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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28 리더의 사랑이 있었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3. 9. 16.

리더의 사랑이 있었다

 

"진나라의 강한 군사력은 헤어스타일에서 나왔다." 사마천학회 김영수 이사장의 강의 중 '진나라 군대는 왜 강했던가?'라는 자문에 대한 자답이다. 재미있는 말이라 진시황 병마용갱 토용 병사들의 사진을 살펴보았다. 과연 머리와 수염 스타일, 복장과 표정이 제각각이다. 흙으로 구운 토용은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수가 소요되었다. 그러려면 틀을 써서 대량으로 찍어냈을 것이라 여겼는데, 마치 실제 병사들의 모습을 재현하기라도 한 듯 하나하나 모습이 모두 다르다.

자신만의 헤어스타일을 가꿀 정도라면 병사들은 사회적으로 귀하게 존중과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 공들인 머리에 투구는 쓸 수 없었을 테니, 위험은 컸겠지만 기동성과 전투력에서는 유리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병사들의 개성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문화가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개성과 자율은, 자부심과 명예가 되어, 진나라의 탁월한 전투력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올림픽 마라톤이 유래된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1만 명의 아테네 군은 수십만의 페르시아 군을 맞아, 192명의 희생으로 6400명의 적을 섬멸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승리는 10년 후 살라미스 해전에서도 재현되었다. 현격한 전력의 열세에서도 아테네 군이 승리한 이유에 대해,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한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군대의 대부분 강제로 끌려나온 노예들로서, 뒤에서 날아오는 채찍질에 떠밀려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아테네 병사들은 자유인들이었기에 그들의 자유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었다. 그 용기가 아테네를 지켰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전성기를 이끈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외쳤다. "행복은 자유에서 나오고, 자유는 용기에서 나온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 봉사 김대복, 금제 배응록 등은 매번 맞붙어 싸울 때마다 제 몸을 잊고 앞장서서 승첩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상을 주어 칭찬해 줄 만합니다. 왜적과 맞붙어 싸울 때 본영 제2선의 진무 순천 수군 김봉수, 방답 제1선의 별군 광양 김두산.. (19)은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 격군 사노 풍자동, 노비 대복, 노비 김손, 보인 박천매, 사노 팔련, 노비 흔매.. (116)명은 총탄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이순신의 견내량에서 왜적을 쳐부순 장계(見乃梁破倭兵狀)’ 중 일부이다. 이 장계는 임진왜란 원년(1592) 한산도 해전(78)과 안골포 해전(710)을 치르고 나서 그 전과를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다. 이 두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치른 옥포해전에서부터 노량해전까지 총 25번의 해전 중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전투로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왜선 수십 척 침몰시키고 수천 명을 수장시켰으나, 아군 피해는 매우 미미하였다. 장계는 전투 준비 상황, 작전 지시 내용, 전투 장면 등을 마치 그림으로 그리듯 세세히 기록하고 있고, 공을 세운 사람뿐만 아니라 전사자와 부상자의 이름도 일일이 기재하고 있다.

정작 놀라운 것은, 부상자 등의 명단에 장수, 수군, 격군 등 정규군 외에, 노비들까지도 그 이름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절 노비들은 이름만 있고 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차별받는 노비들마저도, 이순신 장군은 그 이름을 박대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왕에게 올린 장계에 이름이 실린 그들은, 비록 노비라 불리었지만 강압에 의해 움직이는 노예는 아니었으며, 적어도 이순신에게는 차별 없이 어엿한 자유인이었다.

리더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살아서 조국을 위해 필사의 의지로 나가 싸운 전사가 되고, 죽거나 다쳐서도 나라를 지킨 영광스런 조선 수군이 되었다. 그러니 조선 수군의 진정한 힘은 이름을 차별 없이 기억하고 불러준 리더의 관심과 사랑이었다 할 것이다.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며/ 그대들은 맡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노라/ 그대들의 혼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 함께 받으시라.” 이는 이순신 장군께서 을미년(1595)에 죽은 군졸들을 제사지낼 손수 지은 제문 중 일부이다. 이렇듯 장군의 부하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리더의 뜨거운 사랑에 부하와 백성들의 애정이 메아리로 화답하였다. 이순신이 의금부 옥에 갇히자 구명운동을 다니는 종사관 정경달에게 류성룡과 이항복이 물었다.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정경달이 답했다. “옳고 그름은 말로 해명할 일이 아닙니다.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 중에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통제사가 죄를 입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꼬'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그 시비를 알 것입니다."

진나라 군, 아테나 군 및 조선 수군은 모두 강했다. 그 강함의 바탕은 인간 존중이라는 점에서 공통한다. 진나라에는 개성 표현의 문화가 있었고, 아테네에는 개인의 자유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에게는 부하들에 대한 리더의 깊은 사랑이 있었다.

 

칼럼 중 1952년과 1995년은 1592년과 1595년의 오기임.
Terracotta Army, China. 8,000 soldiers, 130 chariots, and 670 horses, making it the largest group of life-size statues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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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 참여한 시민들의 용기가 폴리스와 그 자유를 지켰다.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지켜준 것이 바로 그 용기였다. 그들이 살라미스에서 저항했던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절벽에서 혼자 저항했던 바로 그것, 폭군의 강압적인 지배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폭군의 권력에 이끌려나온 노예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헤로도토스는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페르시아 군대는 뒤에서 날라온 채찍질에 떠밀려 전투에 나선 반면에, 자유인들로 이루어진 아테네 군대는 스스로 적을 맞아 앞으로 용감하게 나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저항한 것은 노예 상태가 되는 것, 즉 독재 세력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키려 했다. 그것은 자유가 페르시아의 폭정에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은 자유인이며,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용기는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에 내재되어 있었다. "명심하라! 행복은 자유에서 오고, 자유는 용기에서 온다" _ 헤로도토스
"명심하라! 행복은 자유에서 오고, 자유는 용기에서 온다" _ 페리클레스.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 민주주의, 아테네 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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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중에서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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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595년7월14일(乙酉). 
늦게 개었다.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에게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고 쌀 두 섬을 내어 주었다.  이상록(李祥祿), 태구연(太貴連), 공태원(孔太元)들이 들어왔다. 어머님이 쾌차하여 평안하시다니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다.
(*
이날 이순신은 손수 을미년에 죽은 군졸들을 제사지낼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이순신의 부하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이 녹아 있습니다. 그 전편은 분실되고 이 구절만 남아 있는데, 아쉽다.)

<제문 -  부하들의 제단에 바친 장수의 마음(祭死亡軍卒文)>

親上事長(친상사장)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爾盡其職(이진기직)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投醪吮疽(투료연저) 부하를 위로하며 사랑하는 일
我乏其德(아핍기덕)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노라
招魂同榻(초혼동탑) 그대 넋들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設奠共享(설전공향) 여기에 차려진 제물을 받으시라.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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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종사관을 한 정경달은 선조에게 이순신의 석방을 간절히 주청하였다. 아울러 정경달은 영의정 류성룡과 병조판서 이항복을 찾아가 이순신의 구명 운동을 하였다.
류성룡과 이항복은 정경달에게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정경달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말로 해명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 중에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통제사가 죄를 입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꼬'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_ 정경달의 반곡집(盤谷集)에 실려있다.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3권, p34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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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segon5358/223174031857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6회]-이순신 옥에서 풀려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6회]-이순신 옥에서 풀려나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승인 2023.08.03 08:44 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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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_%ED%95%B4%EC%A0%84_%EB%AA%A9%EB%A1%9D

 

임진왜란 해전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래의 목록은 임진왜란의 해전 목록이다. 정렬 순서는 시간순이다. 날짜 전장 조선군 일본군 비고 장교 병력 피해 장교 병력 피해 옥포 해전1592년 음력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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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B9%84#cite_note-1

 

노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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