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를 읽다 보면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비루한 인간됨에 대해 탄식하는 장면을 종종 만난다.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곳에서 그런 언급이 있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총 32군데였다. 난중일기의 그 극도의 간결한 어체를 생각하면, 그토록 많은 곳에서 그의 행실을 기재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원균의 인간됨이 장군을 자주 번민에 빠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 혹은 부하 장수마저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장군은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원균(元均)
원균은 이순신의 일기 속에 120회 언급되어 있다. 연도별로 따지면 계사년(49회)과 갑오년(46회)에 집중되어 언급되는데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진도의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본 척 하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상수사(원균)를 원망하고 있으며 죽은 왜적의 수급을 거두려고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내더라는 기록과, 장계를 거짓으로 꾸며 올리면서 군중을 괜히 동요시키는가 하면 탈영한 격군들을 데리고 자신의 주둔지로 숨은 휘하 포작(어민)들을 숨겨주느라 그들을 잡아 오라고 금모포 만호가 보낸 관리들을 거꾸로 포박하기도 하고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이 경상우병사 최경회에게 보낸 1,530대의 불화살을 혼자서 다 쓰려고 계책을 꾸미기도 하고 이순신에게 날 밝는 대로 나가 왜적과 싸우자고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는 문제에 대해 공문을 써서 보내자 취기에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대답하지 않기도 한다. 이순신에게는 복병을 동시에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이밖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더라는 등의 비난도 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서는 거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라고, 원수 권율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비웃기도 하는 등, 매도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문상을 보냈을 때조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원수의 명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_ 위키피디아 중에서
<계사년(1593년)>
- 2/22 .. 바람이 조금 멎는 듯하기에 다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두 명의 승장과 의병을 제포로 보내서 상륙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우도 여러 장수의 배 중에서 변변치 못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상륙할 것처럼 꾸미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왜적들은 갈팡질팡했다. 이때를 틈타 전선을 모두 모아서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당하였다.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마음이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뒤에 진도 지휘선 역시 적에게 포위되어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사 구원해 냈다. 경상도 좌위장과 우부장은 못 본 체하며 끝내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 통분했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에게 질문도 했는데 실로 한심한 일이었다. 오늘의 억울함을 무슨 말로 다하랴. 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 2/23 원 수사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은 이를 데가 없었다.
- 3/2 원 영공(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한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 5/8 이영남이 방문해서 우수사 원균의 잘못이 많다고 자세히 말하였다.
- 5/14 영남 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했다. 그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연산령(예윤)이 취해 넘어져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
- 5/15 윤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임금께 올리려는 문서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내용의 고약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 5/21 원 수사(원균)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부대를 크게 동요시켰다.진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고약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
- 5/30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4시경(申時)에 잠깐 개었다가 다시 내렸다. 아침 무렵 봉사 윤제현, 변유현에게 왜적에 관한 일을 물었다. 이홍명이 방문했다. 원 수사(원군)가 송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 쓰려고 꾀하다가 병사에게 공문을 보내 화전을 나누어 보내라고 하자 공문서도 내려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이더라고 한다. 가소롭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전 1,530개를 나눠 조내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하다니 그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저녁때 조붕이 와서 이야기 했다. 남해 현령 기효근(寄孝槿)의 배가 나의 배 옆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젊은 여자를 싣고서는 남들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가소로운 짓이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에 예쁜 여자를 배에 태워 놀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元均) 수사 또한 이러하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_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에서
- 6/5 경상도 수사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들어가 공격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 6/10 새벽 2시경 원 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적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의 휸계와 시기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6/11 아침에 왜적을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 원균에게 보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 대답이 없었다.
- 7/21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정 수사 걸이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균이 하는 말은 극히 흉측스럽고 거짓스러워 말할 수 없다. 이러고서도 일을 같이한다면 어찌 뒷걱정이 없을까?
- 7/28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썼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충청수사 정걸,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원 수사(원균)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하다.
- 8/7 저녁에 경상 수사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했지만, 원 수사와 그 군관은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갑오년(1594년)>
- 2/11 ..아침 식사 후에 사정에 올라갔는데 경상 수사(원균)가 왔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미친 말이 많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 4/12 .. 우수사, 경상 수사 원균, 충청 수사도 함께 와서 술을 세 순배했다. 원 수사는 짐짓 취한 체하며 함부로 무리한 말을 했다. 순무 어사도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원 수사가 하는 짓이 극히 흉악했다.
- 6/4 ..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는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내용이었다. 송구스럽고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원균이 술에 취해서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다.
<을미년(1595년)>
- 2/20 우수사와 장흥, 조방장 신호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 2/27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게 했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았다. 두세 번 거듭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 너무도 무식한 것이 가소로웠다.
<병신년(1596년)>
- 3/12 저녁에 소국진이 체찰사의 처소에서 돌아왔는데, 그 회답에 우도의 수군을 본도로 보내라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했다. 우스웠다. 또한 들으니 원흉元兇(원균)은 곤장 40대를 맞고 장흥은 20대를 맞았다고 한다.
- 윤8/24 .. 원공(원균)의 흉악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정유년(1597년)>
- 5/6 ..저녁에 정원명이 한산에서 돌아와 흉악한 자(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이야기했다.
- 5/7 ..서산 군수 안괄이 한산에서 와서 음흉한 자(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이야기했다.
- 5/8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상하니, 이것은 원수(권율)의 명령이었다. 이경신이 한상에서 온 뒤 음흉한 원(원균)의 말을 많이 했는데, 곡식을 사라는 구실로 자신이 데리고 온 서리를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사통하려고 하였는데 그 여인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 악을 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드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심히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 5/11 체찰사의 군관이.. 근래의 소문을 많이 전했다. 그 소문이란 모두 흉악한 자(원균)의 일이었다.
- 5/12 ..선홍수가 와서 원공(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水雷屯인데 천풍구天風姤로 변했으니 용用이 체體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
- 5/13 어짓밤 부찰사의 말이, 상사上使가 보낸 편지에 영공(원균)의 일에 대한 탄식이 많았다고 한다.
- 5/20 ..조용히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중에 "일찍이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미안스런 말이 많았는 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원균)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장차 나랏일을 어찌할꼬"하는 것이다.
(* 이원익은 이순신의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7차례의 어전 호의 중 3차, 4차, 5차 회의에 참석해 소신껏 이순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이미 원균의 주장에 마음을 두고 있던 선조는 원균에게 유리한 질문을 했으며 참석자들이 자신의 생각에 따르도록 유도했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해임과 하옥이 결정된 6차와 7차 회의에는 임지의 공무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 회의 소식을 듣고는 즉시 "왜적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오직 이순신 한 사람뿐"이라는 상소를 올리고 나라의 앞날을 한탄했다.)
- 5/28 ..원(원균)의 미친 짓을 많이 말했다.
- 6/12 .. 그는 적의 정세도 이야기하고 원공(원균)의 일도 이야기했다.
- 6/17 ..아침을 먹은 뒤에 원수에게 갔더니 원공의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말하였다. 그리고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의 장계에는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안골의 적을 무찌른 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으니, 안골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하였고,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지 않고 오직 안골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말하지만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다른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라고 했다. ..실로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 7/15 아주 늦게 중군 이덕필이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 편에 들으니,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그저 통분하고 통분할 뿐이다. 막을 방책이 없음에 한스럽다. 어두워지자 비가 크게 내렸다.(칠천량 해전)
** 칠천량 해전 이후의 난중일기 중 눈에 띄는 부분들
- 7/18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통곡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오후 10시경까지 이야기를 했으나 어떻게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그 이상 더 좋아할 수 없었다.
- 7/21 ..점심 식사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수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 수사 배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방문했기에 패하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그와 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장의 잘못은 차마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했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수령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 7/22 아침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방문해서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 8/2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움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 징조가 있었다.
- 8/3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諭書를 가져왔는데, 내용인즉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한 뒤에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 바로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 8/17 일찍 아침을 먹고 곧바로 장흥 땅 백사정으로 갔다.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로 가니 벌써 경내에 사람 하나 없었다. 수사 배설은 탈 배로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관 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모조리 도둑질하여 나눠 가져가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그때 이르러 잡아다 호되게 곤장을 때렸다.
- 8/19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건방진 태도가 차마 말할 수 없기에, 영리를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
- 8/25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두 명을 잡아 곧바로 못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임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 8/28 적선 8척이 갑자기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 수사 배설도 달아나려고 했다.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다가올 때 호각을 불고 깃발을 흔들며 뒤쫒게 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갈두까지 쫒다가 돌아왔다.
9/16 (명량해전)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장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3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도망갈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내가 노를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이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우리 배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다보며 안색이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하고 명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고 하니 적들이 더 대들 것 같아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리고 지시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함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점 내 배 가까이 다가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欲死軍法乎)?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汝欲死軍法乎)?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고 꾸짖었다.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너는 중군이면서도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지금은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꾸짖었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휘하의 배 2척에 지령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가 붙듯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사력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수마석 덩어리로 막았다. 배 위의 군사가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쫒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3척이 거의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리장수 정응두의 배가 뒤쫒아 와서 협력하여, 적은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투한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에 있던 적장 마다시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린즉, 준사가 좋아 날뛰면서 "그래, 마다시다" 하고 말했다. 곧 명령하여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 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우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쫒아 들어가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이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 가까이에 오지 못했다.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이라 형세 또한 위태롭고 외로워, 당사도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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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원균 갈등은 옥포해전(1592년 5월) 이후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원균의 불만에서 시작됐습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천천히 하자’고 말해놓고는 밤에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했다. 원균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유감스러워 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
<선조수정실록>은 “이때 두 사람이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다투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그로부터 생겼다”고 밝혔습니다.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8280800001#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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