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현(券八 尊賢)_설원(說苑) _ 유향(劉向)
** 역문은 동양고전DB에서, 원문은 說苑에서 가져옴.
** 賢士는 국가의 棟樑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篇의 大義이다. 임금으로서 천하를 태평스럽게 다스려 後世에 榮名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를 예우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尊賢에 대한 史料를 많이 뽑아 이를 설명하였다.
대체로 어진 이는 출신이 미천한 경우가 많으니 임금은 사람을 알아보는 眼目으로 출신의 貴賤高下로써 人才를 단정해서는 안 됨을 천명하였다. 어진 이가 중요한 것은 임금의 결함을 메워주어 功業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임금이 어진 이를 대할 적에는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지지해야 하며, 平時에 어진 이를 厚待하여야 급박한 일이 닥쳤을 때 죽음을 아끼지 않고 보답하며, 어진 이를 쉽게 죽여서는 안 되며, 어진 이가 망명하는 임금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이 어진 이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도망하게 된 것을 반성해야 된다는 등의 사례를 모아 어진 이를 존중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1. 是故游江海者託於船,致遠道者託於乘,欲霸王者託於賢
人君之欲平治天下而垂榮名者,必尊賢而下士。易曰:「自上下下,其道大光。」又曰:「以貴下賤,大得民也。」夫明王之施德而下下也,將懷遠而致近也。夫朝無賢人,猶鴻鵠之無羽翼也,雖有千里之望,猶不能致其意之所欲至矣;是故游江海者託於船,致遠道者託於乘,欲霸王者託於賢;伊尹、呂尚、管夷吾、百里奚,此霸王之船乘也。釋父兄與子孫,非疏之也;任庖人釣屠與仇讎僕虜,非阿之也;持社稷立功名之道,不得不然也。猶大匠之為宮室也,量小大而知材木矣,比功效而知人數矣。是故呂尚聘而天下知商將亡,而周之王也;管夷吾,百里奚任,而天下知齊秦之必霸也,豈特船乘哉!夫成王霸固有人,亡國破家亦固有人;桀用于莘,紂用惡來,宋用唐鞅,齊用蘇秦,秦用趙高,而天下知其亡也;非其人而欲有功,譬其若夏至之日而欲夜之長也,射魚指天而欲發之當也;雖舜禹猶亦困,而又況乎俗主哉!
임금으로서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려 영광된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賢人을 존경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춘다. 《周易》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몸을 낮추니 그 道가 크게 빛난다.” 하였고, 또 “존귀한 사람이 미천한 사람에게 몸을 낮추니 백성의 마음을 크게 얻는다.” 하였다.
현명한 帝王이 恩德을 베풀면서 낮은 사람에게 몸을 낮추는 것은 먼 지역의 사람을 회유하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을 오게 하는 것이다. 조정에 賢人이 없는 것은 기러기와 고니에 날개가 없는 것과 같아서, 천 리를 날아가려는 소망은 있어도 도달하고자 하는 뜻을 이룰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강과 바다를 가는 사람은 배에 의탁하고, 먼 길을 가는 사람은 수레에 의탁하며, 霸王이 되려는 사람은 賢人에게 의탁해야 한다.
伊尹‧呂尙‧管夷吾(管仲)‧百里奚는 곧 霸王이 되게 하는 데에 배와 수레 역할을 하였다. 父兄과 子孫을 멀리하여 중용하지 않은 것은 소원하게 대해서가 아니고, 요리사‧낚시꾼‧백정‧원수‧노예‧포로까지도 임용한 것은 그들에게 아부해서가 아니다. 社稷을 유지하고 功名을 세우는 방도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뛰어난 목수가 집을 지을 적에 집의 작고 큰 규모를 헤아려 써야 할 재목의 수량을 알고, 工程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써야 할 사람의 수를 아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呂尙을 초빙하자 천하 사람들은 商나라가 장차 망하여 周나라가 왕 노릇할 줄을 알았고, 管夷吾와 百里奚가 임용되자 천하 사람들은 齊나라와 秦나라가 반드시 霸者가 될 것임을 알았다. 어찌 단지 배와 수레일 뿐이랴! 王霸를 이룬 것은 본디 이루게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고, 나라와 집을 패망시킨 것도 본디 패망하게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桀은 干辛을 등용하고, 紂는 惡來를 등용하고, 宋나라는 唐鞅을 등용하고, 齊나라는 蘇秦을 등용하고, 秦나라는 趙高를 등용하자 천하 사람들이 그들 나라가 망할 줄을 알았다.
적당한 사람이 아닌데 功業을 세우려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夏至날에 밤이 길기를 바라고, 하늘을 향해 물고기를 쏘면서 화살이 맞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舜과 禹 같은 聖人이라도 곤란을 당할 텐데 더구나 世俗의 君主이겠는가!
2. 此二君知能見賢而皆不能用,故宋殤公以殺死,魯莊公以賊嗣
春秋之時,天子微弱,諸侯力政,皆叛不朝;眾暴寡,強劫弱,南夷與北狄交侵,中國之不絕若線。桓公於是用管仲、鮑叔、隰朋、賓胥無、甯戚,三存亡國,一繼絕世,救中國,攘戎狄,卒脅荊蠻,以尊周室,霸諸侯。晉文公用咎犯、先軫、陽處父,強中國,敗強楚,合諸侯,朝天子,以顯周室。楚莊王用孫叔敖、司馬子反、將軍子重,征陳從鄭,敗強晉,無敵於天下。秦穆公用百里子、蹇叔子、王子廖及由余,據有雍州,攘敗西戎。吳用延州萊季子,并翼州,揚威於雞父。鄭僖公富有千乘之國,貴為諸侯,治義不順人心,而取弒於臣者,不先得賢也。至簡公用子產、裨諶、世叔、行人子羽,賊臣除,正臣進,去強楚,合中國,國家安寧,二十餘年,無強楚之患。故虞有宮之奇,晉獻公為之終夜不寐;楚有子玉得臣,文公為之側席而坐,遠乎賢者之厭難折衝也。夫宋襄公不用公子目夷之言,大辱於楚;曹不用僖負羈之諫,敗死於戎。故共惟五始之要,治亂之端,在乎審己而任賢也。國家之任賢而吉,任不肖而凶,案往世而視己事,其必然也,如合符,此為人君者,不可以不慎也。國家惛亂而良臣見,魯國大亂,季友之賢見,僖公即位而任季子,魯國安寧,外內無憂,行政二十一年,季子之卒後,邾擊其南,齊伐其北,魯不勝其患,將乞師於楚以取全耳(或作身),故傳曰:患之起必自此始也。公子買不可使戍衛,公子遂不聽君命而擅之晉,內侵於臣下,外困於兵亂,弱之患也。僖公之性,非前二十一年常賢,而後乃漸變為不肖也,此季子存之所益,亡之所損也。夫得賢失賢,其損益之驗如此,而人主忽於所用,甚可疾痛也。夫智不足以見賢,無可奈何矣,若智能見之,而強不能決,猶豫不用,而大者死亡,小者亂傾,此甚可悲哀也。以宋殤公不知孔父之賢乎,安知孔父死,己必死,趨而救之,趨而救之者,是知其賢也。以魯莊公不知季子之賢乎,安知疾將死,召季子而授之國政,授之國政者,是知其賢也。此二君知能見賢而皆不能用,故宋殤公以殺死,魯莊公以賊嗣,使宋殤蚤任孔父,魯莊素用季子,乃將靖鄰國,而況自存乎!
춘추시대에 天子의 권력이 미약하니 諸侯들이 무력으로 서로 정벌하여 모두 周王을 배반하고 朝見하지 않았다. 군사가 많은 자는 적은 자를 능욕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겁박하며, 南夷와 北狄이 서로 번갈아 침략하여 중국의 운명이 겨우 한 올의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齊 桓公이 이때 管仲‧鮑叔‧隰朋‧賓胥無‧甯戚 등을 등용하여 망해가는 세 나라를 존속시켜 주고 한 차례 끊어지는 세대를 이어주었으며, 中原의 諸侯國을 구원하고 戎狄을 물리쳤으며, 마침내 荊蠻을 압박하여 周나라 왕실을 높이 받들게 하고 諸侯 중에 霸者가 되었다.
晉 文公은 咎犯‧先軫‧陽處父 등을 등용하여 中原의 諸侯國을 강력하게 하고 강대한 楚나라를 패퇴시켜 諸侯와 연합하고 천자에게 朝覲하여 周나라 왕실을 높이 드러나게 하였다. 楚 莊王은 孫叔敖‧司馬子反과 장군 子重 등을 등용하여 陳나라를 토벌하고 鄭나라를 복종시켰으며, 강성한 晉나라를 패배시켜 천하에 상대할 적수가 없었다. 秦 穆公은 百里子‧蹇叔子‧王子廖와 由余 등을 등용하여 雍州를 차지하고 西戎을 물리쳤다. 吳나라는 延州來季子를 등용하여 冀州를 겸병하고 雞父에서 위세를 떨쳤다.
鄭 僖公은 千乘 나라의 부유함을 소유하고 諸侯의 존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正道로 다스리지 않고 백성의 마음을 따르지 않아 신하에게 시해를 당하였으니, 어진 이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簡公 때에 이르러 子産‧裨諶‧世叔과 行人 子羽를 등용하여 賊臣을 제거하고 正臣을 임용하여 강한 초나라를 물리치고 中原의 제후국과 연합하니, 국가가 평안하여 20여 년 동안 강한 楚나라가 침범하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虞나라에 宮之奇가 있을 적에 晉 獻公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초나라에 子玉得臣이 있을 적에 晉 文公은 불안하여 자리를 바로하고 앉지 못하였다. 深遠하구나. 어진 이가 환난을 극복하고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취함이여! 宋 襄公은 公子 目夷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楚나라에 큰 치욕을 당했고, 曹나라는 僖負羈의 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아 戎에게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그래서 五始의 요체와 혼란을 다스리는 근본을 공손히 생각해야 되니, 자신을 자세히 살피고 어진 이를 임용하는 데 달려 있다. 국가가 어진 이를 임용하면 吉하고 不肖한 사람을 임용하면 凶하니, 지난 시대를 고찰하고 지나간 일을 살펴보면 符節을 맞춘 것처럼 틀림없다. 이것이 임금 된 사람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국가가 혼란할 때에 良臣이 나타나는 것이니, 魯나라가 크게 혼란했을 때 季友 같은 어진 이가 나타났다. 僖公이 즉위하면서 계우를 등용하자 노나라가 평안해져서 내외에 근심이 없어 21년 동안 정치를 맡아 행하였다. 계우가 죽은 뒤에 邾나라는 노나라의 남쪽을 공격하고 齊나라는 북쪽을 공격하니, 노나라는 그 憂患을 견디지 못하여 楚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보전하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春秋公羊傳》에 “환난이 반드시 여기서부터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公子買는 衛나라를 지키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公子遂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 마음대로 晉나라에 가서 안으로는 신하에게 능멸을 당하고 밖으로는 전쟁에 시달렸으니 국력이 약화되어 초래한 환난이다. 僖公의 본성이 이전의 21년은 항상 현명하다가 그 뒤에 차츰 변하여 불초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는 季子가 살아 있을 적에는 유익하였고, 죽고 나서는 손실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어진 이를 얻고 잃는 데 따라 그 損益의 결과가 이와 같은데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 소홀하니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지혜가 어진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있는데도 강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등용하지 못하면, 크게는 자신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며 작게는 혼란하여 나라가 기울어지니 이는 매우 슬퍼할 만한 일이다.
宋 殤公이 孔父가 현명한 줄을 몰랐겠는가? 〈몰랐다면〉 어찌 공보가 죽으면 자기도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아서 달려가 구했겠는가? 달려가 그를 구한 것은 바로 그가 현명한 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魯 莊公이 季子가 현명한 줄을 몰랐겠는가? 〈몰랐다면〉 어찌 병이 들어 죽으려 할 적에 季子를 불러 國政을 맡겨줄 줄을 알았겠는가? 國政을 맡겨준 것은 바로 그가 현명한 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이 두 임금은 어진 이를 알아보는 지혜는 있으나 모두 어진 이를 重用하지 못했다. 그래서 宋 殤公은 죽임을 당하였고, 魯 莊公은 後嗣를 죽게 하였다. 만일 송 상공이 일찍 孔父를 임용하고 노 장공이 평상시에 季子를 중용했더라면 이웃 나라까지도 안정시켰을 것이니, 하물며 자신을 보존하는 일쯤이랴!
3. 此七士者,不遇明君聖主,幾行乞丐,枯死於中野
鄒子說梁王曰:「伊尹故有莘氏之媵臣也,湯立以為三公,天下之治太平。管仲故成陰之狗盜也,天下之庸夫也,齊桓公得之以為仲父。百里奚道之於路,傳賣五羊之皮,秦穆公委之以政。甯戚故將車人也,叩轅行歌於康之衢,桓公任以國。司馬喜髕腳於宋,而卒相中山。范睢折脅拉齒於魏而後為應侯。太公望故老婦之出夫也,朝歌之屠佐也,棘津迎客之舍人也,年七十而相周,九十而封齊。故詩曰:『綿綿之葛,在於曠野,良工得之,以為絺紵,良工不得,枯死於野。』此七士者,不遇明君聖主,幾行乞丐,枯死於中野,譬猶綿綿之葛矣。」
鄒子가 梁孝王에게 권고하였다. “伊尹은 원래 有莘氏의 媵臣이었으나 湯王이 등용하여 三公으로 삼자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졌고, 管仲은 원래 成陽의 좀도둑이니 천하의 가장 용렬한 사내였으나 齊 桓公이 얻어서 仲父로 삼았습니다. 百里奚는 길에 다니며 밥을 빌어먹다가 다섯 마리 양가죽에 몸이 팔렸으나 秦 穆公이 정치를 맡겼고, 甯戚은 원래 수레를 몰던 사람인데 수레끌채를 두드리며 큰 거리를 가면서 노래하자 齊 桓公이 나라를 맡겼습니다. 司馬喜는 宋나라에서 무릎뼈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으나 마침내 中山國의 재상이 되었고, 范雎는 魏나라에서 갈비뼈와 이가 부러지는 박해를 받았으나 뒤에 應侯가 되었습니다. 太公望은 원래 늙은 부인에게 쫓겨난 사내이고 朝歌에서 백정의 일을 도왔으며 棘津에서 손님이나 맞이하는 侍從이었으나 나이 일흔에 周나라의 재상이 되고 아흔에 齊나라에 봉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詩經》에 ‘끊어지지 않고 뻗은 칡덩굴, 넓은 들판에 나 있구나. 좋은 織工 이를 얻어, 葛布와 麻布를 만들었지. 좋은 직공이 이를 얻지 않았다면, 들에서 말라 죽었을 거야.’라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일곱 사람이 明哲하고 거룩한 임금을 만나지 못했던들 아마 길에서 밥을 빌어먹다가 들판에서 말라 죽었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끊어지지 않고 뻗은 칡덩굴’과 같았을 것입니다.”
4. 眉睫之徵,接而形於色;聲音之風,感而動乎心
眉睫之徵,接而形於色;聲音之風,感而動乎心。甯戚擊牛角而商歌,桓公聞而舉之;鮑龍跪石而登嵼,孔子為之下車;堯、舜相見不違桑陰,文王舉太公不以日久。故賢聖之接也,不待久而親;能者之相見也,不待試而知矣。故士之接也,非必與之臨財分貨,乃知其廉也;非必與之犯難涉危,乃知其勇也。舉事決斷,是以知其勇也;取與有讓,是以知其廉也。故見虎之尾,而知其大於貍也;見象之牙,而知其大於牛也。一節見則百節知矣。由此觀之,以所見可以占未發,睹小節固足以知大體矣。
눈썹과 속눈썹은 미세하지만 서로 교접하면 顔色이 드러나고, 목소리는 바람결 같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甯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자 齊 桓公이 듣고는 그를 등용하였고, 鮑龍이 돌 위에 꿇어앉아 탄식하자 孔子께서 그를 위해 수레에서 내리셨고, 堯임금이 舜을 만날 적에 뽕나무 그늘이 옮겨가지 않은 짧은 시간에 〈천하를 禪讓하였고,〉 文王이 太公을 등용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賢人과 聖人이 서로 만났을 때 오랜 시간을 기다린 뒤에 친해지는 것이 아니며, 능력 있는 사람이 서로 만났을 때 시험하고 나서 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비가 만났을 때 반드시 함께 재물을 대하여 이익을 나누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청렴함을 아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함께 어려운 일을 무릅쓰고 위험한 일을 겪어야 비로소 그의 용감함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일 처리에 결단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용감함을 알고, 받고 주는 데에 사양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에 그의 청렴함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의 꼬리를 보면 살쾡이보다 큼을 알 수 있고, 코끼리의 어금니를 보면 소보다 큼을 알 수 있으니, 한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알 수 있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이미 본 것을 가지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점칠 수 있고, 작은 부분을 보면 진실로 大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5. 故無常安之國,無恒治之民
禹以夏王,桀以夏亡;湯以殷王,紂以殷亡。闔廬以吳戰勝無敵於天下,而夫差以見禽於越,文公以晉國霸,而厲公以見弒於匠麗之宮,威王以齊強於天下,而湣王以弒死於廟梁,穆公以秦顯名尊號,而二世以劫於望夷,其所以君王者同,而功跡不等者,所任異也!是故成王處襁褓而朝諸侯,周公用事也。趙武靈王五十年而餓死於沙丘,任李充故也。桓公得管仲,九合諸侯,一匡天下,失管仲,任豎刁易牙,身死不葬,為天下笑,一人之身,榮辱俱施焉,在所任也。故魏有公子無忌,削地復得;趙任藺相如,秦兵不敢出鄢陵;任唐睢,國獨特立。楚有申包胥,而昭王反位;齊有田單,襄王得國。由此觀之,國無賢佐俊士,而能以成功立名,安危繼絕者,未嘗有也。故國不務大而務得民心;佐不務多,而務得賢俊。得民心者民往之,有賢佐者士歸之,文王請除炮烙之刑而殷民從,湯去張網者之三面而夏民從,越王不隳舊冢而吳人服,以其所為之順於民心也。故聲同則處異而相應,德合則未見而相親,賢者立於本朝,則天下之豪,相率而趨之矣,何以知其然也?曰:管仲,桓公之賊也,鮑叔以為賢於己而進之為相,七十言而說乃聽,遂使桓公除報讎之心而委國政焉。桓公垂拱無事而朝諸侯,鮑叔之力也;管仲之所以能北走桓公無自危之心者,同聲於鮑叔也。紂殺王子比干,箕子被髮而佯狂,陳靈公殺泄冶而鄧元去陳;自是之後,殷兼於周,陳亡於楚,以其殺比干、泄冶而失箕子與鄧元也。燕昭王得郭隗,而鄒衍、樂毅以齊趙至,蘇子、屈景以周楚至,於是舉兵而攻齊,棲閔王於莒,燕校地計眾,非與齊均也,然所以能信意至於此者,由得士也。故無常安之國,無恒治之民;得賢者則安昌,失之者則危亡,自古及今,未有不然者也。明鏡所以昭形也,往古所以知今也,夫知惡往古之所以危亡,而不務襲跡於其所以安昌,則未有異乎卻走而求逮前人也,太公知之,故舉微子之後而封比干之墓,夫聖人之於死尚如是其厚也,況當世而生存者乎!則其弗失可識矣。
禹王은 夏나라에 의지하여 왕 노릇하였고 桀은 夏나라를 가지고도 멸망하였으며, 湯王은 殷나라에 의지하여 왕 노릇하였고 紂는 殷나라를 가지고도 멸망하였다. 闔廬(闔閭)는 吳나라를 가지고 전쟁에 승리하여 천하에 겨룰 자가 없었으나 夫差는 越나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晉 文公은 晉나라에 의지해 霸者가 되었으나 晉 厲公은 匠麗氏의 집에서 시해당하였고, 齊 威王은 齊나라에 의지하여 천하에 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齊 湣王은 宗廟의 들보에 매달려 심줄이 뽑혀 시해당하였다. 秦 穆公은 秦나라에 의지하여 이름을 드날려 존귀해졌으나 二世는 望夷宮에서 겁박을 받고 살해되었다. 그들은 똑같은 君王이었지만 功跡이 같지 않은 까닭은 임용한 신하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周 成王이 포대기 안에 있으면서 제후의 朝見을 받은 것은 周公이 정사를 맡아 처리했기 때문이고, 趙 武靈王이 나이 50세에 沙丘에서 굶어 죽은 것은 李兌를 임용했기 때문이다. 齊 桓公은 管仲을 얻어서 제후를 규합하여 한 번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았는데, 관중을 잃고 豎刁와 易牙를 임용하여 자기가 죽은 뒤에는 제때에 장례를 치르지 못해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니 같은 한 사람의 몸에 榮光과 恥辱이 함께 더해지는 것은 임용하는 사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魏나라는 公子 無忌가 있어서 잃었던 땅을 다시 찾았고, 趙나라가 藺相如를 임용하자 秦나라 군대가 감히 조나라로 나오지 못했으며, 鄢陵이 唐雎를 임용하자 나라가 우뚝 서게 되었다. 楚나라는 申包胥가 있어서 昭王이 復位하였고, 齊나라는 田單이 있어서 襄王이 나라를 되찾았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나라에 현명한 보좌와 뛰어난 인재가 없는데 功業을 이루고 名譽를 세우며 위태로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끊어지는 世代를 잇게 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를 크게 하는 데 힘쓸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는 데 힘써야 하고, 보좌하는 신하를 많이 두는 데 힘쓸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뛰어난 인재를 얻는 데 힘써야 한다. 민심을 얻은 사람은 백성들이 스스로 그에게로 가고, 현명한 보좌를 둔 사람은 인재들이 그에게 귀의한다.
文王이 炮烙刑을 없애자고 요청하자 殷나라 백성들이 따랐고, 湯王이 사방의 그물 중 三面에 쳤던 그물을 제거하자 夏나라 백성들이 따랐으며, 越王 句踐이 吳나라 조상의 묘를 훼손하지 않자 吳나라 백성들이 복종하였으니, 그들의 행위가 민심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소리가 서로 같으면 있는 곳이 달라도 서로 호응하고, 道德이 서로 일치하면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서로 친하게 마련이다.
어진 이가 그 나라 조정에 있으면 천하의 호걸들이 서로 연이어 달려오게 된다. 무엇으로 그렇게 됨을 아는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管仲은 桓公의 원수였지만 鮑叔이 자기보다 현명하다고 하여 추천하여 재상으로 삼게 하였는데, 70마디의 말에 기뻐하면서 즉시 그 말을 따라서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복수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國政을 맡기게 하였다. 환공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도 제후들이 朝見한 것은 포숙의 공이다. 관중이 실패한 뒤에 환공에게 달려가서 자기를 위험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포숙과 지향하는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紂가 王子 比干을 죽이자 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였으며, 陳 靈公이 泄冶를 죽이자 鄧元이 陳나라를 떠났다. 이 이후로 殷나라는 周나라에 겸병되었고, 陳나라는 楚나라에 멸망당했으니, 비간과 설야를 죽여 기자와 등원을 잃었기 때문이다. 燕 昭王이 郭隗를 얻자 鄒衍과 樂毅는 齊나라와 趙나라에서 왔고, 蘇秦과 屈景은 周나라와 楚나라에서 왔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齊나라를 공격해 齊 閔王을 莒에 머물게 하였으니, 燕나라는 땅과 백성을 따져보면 齊나라와 대등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이와 같이 편 것은 인재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안정된 나라는 없고, 언제나 잘 다스려지는 백성은 없다. 어진 이를 얻으면 안정되고 번창하며, 어진 이를 잃으면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밝은 거울은 사물의 형체를 비추는 것이고, 지난 옛 일은 오늘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옛날의 위태롭고 망한 원인을 알기 싫어하고, 안정되고 번창한 원인을 따라 행하는 데에 힘쓰지 않으면, 뒷걸음질치면서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잡기를 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姜太公은 이런 이치를 알았다. 그래서 微子의 후손을 추천하였고, 比干 묘의 봉분을 높이 쌓았다. 聖人이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렇게 후하게 대하였는데, 하물며 당세에 살아 있는 어진 이에게 있어서랴! 그 어진 이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 其舉果,其謀和,其令不偷
齊景公問於孔子曰:「秦穆公其國小,處僻而霸,何也?」對曰:「其國小而志大,雖處僻而其政中,其舉果,其謀和,其令不偷;親舉五羖大夫於係縲之中,與之語三日而授之政,以此取之,雖王可也,霸則小矣。」
齊 景公이 孔子께 물었다. “秦 穆公은 나라가 작고 궁벽한 곳에 있었는데도 霸者 노릇을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는 대답하였다. “그 나라는 작지만 뜻은 크고, 궁벽한 곳에 있었으나 정치는 알맞았습니다. 그의 擧動은 과감했고 그의 謀略은 조화로웠으며 그의 命令은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五羖大夫를 직접 등용하여 3일 동안 함께 말을 나누고는 정치를 맡겨주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천하를 얻었다면 왕 노릇할 수 있었을 것이니 霸者는 작다고 하겠습니다.”
7. 一人之身,榮辱俱施者,何者?其所任異也。
或曰:「將謂桓公仁義乎?殺兄而立,非仁義也;將謂桓公恭儉乎?與婦人同輿,馳於邑中,非恭儉也;將謂桓公清潔乎?閨門之內,無可嫁者,非清潔也。此三者亡國失君之行也,然而桓公兼有之,以得管仲隰朋,九合諸侯,一匡天下,畢朝周室,為五霸長,以其得賢佐也;失管仲隰朋,任豎刁易牙,身死不葬,蟲流出戶。一人之身,榮辱俱施者,何者?其所任異也。」由此觀之,則任佐急矣。
어떤 이가 말했다. “齊 桓公을 仁義롭다고 하겠는가? 형을 죽이고 즉위하였으니 仁義롭다고 할 수 없다. 환공을 공손하고 검소하다고 하겠는가?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城邑 중을 달리고 다녔으니 공손하고 검소하다고 할 수 없다. 환공을 맑고 깨끗하다고 하겠는가? 閨門 안에 시집 보낼 만한 여자가 없었으니 맑고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나라를 망치고 임금의 덕을 잃는 행위이다. 그런데도 환공은 이를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管仲과 隰朋을 얻어 제후를 규합하여 단번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고 제후를 모두 周나라 王室에 朝見하게 하여 五霸 중의 으뜸이 되었으니, 그것은 어진 보좌를 얻었기 때문이다.
관중과 습붕을 잃고 豎刁와 易牙를 임용하여 자기가 죽은 뒤에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체에서 나온 벌레가 문밖에까지 흘러나왔다. 같은 한 사람의 몸에 榮光과 恥辱이 함께 더해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임용한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보좌의 임용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다.”
8. 天下之士皆至
周公旦白屋之士所下者七十人,而天下之士皆至;晏子所與同衣食者百人,而天下之士亦至;仲尼修道行,理文章,而天下之士亦至矣。
周公 旦은 빈천한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 예우한 자가 70명이었는데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왔고, 晏子는 옷과 음식을 같이한 사람이 백 명이었는데 역시 천하의 선비들이 왔으며, 仲尼는 道德‧品行을 수양하시고 禮樂‧法道를 정리하시자 역시 천하의 선비들이 왔다.
9. 雖有賢者而無以接之,賢者奚由盡忠哉!驥不自至千里者,待伯樂而後至也
伯牙子鼓琴,鍾子期聽之,方鼓而志在太山,鍾子期曰:「善哉乎鼓琴!巍巍乎若太山。」少選之間,而志在流水,鍾子期復曰:「善哉乎鼓琴!湯湯乎若流水。」鍾子期死,伯牙破琴絕絃,終身不復鼓琴,以為世無足為鼓琴者。非獨鼓琴若此也,賢者亦然,雖有賢者而無以接之,賢者奚由盡忠哉!驥不自至千里者,待伯樂而後至也。
伯牙가 琴을 연주할 때 鍾子期가 듣고 있었는데, 백아가 막 연주하면서 마음이 太山에 가 있자, 종자기는 말했다. “훌륭하구나, 琴을 연주하는 소리여. 높고 높은 태산 같구나.” 잠깐 사이에 백아의 마음이 흐르는 물에 가 있자, 종자기는 다시 말했다. “훌륭하구나, 琴을 연주하는 소리여. 넘실넘실 흐르는 물과 같구나.”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琴을 부숴 弦을 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琴을 연주하지 않았으니, 세상에 더 이상 琴을 연주하여 들려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이다. 단지 琴을 연주하는 일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어진 이의 일도 이와 같다. 어진 이가 있더라도 예의를 갖추어 대접하지 않으면 어진 이가 어떻게 충성을 다하겠는가? 駿馬가 스스로 천 리를 가지 못하니, 伯樂이 배양하기를 기다린 뒤에 갈 수 있는 것이다.
10. 夫城固不能自守,兵利不能自保,得士而失之,必有其間,夫士存則君尊,士亡則君卑。
周威公問於甯子曰:「取士有道乎?」對曰:「有,窮者達之,亡者存之,廢者起之;四方之士,則四面而至矣。窮者不達,亡者不存,廢者不起;四方之士,則四面而畔矣。夫城固不能自守,兵利不能自保,得士而失之,必有其間,夫士存則君尊,士亡則君卑。」周武公曰:「士壹至如此乎?」對曰:「君不聞夫楚平王有士,曰楚傒胥丘,負客,王將殺之,出亡之晉;晉人用之,是為城濮之戰。又有士曰苗賁皇,王將殺之,出亡走晉;晉人用之,是為鄢陵之戰。又有士曰上解于,王將殺之,出亡走晉;晉人用之,是為兩堂之戰。又有士曰伍子胥,王殺其父兄,出亡走吳;闔閭用之,於是興師而襲郢,故楚之大得罪於梁鄭宋衛之君,猶未遽至于此也。此四得罪於其士,三暴其民骨,一亡其國。由是觀之,士存則國存,士亡則國亡;子胥怒而亡之,申包胥怒而存之;士胡可無貴乎!」
周 威公이 甯子에게 물었다. “어진 인재를 뽑는 데 방법이 있소?” 甯子는 대답했다.
“있습니다. 곤궁한 사람을 현달하게 하고 망하게 된 사람을 생존하게 하며 폐기된 사람을 기용하시면, 사방의 인재들이 사면에서 올 것입니다. 곤궁한 사람을 현달하게 하지 않고 망하게 된 사람을 생존하게 하지 않으며 폐기된 사람을 기용하지 않으면, 사방의 인재들이 사면에서 배반하고 떠날 것입니다. 성은 견고한데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무기는 날카로운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며, 인재를 얻었으나 다시 잃는 것은 반드시 빈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재가 있으면 임금이 尊重받게 되고, 인재를 잃으면 임금이 卑賤하게 됩니다.”
주 위공이 다시 물었다. “인재는 이처럼 한결같이 귀중한 것입니까?” 영자는 다시 대답하였다. “임금께서는 楚나라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楚王에게 楚 傒胥와 丘負客이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楚王이 이들을 죽이려고 하기에 망명하여 晉나라로 가자, 晉 文公이 이들을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城濮의 전쟁입니다. 또 苗賁皇이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이 죽이려 하기에 망명하여 晉나라로 가자, 晉 厲公이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鄢陵의 전쟁입니다. 또 上解于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이 죽이려 하기에 망명하여 晉나라로 가자, 晉君이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兩堂의 전쟁입니다. 또 伍子胥라는 인재가 있었습니다. 초왕이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였는데 망명하여 吳나라로 가자, 吳王 闔閭가 등용하여 이에 吳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의 수도 郢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나라가 梁‧鄭‧宋‧衛나라 군주에게 큰 죄를 지었으나 대번에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이 네 차례의 패배는 인재에게 죄를 얻어 세 번이나 그들 백성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굴고 한 차례 國都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인재가 있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하는 법입니다. 伍子胥는 노하여 楚나라 國都를 잃게 하였고 申包胥는 노하여 초나라를 보존하였으니, 인재가 어찌 귀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1. 毋取拑者,無取健者,毋取口銳者
哀公問於孔子曰:「人若何而可取也?」孔子對曰:「毋取拑者,無取健者,毋取口銳者。」哀公曰:「何謂也?」孔子曰:「拑者大給利不可盡用;健者必欲兼人,不可以為法也;口銳者多誕而寡信,後恐不驗也。夫弓矢和調而後求其中焉;馬愨愿順,然後求其良材焉;人必忠信重厚,然後求其知能焉。今有人不忠信重厚而多智能,如此人者,譬猶豺狼與,不可以身近也。是故先其仁義之誠者,然後親之;於是有知能者,然後任之;故曰:親仁而使能。夫取人之術也,觀其言而察其行,夫言者所以抒其匈而發其情者也,能行之士必能言之,是故先觀其言而揆其行,夫以言揆其行,雖有姦軌之人,無以逃其情矣。」哀公曰:「善。」
魯 哀公이 孔子께 물었다. “어떤 사람이라야 뽑아 쓸 수 있습니까?” 공자는 대답하였다. “沈黙하는 사람을 뽑아 쓰지 말며, 雄建한 사람을 뽑아 쓰지 말며, 말을 잘하는 사람을 뽑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노 애공이 다시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침묵하는 사람은 큰 이익을 주기를 바라니 끝까지 다 쓸 수 없고, 웅건한 사람은 반드시 남을 이기려고 하니 본보기로 삼을 수 없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허황하여 믿음이 적으니 뒤에 그 말이 부합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활과 화살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명중을 구할 수 있고, 말[馬]은 온순하여 잘 길들여진 뒤에야 훌륭한 재질을 구할 수 있고, 사람은 반드시 忠信하고 鄭重하며 무게가 있고 난 뒤라야 지혜와 재능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충신하지 않고 정중하지 않으며 무게가 없으면서 지혜와 재능이 많으면, 이런 사람은 비유하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사람이니,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그 사람이 仁義를 성실히 행하는 사람인지를 살펴보고 난 다음에 친해야 하고, 여기에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를 안 다음에 임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仁義를 행하는 사람을 친히 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부려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재를 뽑아 쓰는 방법은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행위를 관찰해야 합니다. 말은 가슴속의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실천하는 사람은 말도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이 때문에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행위를 살펴야 되니, 그가 한 말을 가지고 그의 행위를 살피면 법을 어기고 난을 일으키는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진정을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애공은 말하였다. “좋습니다.”
12. 尸祿之臣,不能存君矣
周公攝天子位七年,布衣之士,執贄所師見者十二人,窮巷白屋所見者四十九人,時進善者百人,教士者千人,官朝者萬人。當此之時,誠使周公驕而且吝,則天下賢士至者寡矣,苟有至者,則必貪而尸祿者也,尸祿之臣,不能存君矣。
周公이 천자의 位를 攝行한 7년 동안 평민의 선비 중에 폐백을 가지고 스승의 예로 만난 이가 12명이고, 궁벽한 거리에 가난하게 사는 이를 먼저 나아가 만난 이가 49명이며, 때때로 좋은 말을 올린 이가 백 명이고, 敎化를 받은 선비가 천 명이며, 조정에서 벼슬한 이가 만 명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진실로 주공이 교만하고 또 인색하였다면 천하의 어진 선비로서 주공을 찾아온 사람이 적었을 것이고, 만일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필시 탐욕스럽고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먹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먹는 신하는 임금을 보전할 수 없다.
13. 夫九九薄能耳,而君猶禮之,況賢於九九乎?
齊桓公設庭燎,為士之欲造見者,期年而士不至,於是東野鄙人有以九九之術見者,桓公曰:「九九何足以見乎?」鄙人對曰:「臣非以九九為足以見也,臣聞主君設庭燎以待士,期年而士不至,夫士之所以不至者,君、天下賢君也;四方之士,皆自以論而不及君,故不至也。夫九九薄能耳,而君猶禮之,況賢於九九乎?夫太山不辭壤石,江海不逆小流,所以成大也,詩云:『先民有言,詢于芻蕘。』言博謀也。」桓公曰善,乃因禮之。期月四方之士,相攜而並至,詩曰:「自堂徂基,自羊徂牛。」言以內及外,以小及大也。
齊 桓公이 찾아와서 만나려는 어진 인재를 위해 宮庭에 횃불을 밝혀놓고 기다렸는데, 1년이 되도록 어진 인재가 찾아오지 않았다. 이때 東野에 사는 촌사람으로 九九法을 가지고 뵈려는 자가 있었다. 제 환공이 말했다. “구구법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다고 여기느냐?” 촌사람은 대답했다.
“신은 구구법으로 뵐 수 있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신이 듣자니, 主君께서 궁정에 횃불을 밝혀놓고 어진 인재를 기다리셨으나 1년이 되도록 어진 인재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진 인재가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주군이 천하의 賢君이기 때문이니, 사방의 어진 인재들은 모두 스스로 주군의 현명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구구법은 하찮은 재능이건만 주군께서 그런 사람도 예우하시는데, 더구나 구구법을 하는 자보다 훨씬 나은 재능이 있는 자이겠습니까? 太山은 흙 한 덩이 돌 하나라도 사양하지 않고 江海는 작은 물도 거절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크게 된 것입니다. 《詩經》에 ‘옛 賢人의 말에, 꼴 베고 나무하는 이에게도 물어야 하네.’라 하였으니, 의견을 널리 구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환공은 “좋은 말이다.”라 하고 곧 그를 예우하였다. 그 뒤 한 달 만에 사방의 어진 인재들이 서로 손을 잡고 몰려왔다. 《詩經》에 “堂에서 문 곁의 堂에 가며, 羊에서 소에게 가네.”라 하였으니, 안에서 밖에 미치며 작은 것에서 큰 것에 미침을 말한 것이다.
14. 今桓公在此,則車下之臣盡管仲也。
齊景公伐宋,至於岐隄之上,登高以望,太息而歎曰:「昔我先君桓公,長轂八百乘以霸諸侯,今我長轂三千乘,而不敢久處於此者,豈其無管仲歟!」弦章對曰:「臣聞之,水廣則魚大,君明則臣忠;昔有桓公,故有管仲;今桓公在此,則車下之臣盡管仲也。」
齊 景公이 宋나라를 토벌할 때 岐隄 위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했다.
“옛날 우리 先君 桓公께서는 長轂 8백 대로 제후의 패자가 되셨는데, 지금 나는 長轂이 3천 대인데도 감히 이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는 것은 어찌 管仲 같은 이가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弦章이 대답하였다. “신은 듣자니 물이 넓으면 물고기가 크고,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충성한다 하였습니다. 예전에 환공 같은 현명한 임금이 있었기 때문에 管仲 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환공이 여기에 계신다면 수레 아래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관중일 것입니다.”
15. 夫珠玉無足,去此數千里而所以能來者,人好之也;今士有足而不來者,此是吾君不好之乎!
趙簡子游於河而樂之,歎曰:「安得賢士而與處焉!」舟人古乘跪而對曰:「夫珠玉無足,去此數千里而所以能來者,人好之也;今士有足而不來者,此是吾君不好之乎!」趙簡子曰:「吾門左右客千人,朝食不足,暮收市征,暮食不足,朝收市征,吾尚可謂不好士乎?」舟人古乘對曰:「鴻鵠高飛遠翔,其所恃者六翮也,背上之毛,腹下之毳,無尺寸之數,去之滿把,飛不能為之益卑;益之滿把,飛不能為之益高。不知門下左右客千人者,有六翮之用乎?將盡毛毳也。」
趙簡子가 西河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어쩌면 어진 선비를 얻어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뱃사공 古乘이 무릎을 꿇고 대답하였다.
“珍珠와 寶玉은 발이 없고 産地와의 거리가 수천 리나 되는데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까닭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비들이 발이 있는데도 오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이에 조간자는 말했다. “내 門下의 좌우에 묵는 食客이 천 명이다. 아침밥의 공급이 부족하면 저녁에 시장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저녁밥의 공급이 부족하면 아침에 시장에서 세금을 징수하는데, 내가 그래도 선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러자 뱃사공 고승은 대답했다.
“鴻鵠이 높이 날아 멀리 갈 적에 믿는 것은 여섯 개의 깃촉입니다. 등 위의 털과 배 밑의 솜털은 尺寸 정도의 긴 것도 없으니, 한 줌 가득 그 털을 뽑더라도 더욱 낮게 나는 것이 아니고, 한 줌 가득 그 털을 보태주더라도 더욱 높게 나는 것이 아닙니다. 主君의 문하에 있는 천 명의 식객 중에 여섯 개의 깃촉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등 위의 털과 배 밑의 털 같은 사람이 전부일 것입니다.”
16. 王必將待堯舜禹湯之士而後好之,則禹湯之士亦不好王矣。
齊宣王坐,淳于髡侍,宣王曰:「先生論寡人何好?」淳于髡曰:「古者所好四,而王所好三焉。」宣王曰:「古者所好,何與寡人所好?」淳于髡曰:「古者好馬,王亦好馬;古者好味,王亦好味;古者好色,王亦好色;古者好士,王獨不好士。」宣王曰:「國無士耳,有則寡人亦說之矣。」淳于髡曰:「古者驊騮騏驥,今無有,王選於眾,王好馬矣;古者有豹象之胎,今無有,王選于眾,王好味矣;古者有毛廧西施,今無有,王選於眾,王好色矣。王必將待堯舜禹湯之士而後好之,則禹湯之士亦不好王矣。」宣王嘿然無以應。
齊 宣王이 앉아 있을 때 淳于髡이 모시고 있었다. 이때 제 선왕이 물었다. “선생은 寡人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해보겠소?” 순우곤이 말하였다. “古人은 좋아하는 것이 네 가지였는데, 王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제 선왕이 다시 말했다. “고인이 좋아한 것과 과인이 좋아하는 것을 비교하면 어떠하오?” 순우곤은 대답하였다.
“고인은 말[馬]을 좋아했는데 왕께서도 말을 좋아하시고, 고인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왕께서도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고, 고인은 女色을 좋아했는데 왕께서도 여색을 좋아하시며, 고인은 선비를 좋아했는데 왕께서만 유독 선비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제 선왕이 말했다. “나라에 어진 선비가 없을 뿐이니, 어진 선비가 있다면 과인도 그를 좋아했을 것이오.”
순우곤은 말했다. “옛날에는 驊騮‧騏驥 같은 名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데 왕께서 여러 말 중에서 골라 타시니 이는 왕께서 말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표범과 코끼리 胎로 만든 요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데 왕께서 여러 음식 중에서 골라 드시니 이는 왕께서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毛廧과 西施 같은 미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데 왕께서 여러 여자 중에서 골라 즐기시니 이는 왕께서 여색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왕께서 반드시 堯‧舜‧禹‧湯을 보필했던 어진 선비를 기다린 뒤에 좋아하신다면, 요‧순‧우‧탕을 보필했던 어진 선비들도 왕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제 선왕은 잠자코 있으면서 응답하는 말이 없었다.
17. 猶舉杖而呼狗,張弓而祝雞矣
衛君問於田讓曰:「寡人封侯盡千里之地,賞賜盡御府繒帛而士不至,何也?」田讓對曰:「君之賞賜,不可以功及也;君之誅罰,不可以理避也;猶舉杖而呼狗,張弓而祝雞矣;雖有香餌而不能致者,害之必也。」
衛君이 田讓에게 물었다. “寡人은 천 리의 땅을 다 써서 諸侯를 봉하고, 宮中의 창고에 있는 비단을 다 써서 상을 주었건만, 어진 선비가 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전양이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주시는 상은 세운 功으로 미칠 수가 없고, 임금께서 주시는 형벌은 정당한 이유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몽둥이를 들면서 개를 부르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닭을 ‘구구’ 하며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향기로운 미끼를 가지고 부르더라도 오게 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이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18. 且夫財者,君之所輕也;死者士之所重也,君不能用所輕之財,而欲使士致所重之死,豈不難乎哉?
宗衛相齊,遇逐罷歸舍,召門尉田饒等二十有七而問焉,曰:「士大夫誰能與我赴諸侯者乎?」田饒等皆伏而不對。宗衛曰:「何士大夫之易得而難用也!」饒對曰:「非士大夫之難用也,是君不能用也。」宗衛曰:「不能用士大夫何若?」田饒對曰:「廚中有臭肉,則門下無死士矣。今夫三升之稷不足於士;而君雁鶩有餘粟。紈素綺繡靡麗。堂楯從風雨弊,而士曾不得以緣衣;果園梨粟,後宮婦人摭以相擿,而士曾不得一嘗,且夫財者,君之所輕也;死者士之所重也,君不能用所輕之財,而欲使士致所重之死,豈不難乎哉?」於是宗衛面有慚色,逡巡避席而謝曰:「此衛之過也。」
宗衛가 齊나라에서 재상 노릇을 하다가 추방당하여 罷職되자 집에 돌아와서 문을 지키는 門尉인 田饒 등 27인을 불러놓고 물었다. “士大夫들 중에 누가 나와 함께 다른 諸侯를 찾아가겠소?” 전요 등이 모두 엎드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종위는 말했다. “어찌 사대부는 얻기는 쉬운데 쓰기는 어렵소?” 그러자 전요는 대답하였다. “사대부를 쓰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主君께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위는 다시 물었다. “사대부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전요는 대답하였다.
“부엌에 썩어서 냄새 나는 고기가 있으면 門下에 주군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하는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지금 3되의 양식도 선비는 만족스럽게 먹지 못하는데, 주군의 기러기와 오리는 먹고 남는 곡식이 있습니다. 깨끗하고 고운 비단과 꽃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인 비단이 마루의 난간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비바람에 날리며 낡아가고 있는데, 선비들은 옷의 가장자리에 선을 두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과수원의 배와 밤은 後宮의 부인들이 주워서 서로 던지며 놀건만, 선비들은 한 번 맛을 보지도 못합니다. 또 재물은 주군께서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죽음은 선비가 귀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주군께서는 가볍게 여기는 재물을 쓰지 않으면서 선비가 귀중하게 여기는 죽음을 바치게 하려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에 종위는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뒷걸음쳐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였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오.”
19. 靈公愛之。靈公尊之。靈公說之
魯哀公問於孔子曰:「當今之時,君子誰賢?」對曰:「衛靈公。」公曰:「吾聞之,其閨門之內,姑姐妹無別。」對曰:「臣觀於朝廷,未觀於堂陛之間也。靈公之弟曰公子渠牟,其知足以治千乘之國,其信足以守之,而靈公愛之。又有士曰王材,國有賢人,必進而任之,無不達也;不能達,退而與分其祿,而靈公尊之。又有士曰慶足,國有大事,則進而治之,無不濟也,而靈公說之。史鰌去衛,靈公邸舍三月,琴瑟不御,待史鰌之入也而後入,臣是以知其賢也。」
魯 哀公이 孔子께 물었다. “당대의 임금 중에 누가 賢明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衛 靈公이지요.” 노 애공이 말했다. “나는 들으니 靈公은 閨門 안에서 고모‧누님‧누이의 분별이 없이 산다고 합디다.” 이에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저는 그의 조정의 政事만 보았지, 宮內 後宮의 개인적인 일은 보지 않았습니다. 公子 渠牟는 영공의 아우인데, 그의 지혜는 千乘의 제후국을 다스릴 만하고, 그의 信義는 나라를 지킬 만하니 영공이 사랑합니다. 또 王林이라는 어진 인재가 있는데, 나라에 賢人이 있으면 반드시 영공에게 추천하고 임용하여 현달하게 하지 않은 이가 없고, 현달시키지 못하면 물러나와 자기의 녹봉을 그에게 나누어주니, 영공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또 慶足이라는 어진 인재가 있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나서서 이를 처리하여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으니, 영공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史鰌가 衛나라를 떠나려 할 적에 영공은 그의 집에 묵으며 석 달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않다가, 사추가 조정에 들어오기를 기다린 뒤에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의 현명함을 아는 것입니다.”
20. 廊下有二十五俊士,堂上有二十五老人
介子推行年十五而相荊,仲尼聞之,使人往視,還曰:「廊下有二十五俊士,堂上有二十五老人。」仲尼曰:「合二十五人之智,智於湯武;并二十五人之力,力於彭祖。以治天下,其固免矣乎!」
介子推가 열다섯 살 때 楚[荊]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仲尼(孔子)께서 들으시고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셨다. 보냈던 사람이 돌아와서 말했다. “그의 廊下에는 25인의 뛰어난 사람이 있고, 堂上에는 25인의 노인이 있었습니다.”
중니는 말했다. “25인의 智慧를 합하면 湯王과 武王의 지혜보다 나을 것이고, 25인의 力量을 모으면 彭祖의 역량보다 나을 것이다. 이렇게 천하를 다스리면 진실로 환난을 면할 것이다.”
21. 夫有道而能下於天下之士,君子乎哉!
孔子閒居,喟然而歎曰:「銅鞮伯華而無死,天下其有定矣。」子路曰:「願聞其為人也何若。」孔子曰:「其幼也敏而好學,其壯也有勇而不屈,其老也有道而能以下人。」子路曰:「其幼也敏而好學則可,其壯也有勇而不屈則可;夫有道又誰下哉?」孔子曰:「由不知也。吾聞之,以眾攻寡而無不消也;以貴下賤,無不得也。昔在周公旦制天下之政而下士七十人,豈無道哉?欲得士之故也,夫有道而能下於天下之士,君子乎哉!」
孔子께서 집에서 한가롭게 계시다가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셨다. “銅鞮伯華가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천하가 아마 안정을 얻었을 것이다.” 子路가 말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는 말해주셨다. “그는 어렸을 때는 明敏하면서 學問을 좋아하였고, 壯年일 때는 勇氣가 있어서 不義에 굽히지 않았으며, 늙어서는 道德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몸을 낮추어 謙讓했느니라.”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그가 어렸을 때 명민하면서 학문을 좋아한 것은 좋은 일이고, 장년일 때 용기가 있어서 불의에 굽히지 않은 것도 좋은 일입니다만, 도덕이 있으면서 또 누구에게 몸을 낮추어 겸양한 것입니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由는 모르는구나. 나는 들으니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적은 무리를 공격하면 상대를 소멸시키고, 귀한 신분으로 미천한 사람에게 몸을 낮추면 人心을 얻는다 하였다. 옛날 周公 旦이 천하를 통치할 때 몸을 낮추어 겸양한 선비가 70인이었는데 어찌 도덕이 없어서 그랬겠느냐? 어진 인재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도덕이 있으면서도 천하의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어 겸양하면 진정한 君子일 것이다.”
22. 富貴者安敢驕人 부귀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교만하게 행동하겠습니까!”
魏文侯從中山奔命安邑,田子方從,夫子擊過之,下車而趨,子方坐乘如故,告太子曰:「為我請君,待我朝歌。」太子不說,因為子方曰:「不識貧窮者驕人,富貴者驕人乎?」子方曰:「貧窮者驕人,富貴者安敢驕人,人主驕人而亡其國,吾未見以國待亡者也;大夫驕人而亡其家,吾未見以家待亡者也。貧窮者若不得意,納履而去,安往不得貧窮乎?貧窮者驕人,富貴者安敢驕人。」太子及文侯道田子方之語,文侯歎曰:「微吾子之故,吾安得聞賢人之言,吾下子方以行,得而友之。自吾友子方也,君臣益親,百姓益附,吾是以得友士之功;我欲伐中山,吾以武下樂羊,三年而中山為獻於我,我是以得有武之功。吾所以不少進於此者,吾未見以智驕我者也;若得以智驕我者,豈不及古之人乎?」
魏 文侯가 中山國에서 安邑으로 달려가 命을 내릴 때 田子方이 따라갔었는데, 太子 擊이 전자방을 만나 수레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달려왔으나, 전자방은 여전히 수레에 앉아 있으면서 太子에게 일렀다. “저를 대신해 임금께 朝歌에서 저를 기다려달라고 요청해주십시오.” 태자는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대로 전자방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빈궁한 사람이 驕慢합니까? 부귀한 사람이 교만합니까?”
전자방이 말했다. “빈궁한 사람이 교만하지요. 부귀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교만하겠습니까! 임금이 교만하면 나라를 망치는 것인데, 저는 나라를 가지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大夫가 교만하면 그의 집을 망치는 것인데, 저는 집을 가지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빈궁한 사람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신을 신고 떠나버리는 법이니, 어디를 간들 빈궁하게 지내지 못하겠습니까! 빈궁한 사람이 교만한 법이니, 부귀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교만하게 행동하겠습니까!”
태자가 위 문후에게 가서 전자방이 한 말을 말하자 문후는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 태자의 잘못이 없었다면 내 어떻게 賢人의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전자방에게 몸을 낮추어 행동하여 그와 벗하게 되었다. 내가 전자방과 벗한 이래로 임금과 신하 사이는 더욱 친밀해졌고, 백성들은 더욱 의지하여 따르게 되었으니, 나는 이 때문에 賢士와 벗한 공이 어떠한 줄을 안다. 나는 武力으로 中山國을 토벌하고자 武勇으로는 樂羊에게 몸을 낮추어 그를 예우했는데 3년 만에 중산국을 나에게 바쳤으니, 나는 이 때문에 武士를 벗한 공이 어떠한 줄을 안다. 내가 여기에서 좀 더 진보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지혜를 가지고 나에게 교만을 부리는 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지혜를 가지고 나에게 교만을 부리는 자를 만난다면 어찌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겠느냐!”
23. 為人君而忍其臣者,智士不為謀,辨士不為言,仁士不為行,勇士不為死。
“남의 임금이 되어 그의 신하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자에게는, 智士는 임금을 위해 계책을 내지 않고, 辯士는 임금을 위해 말을 하지 않고, 어진 선비[仁士]는 임금을 위해 德을 행하지 않으며, 勇士는 임금을 위해 죽음을 바치지 않는 것입니다.”
晉文侯行地登隧,大夫皆扶之,隨會不扶,文侯曰:「會!夫為人臣而忍其君者,其罪奚如?」對曰:「其罪重死。」文侯曰:「何謂重死?」對曰:「身死,妻子為戮焉。」隨會曰:「君奚獨問為人臣忍其君者,而不問為人君而忍其臣者耶?」文侯曰:「為人君而忍其臣者,其罪何如?」隨會對曰:「為人君而忍其臣者,智士不為謀,辨士不為言,仁士不為行,勇士不為死。」文侯援綏下車,辭大夫曰:「寡人有腰髀之病,願諸大夫勿罪也。」
晉 文侯가 평지를 가다가 산길을 올라갈 때 大夫들이 모두 그를 부축하였으나 隨會는 부축하지 않았다. 진 문후가 말했다. “수회야!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이 처한 困境을 참고 돕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어디에 해당하는가?” 수회는 대답했다. “그 죄가 죽이고 또 죽이는 데 해당합니다.” 진 문후는 다시 물었다. “무엇을 죽이고 또 죽인다고 하는 것이냐?” 수회는 대답하였다. “그 자신을 죽이고 처자까지도 죽이는 것입니다.”
수회는 다시 말했다. “임금께서는 왜 단지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에게 잔인하게 대한 데 대해서만 물으시고, 남의 임금이 되어 그의 신하에게 잔인하게 대한 데 대해서는 묻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진 문후는 되물었다. “남의 임금이 되어 그의 신하에게 잔인하게 대하면 그 죄가 어디에 해당하는가?” 수회는 대답했다.
“남의 임금이 되어 그의 신하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자에게는, 智士는 임금을 위해 계책을 내지 않고, 辯士는 임금을 위해 말을 하지 않고, 어진 선비[仁士]는 임금을 위해 德을 행하지 않으며, 勇士는 임금을 위해 죽음을 바치지 않는 것입니다.”
듣고 난 진 문후는 수레에 맨 줄을 잡고 수레에서 내려 大夫들에게 사과하였다. “寡人이 허리와 넓적다리에 병이 있으니 여러 대부들은 허물하지 마시오.”
24. 慎毋以士之所羞者驕士
賢士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권세를 가지고 현사에게 교만을 부리지 마라
齊將軍田瞶出將,張生郊送曰:「昔者堯讓許由以天下,洗耳而不受,將軍知之乎?」曰:「唯然,知之。」「伯夷叔齊辭諸侯之位而不為,將軍知之乎?」曰:「唯然,知之。」「於陵仲子辭三公之位而傭為人灌園,將軍知之乎?」曰:「唯然,知之。」「智過去君第,變姓名,免為庶人,將軍知之乎?」曰:「唯然,知之。」「孫叔敖三去相而不悔,將軍知之乎?」曰:「唯然,知之。」「此五大夫者,名辭之而實羞之。今將軍方吞一國之權,提鼓擁旗,被堅執銳,旋回十萬之師,擅斧鉞之誅,慎毋以士之所羞者驕士。」田瞶曰:「今日諸君皆為瞶祖道具酒脯,而先生獨教之以聖人之大道,謹聞命矣。」
齊나라 장군 田聵가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할 때, 張生이 교외에까지 나와 전송하며 말했다. “옛날 堯임금이 천하를 許由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허유는 潁川에 귀를 씻고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전외가 말했다. “예, 그렇소, 이 일을 알고 있소.” 장생이 물었다. “그럼 伯夷‧叔齊는 諸侯의 지위를 사양하고 제후가 되지 않았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전외가 말했다. “예, 그렇소, 이 일을 알고 있소.”
장생이 물었다. “그럼 於陵仲子는 三公의 지위를 사양하고 품팔이하여 남의 庭園에 물을 주며 살았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전외가 말했다. “예, 그렇소, 이 일을 알고 있소.” 장생이 물었다. “그럼 智過는 임금의 아우 되는 지위를 떠나 성명을 바꾸고 귀족의 신분을 벗고 서인이 되었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전외가 말했다. “예, 그렇소, 이 일을 알고 있소.” 장생이 물었다. “그럼 孫叔敖는 세 번이나 재상에서 떠났는데도 후회하지 않았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전외가 말했다. “예, 그렇소, 이 일을 알고 있소.” 이에 장생이 말했다.
“이 다섯 大夫는 名分은 사양한 것이지만 실상은 이런 지위를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오. 지금 장군은 온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북을 잡고 깃발을 세우며 견고한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잡고서 10만 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誅殺하는 권한을 독점하고 있소. 부디 조심하여 賢士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권세를 가지고 현사에게 교만을 부리지 마시오.”
전외는 듣고 말했다. “오늘 여러분이 모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나 전외를 전송하는데, 선생만 聖人의 큰 도리를 가르쳐주시니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25. 見段干木,立倦而不敢息;及見翟璜,踞堂而與之言
魏文侯見段干木,立倦而不敢息;及見翟璜,踞堂而與之言,翟璜不說。文侯曰:「段干木,官之則不肯,祿之則不受;今汝欲官則相至,欲祿則上卿;既受吾賞,又責吾禮,毋乃難乎?」
魏 文侯가 段干木을 만나서는 서 있느라 피곤하여도 감히 쉬지 못하였고, 翟黃을 만나서는 두 다리를 뻗은 채 堂 위에 앉아서 말을 나누니 책황이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위 문후가 말했다.
“단간목은 벼슬을 주어도 하려 하지 않고 祿俸을 주어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벼슬은 宰相이 되기를 원하고 녹봉은 上卿의 녹봉을 원하고 있다. 이미 내가 주는 재물(녹봉)을 받고는 또 내가 禮로 대해주기를 요구하니 어려운 일이 아닌가?”
26. 士不中而見,女無媒而嫁
孔子之郯,遭程子於塗,傾蓋而語終日。有間,顧子路曰:「取束帛一以贈先生。」子路不對。有間,又顧曰:「取束帛一以贈先生。」子路屑然對曰:「由聞之,士不中而見,女無媒而嫁,君子不行也。」孔子曰:「由,詩不云乎:『野有蔓草,零露溥兮,有美一人,清揚婉兮,邂逅相遇,適我願兮。』今程子天下之賢士也,於是不贈,終身不見。大德毋踰閑,小德出入可也。」
孔子께서 郯나라로 가시다가 길에서 程子를 만나 수레의 덮개를 기울여놓고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셨다. 잠시 뒤에 子路를 돌아보며 이르셨다. “束帛 하나를 가져다가 이 선생께 드려라.”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또 자로를 돌아보며 이르셨다. “속백 하나를 가져다가 이 선생께 드려라.” 그러자 자로는 심드렁하여 말했다. “저는 들으니 선비가 紹介하는 사람 없이 만나고, 여자가 仲媒하는 사람 없이 시집가는 일은 君子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에 공자께서는 일러주셨다.
“由야! 《詩經》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냐? ‘들에 덩굴풀이 있는데, 이슬이 흠뻑 내렸구나. 美人 한 사람, 얼굴이 맑고 아름답구나. 약속하지도 않고 만났으니, 내 소원에 꼭 들어맞았어라.’라고. 지금 정자는 천하의 賢士이다. 이때 드리지 않으면 일생을 마칠 때까지 만나지 못할 것이다. 큰 德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조금 차이가 나도 괜찮은 것이다.”
27. 管仲之賢,不得此三權者,亦不能使其君南面而霸矣。
齊桓公使管仲治國,管仲對曰:「賤不能臨貴。」桓公以為上卿而國不治,桓公曰何故?管仲對曰:「貧不能使富。」桓公賜之齊國市租一年而國不治,桓公曰何故?對曰:「疏不能制親。」桓公立以為仲父。齊國大安,而遂霸天下。孔子曰:「管仲之賢,不得此三權者,亦不能使其君南面而霸矣。」
齊 桓公이 管仲을 시켜 나라를 다스리게 하자 관중이 대답하였다. “微賤한 신분으로는 尊貴한 사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환공이 관중을 上卿으로 삼았으나 나라는 여전히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제 환공이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게요?” 관중이 대답했다.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을 부릴 수 없습니다.” 제 환공이 齊나라의 시장에서 징수하는 1년 치의 세금을 관중에게 주었으나 나라는 여전히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제 환공이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게요?” 관중이 대답했다. “임금과 疏遠한 관계로는 임금과 친한 사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에 제 환공이 관중을 세워 仲父로 삼으니, 齊나라가 크게 안정되어 마침내 천하의 霸者가 되었다. 이에 대해 孔子께서는 말씀하셨다. “관중의 현명함으로도 이 세 가지 권한을 얻지 못했으면, 그의 임금이 남쪽을 향해 앉아서 霸者 노릇을 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28. 「不知賢,害霸;知而不用,害霸;用而不任,害霸;任而不信,害霸;信而復使小人參之,害霸。」
桓公問於管仲曰:「吾欲使爵腐於酒,肉腐於俎,得無害於霸乎?」管仲對曰:「此極非其貴者耳;然亦無害於霸也。」桓公曰:「 何如而害霸?」管仲對曰:「不知賢,害霸;知而不用,害霸;用而不任,害霸;任而不信,害霸;信而復使小人參之,害霸。」桓公:「善。」
齊 桓公이 管仲에게 물었다. “나는 술이 잔 안에서 썩고 고기가 도마 위에서 썩게 하고 싶은데, 霸業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않겠소?” 관중이 대답했다. “이는 지극히 高貴한 행위는 아닙니다. 그러나 패업을 이루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환공이 다시 말했다. “어떠해야 패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지요?” 관중은 대답했다.
“어진 이를 몰라보면 패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고, 알아보고서도 등용하지 않으면 패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고, 등용하고서도 重任하지 않으면 패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고, 중임하고서도 信任하지 않으면 패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며, 신임하면서도 다시 小人을 政事에 참여시키면 패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됩니다.” 제 환공은 “좋은 말이오.” 하였다.
29. 魯人果攻鄪而數之罪十,而曾子之所爭者九
魯人攻鄪,曾子辭於鄪君曰:「請出,寇罷而後復來,請姑毋使狗豕入吾舍。」鄪君曰:「寡人之於先生也,人無不聞;今魯人攻我而先生去我,我胡守先生之舍?」魯人果攻鄪而數之罪十,而曾子之所爭者九。魯師罷,鄪君復修曾子舍而後迎之。
魯나라 사람이 鄪를 공격하자 曾子가 鄪君에게 하직하면서 말했다. “다른 곳으로 나갔다가 침략이 끝난 뒤에 다시 올 것이니, 우선 개와 돼지가 저의 집에 들어오지 말도록 해주십시오.”
비군이 말했다. “寡人이 선생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는 들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魯나라 사람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선생이 나를 버리시니, 내가 무엇 때문에 선생의 집을 지키겠습니까?”
노나라 사람이 鄪를 공격하여 열 가지 죄를 열거하니 아홉 가지가 증자가 諫爭했던 것이었다. 노나라 군대의 공격이 그치자 비군은 증자의 집을 다시 수리한 뒤에 증자를 맞이하였다.
30. 吾唯不能用子韋,故至於亡;今吾之得復也,尚是子韋之遺德餘教也
宋司城子罕之貴子韋也,入與共食,出與同衣;司城子罕亡,子韋不從,子罕來,復召子韋而貴之。左右曰:「君之善子韋也,君亡不從,來又復貴之,君獨不愧於君之忠臣乎?」子罕曰:「吾唯不能用子韋,故至於亡;今吾之得復也,尚是子韋之遺德餘教也,吾故貴之。且我之亡也,吾臣之削跡拔樹以從我者,奚益於吾亡哉?」
宋나라 司城 子罕이 子韋를 顯貴하게 했을 때 들어와서는 함께 밥을 먹고 나갈 적에는 같은 옷을 입었다. 사성 자한이 亡命할 때 자위가 따라가지 않았었는데 자한이 돌아와서 다시 자위를 불러 현귀하게 하였다. 이에 측근들이 말했다. “主君은 자위에게 잘해주었으나 주군이 망명할 때 자위는 따라가지 않았는데 돌아와서 또다시 현귀하게 해주셨으니, 주군은 어찌 주군의 忠臣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러자 자한은 말했다. “나는 자위를 잘 쓰지 못했다. 그래서 망명하기까지 했었는데 지금 내가 돌아온 것도 바로 자위가 남겨준 덕택과 가르침이니 나는 그 때문에 현귀하게 해준 것이다. 또 내가 망명할 때 내 신하로서 수레바퀴의 자취를 없애고 나무를 뽑아 넘어뜨림을 당하는 곤경에서 나를 따른 자들은 나의 망명에 무슨 도움이 되었느냐?”
31. 夫美女者,醜婦之仇也;盛德之士,亂世所疏也;正直之行,邪枉所憎也
楊因見趙簡主曰:「臣居鄉三逐,事君五去,聞君好士,故走來見。」簡主聞之,絕食而歎,跽而行,左右進諫曰:「居鄉三逐,是不容眾也;事君五去,是不忠上也。今君有士見過人矣。」簡主曰:「子不知也。夫美女者,醜婦之仇也;盛德之士,亂世所疏也;正直之行,邪枉所憎也。」遂出見之,因授以為相,而國大治。由是觀之,遠近之人,不可以不察也。
楊因이 趙簡主를 만나려 하면서 말했다. “제가 마을에 살다가 세 번을 쫓겨나고 임금을 섬기다가 다섯 번을 떠났는데 主君은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달려와 뵙는 것입니다.” 조간주가 이 말을 듣고 밥 먹기를 그치면서 탄식하고 무릎걸음으로 나가자 측근들이 간하였다.
“마을에 살다가 세 번 쫓겨난 것은 뭇사람을 包容하지 못한 것이요, 임금을 섬기다가 다섯 번 떠난 것은 윗사람에게 忠誠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런데 현재 주군께서는 여덟 번 잘못을 범한 선비를 만나려는 것입니다.”
조간주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구나! 美女는 醜女의 원수이고, 덕이 높은 선비는 난세에 멀리하는 존재이고, 정직한 행실은 사악한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다.”
마침내 나가 만나고 그대로 재상을 주어서 나라가 크게 잘 다스려졌다. 이를 따라 살펴보면 사람을 멀리하고 가까이하는 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32. 取夫良材而卑官之,安能無悲乎!
應侯與賈午子坐,聞其鼓琴之聲,應侯曰:「今日之琴,一何悲也?」賈午子曰:「夫急張調下,故使人悲耳。急張者,良材也;調下者,官卑也。取夫良材而卑官之,安能無悲乎!」應侯曰:「善哉!」
應侯가 賈午子와 함께 앉아 있다가 琴을 타는 소리를 듣고 응후가 말했다. “오늘의 琴소리는 어찌 한결같이 슬픈 게요?” 가오자는 대답했다.
“琴의 弦을 팽팽히 하여 곡조가 낮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현을 팽팽히 한 것은 琴의 재목이 좋은 것을, 곡조가 낮게 가라앉은 것은 벼슬이 낮은 것을 표시합니다. 좋은 재목을 취하여 낮은 벼슬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슬픔이 없겠습니까?” 이 말은 들은 응후는 “좋은 말이다.” 하였다.
33. 臣笑其賜鬼薄而請之厚也
十三年,諸侯舉兵以伐齊,齊王聞之,惕然而恐,召其群臣大夫告曰:「有智為寡人用之。」於是博士淳于髡仰天大笑而不應,王復問之,又大笑不應,三笑不應,王艴然作色不悅曰:「先生以寡人語為戲乎?」對曰:「臣非敢以大王語為戲也,臣笑臣鄰之祠田也,以一奩飯,一壺酒,三鮒魚,祝曰:『蟹堁者宜禾,洿邪者百車,傳之後世,洋洋有餘。』臣笑其賜鬼薄而請之厚也。」於是王乃立淳于髡為上卿,賜之千金,革車百乘,與平諸侯之事;諸侯聞之,立罷其兵,休其士卒,遂不敢攻齊,此非淳于髡之力乎?
13년에 諸侯가 군사를 일으켜 齊나라를 토벌하려 하자 齊王이 이를 듣고 두려워서 群臣과 大夫들을 불러 일렀다. “지혜가 있으면 寡人을 위해 써달라.” 이때 博士 淳于髡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크게 웃으면서 응답하지 않았다. 왕이 다시 물었으나 또 크게 웃으면서 응답하지 않았고, 세 번째도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자 왕이 노하여 안색이 변하고 불쾌히 여기면서 말했다. “선생은 과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는 게요?” 순우곤은 대답했다.
“신은 감히 대왕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신은 신의 이웃 사람이 農地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웃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한 찬합의 밥, 한 병의 술, 세 마리의 붕어의 祭物로 이렇게 축원하였습니다. ‘높은 땅에는 벼가 잘 되고 낮은 땅에는 백 수레를 수확하여, 후세에 전하여 많고 많아 넉넉함이 있게 해주오.’라 하기에, 신은 그가 귀신에게 주는 것은 적고 요청하는 것은 많음을 웃은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이내 순우곤을 上卿으로 삼고 千金과 革車 백 대를 주어 제후와 화평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제후가 이를 듣고 즉시 군대를 해산하여 병사들을 쉬게 하고 마침내 감히 제나라를 공격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순우곤의 공이 아니겠는가?
34. 眄子之為人也,尊賢者而愛不肖者,賢不肖俱負任,是以王僅得存耳。
田忌去齊奔楚,楚王郊迎至舍,問曰:「楚,萬乘之國也,齊亦萬乘之國也,常欲相并,為之奈何?」對曰:「易知耳,齊使申孺將,則楚發五萬人,使上將軍將之,至禽將軍首而反耳。齊使田居將,則楚發二十萬人,使上將軍將之,分別而相去也。齊使眄子將,楚發四封之內,王自出將而忌從,相國上將軍為左右司馬,如是則王僅得存耳。」於是齊使申孺將,楚發五萬人,使上將軍至,擒將軍首反,於是齊王忿然,乃更使眄子將,楚悉發四封之內,王自出將,田忌從,相國上將軍為左右司馬,益王車屬九乘,僅得免耳。至舍,王北面正領齊袪,問曰:「先生何知之早也?」田忌曰:「申孺為人,侮賢者而輕不肖者,賢不肖者俱不為用,是以亡也;田居為人,尊賢者而賤不肖者,賢者負任,不肖者退,是以分別而相去也;眄子之為人也,尊賢者而愛不肖者,賢不肖俱負任,是以王僅得存耳。」
田忌가 齊나라를 떠나 楚나라로 달아나니 楚王이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고 館舍에 당도하여 물었다. “초나라는 萬乘의 나라이고, 제나라도 萬乘의 나라이지요. 그런데 항상 서로 상대를 兼倂하려고 하니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 전기는 대답하였다.
“이 일은 알기 쉽습니다. 제나라가 申孺를 장수로 삼아 파견하거든 초나라는 군사 5만 명을 출동시켜 上將軍을 보내 거느리게 하면, 제나라 장군의 머리를 획득하여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제나라가 田居를 장수로 삼아 파견하거든 초나라는 군사 20만 명을 출동시켜 상장군을 보내 거느리게 하면, 〈승부가 나지 않아〉 서로 나뉘어 떠나갈 것입니다. 제나라가 眄子를 장수로 삼아 파견하거든 초나라는 사방 국경 안의 모든 군사를 출동시켜 왕께서 직접 나서 군사를 거느리시고 저 田忌도 따르며, 相國과 上將軍을 좌우의 司馬로 삼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면 왕은 〈겸병당하지 않고〉 겨우 보존될 것입니다.”
이때 제나라가 申孺를 장수로 삼아 파견하자 초나라는 군사 5만 명을 출동시켜 상장군이 거느리고 맞아 싸우게 하여 제나라 장군의 머리를 획득하여 돌아왔다. 이에 齊王이 분노하여 다시 眄子를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초나라는 사방 국경 안의 군사를 모두 출동시켜 왕이 직접 나서 군사를 거느리고 田忌가 따랐으며, 相國과 上將軍이 좌우의 司馬가 되고, 왕의 수레에는 아홉 대의 兵車를 더 소속시켜서 겨우 〈제나라에 멸망당하는 수치를〉 면하였다. 館舍에 도착하여 왕은 북쪽을 향하여 옷깃과 소매를 바로 여미고 물었다.
“선생은 어떻게 이런 결과를 일찌감치 먼저 알았소?” 전기는 말했다. “申孺는 사람됨이 어진 이를 업신여기고 不肖한 사람을 輕視하여 어진 이와 불초한 사람이 모두 그에게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田居는 사람됨이 어진 이는 존경하지만 불초한 사람은 천시하니 어진 이는 임용되고 불초한 사람은 퇴출되기 때문에 〈승부가 나지 않아〉 서로 나뉘어 떠나가는 것입니다. 眄子의 사람됨은 어진 이를 존경하고 불초한 사람을 사랑하여 어진 이나 불초한 사람이 모두 임용되었기 때문에 왕께서 겨우 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35. 有命之父母,不知孝子;有道之君,不知忠臣
無管仲鮑叔以為臣,故有豫讓之功也
“管仲과 鮑叔 같은 이를 신하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예양의 공로가 있게 된 것이다.”
魏文侯觴大夫於曲陽,飲酣,文侯喟然歎曰:「吾獨無豫讓以為臣。」蹇重舉酒進曰:「臣請浮君。」文侯曰「何以?」對曰:「臣聞之,有命之父母,不知孝子;有道之君,不知忠臣。夫豫讓之君,亦何如哉?」文侯曰:「善!」受浮而飲之,嚼而不讓。曰:「無管仲鮑叔以為臣,故有豫讓之功也。」
魏 文侯가 曲陽에서 大夫들과 술을 마셨는데 술이 얼큰히 취했을 때 위 문후가 한숨을 쉬면 탄식하였다. “나만 豫讓 같은 사람을 신하로 삼지 못했구나!” 그러자 蹇重이 술잔을 들고 올리며 말했다. “신이 罰酒를 드리겠습니다.” 위 문후가 말했다. “무엇 때문이오?” 건중이 대답했다.
“신이 듣자니 좋은 運命이 있는 부모는 자식이 孝子인 줄을 모르고, 道德이 있는 君主는 어떤 이가 忠臣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예양의 임금은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위 문후는 말했다. “좋은 말이오.” 그리고는 벌주를 받아 마시면서 사양하지 않고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고 말했다. “管仲과 鮑叔 같은 이를 신하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예양의 공로가 있게 된 것이다.”
36. 夫良將營其君,使復其位,死而後止,何曰以來,若未能,乃非良也
趙簡子曰:「吾欲得范中行氏良臣。」史黶曰:「安用之?」簡子曰:「良臣,人所願也,又何問焉?」曰:「君以無為良臣故也。夫事君者,諫過而薦可,章善而替否,獻能而進賢;朝夕誦善,敗而納之,聽則進,否則退。今范中行氏之良臣也,不能匡相其君,使至於難;出在於外,又不能入。亡而棄之,何良之為;若不棄,君安得之。夫良將營其君,使復其位,死而後止,何曰以來,若未能,乃非良也。」簡子曰:「善。」
趙簡子가 말했다. “나는 范氏와 中行氏를 보좌했던 良臣을 얻고 싶다.” 그러자 史黶이 말했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조간자는 말했다. “양신은 사람마다 얻기를 원하는 것인데 어찌 또 묻는가?” 사염은 말했다.
“신은 양신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임금이 잘못하는 일은 諫하고 옳은 일은 권장하며, 善한 일은 드러내고 나쁜 일은 폐기하며, 재능이 있는 사람은 들이고 어진 사람은 추천하여, 아침저녁으로 成敗한 전례를 말씀드리고 採納하게 하여 채납하면 벼슬에 나가고 채납하지 않으면 물러가는 것입니다. 지금 범씨와 중항씨의 양신이라고 한 사람은 그의 임금을 도와서 바로잡지 못하여 患難에 빠지고 도망쳐 밖에 나가 있는데도 돌아오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도망치자 버리고 말았으니 어찌 양신이라 하겠습니까? 만일 버리지 않는다면 主君께서 어떻게 그들을 얻겠습니까? 양신은 제 임금의 어려움을 구해 復位하도록 획책하여 죽고 난 뒤에 그만두는 것인데,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양신이 아닙니다.” 듣고 난 조간자는 “좋은 말이오.” 하였다.
37. 賢者知其不己用而怨之,不肖者知其賤己而讎之
子路問於孔子曰:「治國何如?」孔子曰:「在於尊賢而賤不肖。」子路曰:「范中行氏尊賢而賤不肖,其亡何也?」曰:「范中行氏尊賢而不能用也,賤不肖而不能去也;賢者知其不己用而怨之,不肖者知其賤己而讎之。賢者怨之,不肖者讎之;怨讎並前,中行氏雖欲無亡,得乎?」
子路가 孔子께 여쭈었다. “나라는 어떻게 다스리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어진 이를 尊重하고 不肖한 사람을 輕視하는 데 있다.” 자로는 다시 물었다. “范氏와 中行氏는 어진 이를 존중하고 불초한 사람을 경시하였건만 그들이 멸망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범씨와 중항씨는 어진 이를 존중하면서도 重用하지 않고, 불초한 사람을 경시하면서도 물리치지 않았다. 어진 이는 자기를 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원망하고, 불초한 사람은 자기를 경시한다는 것을 알아서 원수로 여겼다. 어진 이는 원망하고 불초한 사람은 원수로 여겨 원망하는 사람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함께 앞에 있는데 중항씨가 멸망하지 않으려고 하나 되겠느냐?”
38. 社稷之衛也,今殺之,是重荊勝也
晉荊戰於邲,晉師敗績,荀林父將歸請死,昭公將許之,士貞伯曰:「不可,城濮之役,晉勝于荊,文公猶有憂色,曰子玉猶存,憂未歇也;困獸猶鬥,況國相乎?」及荊殺子玉,乃喜曰:「莫予毒也。今天或者大警晉也,林父之事君,進思盡忠,退思補過,社稷之衛也,今殺之,是重荊勝也。」昭公曰:「善!」乃使復將。
晉나라와 楚[荊]나라가 邲에서 전쟁하여 晉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荀林父가 돌아와 죽겠다고 요청하니 景公이 허락하려고 하였다. 士貞伯이 말했다.
“안 됩니다. 城濮의 전쟁에서 진나라가 초나라에 승리하였으나, 文公은 오히려 걱정스런 안색을 띄면서 ‘초나라에는 子玉이 아직 살아 있으니 걱정이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짐승도 오히려 싸우려고 달려드는 것인데 하물며 國相이겠는가?’ 초나라가 子玉을 죽이게 되자 문공은 그제야 기뻐하면서 ‘우리 진나라를 危害할 사람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패배는 하늘이 아마 우리 진나라를 크게 경계한 것인 듯합니다. 순임보가 임금을 섬길 적에 조정에 나와서는 충성을 다하기를 생각하고, 물러가서는 임금의 잘못을 보완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社稷을 保衛하는 인물인데 지금 죽이시면 이는 초나라가 거듭 승리하는 것입니다.”
듣고 난 경공은 “좋은 말이오.” 하고는 곧 다시 장수가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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