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 영웅의 길을 택하다
테세우스, 아테네에 가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두 번 결혼했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자 그는 델포이로 향했다. 신탁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신탁은 모호한 한 줄로 그에게 답을 주었다.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에는 포도주 자루의 입을 열지 말라."
아이게우스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쪽 끝의 작은 도시 트로이젠에 들렀다. 그곳의 왕 피테우스를 찾아가 신탁의 의미를 물었다. 피테우스는 곧 신탁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스어에서 포도주 자루의 입을 연다는 것은 남자가 여인과 동침함을 가리키는 비유였다. 즉 신탁은 아테네에 돌아갈 때까지 어떤 여인과도 동침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피테우스는 그 의미를 알면서도 아이게우스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자기 딸 아이트라와 동침시켰다. 위대한 왕의 핏줄을 자기 가문에 끌어들이려는 계략이었다.
아이게우스는 임신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테네로 돌아가야 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만약의 일을 대비해 큰 바위를 들어 올려 그 아래 자기 칼과 샌들을 묻어두었다. 그리고 아이트라에게 말했다. "혹 아들이 태어나 자라서 이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거든, 그 칼과 샌들을 가지고 아테네로 보내라. 그것이 내 아들의 증표가 될 것이다."
아이트라가 낳은 아이 테세우스가 자라 열여섯 살의 청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아이게우스의 바위를 들어올렸다. 테세우스는 칼과 샌들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아테네로 떠났다.
트로이젠에서 아테네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바닷길과 육로이다. 바닷길은 사로니코스 만을 가로지르는 빠르고 안전한 길로서, 좋은 배 한 척이면 며칠 안에 아테네에 닿을 수 있었다. 육로는 달랐다. 코린토스 지협을 거쳐 아테네까지 이르는 그 길에 살인자 도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누구도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는 테세우스에게 안전하고 빠른 바닷길을 권했다. 16년을 키운 자의 사랑은 영웅이 되는 길이 아니라 안전한 길을 가리킨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그 권유를 거절하고 육로를 택했다. 자신의 영웅적 자질을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본격적으로 길에 들어서자 도적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첫째 도적은 페리페테스였다. 헤파이스토스의 아들로 청동 곤봉으로 지나가는 자를 때려 죽이는 악당이었다. 테세우스는 그를 죽이고 그 곤봉을 자기 무기로 삼았다. 둘째 도적은 시니스로서, 두 그루의 소나무를 굽혀 사람의 팔다리를 묶은 뒤 놓아, 사람을 둘로 찢어 죽였는데, 테세우스는 그의 방식으로 그를 죽였다. 셋째는 길 가는 자들을 짓밟아 죽이던 크롬뮈온의 거대한 멧돼지 괴물이었는데, 이 짐승 역시 테세우스가 죽였다.
넷째 도적은 스키론이었다. 절벽 위에 자리잡고 지나가는 자에게 자기 발을 씻으라고 강요한 뒤, 발을 씻을 때 발길질로 절벽 아래 바다로 떨어뜨려 거대한 거북에게 먹히게 했다. 다섯째 도적은 케르키온이었다. 지나가는 자에게 레슬링을 강요해 죽이던 자다. 테세우스는 그들을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처치했다.
여섯째 도적은 유명한 프로크루스테스였다. 자기 침대에 사람을 강제로 눕힌 뒤,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죽이는 악당이었다. 테세우스는 그를 그의 침대에 눕혀 같은 방식으로 죽였다.
여섯 도적을 통과한 뒤 청년은 마침내 아테네에 닿았다. 손에는 아버지의 칼이 들려 있었고, 발에는 아버지의 샌들이 신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트로이젠을 떠날 때의 어린 청년이 아니라, 어엿한 영웅의 풍모를 갖추었다.
영웅의 선택, 그 의미
테세우스는 굳이 왜 그 위험한 길을 택했을까?
테세우스는 안전한 길로도 갈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도, 시간도, 명분도 모두 안전한 길에 있었다. 바닷길로 갔어도 그는 아이게우스의 아들이었고, 아테네의 후계자였다. 후일의 영광을 그가 모두 누렸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영웅의 영광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한 왕의 후계자, 한 시대의 한 왕으로 기록되었을 뿐, 그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영웅이었기에 험한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험한 길을 택했기에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다. 자기 자신을 시련에 던져 스스로를 단련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일신에 전속된 권리에 속한다. 그 권리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행사하는 것이다. 행사되지 않는 권리는 권리가 아니라 가능성에 머문다. 잠재된 자질도 그러하다. 시험되지 않은 자질은 의미가 없다.
여기에 엄중한 의미가 있다. 자기를 시험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산다. 가질 수 있었던 자질, 도달할 수 있었던 자리, 만들 수 있었던 운명. 이 모든 것이 잠재된 채로 그와 함께 사라진다. 자질은 시험되어야 자질이 된다. 영웅이 되려는 자는 자기를 시험할 권리를 스스로 행사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대신 행사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웅이 만들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바닷길은 빠른 길이고, 육로는 시간이 걸리는 길이다. 테세우스는 시간을 버는 길이 아니라 시간을 쓰는 길을 택했다. 그가 도적 여섯을 차례로 만나는 동안 사촌 헤라클레스는 이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 시간이 손해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그를 만들었다.
영웅이 되는 데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 든다. 도적과 마주치는 시간, 두려움 속에서 결단하는 시간,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시간. 이 시간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건너뛴 시간은 후일 반드시 다시 와서 그를 시험한다. 단단한 토대 없이 빠른 영광을 거둔 자가 결정적 위기에서 무너지는 풍경이 그래서 그렇다. 빠른 길을 택한 자는 시간을 절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랄 시간을 잃은 것이다.
여섯 시련의 다양성
여섯 도적의 풍경에서 또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각 도적이 다른 살해 방식을 가졌다는 점이다. 곤봉, 소나무, 절벽, 레슬링, 침대. 한 가지 시련을 통과한 자도 다른 시련에 무너질 수 있다. 영웅이 되려면 다양한 종류의 시련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한 가지를 잘 해낸 자가 다른 시련에 무너지는 풍경은 어느 시대에나 흔하다. 여섯 도적을 모두 통과한 자만이 아테네의 후계자가 된다.
그리고 더 깊은 디테일이 있다. 테세우스가 각 도적을 그들이 죽이던 방식 그대로 죽였다는 점이다. 페리페테스의 곤봉으로 페리페테스를. 시니스의 소나무로 시니스를. 스키론의 발길질로 스키론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프로크루스테스를.
여기서 솟는 통찰이 결정적이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는 자기가 다른 이를 죽이던 방식으로 죽는다. 신화는 5천 년 전에 이미 한 가지 정의를 기록해두었다. 폭력의 도구를 만든 자는 그 도구의 형벌을 받는다.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이를 짓밟던 자는 같은 부당한 방법으로 짓밟힌다. 이 정의는 신들이 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인간 세계 자체에 내장된 정의다. 시간이 흐르면 그 정의가 작동한다.
여섯 도적 중 마지막 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짊어지는 결은 따로 다루어야 할 만큼 무겁다. 단순한 살해 도구가 아니라 한 시대의 표준이 가진 폭력성을 가리킨다. 그 결은 다음 자리에서 다시 펼쳐야 한다.
영웅은 스스로 만들어진다
트로이젠의 갈림길에 선 한 청년. 두 길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가 한쪽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이 그를 만들었다. 만약 그가 다른 길을 택했다면, 우리는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다. 그를 만드는 것은 그의 선택이다. 자질이 선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자질을 만든다.
이 순서의 전도가 청년기의 가장 결정적 가르침이다. 우리는 흔히 자질이 먼저 있고 그 자질에 맞는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영웅이 영웅적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영웅적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화는 다른 순서를 기록한다. 영웅적 선택을 한 자가 영웅이 되는 것이지, 영웅이 영웅적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테세우스는 갈림길에 섰을 때 영웅이 아니었다. 트로이젠에서 자란 한 청년이었다. 그가 험한 길을 택한 그 순간 영웅의 길로 들어섰다. 도적 여섯을 통과하면서 그는 영웅이 되어 갔다.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영웅 테세우스였다.
모든 영웅은 한때 갈림길에 섰던 청년이었다.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는가가, 그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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