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 관한 포괄적 심층 연구 보고서: 힘의 형이상학, 역사적 필연성, 그리고 은총의 기하학
1. 서론: 재앙의 시대와 철학적 증언
1.1 연구의 배경 및 1940년의 역사적 위기
본 보고서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독창적이고 고뇌에 찬 사상가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에세이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를 철학적,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해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39년 여름에 집필이 시작되어 1940년 프랑스의 함락이라는 국가적 재앙 속에서 완성된 이 텍스트는 단순한 문학 비평을 넘어선다.1 나치 독일의 기계적인 군사력이 유럽을 유린하던 시기, 베유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통해 인류 역사의 저변에 흐르는 가장 근원적인 작동 원리인 '힘(Force/La Force)'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했다. 당시 그녀는 마르세유에서 발행되던 문예지 《카이에 뒤 쉬드(Cahiers du Sud)》에 '에밀 노비스(Emile Novis)'라는 아나그램 필명으로 이 글을 기고했다.2 이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당시의 정치적 탄압을 고려한 선택이었으나, 동시에 텍스트 자체가 지닌 보편적 진리를 익명성 뒤에서 더욱 강력하게 발화하려는 의도와도 맞닿아 있다.
베유에게 1940년의 유럽은 트로이의 함락과 동일한 시공간적 좌표 위에 있었다. 그녀가 목격한 것은 인간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과정이었다.4 공장 노동자로서의 체험과 스페인 내전 참전을 통해 육체적 고통과 굴종을 이미 뼈저리게 체득했던 베유는, 전쟁을 영웅들의 서사가 아닌 영혼을 파괴하는 거대한 '중력(Gravity)'의 작용으로 인식했다.4 따라서 본 연구는 베유의 텍스트를 단순한 고전 해석이 아닌,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보고서로 규정하고 이를 심층 분석한다.
1.2 호메로스의 거울: 진보의 허상과 힘의 영원성
베유는 서두에서 근대인들이 신봉해 온 '진보'의 개념을 가차 없이 타격한다. 많은 이들이 힘과 폭력이 과거의 유물이며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으나, 베유에게 『일리아스』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거울"이었다.2 그녀는 힘이 인간 역사의 중심에 항상 존재해 왔으며,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 힘의 본질을 어떠한 기만도 없이 드러내는 유일무이한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힘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작동한다. 그것은 사용하는 자와 당하는 자 모두를 옭아매는 거미줄과 같으며, 이 거미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본 보고서는 베유가 정의한 힘의 개념이 어떻게 인간을 사물화(reification)하는지, 그리고 그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아주 드물게 은총(Grace)의 순간을 맞이하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2. 힘(Force)의 현상학과 존재론적 전이
2.1 힘의 정의: 인간을 사물로 환원하는 'X'
베유의 에세이는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명징한 정의 중 하나로 시작된다.
"『일리아스』의 진정한 영웅, 진정한 주제, 중심은 바로 힘(Force)이다. 인간에 의해 행사되는 힘,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힘, 그 앞에서 인간의 육체가 쪼그라드는 힘이다.".7
베유는 '힘'을 물리적인 타격이나 군사적 위력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 위상(status)을 변형시키는 형이상학적 실체로 규정한다.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힘은 "그것에 복종하는 사람을 사물(thing/chose)로 만드는 그 무엇(that x)"이다.10 이 정의는 칸트적인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정면으로 파괴한다. 힘이 인간에게 작용할 때, 주체(Subject)였던 인간은 객체(Object), 즉 비인격적인 물질로 전락한다. 이러한 사물화(choseification)는 두 가지 층위에서 발생한다.
2.2 제1의 사물화: 시체(Corpse) - 문자 그대로의 물질성
힘이 그 극한의 형태인 '살해'로 행사될 때, 인간은 말 그대로 사물이 된다. 베유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누군가 여기 있었는데, 다음 순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12 이것은 존재에서 무(Nothingness)로의 즉각적인 이행이다.
베유는 『일리아스』의 전투 장면 묘사가 얼마나 집요하게 인간 신체의 파괴를 다루는지에 주목한다. 호메로스는 죽음의 순간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는 창이 심장을 뚫는 순간, 뇌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사지가 절단되는 순간을 해부학적인 냉정함으로 묘사한다.7 전차 뒤에 매달려 끌려다니는 헥토르의 시신은 더 이상 트로이의 왕자가 아니라, 먼지 속을 뒹구는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10 이 단계에서 힘은 인간을 흙과 먼지라는 원소적 물질로 환원시키며, 영혼을 담고 있던 그릇을 파괴함으로써 영혼 자체를 추방한다.
2.3 제2의 사물화: 살아있는 사물 - 영혼의 석화(Petrification)
베유가 죽음보다 더 깊은 공포와 통찰로 분석한 것은 "아직 살아있는 인간을 사물로 만드는 힘"이다.12 이것은 물리적 죽음보다 더 기이하고 모순적인 상태이다. "그는 살아 있고,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물이다. 영혼을 가진 사물(a thing with a soul)이라니, 이 얼마나 기이한 존재인가!".12
2.3.1 탄원자(Suppliant)의 비극과 갈바니 반응의 부재
베유는 전장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탄원자의 모습을 통해 이 상태를 설명한다. 무장 해제된 채 칼끝 앞에 선 인간은 이미 죽기 전부터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자신의 생사를 결정할 권한을 전적으로 타인(승자)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6
여기서 베유는 매우 독창적인 생물학적 비유를 든다. 개구리 다리에 전기 충격을 주면 근육이 수축하는 '갈바니 반응(galvanic response)'처럼, 살아있는 유기체는 외부 자극에 반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힘의 절대적인 지배 하에 놓인 인간, 즉 극도의 공포에 질린 탄원자는 그 본능적인 반응조차 할 수 없다.6 그들은 타인의 존재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야 하는 '비존재의 기술'을 습득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프리암이 아킬레우스의 발 아래 엎드려 그의 손에 입을 맞출 때, 그는 자신의 존엄과 반응을 내려놓고 하나의 '물체'로서 존재한다. 그는 떨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승자의 기분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처분에 맡겨진다.
2.3.2 노예의 침묵과 내면의 공동(空洞)
노예나 포로가 된 인간은 내면의 삶을 상실한다. 그들은 주인의 기분과 명령에 따라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기계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그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여야 하며, 무(無)를 모방하도록 강요받는다.".6 베유는 이것을 영혼이 겪는 폭력 중 가장 끔찍한 형태로 보았다. 영혼은 사물 속에 깃들도록 창조되지 않았으나, 힘은 영혼을 사물의 감옥에 강제로 구겨 넣는다.12 이 과정에서 인간은 과거를 잃고 미래를 거세당하며, 오직 고통스러운 현재만을 살아가는 짐승과 같은 상태로 축소된다. 이것이 바로 베유가 말하는 '불행(Malheur)'의 본질이다.
2.4 데이터 요약: 힘의 이중적 작용
| 구분 | 문자 그대로의 사물화 (Killing) | 비유적 사물화 (Enslavement) |
| 상태 | 시체 (Corpse) | 살아있는 사물 (Living Thing) |
| 결과 | 존재에서 무(Nothingness)로의 이행 | 인격의 상실, 영혼의 석화(Petrification) |
| 특징 | 즉각적, 물리적 파괴 | 지속적, 심리적/존재론적 파괴 |
| 예시 | 헥토르의 시신, 전장의 시체들 | 탄원자(프리암), 노예(안드로마케) |
| 베유의 통찰 | "누군가 있었으나, 아무도 없게 된다." | "영혼이 사물 속에 억지로 구겨 넣어진다." |
3. 승자의 망상과 힘의 도취: 자기 파괴의 메커니즘
3.1 힘의 소유 불가능성과 맹목성
『일리아스』에 대한 베유의 가장 예리한 통찰 중 하나는, 힘이 패자뿐만 아니라 승자(가해자) 또한 파괴한다는 점이다.8 베유는 "힘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희생자에게만큼이나 무자비하다. 희생자를 짓뭉개는 동시에, 소유자를 취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8
승자는 자신이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는 마치 저항이 없는 유체(fluid) 속을 걷는 것처럼 느낀다.15 베유는 이 상태를 '사고(thought)의 정지'로 진단한다. 인간이 행동하기 전에 거쳐야 할 '아주 작은 간격(reflection)', 즉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내 행동의 결과를 숙고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사라진다. 힘에 도취된 인간은 이성이 마비되고, 맹목적인 충동과 격정에 휩쓸려 기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승자 역시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는 사물', 즉 자동인형(automaton)으로 전락시켰음을 의미한다.8 그는 힘의 주인이 아니라, 힘이라는 맹목적인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움직인다.
3.2 시소(See-saw)의 법칙과 기하학적 엄격성
베유는 『일리아스』의 구조를 지배하는 원리를 "기하학적 엄격성(geometric rigor)"이라고 표현한다.13 우주는 힘의 남용을 허용하지 않으며, 힘은 마치 시소(see-saw/bascule)와 같이 작동한다. 한쪽이 올라가면 반드시 다른 쪽은 내려가며, 이 위치는 끊임없이 역전된다.
전세는 요동친다. 그리스군이 우세할 때 그들은 트로이군을 멸시하고 평화 협정을 거부하지만, 다음 날 상황이 역전되면 그들은 공포에 질려 도주한다.10 베유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고 트로이 소년들을 장례 제물로 바치는 장면에서, 그가 이미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과도함(Hubris)은 필연적으로 네메시스(Nemesis)를 불러온다. "오늘의 승자는 내일의 패자가 되며, 힘을 과용한 자는 반드시 그 힘에 의해 파멸한다"는 것이 『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철칙이다.10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고, 아킬레우스 역시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파멸을 확정 짓는 인과관계는 힘이 누구의 편도 아님을 보여준다. 베유는 이를 통해 "운명(Destiny) 앞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모두 무고하며, 정복자와 피정복자는 같은 불행(Malheur)을 공유하는 형제"라는 결론을 도출한다.17
3.3 전쟁의 관성: 목적의 상실과 미래의 거세
전쟁이 지속될수록 전쟁의 목적은 소실된다. 헬레네를 되찾는다는 초기 명분은 잊혀지고, 오직 죽이고 죽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된다.17 베유는 "전쟁은 모든 목적의 개념을 지워버리고, 심지어 전쟁의 끝을 상상하는 능력마저 거세한다"고 분석한다.17 병사들에게 평화로운 과거는 "뜨거운 목욕물"이 있는 먼 기억일 뿐이며, 미래는 오직 죽음으로만 존재한다.15 영혼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거세당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현재의 고통 속에 갇힌다. 이 절망적인 폐쇄성 안에서 병사들은 기계적으로 살인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4. 공평함(Equity)과 쓴맛(Bitterness): 호메로스의 기적
4.1 치우치지 않는 태양 같은 시선
베유는 『일리아스』가 서양 문학사에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로 그 "놀라울 정도의 공평함(equity)"을 든다.8 호메로스는 그리스인(아카이아인)의 승리를 노래하는 시인이지만, 트로이인들을 악마화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트로이의 멸망과 헥토르의 죽음은 그리스 영웅들의 죽음과 동일한 무게의 슬픔으로 그려진다.10
베유는 이를 "태양 빛처럼 공평한 시선"이라고 묘사한다. 시인은 그 누구도 경멸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영웅시하지 않는다. 오직 모든 인간을 짓누르는 가혹한 운명과 힘의 무게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적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선으로 포장하는 로마의 서사시(예: 『아이네이스』)나, 신이 특정 민족의 편을 든다고 묘사하는 히브리 구약 성서의 일부와 극명하게 대조된다는 것이 베유의 주장이다.1 호메로스에게는 선인도 악인도 없다. 오직 '힘에 굴복한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다.
4.2 쓴맛(Amertume)의 미학
『일리아스』 전체를 감싸고 있는 정조(sentiment)는 '쓴맛(bitterness)'이다.18 그러나 이 쓴맛은 패배자의 원한이나 승자의 오만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이 힘, 즉 물질에 종속되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유일하게 정당한 쓴맛"이다.17
베유는 이 쓴맛이 "부드러움(tenderness)에서 비롯되어 전 인류에게 퍼진다"고 묘사한다.8 호메로스는 전쟁의 잔혹함을 결코 숨기지 않으며(undisguised brutality), 어떠한 위안의 허구(comforting fiction)도 개입시키지 않는다.6 죽음 뒤에 영광된 내세가 있다거나, 조국을 위한 희생이 아름답다는 식의 포장은 없다. 오직 차가운 현실과 상실의 아픔만이 존재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깊은 연민과 사랑이 솟아난다.
4.3 다른 서사시와의 비교 분석
| 비교 항목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로마 서사시 (『아이네이스』 등) | 히브리 구약 성서 (베유의 관점) |
| 힘에 대한 태도 | 힘은 비극적이며, 모두를 파괴함 | 힘은 제국 건설의 수단이며 미화됨 | 힘은 신의 징벌 또는 선택의 도구 |
| 적에 대한 묘사 | 적(트로이)도 동일한 인간으로 존중 | 적은 제압해야 할 대상, 야만 | 적은 신의 적으로 규정되기도 함 |
| 지배적 정서 | 공평한 쓴맛 (Bitterness) | 영광, 애국심, 운명적 사명 | 정의, 분노, 신성한 공포 |
| 비극적 인식 | 승자도 패자도 힘의 노예임 | 승자는 역사의 주체임 | 승리는 신의 은총임 |
5. 은총의 순간들: 사랑, 우정, 그리고 기적
5.1 힘의 제국에 핀 꽃
『일리아스』가 단순히 폭력과 절망의 기록만은 아니다. 베유는 이 참혹한 서사시 곳곳에 빛나는 "은총의 순간(moments of grace)"들이 숨겨져 있음을 포착한다.8 이 순간들은 매우 짧고 드물지만, 힘의 지배를 잠시 정지시키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기적과도 같다.
베유가 꼽는 은총의 순간들은 다음과 같다:
- 어머니와 아들의 사랑: 죽음을 앞둔 아킬레우스와 그의 어머니 테티스 사이의 애틋한 대화.
- 부부의 사랑: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성벽 위에서의 이별. 아들의 투구를 벗겨주며 웃는 찰나의 평화.
- 전우애: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깊은 우정.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아킬레우스의 격정은 역설적으로 그가 타인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환대(Hospitality)의 전통: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도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가 전장에서 서로의 가문을 확인하고 무기를 교환하는 장면.
이러한 사랑의 순간들은 전쟁의 비참함과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비극적 미(美)를 자아낸다. "전쟁이 아닌 모든 것은 시(poetry)로 감싸져 있지만, 전쟁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21
5.2 프리암과 아킬레우스: 최고의 기적
베유가 『일리아스』의 절정으로 꼽는 장면은 24권, 트로이 왕 프리암이 아들을 죽인 원수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가는 장면이다.6 이 장면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발생할 수 없는 '불가능한 기적'이다.
프리암은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꿇고, "수많은 내 아들들을 죽인 그 무서운 손"에 입을 맞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사물화'의 극치인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순간이다. 그는 탄원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적의 손에 맡기지만,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 적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킬레우스는 늙은 프리암을 보고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늙은 아버지 펠레우스를 떠올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죽은 이들(헥토르, 파트로클로스)과 자신들의 불행한 운명을 생각하며 함께 눈물을 흘린다. 이 순간, 승자와 패자, 살인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사라진다. 오직 "필멸의 운명을 짊어진 인간"이라는 공통의 비참함 속에서 서로를 형제로 인식하는 기적이 일어난다.3
베유는 이 장면을 두고 "힘의 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승리"라고 평가한다.22 아킬레우스가 프리암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는, 사물로 전락했던 인간을 다시 인간으로 복권시키는 은총의 행위이다. 비록 이 화해는 일시적이며 다음 날 전쟁은 다시 계속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힘의 중력 법칙이 멈추고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6. 신학적 연결과 베유의 형이상학: 복음서와의 연속성
6.1 그리스적 영성과 기독교의 연속성
베유의 해석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심오한 부분은 『일리아스』와 기독교 복음서(The Gospels) 사이의 연결 고리이다.19 그녀는 『일리아스』가 보여주는 '힘 앞에서의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식이 복음서의 수난(Passion) 이야기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13
베유는 "아티카 비극(Attic Tragedy)과 복음서야말로 『일리아스』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본다.8 그녀의 관점에서 구약 성서(특히 전쟁과 정복을 다루는 부분)나 로마의 문학은 힘을 숭배하거나 승리를 신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어, 『일리아스』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19 반면,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고통받으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힘의 기계적 법칙 아래 놓인 인간의 절대적 고독과 불행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서 호메로스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26
6.2 불행(Malheur)과 신의 부재, 그리고 비움(Decreation)
이 에세이는 베유의 후기 철학적 개념인 '불행(Malheur)'과 '중력(Gravity/Pesanteur)'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불행'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영혼을 사물로 격하시키는 상태를 의미한다.27 『일리아스』와 복음서는 모두 이 '불행'을 직시한다.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발전시킨 사상을 통해, 이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역설한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 즉 힘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본다. 힘의 법칙(중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비움(Decreation)으로써 신의 은총이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5 『일리아스』에서 영웅들이 겪는 그 처절한 무력감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초월적인 사랑을 갈구하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베유에게 호메로스의 시는 "불행을 응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영적인 텍스트였다.
7. 결론: 21세기에 던지는 베유의 메시지
7.1 현대 사회와 힘의 은폐된 작용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고대 서사시에 대한 주해를 넘어,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예언적 경고이다. 오늘날 우리는 직접적인 칼과 창 대신, 자본, 기술, 관료제, 그리고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힘' 아래 살고 있다. 이 힘들은 여전히 인간을 사물화하고, 통계 수치로 환원하며, 영혼의 반응을 마비시킨다. 베유의 통찰은 현대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폭력의 구조를 폭로한다.
7.2 자기 기만(Self-Deception)에 대한 거부와 정의의 실천
베유는 우리가 힘을 소유할 수 있다거나, 폭력을 통해 항구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1 그녀에게 있어 그리스인들의 위대함(Greek Genius)은 "자기 기만을 피하는 영혼의 힘"에 있었다.1 그들은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직시했으며, 그 쓴맛을 시로 승화시켰다.
결국 베유가 제시하는 해답은 역설적이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힘의 법칙을 꿰뚫어 보고,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초인적인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다.30 그것은 "자신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순간에도 타인을 사물이 아닌 인간으로 대우하는 능력", 즉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8 베유는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이 내 귀에 다른 어떤 소리와도 다르게 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정의의 기적이다."
『일리아스』는 3천 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타인을 사물로 만들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우리는 힘의 도취에서 깨어나 타인에게서 '나와 같은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가? 프리암과 아킬레우스가 보여준 그 짧은 순간의 기적이야말로, 폭력의 기하학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참고 자료
- Simone Weil's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A Critical Edition ...,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bmcr.brynmawr.edu/2004/2004.02.24/
-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Simone Weil, 1940) | communists in situ - WordPress.com,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cominsitu.wordpress.com/2021/09/21/the-iliad-or-the-poem-of-force-simone-weil-1940/
- “Simone Weil's Iliad : Misunderstanding Homer ?” – Eugesta - Peren Revues,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peren-revues.fr/eugesta/1497?lang=en
- Simone Weil's Homer: The Iliad | Sydney Review of Books,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sydneyreviewofbooks.com/reviews/simone-weils-homer-the-iliad
-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 파아란 영혼 - 티스토리,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intempus.tistory.com/entry/%EC%A4%91%EB%A0%A5%EA%B3%BC-%EC%9D%80%EC%B4%9D-%EC%8B%9C%EB%AA%AC-%EB%B2%A0%EC%9C%A0
- WEIL, SIMONE,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 Chicago Review ...,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themeister.co.uk/economics/iliad.pdf
-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bmcr.brynmawr.edu/2004/2004.02.24/#:~:text=Elaborating%20on%20her%20opening%20assertion,reduces%20human%20beings%20to%20things%3B
-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 Wikipedia,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The_Iliad_or_the_Poem_of_Force
- Force, the True Master of War : Simone Weil's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 Working Title,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orkingtitlebookshop.wordpress.com/2019/09/26/force-the-true-master-of-war-simone-weils-the-iliad-or-the-poem-of-force/
- Simone Weil and the Iliad - The Cambridge Guide to Homer,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cambridge.org/core/books/cambridge-guide-to-homer/simone-weil-and-the-iliad/FFA73C767719DC6B76B00A867F7CF93D
-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figshare.unimelb.edu.au/ndownloader/files/52672895#:~:text=Human%20beings%20are%20always%20already,Weil%2C%202003%2C%2045).
- Quote by Simone Weil: “Force is that which makes a thing of whoever su...” - Goodreads,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goodreads.com/quotes/10531396-force-is-that-which-makes-a-thing-of-whoever-submits
- Religion: From the Greeks to the Gospels | TIME,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time.com/archive/6772952/religion-from-the-greeks-to-the-gospels/
- Full text of "Simone Weil and The Poem Of Force. From the Fields of Ilion to the Charnel Grounds of Europe" - Internet Archive,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archive.org/stream/SimoneWeilAndThePoemOfForce/Simone%20Weil.%20HOMER.%20The%20Poem%20of%20Force_djvu.txt
- Simone Weil & The Poem of Force - t e r r i b l y c u n e i f o r m,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kuny.ca/blogs/2010/206/book-notes/simone-weil-the-poem-of-force/
- Blood Is Flowing in Carthage: Simone Weil between Force and Colonialism - documenta 14,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documenta14.de/en/south/25222_blood_is_flowing_in_carthage_simone_weil_between_force_and_colonialism
-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by Simone Weil; Published by The Lapis Press,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thewholebookexperience.com/2015/12/31/the-iliad-or-the-poem-of-force-by-simone-weil-published-by-the-lapis-press/
- Simone Weil: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 Study Guide,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digitalcommons.liberty.edu/cgi/viewcontent.cgi?article=1403&context=gov_fac_pubs
- A Little Simone Weil and Classical Exegesis Sampler–Part III: The Lost Keys of Interpretation in Christianity - Via Hygeia,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via-hygeia.art/a-little-simone-weil-and-classical-exegesis-sampler-part-iii-the-lost-keys-of-interpretation-in-christianity/
- Homer, Simone Weil, and loss - Commonweal Magazine,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commonwealmagazine.org/homer-simone-weil-and-loss
- Compassion in the Face of Force - Fare Forward,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farefwd.com/index.php/2020/12/16/compassion-in-the-face-of-force/
- Simone Weil on Greece's Desire for the Ultimate Bridge to God: The Passion,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place.asburyseminary.edu/cgi/viewcontent.cgi?article=1758&context=faithandphilosophy
- Homer's Iliad » Simone Weil - Dickinson Blogs,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blogs.dickinson.edu/homer/tag/simone-weil/
- A Christian Mystic Reads Homer: Simone Weil on 'The Iliad',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graham.uchicago.edu/article/simone-weil-iliad/
- War and the Iliad by Simone Weil | Goodreads,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2781.War_and_the_Iliad
- 은총, 중력에서 자유로운 유일한 것 - 에큐메니안,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08
-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 시몬 베유 - 알라딘,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4469523
- 중력과 은총 | 시몬 베유 - 교보문고,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70647
- The Uncommonly Pure Simone Weil on Love, Suffering and the Emptiness Filled by Divine Love - The Examined Life,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theexaminedlife.org/library/gravity-and-grace
- The Poem of Force (Article by Simone Weil) - A W E S T R U C K _W A N D E R E R, 1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awestruckwanderer.wordpress.com/tag/the-poem-of-force-article-by-simone-weil/
'學而 > 토피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고의 투자는 '친절'이다" _ 워렌 버핏 (1) | 2026.01.21 |
|---|---|
| 웨렌버핏의 인터뷰 _ 260113 (0) | 2026.01.21 |
| 리폼 행위가 상표권 침해? (0) | 2026.01.20 |
| [스타트업] 나쁜 시장? 스타트업의 기회 (0) | 2026.01.20 |
| 허성원 변리사: 지식재산 전략의 '전투적 인문학자' (1) | 202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