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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09 존재인가 행위인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3. 5. 3.

존재인가 행위인가

 

몇 년 전 아들이 여름방학 중에 사무실에 나와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월요일 아침 출근을 위해 함께 지하철을 탔다. 러시아워라 무척 붐볐다. 빽빽한 사람들 틈에 끼였는데, 묘한 불편한 냄새가 훅 밀려온다. 그 출처는 우리 바로 앞에 선 비대한 체구의 백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땀은 목덜미를 따라 흘러 티셔츠를 적신 다음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체취가 심한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그것도 만원 지하철에서 움쩍할 수 없이 밀착된 상태로 곱다시 제대로 체험하기는 처음이다. 영 거슬려서 옆으로 조금 피하면 그 빈틈으로 따라 밀려들어와 더 가까워진다. 나보다 후각이 더 예민한 아들 녀석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하늘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히 그 지하철을 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환승을 위해 걸어가며, 아들은 인간에 대해 그토록 증오심이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이런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하며 투덜댄다.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의도해서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닐 권리가 있고, 어딘가로 출근하여야 한다면 그걸 말릴 수는 없지. 무엇보다도 정작 본인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겪을 불편이나 고통을 잘 모를 수 있다. 남의 고통에 대해,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나.' 아들은 다행히 쉽게 동감한다.

퇴근 후에 집에서 저녁을 먹고 아들과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팥빙수 가게에 들어갔다. 열심히 일하는 가게 주인이 매우 예쁘장하게 생겼다. 그런데 가만 보니 분명히 남자다. 성별을 쉽게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공들여서 화장을 했고, 눈에 띄게 치렁거리는 큰 귀걸이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영 편치 않고 거북스럽다. 그래서 내가 아들에게 뭐라 한마디를 했는데, 나의 불편한 속내가 드러났나 보다.

내 반응에 대해 아들은 의외로 강경하게 따지며 비판한다. ‘저건 자유로운 자기표현이다. 누구도 그 자유를 가지고 비난할 수 없다는 취지의 따끔한 훈시(?)를 송곳에 찔리듯 들어야 했다. 훈시를 들은 나는 억울했다. "야 인마~ 아무리 자기 취향이고 자기표현이라고 해도 그렇지, 주변 사람들의 평범하고 건강하고 선량한 정서를 심히 불편하게 하는 것까지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짜샤~" 이 녀석도 뻗대며 말한다. "불편하면 안 보면 되는 겁니다. 그걸 굳이 보고 느끼고 재단하여 지적하는 게 옳지 않은 거예요."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반박 논리를 생각했다. 오래전 골프장 사우나에서 있었던 해프닝이 떠올랐다. 온몸에 거의 빈틈없이 문신을 과도하게 새긴 사람이 사우나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긴장감이 확 퍼졌다. 그가 샤워를 하고 탕을 향해 걸어오자, 탕 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순식간에 모두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이 사례를 말하고서 아들에게 말했다. “문신도 자유로운 자기표현이지만, 그 사우나를 이용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결국에는 편하게 탕욕을 즐길 타인의 자유를 해치는 거잖아. 어떻게 생각해?” 이에 아들이 말한다. “그러네요. 당사자의 의도도 중요하겠네요. 원래 그런 문신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이나 공포감을 줄려고 한 것이겠지요. 화장은 좀 다르지 않나요?”

우리는 그날의 해프닝들을 복기해보았다. 이 모두가 행위와 존재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정리했다. '행위'는 비난받을 수 있다. 행위는 행위자의 욕구나 자유 의지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가 적극적으로 타인의 정서 등에 영향을 미쳐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설사 스스로에 대한 자기표현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존재'는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다름'에 불과한 것이기에 책임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피부색, 출신, 종교, 신체적 결함, 성정체성 등이 그렇다.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호불호나 불편의 이유는 될 수 있을지라도, 비난이나 박해 혹은 배척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그들을 포용하여야 하고, 때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상황은 불시에 만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태도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그때 필요한 것이 공감과 상상력이라는 데 동의했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의 입장을 모르면, 우리는 오직 그 순간 느낀 감정에 따라 야성적으로 반응할지 모른다. 잠시 그 상대방이 나 자신 혹은 내 가족일 때를 상상하면 된다. 상상하고 공감하면 보일 것이다. 존재인가 행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