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제갈공명, 액막이 법
정유재란 때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도독이
이순신 장군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제가 밤이면 천문(天文)을 보고 낮에는 인사(人事)를 살펴왔는데,
동방에 장수별이 흐려져 가고 있으니,
공(公)에게 닥칠 화(禍)가 머지 않았습니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무후(武候 : 제갈공명)의 액막이 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吾夜觀乾象, 晝察人事, 東方將星, 將病矣, 公之禍不遠矣. 公豈不知耶, 何不用武侯之禳法乎?)
이에 대해 이순신 장군이 답하였다.
"저는 충성이 무후(武候)에 미치지 못하고,
덕망이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재주가 무후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 모두 무후에 미치지 못하니,
비록 무후의 법을 쓴다 한들 어찌 하늘이 들어줄 리 있겠습니까?"
(吾忠不及於武侯, 德不及於武侯, 才不及於武侯, 此三件事皆不及於武侯, 而雖用武侯之法, 天何應哉?)
_ 진린 도독에게 답하는 글(답진도독린서答陳都督璘書, 1598.11.17. 戊戌)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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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과연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 이변이 있었다(翌日果有大星墜海之異)."
진린과 이순신 사이에 오간 서신의 기록들은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陳璘) 도독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순신의 답장은 무술년(1598년) 11월 17일에 쓰인 것이고, 진린이 그 서신을 받아본 다음날이 1598년 11월 19일(庚子)이다.
이날 오전 10시경(巳時)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하셨다.
** 제갈공명의 액막이 법은 어떤 것일까?
<삼국연의(三國演義) 중 제갈공명의 보강답두(踏罡步斗)>
제갈공명이 말했다.
"내가 보니 삼태성(三台星) 가운데 손님별(客星)이 배나 밝고, 주인별(主星)이 뭇별과 어울리는데, 그 빛이 어둡네. 하늘의 상(天象)이 이러하니 내 운명을 알 만하네."
강유가 물었다.
"천상(天象)이 그러하다면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기도를 드려 액을 푸는 방법으로 만회하지 않으십니까?"
제갈공명이 대답했다.
"내 이전부터 비는 방법이여 잘 알지만 하늘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네. 자네는 갑옷 입은 무사 49명을 데리고 장막 밖에 빙 둘러서되 각기 검은 깃발을 들고 검은 옷을 입히게. 나는 장막 안에서 북두(北斗)에 빌겠네. 만약 이레 동안 주등(主燈)이 꺼지지 않으면 내 목숨이 12년(一紀) 늘어나고, 만약 등이 꺼지면 나는 틀림없이 죽네. 그러니 관계없는 잡인들은 절대 들여보내지 말게. 무릇 일에 쓰이는 물건들은 어린아이 둘을 시켜 나르게 하게."
영채 속에서 굳게 지키던 사마의가 어느 날 밤,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대단히 기뻐하며 하후패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장수별이 자리를 잃었으니 공명은 틀림없이 병에 걸려 오래지 않아 반드시 죽는다. 너는 10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오장원에 가서 정탐해보아라. 촉군이 우왕좌왕하면서 나와 맞받아 싸우지 않으면, 공명은 틀림없이 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면 틈을 타서 치겠다."
공명이 장막 안에서 하늘에 비는데 벌써 여섯 밤이 되도록 주등이 환해서 속으로 매우 기뻤다. 강유가 장막에 들어가 보니 마침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검을 들어 북두칠성의 모양을 따라 걸으면서(踏罡步斗) 장수별을 누르고 있었다(壓鎮將星).
이떼 느닷없이 영채 밖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울렸다. 강유가 막 나가 물어보게 하려는데, 위연이 나는 듯이 뚸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 위군이 왔습니다."
급히 발을 내디디던 위연은 그만 주등을 밟아서 꺼버렸다. 제갈량은 검을 내던지고 한숨을 쉬었다.
"죽고 사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빌서어서는 아니 되는구나!"
위연은 황송해서 땅에 엎드려 죄에 벌을 청했다. 강유가 분노하여 검을 뽑아들고 위연을 죽이려 했다.
이야말로..
만사는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았으니 萬事不由人做主
마음만으로 운명과 싸위 어렵더라 一心難與命爭衡
孔明嘆曰:「吾心昏亂,舊病復發,恐不能生矣!」是夜孔明扶病出帳,仰觀天文,十分驚慌:入帳謂姜維曰:「吾命在旦夕矣!」維曰:「丞相何出此言?」孔明曰:「吾見三台星中,客星倍明,主星幽隱,相輔列曜,其光昏暗:天象如此,吾命可知!」維曰:「天象雖則如此,丞相何不用祈禳之法挽回之?」孔明曰:「吾素諳祈禳之法,但未知天意若何。汝可引甲士四十九人,各執皂旗,穿皂衣,環遶帳外;我自於帳中祈禳北斗。若七日內主燈不滅,吾壽可增一紀;如燈滅,吾必死矣。閒雜人等,休教放入。凡一應需用之物,只令二小童搬運。」姜維領命,自去準備。
時值八月中秋,是夜銀河耿耿,玉露零零;旌旗不動,刁斗無聲。姜維在帳外引四十九人守護。孔明自於帳中設香花祭物。地上分布七盞大燈,外布四十九盞小燈,內安本命燈一盞。孔明拜祝曰:「亮生於亂世,甘老林泉;承昭烈皇帝三顧之恩,託孤之重,不敢不竭犬馬之勞,誓討國賊。不意將星欲墜,陽壽將終。謹書尺素,上告穹蒼。伏望天慈,俯垂鑒聽,曲延臣算,使得上報君恩,下救民命,克復舊物,永延漢祀。非敢妄祈,實由情切。」拜祝畢,就帳中俯伏待旦。次日,扶病理事,吐血不止;日則計議軍機,夜則布罡踏斗。
卻說司馬懿在營中堅守,忽一夜仰觀天文,大喜,謂夏侯霸曰:「吾見將星失位,孔明必然有病,不久便死。你可引一千軍去五丈原哨探。若蜀人攘亂不出接戰,孔明必然患病矣。吾當乘勢擊之。」霸引兵而去。孔明在帳中祈禳已及六夜,見主燈明亮,心中甚喜。姜維入帳,正見孔明披髮仗劍,踏罡步斗,壓鎮將星。忽聽得寨外吶喊,方欲令人出問,魏延飛步入告曰:「魏兵至矣!」延腳步急,竟將主燈撲滅。孔明棄劍而嘆曰:「死生有命,不可得而禳也!」魏延惶恐,伏地請罪。姜維忿怒,拔劍欲殺魏延。正是:萬事不由人做主,一心難與命爭衡。
未知魏延性命如何,且看下文分解。 _ 三國演義/第103回
** <경천위지(經天緯地), 보천욕일(補天浴日)>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의 체계를 세워 바르게 경영한다는 의미)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공이 있는 장수"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을 존경했다.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장재와 훈공을 보고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의 체계를 세워 바르게 경영한다는 의미)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공이 있는 장수’라고 상주하였다."
"고금도에 정착한 진린의 군사들은 조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약탈하면서 난리를 쳤다. 그래서 백성들은 ‘견딜 수 없다’며 이순신에게 제소를 했다. 명나라 장수들의 버르장머리란 어쩔 수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명 제독 진린은 이순신에게 통역관과 아장을 보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순신은 얼굴에 불편한 노기를 띠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 군민이 명나라의 도독이 오는 것을 보고 부모와 같이 우러러 보았더니 이제 명군이 폭행과 약탈하기를 일삼아 백성과 군졸이 이를 견딜 수 없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려 하오. 내가 대장이 되어 홀로 이곳에 있을 수 없은즉 나도 역시 진을 옮겨 보화도로 가고자 하오!”
진린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이순신의 손을 잡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진린은 그 자리에서 명군 진중을 조사하여 약탈한 군사를 일일이 순신에게 보냈다. 이순신이 논책하고 골라내어 명병을 징계하였다. 명병은 그후부터 순신을 자기 도독보다도 더 무서워하여 약탈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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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욕일補天浴日"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와가 하늘의 이지러진 부분을 메웠다는 전설에서 나온 '보천(補天)'과 희화가 해를 목욕시켰다는 전설에 나오는 '욕일(浴日)'에 대한 다음의 두 가지 신화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보천'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실려 있다. 옛날에 물을 다스리는 신인 공공(共工)과 불의 신 축융(祝融)이 싸워서 공공이 패하자 화가 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 불주산(不周山)을 무너지게 하였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며 홍수와 큰불이 났다. 우주를 창조한 여신 여와는 강에서 '오색 빛깔의 돌을 골라 불로 녹여서 이지러진 하늘을 보수하고[煉五色石以補蒼天]' 홍수를 막아 재앙을 다스렸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에는 '욕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태양의 신 희화(羲和)에게는 10개의 태양인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쪽 바다 밖 탕곡의 큰 나무인 부상(扶桑)에 살았는데, 10개의 태양은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늘에서 감시하였다. 희화는 그날의 일을 맡은 아들인 태양을 늘 수레에 태워 바래다 주었는데, 매일 아침마다 수레에 오르기 전에 '태양들을 데리고 감연에서 깨끗하게 목욕하였다[方日浴于甘淵]'고 전해진다.
'보천'과 '욕일'이 합하여 이루어진 고사성어로, 국가에 위대한 공적이 있음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천욕일 [補天浴日]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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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略).... 무술년(1598년)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고금도로 내려갔다. 황제는 이순신에게 도독(都督)의 인장을 특사할 것을 명령했다. 진린이 해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남으로 전라도로 내려가므로, 임금은 그를 동작나루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웠고 소속 부하들은 횡포하여 보급 절차가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관장(官長)을 잡아다 매를 때리므로 조정 대신들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이순신의 군사가 반드시 이 군사들에게 눌려서 장차 또 패할 것이라고 하였고, 임금도 또한 염려하였다. (後略).... -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 에서 - 발췌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궤멸하자 명나라에서는 수군을 파병합니다. 진린도독이 수군을 운용하는 것을 보고 모두 걱정 하는 장면 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포악한 진린을 잘 다스려 조명연합군을 결성하여 노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순신 장군의 포용의 리더십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진린은 노량해전의 전공으로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집니다. 진린은 이순신보다 두 살이 더 많으며 광동성 사오관 출신 입니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으나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 하는 등 전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고 구국의 일념으로 시종일관 전진하는 이순신의 인격에 감복한 진린은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고 수군의 작전권도 돌려주며 이순신을 도왔습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명황제로부터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전란이 끝난 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그의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으로 돌아와 고금도에 살다가 지금은 해남군 해남읍에 정착하여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습니다. 포용은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 입니다. 중국의 전국책(戰國策) 진책편에는 사람을 가리지 말고 포용하라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太山不讓土壤)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河海不擇細流)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장수 진린 도독을 포용한것은 조선의 입장과 명나라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과 조선과 명나라의 이해관계를 잘 이해하고 명쾌하게 정리한 처신이라고 생각 합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나라가 도와 주어 전란을 하루빨리 끝내주기를 바라는 입장이지만 명나라 장수가 이를 실행 하려면 그가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라이벌이 되지않고 협력자가 되도록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현장에서의 상황판단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나라의 장수라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이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하므로서 불목하지 않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처세를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순신포럼 이부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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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읽다가 책을 내던지며 한숨짓게 되는 장면이 몇 번 있다. 관우와 유비가 죽을 때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제갈량의 죽음이 가장 안타깝고 드라마틱하다. 제갈량은 그의 신묘한 능력에 걸맞게 자신의 죽음을 예지한다. 오장원에서 위나라 군대와 대치하던 중에 천문을 살펴보고 장수 강유에게 말한다. "삼태성 가운데에 객성이 침범하여 배나 밝고 주인별은 그 빛이 어두우니 내 명이 머지않았다." 그 말을 들은 강유가 물었다. "천상(天象)이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하늘에 빌어 액을 푸는 방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이에 제갈량은 액을 풀어 명을 연장하기 위한 보강답두(步罡踏斗)를 시행한다. 북두칠성을 따라 49개의 등을 밝히고 이레 동안 보법에 따라 걷는 것이다. 엿새째 밤까지 모든 등들이 밝게 제 자리를 잘 지켰다. 그런데 장수 위연이 급한 보고를 위해 영채에 뛰어 들다 그만 주등을 밟아 꺼트리고 말았다. 제갈량은 탄식한다. "죽고 사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으니 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그러고 며칠 후 제갈량은 54세의 삶을 마감한다.
어릴 적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갈량과 함께 탄식했다. 그 엄한 정성을 드리면서 사람의 출입을 어찌 그리 허술히 통제했단 말인가. 그리고 삼태성이 재상의 명을 관장한다면, 천하의 많은 나라에 다들 재상이 있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제갈량의 운명인가. 무엇보다 '운명'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제갈량의 탄식처럼 인간은 정녕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삼국지의 그 많은 영웅들은 왜 그토록 번민하고 갈등하고 죽고 죽이며 절절한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일까. 과연 운명이란 무엇인가."
https://athenae.tistory.com/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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