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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04 <아테나이8> 일리아스, 아킬레우스의 야성과 이성 사이

by 변리사 허성원 2023. 4. 2.

일리아스, 아킬레우스의 야성과 이성 사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오디세이아와 함께 기원전 8세기에 쓰인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서, 10년간의 트로이 전쟁 중 종반 50일 동안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트로이의 멸망까지는 다루지 않고 헥토르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 일리아스의 내용을 요약해본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그리스 군)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수많은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의 저승으로 보내고, 그들의 주검은 들개와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분노를!"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일리아스의 전체 줄거리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그것은 그리스 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유발하였다. 아가멤논에게 크리세이스라는 처녀가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는데, 아폴론 신전의 사제인 그녀의 아버지 크리세스가 보물을 들고 와서 딸을 돌려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아가멤논은 냉정히 거부한다. 이에 아폴론은 그리스 군 진지에 역병을 퍼뜨렸고, 아킬레우스는 아폴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크리세이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아가멤논을 압박하였다.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포기하면서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가버린다.

이를 모욕으로 여긴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아가멤논이 이끄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아킬레우스가 없는 전장에서는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그리스 군을 마음껏 유린한다. 궁지에 몰린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등 회유했지만 아킬레우스는 단호히 거부한다. 친구이자 시동인 파트로클로스도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그의 갑옷과 투구를 빌려 입고 전장에 뛰어든다. 하지만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아킬레우스를 격노하게 만든다. 이제 분노의 대상이 아가멤논으로부터 헥토르에게로 전환되었다. 아킬레우스는 어머니 테티스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요청하여 만든 훌륭한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드디어 전장에 나선다. 수많은 트로인 군을 도륙하고, 아테나의 도움까지 받아 결국 헥토르마저 죽인다. 그러고는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매달고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주위를 돌며 영혼을 위로하였다.

아들 헥토르의 시신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밤늦게 아킬레우스의 함선으로 몰래 찾아간다.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이 만남은 일리아스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가슴 아리는 장엄한 장면이다. 프리아모스는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들을 죽인 그 끔찍한 두 손에 입을 맞추며 말한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 나는 정말 불행한 사람이오. 드넓은 트로이아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아들들을 낳았건만 그중 한 명도 안 남았으니 말이오. 혼자 남아서 도성과 백성들을 지키던 헥토르도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얼마 전에 그대의 손에 죽었소.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돌려받고자 찾아온 것이오.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하지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발아래 쓰러져 울었고, 아킬레우스도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었다.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에게 말한다.

"아아, 불쌍하신 분! 그대는 마음속으로 많은 불행을 참았소이다. 그대의 용감한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사람의 눈앞으로 혼자서 감히 아카이오이족의 함선들을 찾아오시다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우리의 슬픔은 마음속에 누워 있도록 내버려둡시다. 싸늘한 통곡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제우스의 궁전 마룻바닥에는 두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하나는 나쁜 선물이, 다른 하나는 좋은 선물이 가득 들어 있지요. 제우스께서 이 두 가지를 섞어주시기에 사람은 때로는 궂은일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일을 만나기도 하지요."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헥토르의 시신을 깨끗이 씻어 돌려주며, 장례를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라는 문장으로 일리아스는 끝을 맺는다.

프리아모스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분노와 야성의 아킬레우스를 화해와 용서의 이성적 인간으로 변모시켰다. 이처럼 아킬레우스의 야성과 이성 사이의 서사가 바로 일리아스이다.

크리세이스를 돌려달라는 크리세스의 요청을 거부하는 아가멤논. Agamemnon in his tent refusing to give chryseis back to her father by Joseph-Marie Vien (French, 1716-1809)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아킬레스. ca. 1760-63 by Gavin Hamilton
아킬레우스에게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프리아모스 왕. Alexandr Ivanov,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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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의 인용 부분은 모두 천병희 역 '일리아스'에서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