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르쌍티망
(* 르쌍티망은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삼키지 못한 감정이 내부에서 발효되어 가치 체계 자체를 뒤집는 심리의 운동이다. 니체는 이를 노예도덕의 뿌리로 지목했다. 강자 앞에서 무력한 약자가 강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편에 자신을 선으로 재정의하는 상상적 복수가 수천 년의 도덕 질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셸러는 이 감정이 형식적 평등이 선포된 근대 시민사회, 특히 상승이 좌절된 중간층에서 가장 농밀하게 발효된다고 진단했다. 들뢰즈는 르쌍티망을 반응이 작용의 자리를 차지한 힘의 병리로, 과거에 점령당한 현재의 시간성으로 해석했다. 이 구조는 초기 기독교의 가치 전도, 프랑스 혁명의 자기 숙청, 나치즘의 부상, 문화대혁명에서 역사적으로 반복되었고, 오늘의 포퓰리즘과 소셜미디어의 도덕적 군중 심리에서 다시 증폭된다. 불교의 진에, 한국의 한, 순자의 쟁이 각기 다른 인접 개념을 이룬다. 극복의 길은 태도의 운명애, 감정의 사랑의 질서, 시간의 용서, 행위의 능동적 되기라는 네 축에서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1. 어원과 개념의 자리
르쌍티망(ressentiment)은 프랑스어 동사 ressentir에서 나온 명사다. ressentir는 '다시 느끼다', '거듭 느끼다'라는 뜻을 가진다. 접두사 re는 반복을, sentir는 감각하고 느낀다는 동사다. 따라서 르쌍티망은 어떤 감정을 한 번 겪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반복해서 되씹고 곱씹으며 내부에서 끝없이 재생산하는 상태를 지시한다.
니체는 독일어 철학자였음에도 이 단어를 독일어로 옮기지 않고 프랑스어 그대로 가져왔다. 독일어의 Groll(묵은 원한), Rache(복수), Neid(질투) 가운데 어떤 것도 르쌍티망의 정확한 뉘앙스를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Groll은 감정의 묵음은 있으나 가치 전복의 창조성이 없고, Rache는 직접 행동의 복수여서 상상적 복수의 굴절이 빠져 있으며, Neid는 타자의 소유에 대한 질투이지 자기 정당화의 도덕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르쌍티망이 프랑스어 채로 철학의 중심어가 된 사건은 그 자체로 번역 불가능한 감정의 정치적 밀도를 증언한다.
2. 니체의 계보학과 노예도덕의 탄생
니체가 1887년에 펴낸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제1논문은 르쌍티망을 유럽 도덕 전체의 뿌리로 지목한다. 그의 출발점은 단순한 물음이다.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가치는 어디서 왔는가.
니체는 두 종류의 도덕을 대비한다. 하나는 주인도덕(Herrenmoral)으로, 강한 자, 고귀한 자, 충만한 자가 자기 긍정에서 출발해 자신의 삶의 양식을 '좋음(gut)'이라 부르고, 자신이 아닌 것을 '나쁨(schlecht)'이라 부르는 평가 방식이다. 여기서 '좋음'은 일차적이고 능동적이며, '나쁨'은 좋음의 부재로서 이차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다른 하나는 노예도덕(Sklavenmoral)이다. 여기서는 구조가 거꾸로 뒤집힌다. 약자는 자기 긍정에서 출발할 수 없다. 그는 먼저 자기를 억누르는 강자를 바라보고 그 강자를 '악(böse)'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악의 반대편에 있는 자신을 '선(gut)'이라고 이차적으로 정의한다. 선은 악이 아닌 것,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립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가치의 전도(Umwertung)다. 약자가 자기 앞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강자를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단죄함으로써 얻는 심리적 승리, 그것이 르쌍티망의 핵심 작동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 전도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성공 사례가 유대-기독교 전통이다. 로마의 강자 앞에서 무력했던 유대 민족은 강함을 '악'으로, 약함과 온유와 겸손을 '선'으로 재규정함으로써, 로마의 군사적 승리 위에 도덕적 승리를 쌓아 올렸다. 니체가 "유대는 로마를 이겼다"고 말한 것은 이 아이러니를 가리킨다. 르쌍티망은 무력한 자의 상상적 복수이지만, 그 상상이 수천 년 동안 실제 현실을 재편할 만큼 강력한 창조력을 가진다.
니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 복수가 직접적이지 않고 굴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인의 행동이 즉각적이라면, 르쌍티망의 인간은 상처를 당장 갚지 못하고 내부에 간직한 채 오래 발효시킨다. 그 결과 감정은 정신화되고 지성화되어, 마침내 신학과 도덕 체계와 법과 철학의 형태로 외부화된다. 르쌍티망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정념이 아니라 가치의 외피를 쓰기 때문이다.
3. 셸러의 재구성과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병리
막스 셸러는 1912년의 저작 도덕의 구축에서의 르쌍티망(Das Ressentiment im Aufbau der Moralen)에서 니체의 개념을 대폭 재구성했다. 셸러는 두 가지 방향에서 니체와 갈라진다.
첫째, 셸러는 기독교의 사랑(agape)을 르쌍티망의 산물로 본 니체의 판단을 반박한다. 셸러가 보기에 복음서의 사랑은 충만함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존재의 풍요이지, 무력한 자의 자기 보상이 아니다. 참된 아가페는 르쌍티망의 정반대다. 니체가 기독교에서 본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에서 변질된 기독교 도덕, 즉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외피를 쓴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둘째, 셸러는 르쌍티망이 가장 맹렬히 번성하는 토양을 근대 시민사회로 특정한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비교가 제한적이다. 농노는 귀족과 자신을 같은 척도 위에서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식적 평등이 선포된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원칙상 같은 지평에 서게 되고,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불평등은 견디기 어려운 모욕으로 경험된다. 평등의 원칙이 가장 강하게 천명된 사회가 가장 강렬한 르쌍티망을 낳는 역설. 셸러의 이 통찰은 이후 슬로터다이크, 한나 아렌트, 현대 정치사회학자들의 포퓰리즘 분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셸러는 또한 르쌍티망이 집중되는 사회적 위치를 분석했다. 완전한 하층민은 르쌍티망을 품기 어렵다. 비교의 지평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최상층도 마찬가지다. 르쌍티망이 가장 농밀하게 축적되는 자리는 중간층, 특히 '아래로부터는 치받히고 위로는 닿지 않는' 위치, 즉 상승의 좌절을 가장 민감하게 겪는 계층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한 중산층, 오늘날 서구의 러스트 벨트 노동자, 아시아의 청년 사무직이 겪는 감정의 구조는 이 도식과 무관하지 않다.
4. 들뢰즈의 독해와 반응적 힘의 화학
질 들뢰즈는 1962년의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에서 르쌍티망을 힘의 유형학(typologie des forces)으로 재해석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의 세계에는 두 종류의 힘이 있다. 능동적 힘(force active)은 자기의 역량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고, 반응적 힘(force réactive)은 능동적 힘에 반응하는 힘, 능동적 힘을 제한하고 적응시키는 힘이다.
건강한 삶에서는 반응적 힘이 능동적 힘에 종속된다. 몸의 방어 기제가 생명 활동에 봉사하듯, 반응은 능동에 봉사한다. 그러나 르쌍티망의 인간에게는 이 위계가 뒤집힌다. 반응적 힘이 능동적 힘의 자리를 차지하고, 반응이 삶의 주된 양식이 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응이 작용이 되는 기이한 상태가 이것이다.
들뢰즈가 특히 정교하게 분석한 것은 '망각의 무능'이다. 건강한 인간은 무언가를 소화한 뒤 잊을 줄 안다.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 부른 힘에는 적극적 망각이 포함된다. 그러나 르쌍티망의 인간은 잊지 못한다. 모든 자극이 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고, 그 흔적들이 축적되어 결국 현재 자체가 과거의 반추에 의해 식민화된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의 상처를 현재로 끌어와 재생한다. 이 점에서 르쌍티망은 시간성의 병리다. 현재가 과거에 점령된 상태, 그것이 르쌍티망의 실존적 구조다.
5. 키르케고르의 선행적 통찰
르쌍티망의 구조는 니체 이전에 이미 키르케고르가 다른 어휘로 포착한 바 있다. 1846년의 현재의 시대(En literair Anmeldelse)에서 그는 질투(Misundelse)와 수평화(Nivellering)를 시대의 병으로 지목했다.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시대상은 익숙하다. 모두가 모두를 관찰하고 평가하지만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다. 반성이 행동을 대체하고, 여론이 개인을 삼킨다.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긍정하지 못하는 질투는 뛰어남 자체를 끌어내려 평평하게 만들려 한다. 이 수평화의 충동이 곧 셸러가 말한 근대 평등주의의 어두운 쌍둥이이며, 니체의 노예도덕과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키르케고르가 다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그린 19세기 코펜하겐의 풍경은 오늘의 타임라인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6. 역사적 사례들
로마 제국에서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니체가 르쌍티망의 역사적 승리라 부른 장면의 원형이다. 제국의 변방과 도시 하층에서 번진 새 종교는 황제의 영광 대신 십자가에 달린 자의 무력함을, 전사의 용맹 대신 온유함을, 자부심 대신 겸손을 최고의 가치로 세웠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이르러 이 전도는 제도적으로 완결된다.
프랑스 혁명은 르쌍티망이 정치적 에너지로 전환된 양가적 사례다. 자유 평등 박애의 선언에는 보편 인권의 빛나는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자코뱅 독재와 공포정치 국면에서 단두대가 실제로 노린 것은 구체제의 귀족만이 아니었다. 지롱드파, 에베르파, 당통파가 차례로 숙청되는 과정은 혁명의 내부에서 작동한 르쌍티망의 자기 소진이었다. 평등의 이상이 현실의 탁월함을 용납하지 못하고 끝없이 새로운 수평화의 대상을 찾아 나간 것이다.
바이마르 독일에서 나치즘의 부상은 셸러의 진단이 가장 비극적으로 적중한 사례다. 1차 대전의 패배,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 초인플레이션, 대공황, 붕괴하는 중산층. 이 누적된 박탈감 위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게르만 민족의 신화적 '선'을 그 대립항으로 세우는 도식은 니체가 묘사한 가치 전도의 정치적 현실화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니체의 이름은 이 운동에 의해 오용되었지만, 니체의 개념 자체는 이 운동을 설명하는 가장 예리한 도구가 된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운동 또한 르쌍티망의 대규모 동원이다. 지식인, 교사, 부모 세대를 '반동'과 '악'으로 낙인찍고 자신들의 무학과 폭력을 '혁명적 선'으로 재정의하는 구조는 순수한 노예도덕의 운동이다. 마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는 르쌍티망에 형이상학적 정당성을 부여한 슬로건이었다.
7. 현대 정치와 감정의 경제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2006년의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에서 근대 정치사 전체를 '분노의 은행'이라는 은유로 재구성했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이후의 좌파 정당과 종교 운동은 개인들이 흩어진 채 품고 있던 르쌍티망과 분노를 집합적으로 모아 저축하고, 그것을 혁명이나 개혁의 정치 자본으로 전환하는 은행의 역할을 수행했다. 20세기 말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전통적 좌파의 쇠퇴는 이 은행의 파산을 의미했다. 그러나 축적되어야 할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고, 새로운 저축 기관을 찾아 떠돌게 되었다. 21세기의 우파 포퓰리즘은 바로 그 부유하는 분노를 흡수하는 새 은행이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의 국민연합, 이탈리아의 형제당, 독일의 AfD는 세부는 다르지만 공통 구조를 가진다. 세계화의 수혜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계층, 문화적 위신이 침식되었다고 느끼는 백인 남성, 대학 학위가 없는 지방 노동자에게, 이 운동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한다. 하나는 자신의 박탈을 설명해주는 '악'의 지정(이민자, 엘리트, 관료, 소수자, 미디어), 다른 하나는 그 악의 반대편에서 자신을 '진짜 민중', '침묵하는 다수', '평범한 사람'으로 재규정하는 선의 좌표다. 이것은 니체가 19세기에 기술한 노예도덕의 구조를 21세기 정치가 거의 문자 그대로 재현하는 장면이다.
소셜미디어는 이 구조의 증폭기다. 알고리즘은 분노와 도덕적 우월감이 결합된 감정에 가장 높은 참여율을 선사하며, 따라서 플랫폼 자체가 르쌍티망의 생산 장치로 기능한다. 과거에는 뒷담화 형태로 사적 영역에 갇혀 있던 '상상적 복수'가 이제 공개 무대에서 즉각 보상받고 확산된다. 트위터의 몰려들기(piling on), 취소 문화(cancel culture)의 도덕적 군중 심리, 유튜브 코멘트의 익명 단죄는 셸러가 묘사한 근대 평등주의의 그림자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만들어낸 새로운 국면이다.
8. 동아시아의 인접 개념들과의 교차
불교는 르쌍티망의 심리적 핵에 매우 근접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탐진치(貪瞋痴)의 삼독 중 진(瞋)은 분노이고, 그 가운데 특히 원한으로 응결된 상태가 원(怨)이며, 마음속 깊이 묻혀 자신도 알지 못하게 되새김되는 것을 수면번뇌(隨眠煩惱)라 부른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종자(種子) 개념은 니체와 들뢰즈가 말한 '흔적의 축적'과 놀라운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불교는 이 축적된 번뇌의 해체를 관(觀)과 자비(慈悲)의 수행으로 설계한 반면, 니체는 귀족적 긍정으로, 셸러는 사랑의 질서 회복으로 처방했다.
한국의 한(恨)은 르쌍티망과 종종 비교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은 억눌린 원망을 포함하지만, 그 원망의 방향이 반드시 외부의 특정 적을 향해 도덕화되는 것은 아니다. 한에는 하소연의 대상이 흐릿하고, 운명과 신세와 팔자라는 더 큰 지평으로 원망이 분산된다. 한은 르쌍티망처럼 가치 체계를 전복하지 않고, 오히려 삭힘과 풀이의 순환 속에서 예술적 승화로 전환되는 경로를 열어둔다. 판소리의 비장미, 민요의 정한이 한이 르쌍티망과 갈라지는 자리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관찰되는 감정 중 상당 부분은 전통적 한보다 셸러적 의미의 르쌍티망에 가깝다. 형식적 평등과 능력주의 담론이 보편화되면서 실제의 불평등이 견디기 어려운 모욕으로 경험되는 구조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순자의 사유 또한 흥미로운 참조점이다. 성악설을 편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욕망과 쟁(爭)으로 기운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쟁은 자원의 부족에서 오는 갈등이지만, 그 갈등이 도덕화되는 순간의 심리는 르쌍티망의 초입과 닿는다. 순자가 예(禮)의 학습으로 이 본성을 교화하려 한 기획은, 셸러가 사랑의 질서로 르쌍티망을 극복하려 한 시도와 구조적으로 공명한다.
9. 조직과 일상의 미시 르쌍티망
르쌍티망은 세계사적 사건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익숙한 자리에서 가장 조용히 작동한다.
기업 조직에서 승진에 누락된 자가 승진한 동료를 '실력이 아니라 정치로 올라갔다'고 규정하는 순간, 니체가 묘사한 가치 전도의 축소판이 가동된다. 그는 자신이 닿지 못한 자리를 '악'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그 자리에 가지 못한 자신을 '선(정직, 순수, 실력 중심)'의 자리로 옮겨 놓는다. 이 전도가 개인 심리 수준에 머물면 상처의 자기 보호 기제로 기능하지만, 조직 문화로 일반화되면 유능한 자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집단 전체를 평범함의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셸러가 말한 수평화가 일터에서 매일 작은 규모로 일어나는 장면이다.
학술 공동체에서는 르쌍티망이 각주와 서평의 형식으로 위장한다. 자신의 작업을 정면에서 끌어올리기 어려운 연구자가 선배 세대의 연구를 거듭 공격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학문의 공적 외피 뒤에서 작동하는 상상적 복수의 구조다.
예술계에서는 흥행한 작품에 대한 냉소가 자주 이 기능을 한다. 대중적 성공을 거둔 동료를 '상업적으로 타락했다'고 규정하고 자신의 고립을 '순수의 훈장'으로 삼는 심리는, 니체가 기술한 노예도덕의 소형 재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모든 르쌍티망이 주관적으로는 도덕적 확신의 형태로 경험된다는 점이다. 르쌍티망은 한 번도 자기를 르쌍티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10. 극복의 길들
니체는 르쌍티망의 극복을 운명애(amor fati)와 영원회귀의 사유에서 찾았다. 지금의 삶이, 이 순간 이대로, 무한히 반복되어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자는 과거에 묶여 있지 않고, 따라서 누구를 악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자기 삶을 타자와의 비교에서가 아니라 자기 역량의 충만한 발휘에서 얻는다. 니체의 처방은 형이상학적이고 귀족적이지만, 그 핵심 통찰은 단순하다. 나를 괴롭히는 자가 누구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물으라는 것이다.
셸러의 길은 다르다. 그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온 이 개념은, 모든 대상에는 그것에 마땅한 사랑의 크기와 순서가 있고, 이 질서를 잃을 때 인간은 병든다는 주장이다. 르쌍티망은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 즉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미워하고 마땅히 덜 사랑해도 좋을 것을 과도하게 욕망하는 상태다. 따라서 극복의 길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감정의 재질서화에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용서(forgiveness)와 약속(promise)을 인간 행위의 두 치유 장치로 제시했다. 용서는 과거의 되돌릴 수 없음에서, 약속은 미래의 예측 불가능에서 인간을 해방한다. 르쌍티망이 과거에 점령당한 현재의 병리라면, 아렌트의 용서는 바로 그 점령 상태로부터 현재를 되찾는 정치적 능력이다. 주목할 것은 아렌트의 용서가 종교적 자비나 개인적 관용이 아니라 행위 주체의 정치적 역량으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다시 니체로 돌아가, 능동적 힘의 회복을 제안한다. 반응이 작용을 잠식한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새로운 긍정의 지점을 삶에서 창조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한 '되기(devenir)'의 철학, 새로운 결합과 배치를 통한 자기 변형의 실천은, 르쌍티망의 시간을 끊고 새로운 현재를 여는 구체적 방법론이다.
이 네 길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운명애는 태도의 축이고, 사랑의 질서는 감정의 축이며, 용서는 시간의 축이고, 능동적 되기는 행위의 축이다. 르쌍티망이 이 네 축에 동시에 걸친 복합 현상이라면, 그 극복 또한 네 축을 함께 움직이는 작업이어야 한다.
맺음
르쌍티망은 감정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가치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무력한 자의 상상적 복수이지만, 그 상상이 역사적 현실을 바꿀 만큼 강력한 창조력을 가진다. 니체가 이를 폭로한 이후 한 세기 반이 지났지만, 디지털 기술과 글로벌 불평등이 결합한 오늘의 조건에서 르쌍티망은 오히려 더 정교하고 더 빠르게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르쌍티망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일이 아니다. 르쌍티망을 단죄하는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르쌍티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알려주는 것은, 이 감정의 구조를 투명하게 보는 것, 그 구조가 자기 안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 구조에 갇히지 않는 삶의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르쌍티망은 인간 조건의 일부다.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니체와 셸러와 들뢰즈와 아렌트가 각기 다른 길에서 말하려 한 것은 결국 그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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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쌍티망의 얼굴들, 소설과 영화 속 인간 개인의 해부
르쌍티망은 집단과 역사의 수준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날것으로 드러나는 곳은 한 개인의 방 안, 한 사람의 침묵과 시선과 미소 속이다. 문학과 영화는 이 감정을 철학 논문보다 먼저, 그리고 종종 더 정확하게 포착해왔다. 이 보고서는 아홉 개의 대표적 형상을 통해 르쌍티망이 개인에게 어떻게 싹트고 어떻게 발효되며 어떻게 폭발하는지, 그 심리적 운동 전체를 추적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에서 시작해 살리에리, 스메르댜코프, 쥘리앙 소렐, 쿤데라의 루드비크, 쥐스킨트의 그루누이, 멜빌의 바틀비, 박찬욱의 이우진, 토드 필립스의 아서 플렉에 이르기까지, 각 인물은 르쌍티망이 취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문학적 결정을 보여준다.
1. 지하생활자, 원형으로서의 독백
도스토옙스키가 1864년에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니체가 훗날 "심리학의 역사에서 최고의 행운"이라 불렀을 만큼 르쌍티망의 원형을 제시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40대의 퇴직 관리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좁은 지하방에 틀어박혀 20년 동안 혼자 독백한다.
그의 첫 문장은 유명하다. 자신이 병들어 있고 심술궂고 매력 없는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자기 비하는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먼저 공표함으로써 타자의 비판을 선제적으로 무력화하려는 기묘한 우위 선점의 전략이다. 자기 경멸의 형식으로 수행되는 자기 방어, 이것이 르쌍티망 심리의 가장 섬세한 운동이다.
그는 옛 동창들을 저녁 식사에 부르고,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순간을 상상 속에서 수백 번 되살리며, 그들에게 던지지 못한 말들을 밤새 다듬는다. 그의 복수는 언제나 상상 속에서만 완벽하다. 현실에서 그는 말을 더듬고, 잘못된 타이밍에 화를 내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현실의 무능이 심할수록 상상의 복수는 더욱 정교해진다. 들뢰즈가 말한 "반응이 작용의 자리를 차지한 상태"가 한 인간의 일인칭으로 살아 움직이는 장면이다.
이 인물이 무서운 것은 그가 자기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병을 진단할 만큼 영리하지만, 그 영리함이 오히려 병을 심화시킨다. 앎이 치유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자기 감옥이 되는 역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가 포착한 르쌍티망의 가장 어두운 진실이다.
2. 살리에리, 평범함의 도덕이 천재의 음악을 증오할 때
밀로스 포먼의 1984년작 아마데우스에서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빈 궁정의 존경받는 악장이다. 근면하고 경건하며 신에게 자신의 재능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서원은 조건이 붙어 있다. 신은 그의 경건함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음악적 위대함을 주어야 한다. 이 계약적 신심이 모든 비극의 출발이다.
모차르트가 등장하는 순간 그의 세계는 무너진다. 천박하고 유치하고 방탕한 이 청년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악이 자신이 평생의 노력으로도 닿지 못한 경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한다. 살리에리의 질문은 신을 향한다. 왜 그토록 천박한 그릇에 그토록 신성한 음악을 담으셨습니까.
이 지점에서 살리에리의 감정은 질투를 넘어 르쌍티망으로 응결된다. 그는 자신의 평범함을 겸허의 형식으로 숭고화하고, 모차르트의 천재를 신의 배반으로 규정한다. 자신의 무능은 '성실함'과 '경건함'이라는 선의 좌표로, 모차르트의 탁월함은 '오만함'과 '불경'이라는 악의 좌표로 재배치된다. 이것이 니체가 묘사한 노예도덕의 정확한 소형 모델이다. 자신의 한계를 덕으로 전환하고, 자신이 닿지 못한 것을 죄로 규정하는 이중의 작업.
영화의 가장 통렬한 장면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악보를 처음 읽는 순간이다. 손도 떨리지 않은 단 한 번의 필사로 그려진 완벽한 악보. 살리에리는 그 종이를 떨어뜨리며 울부짖는다. 그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알아볼 만큼의 귀를 가졌다. 바로 그 귀가 그의 저주다. 범재(凡材)의 가장 잔인한 처지는 탁월함을 알아보는 능력은 있으나 도달할 수는 없는 자리, 셸러가 지목한 르쌍티망의 온상 그 자체다.
3. 스메르댜코프, 사생아의 철학 수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가장 어두운 인물은 명시적 주인공들이 아니라 그림자에 머무는 사생아 스메르댜코프다. 요리사이자 하인으로 아버지 표도르의 집에서 자란 그는, 공식적으로는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채 가문의 오물 처리자 같은 자리에 머문다.
그의 르쌍티망은 두 층위로 발효된다. 하나는 출생 자체의 모욕이다. 그의 어머니는 동네의 정신지체 여자 리자베타였고, 그의 이름 스메르댜코프는 '악취 나는 여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이 낙인이 된 인간. 그는 그 낙인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반과의 관계다. 지식인 형 이반이 전개하는 무신론 철학,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를 스메르댜코프는 책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인다. 이반은 지적 유희로 파괴의 논리를 전개하지만, 스메르댜코프는 그 논리를 아버지 살해라는 현실로 번역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식인의 사유가 르쌍티망을 가진 실행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무서운 연금술이 일어나는지다.
스메르댜코프가 아버지를 죽인 뒤 이반에게 자신의 행위를 차갑게 설명하는 장면은 르쌍티망의 완결된 모습이다. 그는 이반이 원한 것을 대신 해주었다고 말한다. 이반이 머릿속에서만 상상한 아버지의 제거를, 자신이 손으로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 이 주장에는 오랜 굴욕의 복수가 담겨 있다. 자신을 무시한 친형을 공범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의 지성을 자신의 살인에 묶어 동등한 파멸의 자리로 내리는 것. 결국 이반은 뇌염에 걸려 무너지고, 스메르댜코프는 목을 매단다. 르쌍티망의 복수가 성공하는 순간은 언제나 모두의 파멸 안에서다.
4. 쥘리앙 소렐, 계급 사회에서 야망이라는 이름으로
스탕달이 1830년에 발표한 적과 흑의 쥘리앙 소렐은 르쌍티망이 어떻게 개인의 야망과 구별 불가능하게 뒤섞이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교한 사례다. 시골 제재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폴레옹의 자서전을 품고 다니며 계급 상승을 꿈꾼다.
쥘리앙의 복잡함은 그가 단순히 상층을 동경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귀족을 동경하는 동시에 경멸한다. 그가 레날 부인과의 연애를 시작할 때, 사랑은 욕망만큼이나 복수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부인의 손을 잡는 첫 접촉을 그는 전장의 승리처럼 기록한다. 그에게 귀부인의 침실은 계급이라는 적진의 깃발이고, 그 깃발을 빼앗는 행위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겪은 모욕에 대한 은밀한 응답이다.
그러나 이 응답의 방식이 르쌍티망적이다. 쥘리앙은 귀족들 앞에서 언제나 겸손하고 경건한 사제 지망생의 외피를 쓴다. 그가 실제로 품은 감정은 오만과 경멸이지만, 그것은 오직 일기와 독백에서만 드러난다. 외부 세계에 대한 위장된 순응과 내부 세계에 폭발하는 복수 욕망 사이의 영구적 분열, 이것이 르쌍티망이 개인의 전 생애를 관통할 때 취하는 형식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쥘리앙이 레날 부인을 총으로 쏘는 장면은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이성적으로 보면 총을 쏠 이유가 없는 시점에 총을 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그것이 유일하게 일관된 행위다. 평생 위장된 채 축적되어온 르쌍티망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 자신의 파멸을 동반하는 폭발로 터져 나오는 것. 단두대 앞에서 쥘리앙이 보여주는 묘한 평정은 르쌍티망이 자기 파괴로 완성된 자의 기이한 해방감이다.
5. 루드비크, 농담 한 줄의 30년짜리 이자
밀란 쿤데라의 1967년작 농담에서 주인공 루드비크는 대학생이던 시절, 연인에게 보낸 엽서에 장난스러운 한 줄을 썼다.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트로츠키 만세. 체코 공산당의 규율 시대에 이 한 줄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당에서 제명되고,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광산 노동자가 되어 강제 노역의 세월을 보낸다.
15년이 지나 루드비크가 돌아왔을 때, 그의 인생은 이미 만회할 수 없이 뒤틀려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옛 동지 제마넥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제마넥을 직접 치는 대신, 제마넥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해 그의 결혼을 파탄 내는 우회 전략을 택한다. 상상 속에서 정교하게 설계된 복수의 구도다.
소설의 잔인한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루드비크가 헬레나를 유혹해 관계를 맺은 뒤 알게 된 사실은, 제마넥이 이미 헬레나에게 관심을 잃고 다른 젊은 여자와 새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루드비크가 15년을 벼른 복수는 복수의 대상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한다. 그는 오직 헬레나 한 사람을 망가뜨렸을 뿐이다.
쿤데라가 보여주는 것은 르쌍티망의 시간적 역설이다. 복수는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 그 사이 피해자의 삶은 계속 흘러갔고, 가해자의 삶도 계속 흘러갔다. 15년 전의 상처를 15년 뒤의 인간에게 되갚으려 할 때, 그 인간은 이미 같은 인간이 아니다. 르쌍티망이 과거에 묶인 현재의 병리라는 들뢰즈의 정의가, 루드비크라는 한 인간의 찌그러진 중년으로 현현한다. 복수의 총구는 언제나 결국 자신을 향한다는 쿤데라의 냉소가 이 소설의 중심 선율이다.
6. 그루누이, 냄새 없는 자의 미학적 복수
파트릭 쥐스킨트의 1985년 소설 향수의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르쌍티망이 예술적 창조의 동력으로 전환되는 극단적 사례다. 18세기 파리의 생선 시장 바닥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몸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기이한 존재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체취로 타자에게 현존하는데, 그에게는 그 기본적 현존의 수단조차 결여되어 있다.
그루누이의 어머니는 그를 생선 내장과 함께 버리려 했고, 그는 생존 자체가 타자에 대한 조용한 모욕처럼 이어지는 삶을 산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천부의 재능이 있다. 인간 중 누구보다 뛰어난 후각이다. 세상 모든 냄새를 감별하고 기억하고 조합하는 능력,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몸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역설. 이 비대칭이 그의 르쌍티망의 뿌리다.
그의 복수는 장엄하고 끔찍하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을 죽여 그들의 체취를 추출하고, 그것을 조합해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향수를 만든다.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사형 집행장에서 이 향수를 뿌리자, 자신을 저주하러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황홀경에 빠져 그를 신처럼 경배한다. 그를 평생 멸시하고 무시한 세계가, 그 세계의 표면을 흔드는 한 방울의 향기 앞에서 무릎 꿇는다.
쥐스킨트가 그려내는 이 장면의 의미는 미학적 르쌍티망의 승리이자 파산이다. 그루누이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 성공의 순간 그는 자신의 복수가 공허함을 깨닫는다. 군중이 경배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훔친 냄새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 자신은 여전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루누이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자기 몸에 들이붓고, 파리의 부랑자들에게 스스로를 찢어 먹게 한다. 르쌍티망이 창조의 에너지로 승화된 순간에조차 그것은 자기 소멸로 귀결된다는 쥐스킨트의 냉혹한 결론이다.
7. 바틀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응의 극한
허먼 멜빌의 1853년 단편 필경사 바틀비는 르쌍티망을 다룬 문학 가운데 가장 미니멀하고 가장 불가사의한 작품이다. 월스트리트의 법률 사무소에 필경사로 들어온 바틀비는 처음에는 성실하게 일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모든 요청에 단 한 문장으로 답하기 시작한다. I would prefer not to. 안 하는 쪽이 좋겠습니다.
그는 서류 교정을 거부하고, 심부름을 거부하고, 나중에는 필사 자체를 거부하고, 마침내 사무실을 떠나는 것마저 거부한다. 폭력도 항의도 없다. 그저 조용하고 한결같은 거부만이 있다. 사무실 주인은 그를 해고할 수도, 쫓아낼 수도, 처벌할 수도 없다. 바틀비의 거부는 어떤 요구에도 정면으로 응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권력 관계의 회로를 단락시킨다.
바틀비를 르쌍티망의 인물로 읽는 것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그의 거부에는 분노도 정당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이 작품을 해석한 방식을 따라가면, 바틀비는 르쌍티망이 극단까지 발효되어 마침내 언어 자체의 거부로 결정(結晶)된 인간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능동적 참여가 불가능해진 자리에서, 거부 자체가 유일하게 남은 자기 표현의 형식이 된 상태.
바틀비의 결말은 상징적이다. 그는 결국 뉴욕의 교도소로 끌려가고,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다가 굶어 죽는다. 죽기 전 그의 이력이 공개된다. 그는 워싱턴의 사서(死書) 부서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배달되지 못하고 수신인 없이 소각되는 편지들을 처리하던 인간.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말들에 평생을 바쳤던 인간이, 마지막에는 모든 말을 거부하는 인간이 된다. 멜빌이 그린 것은 현대 사무실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르쌍티망이 침묵의 형식으로 결정화된 초상이다.
8. 이우진, 15년 동안 설계된 완전한 복수
박찬욱의 2003년작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르쌍티망의 영화적 형상화 가운데 가장 정교한 인물 중 하나다. 이 영화를 단순한 복수극으로 보는 것은 그 깊이를 놓치는 일이다. 이우진의 복수는 물리적 응징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의 복원이다.
고등학교 시절 오대수는 목격한 장면을 한 문장으로 전했다. 이우진이 누이와 관계를 맺는 장면이었다. 그 한 문장이 소문이 되고, 소문이 누이를 자살로 몰았다. 오대수에게 그 말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가십이었다. 이우진에게 그것은 세계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이우진이 선택한 복수는 오대수를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가두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복수의 전주곡일 뿐이다. 진짜 복수는 15년 뒤 오대수를 풀어놓고, 그가 자신도 모르게 딸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우진이 겪은 근친상간의 비극을 오대수에게 똑같은 구조로 재현시키는 것. 그것도 본인은 모르는 채로.
이것이 르쌍티망의 가장 무서운 형태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단순히 죽이거나 때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겪은 상처의 구조 자체를 오대수의 삶에 각인시키려 한다. 자기 고통을 타자에게 정확히 대칭되게 설계해 복사하는 것. 이 설계에 15년이 바쳐지고,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고, 치밀한 심리 조작이 동원된다. 르쌍티망이 한 인간의 전 생애를 하나의 프로젝트로 조직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이 자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삶은 복수를 설계하는 데 전부 쓰였고,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그의 삶은 더 이상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한다. 들뢰즈가 말한 망각의 무능이 한 인간을 그 자체로 복수의 기계로 전환시킨 사례다. 이우진은 15년 동안 단 한 순간도 누이를 잊지 못했고, 그 망각 불가능이 그의 모든 능동적 삶을 질식시켰다.
9. 아서 플렉, 21세기 도시가 만든 르쌍티망의 아이콘
토드 필립스의 2019년작 조커의 아서 플렉은 고전적 르쌍티망 인물들의 현대적 변형이자, 현대 도시 특유의 조건이 빚어낸 새로운 변종이다. 그는 고담의 싸구려 광대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중년 남자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약을 끊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낡은 아파트에 살고, 경련처럼 터져나오는 웃음을 통제하지 못한다.
아서의 르쌍티망은 한 방향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층위의 박탈이 겹쳐진 복합적 감정이다. 계급적 박탈(빈곤), 문화적 박탈(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없음), 관계적 박탈(어머니의 기만, 아버지의 부재, 짝사랑의 망상), 의료적 박탈(예산 삭감으로 약 처방 중단). 이 박탈들이 서로를 증폭하며 아서를 점차 인간 관계망 바깥으로 밀어낸다.
영화가 특히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은 아서의 르쌍티망이 구체적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를 이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복지 예산을 삭감한 시 정부, 그를 조롱한 지하철의 월스트리트 금융인들, 그를 이용하다 공개 방송에서 망신 준 머리 프랭클린, 그를 거짓말로 키운 어머니. 여러 얼굴의 가해가 중첩되어 있기에 그의 복수는 초점을 잃고 흩어진다. 지하철의 세 남자를 총으로 쏠 때, 머리 프랭클린을 생방송에서 쏠 때, 그의 폭력은 대상을 명료하게 겨누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 전체, 시스템 전체에 대한 발작적 반응이다.
영화의 가장 불편한 장면은 아서가 조커로 변신해 TV 쇼 무대 위에서 총을 들었을 때, 거리에 모여 있던 고담의 하층민들이 그를 영웅으로 환호하는 순간이다. 익명의 수많은 르쌍티망들이 아서라는 한 얼굴을 통해 공적 표현을 얻는 순간. 셸러가 근대 시민사회의 구조적 감정으로 진단한 르쌍티망이, 21세기 도시에서 어떻게 개인의 광기와 집단의 정치적 에너지 사이를 매개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커가 고전적 르쌍티망 인물들과 다른 지점은, 그가 자신의 상태에 대한 어떤 도덕적 외피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리에리는 경건함의 외피를, 쥘리앙은 예의의 외피를, 이우진은 사업가의 외피를 썼다. 아서는 어느 순간부터 외피를 벗는다. 광대 분장 아래 드러나는 것은 더 이상 위장되지 않은 분노의 민낯이다. 이 민낯성은 21세기 소셜미디어 시대의 르쌍티망이 점점 더 외피를 벗고 자기를 직접 전시하는 경향과 공명한다.
10. 아홉 인물의 공통 구조와 차이
이 아홉 인물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와 매체에 속하지만 공통의 구조를 공유한다.
첫째, 모두가 초기에 어떤 치명적 상처 혹은 결핍을 경험한다. 지하생활자의 사회적 고립, 살리에리의 재능의 한계, 스메르댜코프의 출생, 쥘리앙의 계급, 루드비크의 엽서, 그루누이의 무취, 바틀비의 사서 부서, 이우진의 누이의 죽음, 아서의 중첩된 박탈. 이 상처가 그들의 삶의 뿌리에 박힌 가시가 된다.
둘째, 이 가시를 뽑아낼 직접적 수단이 없다. 그들은 상처의 원인에 직접 응답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상처는 내부에서 발효된다.
셋째, 이 발효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지하생활자의 20년, 루드비크의 15년, 이우진의 15년. 르쌍티망은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다. 짧게 터지는 분노는 르쌍티망이 되지 못한다.
넷째, 이 발효의 과정에서 감정이 가치로, 사실이 도덕으로 재배치된다. 살리에리는 자신의 평범함을 경건함으로, 이우진은 자신의 복수를 정의의 구조 복원으로, 조커는 자신의 폭력을 시스템에 대한 응답으로 재정의한다. 르쌍티망이 언제나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동반하는 이유다.
다섯째, 복수가 성공하는 순간은 거의 언제나 파멸의 순간과 겹친다. 스메르댜코프의 자살, 쥘리앙의 단두대, 루드비크의 공허, 그루누이의 해체, 바틀비의 아사, 이우진의 자결, 조커의 정신병동. 르쌍티망의 가장 끈질긴 아이러니가 이것이다. 그것은 성공할수록 파괴된다.
그러나 차이도 있다. 지하생활자는 말하고, 바틀비는 거부하며, 살리에리는 기도하고, 쥘리앙은 위장하며, 이우진은 설계하고, 그루누이는 창조하며, 루드비크는 유혹하고, 아서는 춤춘다. 르쌍티망이 한 인간의 몸에 들어가 취하는 표현 양식은 문화, 계급, 시대, 성격에 따라 천 가지 얼굴을 가진다.
11. 맺음
문학과 영화가 르쌍티망을 이토록 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감정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둠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리에리를 경멸하지만 자신 안의 살리에리를 알아본다. 지하생활자를 비웃지만 밤의 독백에서 그와 닮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우진의 복수에 소름 끼치지만, 오래된 상처 앞에서 자신도 그만큼은 아니어도 비슷한 기울기의 감정을 품어본 적이 있음을 안다.
문학이 가르치는 것은 르쌍티망이 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이 무력과 모욕 앞에서 발휘하는 일종의 창조력이다. 문제는 그 창조력이 향하는 방향이다. 그것이 자기 파괴로 향할 때 스메르댜코프가 되고 쥘리앙이 되고 이우진이 된다. 그것이 자기 구성으로 향할 때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니체가 르쌍티망을 극복한 자리에 두려 한 '위대한 건강'이 그것이다.
문학과 영화는 이 극복의 사례를 덜 그린다. 극복된 르쌍티망은 이야기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갈등을 먹고 살고, 르쌍티망은 가장 풍부한 갈등의 광맥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이 인물들의 몰락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거꾸로 상상할 수 있다. 살리에리의 기도가 질투가 아닌 감사가 되었다면, 이우진의 설계가 복수가 아닌 애도가 되었다면, 아서의 웃음이 광기가 아닌 유머가 되었다면. 이 가정법들이 문학의 마지막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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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쌍티망의 두 전선, 자기 안의 발효를 멈추는 법과 타자의 발효에 휘말리지 않는 법
르쌍티망은 두 방향에서 한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안에서 자라나는 자기의 르쌍티망과, 밖에서 다가오는 타자의 르쌍티망이 그것이다. 첫 번째 전선에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자기와 싸워야 하고, 두 번째 전선에서는 자기를 지키되 상대를 닮지 않는 방식으로 거리를 설계해야 한다. 이 보고서는 니체와 셸러와 들뢰즈와 아렌트의 통찰을 더 구체적인 실천의 층위로 끌어내리고, 손자와 한비자와 장자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를 동원하여 르쌍티망의 화신과 마주한 자가 취해야 할 자세를 정리한다.
1. 첫 번째 단계, 자기 안의 르쌍티망을 알아보는 능력
극복의 모든 작업은 인지에서 시작한다. 르쌍티망은 한 번도 자기를 르쌍티망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의 가장 무서운 특성이다. 그것은 언제나 정의감, 도덕적 분노, 정당한 비판, 진실에 대한 충성이라는 외피를 쓰고 자기를 등장시킨다.
따라서 첫 번째 작업은 자기 감정의 미세한 신호를 읽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누군가의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구석이 미세하게 가라앉는 그 감각, 그러나 즉시 그 사람의 결점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을 평형으로 되돌리는 그 다음 동작. 이 두 동작 사이의 간격이 르쌍티망이 자라기 시작하는 정확한 자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매일 아침 자기 점검의 습관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그는 오늘 자신이 마주칠 인간들이 어떤 부류이며 자신이 어떤 충동에 휩쓸릴 수 있는지를 미리 점검했다. 르쌍티망의 인지 또한 이런 일상적 의례 안에서 가능해진다. 저녁에 그날의 감정 가운데 어떤 순간이 자기의 균형을 흔들었는지를 짧게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르쌍티망이 자라기 전에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의 정념(正念) 수행, 즉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거기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작업이 같은 기능을 한다. 알아차림 자체가 치료는 아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감정만이 인간을 점령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실이 여기 작동한다.
2. 시간의 회복, 적극적 망각의 훈련
니체가 르쌍티망의 인간에게서 결정적으로 결여된 능력으로 지목한 것은 망각이다. 건강한 인간은 어떤 사건을 겪고 그것을 소화한 뒤 잊을 줄 안다. 르쌍티망의 인간은 잊지 못한다.
여기서 망각은 사건의 부정이나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을 충분히 마주하고 충분히 다룬 뒤에 그것을 자기의 현재로부터 놓아주는 능력이다. 들뢰즈는 이를 적극적 망각(oubli actif)이라 불렀다. 수동적 망각이 단순한 기억의 흐려짐이라면, 적극적 망각은 의식의 의도된 작업이다.
실천의 차원에서 이것은 몇 가지 형태로 가능하다. 글쓰기의 의례가 그 하나다. 자기를 분노케 하거나 모욕한 사건을 한 번 정면으로 기록하는 것. 그 기록의 과정에서 사건을 자기의 언어로 정리하고, 정리된 그 기록을 다시 읽지 않는 것. 어떤 작가들은 이런 글을 봉투에 넣어 봉인하거나 일정 기간 뒤에 태우는 의례를 가진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시간의 매듭을 짓는 정신적 기술이다.
또 하나는 신체적 경계의 변경이다. 같은 장소에 머물면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같은 감정의 회로가 반복적으로 활성화된다. 르쌍티망의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서 멀리 떠나는 여행, 새로운 도시에서의 한 주,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의 노동은 의식의 차원에서 도달하지 않는 깊이까지 시간의 매듭을 끊어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코르크로 방을 두른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작동시킨 작업이다.
장자가 말한 좌망(坐忘)의 사상도 이 자리에서 만난다. 자기를 잊고 만물을 잊는다는 것은 외부 사건에 묶인 자기 동일성을 풀어 시간의 흐름 안에 다시 놓는 작업이다.
3. 가치의 자기 정초, 비교에서 긍정으로
르쌍티망의 핵심 메커니즘은 자기 가치를 타자와의 비교에서 끌어오는 데 있다. 약자의 도덕은 자신이 강자가 아님을 먼저 확인하고, 강자가 아닌 자신을 선이라 규정하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 성립한다. 따라서 극복의 결정적 작업은 자기 가치의 좌표를 비교의 평면에서 자기 긍정의 평면으로 옮기는 것이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라 부른 자세가 이것이다. 지금 이 삶이, 이 한계와 이 결함과 이 상처를 모두 포함한 채로, 무한히 반복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자에게 타자와의 비교는 더 이상 자기 정의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자기 역량의 충만한 발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상적 결단이 아니라 일상의 조직 방식의 문제다. 매일의 시간 가운데 얼마만큼이 자기의 능동적 작업에, 자기가 진심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에 쓰이고 있는가. 그 비율이 충분하지 않을수록 비교의 충동은 강해진다. 자기 안에서 의미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인간은 의미를 외부에서 얻으려 하고, 외부에서 의미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비교다. 거꾸로 자기 안에 의미의 광맥이 충분히 가동되고 있을 때 비교의 충동은 자연스럽게 사그라진다.
공자가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한 것,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고 한 것의 한 의미가 이것이다. 그릇은 비교의 대상이 된다. 큰 그릇이냐 작은 그릇이냐, 귀한 그릇이냐 천한 그릇이냐. 그릇이 아닌 자는 자기를 그릇의 척도 위에 두지 않는다.
4. 신체와 행위, 능동적 힘의 일상적 회복
들뢰즈가 르쌍티망을 반응적 힘이 능동적 힘의 자리를 차지한 상태로 정의한 것은 매우 구체적인 함의를 가진다. 인간이 머릿속에서만 살고 있을 때,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만 시간을 보낼 때, 르쌍티망은 가장 잘 자란다. 따라서 능동의 회복은 우선 신체와 행위의 차원에서 일어나야 한다.
규칙적인 신체 활동, 특히 자기의 몸을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활동이 결정적 의미를 가진다. 달리기, 등산, 무술, 정원 가꾸기, 목공. 이런 활동의 공통점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외화라는 점이다. 몸이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 정신도 능동의 모드를 회복한다.
또 하나는 작업의 차원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구별한 통찰이 여기서 빛난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이고, 작업은 자기의 능력으로 세계에 무엇인가를 남기는 일이며, 행위는 타자와 더불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인간에게 결여되는 것은 작업과 행위의 시간이다. 자기의 흔적을 세계에 남기는 작업,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행위가 일상에 충분히 들어와 있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장자의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우화가 이 차원을 정확히 보여준다. 포정의 칼이 소의 결을 따라 막힘없이 움직일 때, 그는 비교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자기 작업의 충만함이 그 자체로 그를 르쌍티망 너머의 자리에 두기 때문이다.
5. 좋은 적의 발견, 르쌍티망과 다른 적개심의 형식
니체는 흥미롭게도 적(敵)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구별했다. 르쌍티망의 인간은 적을 만들지만 그 적을 진정으로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는 적을 단죄하고 비방하지만, 그 적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반면 귀족적 인간은 좋은 적을 갖는 것을 일종의 영광으로 여긴다.
좋은 적이란 자기를 자라게 하는 적이다. 자기보다 강하거나 자기와 다른 미덕을 가진 자, 자기에게 결여된 것을 가지고 있어 자기로 하여금 더 높이 도달하게 자극하는 자. 이런 적과 마주할 때 인간은 비방의 충동이 아니라 학습의 욕망을 느낀다.
검도와 유도의 도장에는 오래된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가장 많이 패배시키는 자를 가장 깊이 존경하라는 것. 그가 자신을 가장 빠르게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자세는 르쌍티망과 정반대 방향에 있다. 자신을 패배시킨 자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르쌍티망이라면, 자신을 패배시킨 자를 자기의 스승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이 능동적 자세다.
일터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자기보다 뛰어난 동료를 발견했을 때 첫 반응이 그의 결점을 찾는 것이라면 르쌍티망의 회로가 가동된 것이고, 첫 반응이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라면 능동의 회로가 가동된 것이다.
6. 사랑의 질서, 그리고 용서의 정치
셸러가 르쌍티망의 극복 처방으로 제시한 사랑의 질서(ordo amoris)는 매우 구체적인 함의를 가진다. 모든 대상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의 크기와 순서가 있고, 이 질서가 흐트러질 때 인간은 병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의 실천적 번역은 자기 시간과 정성의 분배를 점검하는 일이다. 르쌍티망에 사로잡혔을 때 인간은 자기 시간의 상당량을 자기를 모욕한 자, 자기와 비교되는 자,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 대한 생각으로 채운다. 그 시간에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자기가 정성을 들여야 할 작업, 자기가 돌보아야 할 자기 자신은 방치된다.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다.
질서의 회복은 의식적 결정에서 시작한다. 오늘 하루 내가 가장 깊이 정성을 들여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누구의 안부가 내게 가장 중요한가. 어떤 작업이 내 삶의 핵심에 자리하는가. 이 질문을 정기적으로 던지고, 답에 따라 시간을 다시 분배하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르쌍티망의 시간 점령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용서를 인간 행위의 핵심 능력으로 제시한 것 또한 여기에 닿는다. 용서는 종교적 미덕이기 이전에 정치적 능력이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미래를 결정짓는 끈을 끊어내는 행위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잊는 것도, 그 사건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사건이 자기의 미래를 더 이상 결정짓지 못하게 하는 결단이다. 르쌍티망의 가장 깊은 뿌리가 과거에 점령된 현재라면, 용서는 그 점령을 해제하는 정치적 행위다.
이로써 자기 안의 르쌍티망 극복을 위한 여섯 갈래의 길이 정리되었다. 인지, 시간의 회복, 가치의 자기 정초, 신체와 행위, 좋은 적, 사랑의 질서와 용서. 이 여섯은 서로를 보강하는 동심원이다.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여섯이 함께 움직일 때 르쌍티망의 회로는 약해진다.
7. 르쌍티망의 화신을 식별하는 법
여기서부터는 다른 전선이 시작된다. 자기 밖에서 다가오는 르쌍티망의 인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첫 번째 작업은 그를 알아보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화신은 몇 가지 일관된 신호를 보낸다. 첫째, 그는 대화의 상당 부분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에 대한 평가로 채운다.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보다, 누가 잘못되었고 누가 부도덕하며 누가 부당하게 성공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언어를 점령한다.
둘째, 그의 비판은 일관되게 도덕화의 외피를 쓴다. 그는 누군가의 능력이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부정직하고 비윤리적이며 사악하다고 말한다. 능력의 차이를 도덕의 차이로 번역하는 것이 르쌍티망의 가장 일관된 작동이다.
셋째, 그의 분노는 좀처럼 직접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비판하지만, 자기가 비판하는 자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무대는 언제나 그 사람이 없는 곳, 그 사람의 등 뒤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가 옛 동창들을 향해 던질 말을 밤새 다듬으면서도 정작 그들 앞에서는 더듬는 장면이 르쌍티망의 행동학적 표본이다.
넷째, 그의 시간 의식이 과거에 묶여 있다. 어떤 대화든 결국 오래된 사건, 오래된 모욕, 오래된 부당함으로 회귀한다. 5년 전, 10년 전, 20년 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그의 언어 안에 살아 있다. 들뢰즈가 말한 망각의 무능이 한 인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이 이것이다.
다섯째, 그는 타자의 성공에 대해 첫 반응으로 의심을 보낸다. 누군가가 좋은 일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는 그것이 진짜인지를 묻거나, 그 뒤에 어떤 부정이 숨어 있을지를 추측하거나, 그 사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는 이유를 찾는다. 타자의 좋음을 그대로 좋음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이 다섯 가지 신호 가운데 셋 이상이 일관되게 나타난다면, 그 인간은 르쌍티망의 화신일 가능성이 높다.
8. 거리의 설계, 적이 되지 않는 거리 두기
르쌍티망의 인물을 알아본 다음의 작업은 거리의 설계다. 여기서 결정적 원칙이 있다. 그를 적으로 만들지 말 것. 적이 되는 순간 그의 르쌍티망의 정확한 표적이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가까이 두지도 말 것. 가까이 둘수록 그의 발효된 감정이 자기에게 옮아오기 때문이다.
손자가 병법에서 말한 가장 높은 단계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 가장 좋은 대응은 그와 정면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되 그 거리를 적대로 표현하지 않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남의 빈도를 줄이되 만났을 때는 평정하게 응대하고, 깊은 정보의 공유는 피하되 표면적 예의는 지키며, 협업이 필요할 때는 명확한 경계 안에서 협업하되 사적 친밀의 영역으로는 끌어들이지 않는다.
장자의 산목(山木) 편에 빈 배의 비유가 있다. 강에서 배를 저어 가다 다른 배와 부딪쳤을 때,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분노가 일지만, 그 배가 빈 배라면 분노가 일지 않는다는 우화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대할 때 가장 유용한 자세 가운데 하나가 그를 빈 배로 다루는 것이다. 그의 비방과 의심과 도덕적 단죄가 흘러올 때 거기에 자기를 단단한 사물로 두고 부딪치는 대신, 자기를 비워 그 흐름이 자기 앞을 그냥 통과하게 하는 것. 이것은 비겁이 아니라 정교한 무공이다.
9. 단정한 응대, 그러나 도덕화 함정에 빠지지 않기
르쌍티망의 인물과 직접 대화해야 할 때, 가장 흔한 함정은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는 것이다. 그가 보이는 비열함, 비합리, 비일관에 분노하여 그것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충동에 굴복하는 순간, 자기 또한 그와 같은 회로에 들어선다.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를 선으로 정의하는 그 동작이 정확히 르쌍티망의 동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대의 원칙은 단정함이다. 그의 말에 정서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실의 차원에서만 응답하며, 도덕적 평가를 자기의 입에 담지 않는 것. 그가 누군가를 비방할 때 동조하지도 반박하지도 않고, 그저 다른 화제로 옮기는 기술. 그가 자기에게 모욕을 던질 때 그 모욕을 받아치지 않고 마치 그것이 거기 없는 것처럼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는 평정.
공자가 이직보원(以直報怨), 정직으로 원한에 답한다고 한 것의 한 의미가 이것이다. 노자식의 무대응도 아니고 함무라비식의 보복도 아닌, 사태의 결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응대. 그가 부당한 비난을 던질 때 그 비난의 사실관계만을 차분히 정정하고 그 이상의 감정은 싣지 않는 것이 직(直)의 응답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매일 아침 자기에게 일러두었다. 오늘 나는 무례한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거짓된 자, 시기하는 자를 만날 것이라고. 그들이 그러한 것은 그들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분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자세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자기 보호의 기술이다. 상대의 본성에 놀라지 않으면 자기의 균형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10. 정보의 비대칭, 노출하지 않는 것의 무게
한비자가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법을 논한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정보의 비대칭이다. 군주는 신하의 마음을 읽되 자기의 마음을 신하에게 읽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대할 때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르쌍티망의 인물에게 자기의 약점, 자기의 상처, 자기의 진로 계획, 자기의 진심을 노출하는 것은 그것을 무기고에 적재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 정보를 즉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자기가 그를 추월하거나 그가 자기에게 르쌍티망을 작동시킬 빌미를 얻었을 때, 그 정보는 정확히 자기에게 가장 아픈 자리를 찌르는 송곳이 된다.
따라서 노출의 깊이를 의식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일과 사실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소통하되, 자기의 내면, 자기의 감정, 자기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신중하게 다루는 것. 친밀의 외피를 가지고 접근해 오는 르쌍티망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 원칙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친밀의 깊이는 시간과 검증을 거친 자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 불신의 권유가 아니다. 인간을 그의 실제 능력과 실제 자세에 맞게 다루어야 한다는 분별의 권유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깊이의 신뢰를 주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분별의 결여다.
11. 정면 대응의 시점과 방법
거리 두기와 단정한 응대로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즉 르쌍티망의 화신이 직접적인 가해의 단계로 들어왔을 때는 정면 대응이 필요하다. 이때의 원칙은 신속, 명확, 비도덕화다.
신속함이 결정적인 이유는 르쌍티망의 가해가 시간과 함께 누적되기 때문이다. 첫 가해를 묵인하면 두 번째 가해의 문턱이 낮아지고, 두 번째를 묵인하면 세 번째는 거의 자동화된다. 따라서 명백한 가해의 첫 사례에서 분명한 응답이 가야 한다.
명확함이란 자기가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모호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다. 비유나 암시가 아니라 사실관계와 행위의 차원에서 그 행위가 있었고 그 행위가 자기에게 어떤 손해를 끼쳤으며 자기는 그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는 명료한 진술. 이때 도덕적 단죄의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를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는 대신, 그의 어떤 행위가 어떤 사실적 결과를 초래했는지만을 말하는 것. 이것이 비도덕화의 원칙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일관된 강도의 응답이라는 원칙도 여기서 작동한다. 가해에 대한 응답은 가해의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 약한 가해에 과도한 응답을 하면 자기가 르쌍티망의 인물로 보이게 되고, 강한 가해에 약한 응답을 하면 가해는 계속된다. 비례의 정확성이 신뢰의 자리를 만든다.
이 정면 대응의 결과 그가 자기를 더 강하게 미워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야 할 결과다. 르쌍티망의 화신과의 관계에서 그의 호의를 얻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다. 가능한 목표는 그가 자기에게 가해할 수 있는 영역을 좁히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12. 그를 대하며 내가 르쌍티망에 빠지지 않는 길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오래 상대하다 보면 자기 안에 그를 향한 르쌍티망이 자라나는 위험이 있다. 그가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도 그를 미워하게 되고, 그의 비방을 곱씹으며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자기 언어를 키우는 것. 이렇게 되면 르쌍티망의 화신과 마주한 자기가 또 하나의 르쌍티망의 화신이 된다.
이를 막는 첫 번째 원칙은 그에 대한 생각의 시간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그가 자기 의식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것. 그를 다루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를 생각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그를 자기 마음 밖에 두는 것. 이것은 의식적 훈련을 요구하지만 가능하다.
두 번째는 그에 대한 자기 언어를 점검하는 것이다. 친구나 가족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기가 사용하는 어휘가 그가 사용하는 어휘와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언어, 그의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언어, 그의 사소한 결점을 부풀리는 언어. 이런 언어가 자기 입에서 자라나면 르쌍티망의 회로가 가동되기 시작한 신호다.
세 번째는 그에 대한 우월감의 함정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기는 르쌍티망의 화신이 아니므로 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그 의식 자체가 새로운 르쌍티망의 자리다. 자기를 그와 비교하여 평가하는 순간, 자기 또한 비교의 평면 위로 끌려 들어간 것이다. 자기 가치의 좌표를 자기 작업과 자기 사랑의 차원에 놓고, 그를 그 좌표 안에 두지 않는 것. 그가 자기의 풍경에서 가장 먼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 이것이 자기를 지키는 마지막 기술이다.
장자가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말한 것은 이 자리에서도 빛난다. 르쌍티망의 화신은 자기에게 어떤 쓸모도 없고 어떤 자라남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통해 자기가 르쌍티망의 회로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운다면, 그 자체가 무용 가운데의 큰 쓸모다. 그는 자기에게 가장 강력한 반면교사가 된다. 자기가 무엇이 되지 말아야 하는지를 매일 가르쳐주는 살아 있는 거울. 이렇게 다룰 수 있을 때,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자기의 적이 아니라 자기 수련의 도구가 된다.
13. 예방의 원칙,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만남을 만들지 않는 것
여기까지의 모든 작업, 자기 안의 발효를 멈추는 여섯 길과 타자의 발효에 휘말리지 않는 여섯 길을 다시 돌이켜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두 전선 모두에서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만남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자기 안에 르쌍티망이 자라는 가장 큰 원료는 르쌍티망의 화신과의 반복된 접촉이다. 그의 비방을 듣고, 그의 의심을 받아내고, 그의 도덕적 단죄에 노출되면서, 자기 안에도 그를 향한 동일한 회로가 만들어진다. 르쌍티망은 전염성이 있고, 그 전염은 가까이 있을수록 깊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이 원료의 공급 자체가 끊어진다.
거꾸로 타자의 르쌍티망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그 타자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선 다음에 거리를 설계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그 자장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비용이 적다.
따라서 모든 처방의 맨 앞에 놓여야 할 것은 예방이다. 앞 12개의 길은 이미 관계가 시작된 자리에서 작동하는 기술이지만, 가장 깊은 지혜는 그 관계 자체를 시작하지 않는 안목이다.
예방의 첫 동작은 관계의 초기에 르쌍티망의 신호를 읽어내는 것이다. 7장에서 정리한 다섯 신호, 즉 타자에 대한 평가가 대화를 점령하는가, 비판이 일관되게 도덕화되는가, 분노가 등 뒤에서만 작동하는가, 시간 의식이 과거에 묶여 있는가, 타자의 성공에 첫 반응이 의심인가. 이 신호들은 처음 몇 번의 대화에서 이미 드러난다. 그 단계에서 관계의 깊이를 더 들이지 않는 결단이 모든 후속 비용을 절감한다.
여기서 회피 가능한 관계와 회피 불가능한 관계의 분별이 결정적이다. 친밀한 사적 친구의 자리, 사업의 동업자, 깊이 의지하는 멘토, 영혼을 나누는 동료. 이런 자리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리다. 르쌍티망의 신호가 보이면 그 자리에 그를 들이지 말 것. 반면 가족, 직속 상사, 이미 시작한 동업, 좁은 공동체의 구성원처럼 회피가 어려운 관계는 거리의 정밀한 설계로 가야 한다. 분별의 첫 작업은 자기 앞의 관계가 어느 쪽인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다.
만남을 회피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거두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보아서야"라는 자기 검열이 종종 작동한다. 이 검열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 모든 사람을 동등한 깊이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이라는 가정이 잘못이다. 셸러가 사랑의 질서라 부른 것의 한 함의는 사람을 그의 실제 자세에 맞게 서로 다른 깊이로 다루는 분별이다. 이 분별은 차별이 아니라 사랑의 한 형식이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자기 삶의 가까운 자리에 들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의 무너짐이다.
둘째, 정과 의리와 과거의 인연이라는 명분이 회피를 막을 때, 그것은 종종 진정한 정이나 의리가 아니라 자기가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무능에 대한 사후적 합리화다. 진정한 의리는 자기를 갉아먹는 관계 안에서 자기를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바깥에서도 그가 잘 살기를 비는 거리감 있는 자세에 더 가깝다.
장자의 무용지용도 여기서 한 번 더 점검해야 한다. 앞서 12장에서 르쌍티망의 화신마저 반면교사로 활용하라고 말했지만, 이 가르침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무용한 것이 큰 쓸모를 가지지는 않는다. 어떤 무용함은 그저 무용하다. 르쌍티망의 화신을 자기 풍경의 일부로 굳이 끌어들여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려 하는 결심은, 종종 자기를 그 관계에 묶어두는 또 하나의 사슬이 된다. 12장의 가르침은 회피 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마지막 안전장치이지, 회피 가능한 관계를 굳이 유지하라는 권유가 아니다.
시간의 분별도 필요하다. 한두 번 거쳐가는 일시적 관계라면 짧게 견디고 흘려보내는 편이 낫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있는 관계라면 초기에 분명한 거리를 두는 것이 비용이 가장 적다. 르쌍티망의 화신은 시간이 갈수록 자기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자기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서사를 정교화한다. 5년 동안 묵인한 관계는 5년 분의 무기고를 그에게 적재시킨 셈이 된다. 단호함의 시점은 언제나 지금이지 나중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회피의 결정 자체가 또 하나의 르쌍티망이 되지 않게 하는 분별이 필요하다.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기를 그 악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분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순히 그 관계가 자기의 사랑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는 차분한 판단으로 떠나는 것. 그를 비난하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떠나는 것. 그가 자기 풍경의 주변부에서 자연스럽게 흐려져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떠남의 가장 정갈한 형식이다.
손자가 병법의 가장 높은 단계로 든 것이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 싸우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리가 있다. 적과의 싸움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 손자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 더 높은 단계가 르쌍티망에 대해 적용되는 마지막 지혜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것. 처방을 잘하는 것보다, 처방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 머무는 것.
맺음, 예방이 모든 처방의 앞에 선다
자기 안의 르쌍티망 극복과 타자의 르쌍티망 다루기, 그리고 이 두 작업의 가장 효과적 형식인 만남의 예방. 이 셋이 하나의 통합된 자기 보호의 체계를 이룬다.
니체와 셸러와 들뢰즈와 아렌트가 보여준 정교한 처방들은 이미 르쌍티망이 자라기 시작한 자리에서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러나 손자와 장자가 가리키는 더 깊은 지혜는 그것이 자라기 시작할 자리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두 지혜는 서로를 보강한다. 예방이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처방의 기술이 필요하고, 처방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예방의 안목이 더 중요하다.
매일의 자기 점검에는 세 질문이 함께 들어 있어야 한다. 오늘 자기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 르쌍티망의 싹은 무엇인가. 오늘 자기에게 다가오는 르쌍티망의 화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리고 오늘 자기 삶에 처음부터 들이지 말아야 할 르쌍티망의 인물은 누구인가. 이 세 질문이 의식의 일상이 될 때, 르쌍티망은 더 이상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일부로 거기 있되, 자기의 풍경을 점령하지는 못한다.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 부른 상태는 르쌍티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르쌍티망이 자라날 수 있는 조건이 자기 안과 자기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자기의 시간을 점령하지 못하게 매일 다시 만들어내는 자리다. 이 자리는 만들어진 적이 없으므로 매일 다시 만들어야 하고, 그 만들어냄의 가장 큰 부분은 무엇을 들이지 않을 것인가의 결정이다. 들이지 않은 것이 자기를 가장 깊이 지킨다. 동서 철학자들이 다른 어휘로 가리켜온 자유의 한 모습이 이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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