 뿐이며 그 실체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에는 몽테뉴의 깊은 회의주의가 묻어 있다.
그는 자기가 받았던 모든 공적 권위 — 판사로서의 권위, 가장(家長)으로서의 권위, 시민으로서의 권위 — 가 모두 말뿐이었다고 고백한다. 그것들은 주어진 역할이지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은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몽테뉴의 평생의 물음과 직접 연결된다. 바깥세상에서 우리가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역할에 의해 형성된 환상일 수 있다. 진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자기뿐이다.
여기서 몽테뉴와 회의주의가 만나며, 흄의 서재가 다시 떠오른다. 흄도 모든 외부 인식의 토대를 의심한 끝에 회의의 절벽에 도달했다. 다만 흄은 거기서 광기에 가까워졌고, 몽테뉴는 거기서 평정을 얻었다. 차이는 어디에서 왔는가. 몽테뉴에게는 처음부터 왕국이 있었다는 점이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다. 회의의 칼날이 모든 것을 베어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베어낼 수 없는 곳 — 데카르트가 사유의 영역에서 발견한 그 자리를, 몽테뉴는 공간의 영역에서 먼저 발견한 셈이다.
작아야만 진짜다
마지막으로 한 구석(one corner)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몽테뉴는 자기 영지의 큰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왕국으로 선언한 것은 그 저택 전체가 아니라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서재였다. 왜 작아야 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큰 공간은 사회의 침투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실에는 손님이 들어오고, 식당에는 가족이 모이며, 침실에는 배우자가 함께한다. 오직 작고 외진 한 구석만이 모든 관계로부터 자기를 격리할 수 있다.
이는 동굴의 본질에 관한 통찰이기도 하다. 동굴이 동굴인 이유는 작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야 진짜 동굴이며, 두 사람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이미 사회다.
지난해 「남자의 동굴」 칼럼에서 다룬 공간들이 모두 작았던 것도 같은 이치다. 공장 한 귀퉁이의 컨테이너 음악실, 은퇴 후 마련한 작은 오피스텔, 지하상가의 골방 — 클 필요가 없다. 작아야 진짜 왕국이다. 한 경영자가 수십억 원짜리 설비보다 그 작은 컨테이너를 더 자랑스러워한 이유는, 그 안에서 그가 절대 군주였기 때문이다.
동양의 마지막 짝
이 구절은 동양에도 정확한 짝이 있다. 명대(明代)의 사상가 진헌장(陳獻章, 호 백사 白沙)은 정좌(靜坐)를 통한 자기 회복을 가르치며 나의 한 칸 방이 곧 천지(天地)다라고 했다. 작은 방 하나가 우주 전체와 맞먹는다는 자각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심용슬지이안(審容膝之易安) —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곳이 편안함을 안다 — 도 같은 결이다. 이 무릎 하나 들일 곳이 바로 몽테뉴의 한 구석이다.
당대(唐代)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은 더 명료하다. 산은 높음에 있지 않으며,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난다. 물은 깊음에 있지 않으며, 용이 있으면 영험하다. 이는 누추한 방이로되, 나의 덕이 향기롭다. 누추한 방 하나가 곧 진짜 공간임을 선언한 이 글이, 몽테뉴의 정신과 천 년을 사이에 두고 그대로 통한다.
V. 두 자아의 정당성
근대 이전의 이상은 단일한 자아였다. 어디서나 같은 사람, 변하지 않는 인격, 일관된 본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흄, 몽테뉴, 그리고 도연명·소동파·향당편의 공자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다른 가능성이다. 분리될 줄 아는 자아가 더 풍요롭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농부들과 욕설을 주고받는 자기와 고대인과 대화하는 자기가 둘 다 자기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흄은 cogito를 해체하는 자기와 백개먼에서 친구에게 지고 웃는 자기가 둘 다 자기임을 받아들였다. 몽테뉴는 판사·가장·시민이라는 모든 사회적 자기와 한 구석의 자기가 모두 자기임을 인정하되, 그중에서 한 구석의 자기를 가장 진실한 것으로 보았다.
이 통찰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확인된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역할 분리(role segmentation)가 능숙하다는 연구가 다수 보고된다. 직장에서의 자기, 가정에서의 자기, 친구들 사이에서의 자기, 혼자 있을 때의 자기가 각기 다른 결로 살아 있다. 모든 자리에서 동일하려는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도 온전하지 못하다. 흄이 서재에서는 인과를 의심하면서 응접실에서는 주사위의 우연에 기꺼이 자기를 맡긴 것이, 정신적 모순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의 증거였던 까닭이다.
VI. 회복의 상호 작용
마키아벨리와 흄이 함께 보여주는 또 하나의 통찰은 상호 회복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서재는 일상의 굴욕을 상쇄하는 자리였다. 농부들과 동전 한 푼을 두고 다투던 자기가 서재에서는 고대인들과 대등한 대화 상대가 되었다. 그 네 시간이 낮의 흙먼지를 상쇄한 셈이다.
흄에게 일상은 서재의 우울을 상쇄하는 자리였다. 회의의 절벽 끝에서 절망에 빠진 자기가 식탁에서는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백개먼 보드 앞의 그 시간이 사변의 광기를 상쇄했다.
몽테뉴는 두 사람 사이의 균형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서재의 왕국을 절대적으로 지키되, 거기서 영영 나오지 않는 은둔자가 되지 않았다. 1581년부터 1585년까지 보르도 시장으로 봉직했고, 외교 사절로 여행했으며, 사교 생활도 유지했다. 다만 그 모든 일이 끝나면 그는 한 구석으로 돌아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왕복을 평생 반복한 것이다.
한쪽 세계만 가진 사람은 그 세계의 짐에 짓눌린다. 일상만 가진 사람은 일상의 흙먼지에 묻혀 영혼이 메마르고, 사변만 가진 사람은 사변의 절벽에서 광기로 떨어진다. 두 세계를 모두 가진 사람만이 한쪽이 다른 쪽을 상쇄하는 회복의 순환 속에 산다.
이것이 동굴이 단순한 도피가 아닌 까닭이다. 동굴은 도피처가 아니라 회복의 장소이며, 동시에 일상으로 되돌려보내는 장소다. 동굴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은둔이 되고, 돌아오기는 하되 그 안에서 회복을 얻지 못하면 헛걸음이 된다. 들어가고 나오는 왕복이 곧 동굴의 본질이다.
VII. 현대인이 잃어버린 문턱
오늘 우리가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까닭의 일부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문턱을 잃었다.
스마트폰은 서재와 식탁의 경계를 지웠다. 식사 중에 업무 메시지가 오고, 친구와 대화하는 동안 뉴스 속보가 뜨며, 잠자리에서 회의 자료를 검토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옷을 갈아입던 문턱이 사라진 것이다. 몽테뉴의 표현을 빌리면, 한 구석이 사라졌다. 부부 관계도, 자식과의 관계도, 시민적 관계도 모두가 한꺼번에 침투해 들어오는 시대다. 모든 관계가 동시에 우리를 부르면, 정작 우리는 어떤 관계로도 온전히 있지 못한 상태가 된다.
이 결과는 두 가지다. 사유는 깊어지지 않고, 일상은 회복되지 않는다. 서재의 진지함도, 식탁의 따뜻함도, 둘 다 희미해진 채 하루가 흘러간다. 두 세계 모두를 반쯤만 살게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흄과 몽테뉴가 우리에게 주는 처방은 명료하다. 문턱을 다시 세우는 것, 그리고 한 구석을 다시 마련하는 것이다. 일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책을 덮고 친구를 만나며, 서재의 등을 끄고 식탁의 등을 켜는 것 — 그 작은 의식들이 두 세계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
VIII. 리더의 문턱
이 통찰은 리더에게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
리더의 일상은 본성상 섞임의 압력이 강하다. 어디서나 결정을 요구받고, 언제든 연락이 닿으며, 잠자리에서도 내일의 회의를 떠올리게 된다. 이 압력에 굴복하면 리더는 점차 한 가지 자기만 남게 된다. 결정하는 자기, 책임지는 자기, 긴장하는 자기만 살아남고 다른 모든 자기는 시든다.
훌륭한 리더일수록 문턱을 잘 지킨다. 그리고 자기만의 한 구석을 가진다. 사무실 문을 나설 때 일을 사무실에 두고 나오는 사람, 주말에 산으로 들어갈 때 휴대전화를 꺼 두는 사람, 가족과의 저녁 식탁에서는 가장 단순한 일상의 화제만 나누는 사람 — 그들은 자기를 여러 결로 살아 있게 보존한다.
이순신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임진왜란 7년간 『난중일기』를 썼다. 거기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부하의 죽음에 대한 슬픔, 자작 시문과 짧은 산문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장수의 결과 시인의 결이 한 사람 안에 분리되어 살아 있었다. 『난중일기』가 곧 이순신의 한 구석이었던 셈이다.
IX. 문턱을 만드는 법
마지막으로 실용적인 차원에서 정리한다. 문턱을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간을 분리하라. 가능하다면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나누어라. 같은 책상에서 모든 일을 하지 말라. 작은 책상 하나, 작은 의자 하나라도 좋다. 몽테뉴의 가르침대로, 작아야 진짜 왕국이다.
둘째, 시간을 분리하라. 하루의 어느 시간은 일에 속하고, 어느 시간은 일에서 완전히 떠나 있어야 한다. 그 경계가 흐릿할수록 두 시간 모두 망가진다.
셋째, 의식을 만들어라. 마키아벨리의 옷처럼, 흄의 백개먼처럼, 두 세계 사이에 작은 의식을 두어라. 차 한 잔이라도 좋고, 산책 한 번이라도 좋다. 그 의식이 곧 문턱이 된다.
넷째, 돌아오는 길도 만들어라. 동굴에 들어가는 것만큼 동굴에서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흄의 백개먼은 돌아오는 의식이었다. 일에서 일상으로 돌아올 때, 사유에서 사람들에게 돌아올 때, 그 전환을 도와주는 자기만의 다리를 가져라.
X. 한 줄의 마무리
마키아벨리는 일상에서 사유로 올라가며 옷을 갈아입었고, 흄은 사유에서 일상으로 내려오며 사변을 내려놓았다. 몽테뉴는 그 두 방향 사이에 한 구석이라는 작은 왕국을 두고 거기서 평생을 왕복했다. 방향은 다르되 가르침은 하나다.
문턱을 세울 줄 아는 자만이 두 세계 모두를 잃지 않고, 한 구석을 가진 자만이 모든 관계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다.
지난해 글에서 나는 그들에게 고독의 자유를 허하라고 적었다. 오늘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다. 그 고독이 진짜 자유가 되려면, 들어가고 나오는 문턱이 있어야 한다. 동굴이 도피가 되지 않고 회복이 되려면 옷을 갈아입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동굴은 작아도 된다. 아니, 작아야 한다. 부부도, 자식도, 시민적 의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한 구석 — 그 작은 왕국이 곧 한 사람의 마지막 자유다.
옷을 갈아입는 그 잠깐의 의식 안에, 그리고 한 구석이라 부르는 그 작은 공간 안에, 한 사람의 깊이가 모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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