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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마부와 교수 _ 이태준

by 변리사 허성원 2023. 10. 26.

* 보이는 대로, 아는 대로, 타인의 일을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섣부른 판단이나 섣부른 단정을 경계하라는 가르침.

마부와 교수

_ 이태준

하필 그 여학교 문 앞에서였다, 자갈을 실은 두 마차가 그 경사진 길을 올라가다 앞의 말이 쿵하고 나가동그라진 것은.

마부야 으레 하는 순서로 땀 배인 등허리에서 그 말 가죽에 알른달른 닳은 물푸레 채찍을 뽑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 놈의 말이 그만 죽고 싶은가…….'

암만 죄기어도(패다) 넘어진 동물은 입에 거품만 뿜을 뿐, 일어서기는 커녕 가로 박힌 눈알이 주인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나중에는 멍에를 부려 놓고도 족치어 보나 매가 떨어질 때마다 네 굽만 움죽움죽하여 보일 뿐, 그 이상 매도 타지 않는다.

마부는 화가 밀짚 벙거지에까지 올려 뻗친 듯 그것을 벗어 내팽개치더니 길 아래 남의 밭에 가서 울짱(말뚝)을 하나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래서 다른 마부는 고삐를 낚아채이기, 이 마부는 저도 거의 거품을 물다시피 악을 써 매를 때리기 한창인 때였다. 벌써 하학(하교)들을 하고 돌아가는 것인지 제복의 처녀 한 떼가 우르르 쇠문 안에서 쏟아진다.

"저런, 망측해!"
"아구머니나, 불쌍해……."
"저런!"
"저런!"

선량한 그들의 가슴은 돌발적으로 의분에 떨리었다.

"저런 망할 녀석! 힘에 부쳐 넘어진 걸 왜 자꾸 때리기만 할까……."
"저런 무도한 녀석같으니!"
"선생님, 저것 좀 말리서요."
"선생님 가만두라고 좀 그러서요."

마침 교수 한 분이 나오다가 길도 막혔거니와, 이내 어여쁘고 선량한 제자들에게 둘러싸였다.

교수는 성큼 매질하는 마부 앞으로 나섰다.

"여보?"

마부는 소매로 이마를 씻으며 긴치않게 쳐다본다.

"왜 그다지 때리오?"

교수는 말의 주인보다 더 가까운 말의 친구이나처럼 꽤 높은 소리로 탄했다. 학생들은 손뼉이라도 칠 뻔 속이 시원하였다.

그러나 마부는 '댁이 웬 걱정이냐?' 싶은 듯이 대꾸도 없이, 다시 매를 드는데는 교수도 말을 말리기보다, 제자들 앞에서 잃어지는 체면을 도로 찾기 위해서도 그냥 있을 수가 없는 듯, 다시 한걸음 나서며 마부를 나무란다.

"글쎄, 여보? 아무리 동물이기로 당신 이익을 위해 저렇게 힘의 착취를 당하고 쓰러진 걸 왜 불쌍히 여길 줄 모르오? 한참 그냥 두어 좀 쉬게 하면 큰일 나오?"

교수의 말투로 보면 자본주 격인 마부는 이번에는 대꾸를 하되,
"이를테면 댁이 나보다 더 이 말을 중히 여겨 하는 말이오?"
하고 을러 센다. 교수도 화가 날밖에.

"그렇소.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당신보다 더하오."

학생들은 또 손뼉이라도 칠 뻔, 속이 시원하였다.

"모르면 모르나 보다 하고 어서 가슈, 허……."

이것이 대담하게도 마부의 대답인데는 둘러섰던 다른 사람들도 마부를 괘씸히 던져 보는 한편, 교수의 톡톡한 닦달이 어서 나리기를 기다렸다. 교수는 얼굴이 투지발발하여,

"고약한 사람이로군……." 하고 안경 쓴 눈을 으르댄다.

그러나 마부는 의외에 교수의 노염은 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어 어린애에게 타이르듯,

"말이란 것은 쓰러졌을 때 이내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 죽고 마는 짐승이오. 그래서 병이 들어 약을 먹이고도 눕지 못하게 허리를 떠 복 고개에 매달아 놓는 것이오, 허허……." 하고 다시 말을 족치기 시작한다.

교수는 그만 땀은 흐르되 입은 얼고 말았다. 모여 섰던 사람들도 모두 저 갈 데로 갔다. 흥분하였던 여학생들도 모두 무슨 운동 시합에서 저희 선수가 지는 것을 보고 돌아서는 듯 하나씩 둘씩 말없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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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대한민국의 소설가. 소설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태준' 이라 일컬어졌다. 정지용은 그의 '지용문장독본'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 태준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권은 된다."

이태준은 자신의 저서 <문장강화(講話)>에서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따라 소설을 썼다. 실제 이태준의 소설은 2020년대에 와서 읽어도 누가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1930년대 소설이라 믿기지 않을만큼 문장과 구성이 현대 소설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전형이라고 칭찬했듯 깔끔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장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