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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설원(說苑)_유향(劉向)

부은(券六 復恩)_설원(說苑) _ 유향(劉向)

by 변리사 허성원 2022. 8. 3.

부은(券六  復恩)_설원(說苑) _ 유향(劉向)

 

** 역문은 동양고전DB에서, 원문은 說苑에서 가져옴.

**  에서 말한 復恩은 임금과 신하, 主人 奴僕 사이의 관계를 위주로 제시하였다. 신하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자신의 私利만을 도모하는 것은 를 초래하는 근원이고, 반대로 임금이 신하의 공로에 보답하지 않고 을 주는 것을 꺼리는 것도 혼란을 부르는 기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復恩은 국가의 安定 盛衰에 미치는 영향이 큰 일이다.
임금이 된 사람은 祿俸 懸示하여 기다리고, 신하가 된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다하여 그 은혜를 갚아야 君臣 和協하고 국가는 안정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런 관점에 부합하는 例事를 두루 뽑아 그 결과를 보이고 있다. 또한 남에게 은덕을 베풀지 않을 뿐 아니라, 荒淫無道하여 報應을 받는 反面的 例事 提示하였다.

 

1. 德不孤,必有鄰
夫禍亂之原基,由不報恩生矣。

孔子曰:「德不孤,必有鄰。」夫施德者貴不德,受恩者尚必報;是故臣勞勤以為君而不求其賞,君持施以牧下而無所德,故易曰:「勞而不怨,有功而不德,厚之至也。」君臣相與以市道接,君縣祿以待之,臣竭力以報之;逮臣有不測之功,則主加之以重賞,如主有超異之恩,則臣必死以復之。孔子曰:北方有獸,其名曰蟨,前足鼠,後足兔,是獸也,甚矣其愛蛩蛩巨虛也,食得甘草,必齧以遺蛩蛩巨虛,蛩蛩巨虛見人將來,必負蟨以走,蟨非性之愛蛩蛩巨虛也,為其假足之故也,二獸者亦非性之愛蟨也,為其得甘草而遺之故也。夫禽獸昆蟲猶知比假而相有報也,況於士君子之欲與名利於天下者乎!夫臣不復君之恩而苟營其私門,禍之源也;君不能報臣之功而憚刑賞者,亦亂之基也。夫禍亂之原基,由不報恩生矣。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덕이란 외롭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이웃이 있으리라”  「德不孤,必有鄰。」

恩德을 베푼 사람은 은덕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은덕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報答하기를 숭상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신하는 임금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되 賞 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임금은 은덕 베풀기를 주장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되 은덕을 베푼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周易》에 “수고로워도 원망치 않으며 공로가 있어도 德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지극히 厚德한 일이다.” 하였다. 君臣이 교제하는 도리는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임금이 녹봉을 제시하여 신하를 대우하면 신하는 있는 힘을 다해 보답하며, 신하가 뜻밖의 큰 공을 세운 데에 이르면 임금은 重賞을 내려주며, 만일 임금이 특별한 은혜를 주었으면 신하는 반드시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된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북쪽 먼 지방에 짐승이 있는데 이름을 蟨이라고 한다. 앞발은 쥐와 같고 뒷발은 토끼와 같아 〈잘 달리지 못한다.〉 이 짐승을 蛩蛩‧巨虛가 매우 사랑하여 맛있는 풀을 만나 먹게 되면 반드시 이 풀을 씹어서 공공‧거허에게 먹여주고, 공공‧거허는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蟨을 업고 달아난다. 이는 蟨의 천성이 공공‧거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거허의 발을 빌리기 위한 것 때문이고, 공공‧거허 두 짐승도 천성이 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蟨이 맛있는 풀을 먹여주기 때문이다. 금수와 곤충도 서로 친하고 도움을 주면서 서로 보답할 줄을 아는데 하물며 士君子로서 천하에 名利를 세우려는 사람이랴!”

신하가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지 않고 구차하게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이는 禍亂을 초래하는 근원이요, 임금이 신하의 공로에 보답하지 않고 상 주기를 꺼리는 것도 화란을 초래하는 기틀이다. 화란을 초래하는 근원과 기틀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 蟨 장구벌레 궐, 쥐 귀)

2. 吾在拘厄之中,不失臣主之禮唯赫也

趙襄子見圍於晉陽,罷圍,賞有功之臣五人,高赫無功而受上賞,五人皆怒,張孟談謂襄子曰:「晉陽之中,赫無大功,今與之上賞,何也?」襄子曰:「吾在拘厄之中,不失臣主之禮唯赫也。子雖有功皆驕,寡人與赫上賞,不亦可乎?」仲尼聞之曰:「趙襄子可謂善賞士乎!賞一人而天下之人臣,莫敢失君臣之禮矣。」

趙襄子가 晉陽에서 포위를 당했다가 포위를 풀고 나서 공로가 있는 신하 다섯 사람을 포상할 때, 高赫은 공로가 없는데도 최고의 賞을 받으니 다섯 사람이 다 화를 내었다. 張孟談이 襄子에게 말했다. “진양의 포위를 푸는 전투 중에 고혁은 큰 공로가 없는데 지금 최고의 상을 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양자는 대답했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君臣간의 禮를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고혁뿐이었다. 그대들은 공로가 있으나 모두 교만하였으니, 寡人이 고혁에게 최고의 상을 주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仲尼께서 이를 듣고 말씀하셨다. “조양자는 賢士에게 상을 잘 줄 줄 안다고 말할 만하다. 한 사람에게 상을 주어 천하의 신하된 사람들이 감히 군신간의 예를 잃지 않게 하였구나.”

3. 夫高明至賢,德行全誠,耽我以道,說我以仁,暴浣我行,昭明我名,使我為成人者

晉文公亡時,陶叔狐從,文公反國,行三賞而不及陶叔狐,陶叔狐見咎犯曰:「吾從君而亡十有三年,顏色黎黑,手足胼胝,今君反國行三賞而不及我也,意者君忘我與!我有大故與!子試為我言之君。」咎犯言之文公,文公曰:「嘻,我豈忘是子哉!夫高明至賢,德行全誠,耽我以道,說我以仁,暴浣我行,昭明我名,使我為成人者,吾以為上賞;防我以禮,諫我以誼,蕃援我使我不得為非,數引我而請於賢人之門,吾以為次賞;夫勇壯強禦,難在前則居前,難在後則居後,免我於患難之中者,吾又以為之次。且子獨不聞乎?死人者,不如存人之身;亡人者,不如存人之國;三行賞之後,而勞苦之士次之,夫勞苦之士,是子固為首矣,豈敢忘子哉!」周內史叔輿聞之曰:「文公其霸乎!昔聖王先德而後力,文公其當之矣,詩云:『率履不越』,此之謂也。」

晉 文公이 亡命할 때 陶叔狐가 따라갔었는데, 문공이 귀국하여 즉위한 뒤 공이 있는 신하에게 세 차례나 상을 내리면서도 도숙호에게는 상을 내리지 않았다. 도숙호는 咎犯을 만나 말했다. “나는 임금을 따라 13년 동안 망명하면서 온갖 고생에 얼굴색은 새까맣게 타고 손발에는 굳은살이 박였소. 그런데 지금 임금이 귀국하여 세 차례나 상을 내리면서 나에게는 내리지 않았으니, 생각건대 임금이 나를 잊은 것인가요? 아니면 나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는 것인가요? 그대는 나를 위해 한번 임금께 말해보시오.”

구범이 문공에게 이 말을 하자, 문공은 말했다. “아, 내 어찌 이 사람을 잊었겠소. 총명하고 매우 현명하며 德行이 완전하고 성실하여 나를 道로써 즐겁게 하고 仁으로써 설득하며, 나의 행위를 高潔하게 변화시키고 나의 명성을 밝게 드러내어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에게 나는 최고의 상을 주었소. 禮로써 나의 잘못을 예방하고 道義로써 나의 잘못을 諫하며, 나를 보호하고 도와서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고, 자주 나를 인도하여 賢人의 집에 가서 가르침을 요청하게 한 사람에게 나는 次賞을 주었소. 용감하고 강하며 굳세어 患難이 앞에 닥치면 앞에 나서 처리하고, 환난이 뒤에 있으면 뒤에 남아 막아 나를 환난 중에서 벗어나게 한 사람에게 나는 또 그 다음의 상을 주었소. 또 그대만 이런 말을 듣지 못했소? 남을 위해 죽은 사람은 남의 생명을 보존시킨 것만 못하고, 남을 도망치게 한 사람은 남의 나라를 보존시킨 것만 못하다 하였소. 세 차례 상을 내린 뒤에 수고하고 애써 고생한 사람에게 그 다음의 상을 내리게 된 것이오. 수고하고 애써 고생한 사람 중에는 이 사람이 단연 으뜸이 되니, 내가 어찌 감히 이 사람을 잊었겠소?”

周나라의 內史 叔興이 이 일을 듣고 말하였다. “문공은 앞으로 霸者가 될 것이다. 예전에 聖王은 德을 먼저로 삼고 勇力을 뒤로 삼았는데, 문공이 여기에 해당한다.” 《詩經》에 “예를 따라 행하여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4. 臣聞國君蔽士,無所取忠臣;大夫蔽遊,無所取忠友

晉文公入國,至於河,令棄籩豆茵席,顏色黎黑,手足胼胝者在後,咎犯聞之,中夜而哭,文公曰:「吾亡也十有九年矣,今將反國,夫子不喜而哭,何也?其不欲吾反國乎?」對曰:「籩豆茵席,所以官者也,而棄之;顏色黎黑,手足胼胝,所以執勞苦,而皆後之;臣聞國君蔽士,無所取忠臣;大夫蔽遊,無所取忠友;今至於國,臣在所蔽之中矣,不勝其哀,故哭也。」文公曰:「禍福利害不與咎氏同之者,有如白水!」祝之,刀沈璧而盟。介子推曰:「獻公之子九人,唯君在耳,天未絕晉,必將有主,主晉祀者非君而何?唯二三子者以為己力,不亦誣乎?」文公即位,賞不及推,推母曰:「盍亦求之?」推曰:「尤而效之,罪又甚焉。且出怨言,不食其食。」其母曰:「亦使知之。」推曰:「言,身之文也;身將隱,安用文?」其母曰:「能如是,與若俱隱。」至死不復見推,從者憐之,乃懸書宮門曰:「有龍矯矯,頃失其所,五蛇從之,周遍天下,龍饑無食,一蛇割股,龍反其淵,安其壤土,四蛇入穴,皆有處所,一蛇無穴,號於中野。」文公出見書曰:「嗟此介子推也。吾方憂王室未圖其功。」使人召之則亡,遂求其所在,聞其入綿上山中。於是文公表綿上山中而封之,以為介推田,號曰介山。

晉 文公이 晉나라로 들어올 때 河水 가에 이르러 그동안 사용했던 그릇과 자리를 버리게 하고, 안색이 새까맣고 손발에 굳은살이 박인 사람들을 뒷자리에 있게 하였다. 咎犯이 이를 듣고 한밤중에 哭을 하자 문공이 말했다. “내가 亡命한 지 19년이나 되었소. 이제야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대가 기뻐하지 않고 哭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내가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게요?”

구범이 대답하였다. “그릇과 자리는 館舍에서 늘 쓰던 것인데 버리고, 안색이 새까맣고 손발에 굳은살이 박인 것은 수고롭고 고생스런 일을 한 사람들인데 모두 뒷자리에 있게 했습니다. 저는 들으니, 임금이 선비를 버리면 忠臣을 얻을 수 없고, 大夫가 벗을 버리면 忠直한 벗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제가 버림받을 사람들 속에 있으니,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기에 곡을 한 것입니다.”

문공은 말하였다. “禍福과 利害를 외삼촌과 共有하지 않는다면 저 맑은 물의 神이 있어 증인이 될 것이오.” 이렇게 축원하고 곧 璧玉을 강물에 빠뜨려 맹세하였다.

介子推가 말했다. “獻公의 아들 아홉 명 중에 公子만 남아 있을 뿐이오. 하늘이 진나라를 斷絶하려 않는다면 반드시 계승할 임금을 둘 것이니, 진나라의 祭祀를 주관할 사람은 공자가 아니고 누구이겠소. 다만 그대들이 자기의 공로라고 여긴다면 속이는 일이 아니겠소?”

문공이 즉위하여 賞이 개자추에게는 내리지 않으니, 개자추의 어머니가 말했다. “왜 상을 요구하지 않느냐?” 개자추는 말했다. “〈자기의 공로라고 여기는 사람을〉 나무라고서 본받으면 죄가 더욱 심하고, 또 원망하는 말을 하였으니 그의 祿俸을 먹지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다시 말했다. “그래도 임금이 알도록 해라.” 개자추는 말했다. “말은 사람의 몸을 修飾하는 것입니다. 몸을 감추려고 하는데 수식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능히 이같이 한다면 나는 너와 함께 隱居하겠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다시는 보지 못하였다. 개자추를 따르던 사람이 이를 가련하게 여겨 마침내 이런 글을 宮門에 걸어놓았다.

“날래고 씩씩한 龍이 있었는데, 잠시 제자리를 잃었구나. 다섯 마리 뱀이 그를 따라, 천하를 두루 다녔다네. 용은 굶었으나 먹을 것이 없자, 뱀 한 마리가 허벅지 살을 베어 먹였다네. 용은 연못으로 돌아와, 옛 땅에서 편안히 지내고, 뱀 네 마리는 굴에 들어가, 모두 살 곳이 있건만, 뱀 한 마리는 굴이 없어서, 들에서 울고 있구나!”

문공이 궁문을 나서다가 이 글을 보고 말했다. “아, 이는 개자추로구나! 내가 한창 王室의 일에 마음을 쓰느라 그의 공로를 고려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불러오게 하였으나 그는 달아나고 없었다. 마침내 그가 있는 곳을 찾으니, 그가 綿上의 산속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문공은 면상의 산속에 있는 땅을 표시하고 封하여 개자추의 祭田으로 삼고 介山이라 불렀다.

(* 蔽士 : ‘蔽’는 ‘屛’의 뜻과 같고, ‘屛’은 ‘물리치다, 廢棄하다’의 뜻. * 蔽遊 : 벗과 사귐을 폐기함을 이른다. * 有如白水 : 맹세하는 말이다. 白水의 神이 있어 증인이 된다는 뜻으로, 《詩經》 〈王風 大車〉의 “밝은 해가 있어 증인이 될 것이다.[有如皦日]”와 같은 뜻이다. ‘有如’는 맹서하는 말에 많이 쓰는 복합동사로 증명할 대상을 이른다. * 五蛇 : 晉 文公이 망명생활을 할 때 따르던 다섯 신하를 비유한 말이다. 곧 狐偃‧趙衰‧魏武子‧司空季子‧介子推를 이른다.)

5. 請而得其賞,廉者不受也;言盡而名至,仁者不為也

晉文公出亡,周流天下,舟之僑去虞而從焉,文公反國,擇可爵而爵之,擇可祿而祿之,舟之僑獨不與焉,文公酌諸大夫酒,酒酣,文公曰:「二三子盍為寡人賦乎?」舟之僑曰:「君子為賦,小人請陳其辭,辭曰:有龍矯矯,頃失其所;一蛇從之,周流天下,龍反其淵,安寧其處,一蛇耆乾,獨不得其所。」文公瞿然曰:「子欲爵耶?請待旦日之期;子欲祿邪?請今命廩人。」舟之僑曰:「請而得其賞,廉者不受也;言盡而名至,仁者不為也。今天油然作雲,沛然下雨,則曲草興起,莫之能禦。今為一人言施一人,猶為一塊土下雨也,土亦不生之矣。」遂歷階而去。文公求之不得,終身誦甫田之詩。

晉 文公이 亡命하여 천하를 두루 떠돌 적에 舟之僑가 虢나라를 떠나 문공을 따라다녔다. 문공이 晉나라로 돌아와 爵位를 줄 만한 사람을 골라 작위를 주고 祿俸을 줄 만한 사람을 골라 녹봉을 주었으나 주지교만 여기에 끼지 못하였다. 문공이 여러 大夫와 술을 마시면서 술이 얼큰히 취했을 때 문공이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 寡人을 위해 詩를 읊지 않는가?”

주지교가 말했다. “君子는 시를 읊으니 小人은 말로 진술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불렀다. “날래고 씩씩한 龍이 있었는데, 잠시 제자리를 잃었구나. 뱀 한 마리 그를 따라 천하를 두루 떠돌았다네. 용은 연못으로 돌아와, 예전 처소에서 편안히 살건만, 뱀 한 마리는 늙고 말라서, 그만이 살 곳을 얻지 못했다네.” 이를 들은 문공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대는 작위를 원하는가? 그러면 내일 아침때까지 기다려라. 그대는 녹봉을 원하는가? 그러면 지금 당장 창고 관리인에게 명하겠다.”

주지교는 말했다. “요청하여 받는 賞은 淸廉한 사람은 받지 않고, 말을 다하고 나서야 오는 名位는 어진 이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일어나 큰비가 좍좍 쏟아지면 곡식 싹과 풀들이 쑥쑥 자랄 것이니 아무도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한 사람이 말한 것 때문에 그 한 사람에게만 베푼다면 이는 한 덩이의 흙에만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서 이 땅에서도 싹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마침내 계단을 내려가 떠나버렸다. 문공은 주지교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詩經》 〈甫田〉章의 시를 외웠다.

6. 有陰德者必饗其樂以及其子孫

邴吉有陰德於孝宣皇帝微時,孝宣皇帝即位,眾莫知,吉亦不言,吉從大將軍長史轉遷至御史大夫,宣帝聞之,將封之,會吉病甚,將使人加紳而封之,及其生也,太子太傅夏侯勝曰:「此未死也,臣聞之,有陰德者必饗其樂以及其子孫;今此未獲其樂而病甚,非具死病也。」後病果愈,封為博陽侯,終饗其樂。

邴吉이 가 微賤할 때 陰德을 베푼 일이 있었는데, 효선황제가 즉위하였으나 뭇사람 중에 이를 아는 이가 없었고 병길도 이를 말하지 않았다. 병길이 大將軍 長史에서 御使大夫로 승진하니, 宣帝가 이를 듣고 爵位를 봉하려고 하였다. 마침 병길의 병이 심해지자 사람을 보내 그가 살았을 때 띠[紳]를 몸에 올려놓고 봉하게 하였다.

太子太傅 夏侯勝이 말했다. “이 사람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臣은 들으니, 음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즐거움을 누려 자손에게까지 미친다고 합니다. 지금 이 사람은 그 즐거움을 받지 못한 채 병이 심하니, 이는 죽을병이 아닙니다.” 그런 뒤에 정말 병이 나으니, 博陽侯에 봉해져서 마침내 그 즐거움을 누렸다.

 

7. 中山之舉也,非臣之力,君之功也

魏文侯攻中山,樂羊將,已得中山,還反報文侯,有喜功之色,文侯命主書曰:「群臣賓客所獻書操以進。」主書者舉兩篋以進,令將軍視之,盡難中山之事也,將軍還走北面而再拜曰:「中山之舉也,非臣之力,君之功也。」

魏 文侯가 中山國을 공격할 때 樂羊이 장군이었는데, 이미 중산국을 차지하고 돌아와 문후에게 보고할 때 功을 세워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문후는 문서를 주관하는 관리에게 “群臣과 賓客들이 올린 글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문서를 주관하는 관리가 두 상자의 글을 바치자, 장군 악양에게 보도록 하니 모두 중산국을 공격하며 일어난 일을 비난하는 글들이었다.

장군 악양은 몸을 돌려 달려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리고 말했다. “중산국을 정복한 것은 臣의 공로가 아니라, 君主의 공로입니다.”

8. 若使秦破趙,君安得有此?使趙而全,君何患無有?

平原君既歸趙,楚使春申君將兵救趙,魏信陵君亦矯奪晉鄙軍往救趙,未至,秦急圍邯鄲,邯鄲急且降,平原君患之,邯鄲傳舍吏子李談謂平原君曰:「君不憂趙亡乎?」平原君曰:「趙亡即勝虜,何為不憂?」李談曰:「邯鄲之民,炊骨易子而食之,可謂至困;而君之後宮數百,婦妾荷綺縠,廚餘粱肉;士民兵盡,或剡木為矛戟;而君之器物鐘磬自恣,若使秦破趙,君安得有此?使趙而全,君何患無有?君誠能令夫人以下,編於士卒間,分工而作之,家所有盡散以饗食士,方其危苦時易為惠耳。」於是平原君如其計,而勇敢之士三千人皆出死,因從李談赴秦軍,秦軍為卻三十里,亦會楚魏救至,秦軍遂罷。李談死,封其父為孝侯。

平原君이 이미 趙나라에 돌아오니 楚나라는 春申君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원하고 魏나라의 信陵君도 晉鄙의 군대를 속임수로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하러 갔다.

이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秦나라 군대가 더욱 급하게 邯鄲을 포위하니 한단이 위급하여 항복해야 할 처지가 되자 평원군이 근심하였다. 邯鄲 傳舍吏의 아들 李談이 평원군에게 말했다. “당신은 조나라가 망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까?” 평원군은 대답했다. “조나라가 망하면 나 勝은 곧 포로가 될 텐데 어떻게 걱정이 되지 않겠느냐?” 이담은 말했다.

“한단의 백성들은 사람의 뼈를 태워 밥을 짓고 서로 자식을 바꾸어 먹고 있으니, 극도로 어려운 상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後宮에는 백 명쯤의 여인이 있고, 妻妾들은 비단옷을 걸치고 있으며, 부엌에는 양식과 고기가 남아돌고 있습니다. 병사와 백성들은 무기가 다하여 나무를 깎아 창을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당신은 器物과 鐘磬을 자기 마음대로 쓰고 있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조나라를 격파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것들을 소유하겠습니까? 만일 조나라가 보전된다면 당신은 어찌 이런 물건들이 없을까 봐 걱정하겠습니까? 당신은 진실로 夫人 이하의 사람들을 士卒 중에 편입시켜 工作을 나누어 담당시키고 집안에 있는 재물을 모두 풀어서 병사를 먹이십시오. 한창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에 은혜를 베풀기는 쉬운 법입니다.”

이에 평원군이 그가 일러준 계책대로 시행하니 용감한 병사 3천 명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나서 그대로 이담을 따라 진나라 군대에게 달려들었다. 진나라 군대는 이 때문에 30리를 퇴각하였고, 또 마침 초나라와 위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하니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전쟁을 중지하였다. 이담이 戰死하니 그의 아버지를 李侯에 봉하였다.

9. 此德出而福反也

秦繆公嘗出,而亡其駿馬,自往求之,見人已殺其馬,方共食其肉,繆公謂曰:「是吾駿馬也。」諸人皆懼而起,繆公曰:「吾聞食駿馬肉,不飲酒者殺人。」即以次飲之酒,殺馬者皆慚而去。居三年,晉攻秦繆公,圍之,往時食馬肉者,相謂曰:「可以出死報食馬得酒之恩矣。」遂潰圍。繆公卒得以解難,勝晉獲惠公以歸,此德出而福反也

秦 繆公이 언젠가 출타했다가 자기의 駿馬를 잃고 직접 나가 찾았는데, 사람들이 이미 그 말을 잡아 막 함께 그 고기를 먹는 것을 보았다. 목공이 말했다. “이것은 나의 준마이다.” 그러자 이 사람들은 모두 놀라 일어났다. 목공이 말했다. “나는 들으니, 준마의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은 자는 중독되어 그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즉시 차례대로 술을 마시게 하니, 말을 잡은 자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떠나갔다.

3년이 지난 뒤 晉나라가 秦나라를 공격하여 목공을 포위하였다. 지난날 준마의 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나가 죽기로 싸워서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까지 마시게 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는 마침내 晉나라의 포위를 무너뜨렸다. 목공이 마침내 어려운 위기를 해결하여 晉나라 군대에 승리하고 晉 惠公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이는 恩德을 베풀어 福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10. 此有陰德者必有陽報也

楚莊王賜群臣酒,日暮酒酣,燈燭滅,乃有人引美人之衣者,美人援絕其冠纓,告王曰:「今者燭滅,有引妾衣者,妾援得其冠纓持之,趣火來上,視絕纓者。」王曰:「賜人酒,使醉失禮,奈何欲顯婦人之節而辱士乎?」乃命左右曰:「今日與寡人飲,不絕冠纓者不懽。」群臣百有餘人皆絕去其冠纓而上火,卒盡懽而罷。居三年,晉與楚戰,有一臣常在前,五合五奮,首卻敵,卒得勝之,莊王怪而問曰:「寡人德薄,又未嘗異子,子何故出死不疑如是?」對曰:「臣當死,往者醉失禮,王隱忍不加誅也;臣終不敢以蔭蔽之德而不顯報王也,常願肝腦塗地,用頸血湔敵久矣,臣乃夜絕纓者。」遂敗晉軍,楚得以強,。

楚 莊王이 群臣에게 술을 내려 잔치를 하는데, 날이 저물고 술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등불이 꺼졌다. 이때 어떤 사람이 美人의 옷을 잡아끄는 일이 있었는데, 미인은 그의 갓끈을 잡아당겨 끊어놓고 왕에게 말했다. “지금 촛불이 꺼진 사이에 妾의 옷을 잡아끄는 자가 있기에 첩이 그의 갓끈을 잡아당겨 끊어 가지고 있으니 빨리 불을 가져오게 하여 갓끈이 끊어진 사람을 살펴보십시오.”

그러자 장왕이 말했다. “사람들에게 술을 내려 취하여 失禮하게 했는데 어찌 婦人의 貞節을 드러내고자 하여 士에게 모욕을 주겠는가?” 그러고는 이내 주위 사람들에게 명하였다. “오늘 寡人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갓끈을 끊지 않는 사람은 즐거움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백여 명의 群臣이 모두 그들의 갓끈을 끊고는 불을 밝히고 마침내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나서 잔치를 파하였다.

2년이 지난 뒤 晉나라와 楚나라가 전쟁을 할 때, 한 신하가 항상 앞에 나서서 다섯 차례 交戰하여 다섯 번 적군의 머리를 베고 적군을 물리쳐 끝내 승리하였다. 장왕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과인은 德이 적고 또 일찍이 그대를 특별히 대하지도 않았는데,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이처럼 목숨을 내놓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싸웠는가?”

그 신하는 대답했다. “臣은 당연히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전에 제가 술에 취하여 失禮를 범했는데 대왕께서 감정을 누르고 참으셔서 드러내지 않은 채 죽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끝내 대왕께서 신의 죄를 가려주신 은덕을 드러나게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항상 肝臟과 腦髓가 땅을 적시고 목의 피를 적군에게 뿌려서 은혜 갚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신은 바로 예전 밤에 갓끈이 끊겼던 사람입니다.”

마침내 晉나라 군대를 격파하였고 楚나라는 이 때문에 강성해졌으니, 이로 보면 陰德이 있는 사람에겐 반드시 이 세상에서 받는 보답이 있는 것이다.

11. 德無細,怨無小

趙宣孟將上之絳,見翳桑下有臥餓人不能動,宣孟止車為之下,餐自含而餔之,餓人再咽而能食,宣孟問:「爾何為饑若此?」對曰:「臣居於絳,歸而糧絕,羞行乞而憎自致,以故至若此。」宣孟與之壺餐,脯二胊,再拜頓首受之,不敢食,問其故,對曰:「向者食之而美,臣有老母,將以貢之。」宣孟曰:「子斯食之,吾更與汝。」乃復為之簞食,以脯二束與錢百。去之絳,居三年,晉靈公欲殺宣孟,置伏士於房中,召宣孟而飲之酒,宣孟知之,中飲而出,靈公命房中士疾追殺之,一人追疾,既及宣孟,向宣孟之面曰:「今固是君邪!請為君反,死。」宣孟曰:「子名為誰?」及是且對曰:「何以名為?臣是夫桑下之餓人也。」遂鬥,而死,宣孟得以活,此所謂德惠也。故惠君子,君子得其福;惠小人,小人盡其力;夫德一人活其身,而況置惠於萬人乎?故曰德無細,怨無小,豈可無樹德而除怨,務利於人哉!利施者福報,怨往者禍來,形於內者應於外,不可不慎也,此書之所謂德無小者也。詩云:「赳赳武夫,公侯干城。」「濟濟多士,文王以寧。」人君胡可不務愛士乎!

趙宣孟이 絳으로 올라가다가 무성한 뽕나무 아래에 굶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宣孟이 수레를 멈추고 그를 위해 음식을 내려 스스로 씹어서 먹이니 굶주린 사람이 두 번 삼키고 난 뒤에 눈을 뜨고 보았다. 선맹이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굶었느냐?”

그는 대답했다. “저는 絳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糧食이 떨어졌으나 乞食하는 것이 부끄럽고 스스로 음식 조달하는 것을 싫어하여 이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선맹이 한 병의 국과 밥, 그리고 두 가닥의 脯를 주자, 그는 두 번 절을 하고 이마를 땅에 닿도록 예를 표한 뒤 받았으나 감히 먹지는 못하였다.

선맹이 먹지 않는 까닭을 묻자, 그는 대답했다. “조금 전 주신 음식을 먹으니 맛이 좋은데 저는 老母가 계시기 때문에 갖다 드리려고 합니다.” 선맹은 다시 말했다. “너는 이것을 먹어라. 내가 다시 너에게 음식을 주겠다.” 그러고는 곧 다시 그를 위해 한 도시락의 밥과 포 두 묶음, 그리고 백 文의 돈을 주고 絳으로 갔다.

3년이 지난 뒤, 晉 靈公이 선맹을 죽이려고 방 안에 武士를 매복시키고 선맹을 불러 술을 마셨다. 선맹이 이런 음모를 알아차리고 술을 마시던 중간에 나가버리자, 영공이 방 안에 매복시킨 무사에게 명하여 빨리 쫓아가서 죽이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빠르게 쫓아가서 먼저 선맹을 따라잡아 선맹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아, 진실로 당신이었군요! 당신을 위하여 돌아가 싸우다 죽겠습니다.” 선맹이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는 몸을 돌려 달려가면서 다시 말했다. “이름을 물어 뭣하겠습니까? 저는 바로 뽕나무 아래에서 굶어 죽을 뻔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고는 되돌아가서 싸우다가 죽으니, 선맹은 이 때문에 살 수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恩德을 보답한 것이다.

그 때문에 君子에게 은혜를 베풀면 군자는 福을 얻게 되고 小人에게 은혜를 베풀면 소인은 있는 힘을 다해 은혜를 갚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德을 베풀어도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데, 하물며 萬人에게 은혜를 베풀어둔 경우이겠는가! 그래서 “덕은 작게 여기지 말고, 원한은 작다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니, 어찌 은덕을 세우고 원한을 제거하며 남을 이롭게 하는 데에 힘을 쓰지 않겠는가? 

이로움을 베푼 사람은 복의 보답을 받고 원한을 보낸 사람은 재앙이 오는 것이니, 마음에 형성된 것은 외부에 응해 오는 것이다.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書經》에서 이른 “덕은 작다고 여기지 말라.” 는 것이다. 《詩經》에 “씩씩하고 씩씩한 무사여! 公侯의 干城이구나.”라 하고, “많고 많은 선비들, 文王이 평안해지셨네.”라 하였으니, 임금이 어찌 선비를 사랑하는 데 힘쓰지 않겠는가!

12. 公見親,吾不足以累公

孝景時,吳楚反,袁盎以太常使吳,吳王欲使將不肯,欲殺之,使一都尉以五百人圍守盎;盎為吳相時,從史與盎侍兒私通,盎知之不泄,遇之如故人,有告從史,從史懼亡歸,盎自追,遂以侍兒賄之,復為從史。及盎使吳見圍守,從史適為守盎校司馬,夜引盎起曰:「君可以去矣,吳王期旦日斬君。」盎不信,曰:「公何為者也?」司馬曰:「臣故為君從史盜侍兒者也。」盎乃敬對曰:「。」司馬曰:「君去,臣亦且亡避,吾親君,何患!」乃以刀決帳,率徒卒道出,令皆去,盎遂歸報。

孝景皇帝 때에 吳‧楚 두 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袁盎이 太常으로서 오나라에 使臣 갔는데 吳王이 원앙을 장수로 삼고자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왕이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의 都尉를 시켜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원앙을 포위하여 지키게 하였다.

원앙이 오나라 相으로 있을 때 從史가 원앙의 侍女와 몰래 情을 통했는데 원앙이 알면서도 누설하지 않고 예전대로 대하였다. 어떤 이가 종사에게 원앙이 알고 있다고 말해주니 종사는 두려워하여 도망쳐 집으로 돌아갔는데, 원앙이 직접 쫓아가서 마침내 시녀를 그에게 주고 다시 종사로 삼았다. 원앙이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 포위되어 지킴을 당하는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종사가 마침 원앙을 지키는 校司馬가 되어 있었다. 밤에 원앙을 끌어 일으키고는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되니 오왕이 내일 아침에 당신을 處斬하려고 합니다.”

원앙은 믿지 않고 물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오?” 司馬는 대답했다. “저는 예전에 당신의 종사가 되어 몰래 시녀와 정을 통한 사람입니다.” 원앙이 이에 깜짝 놀라 거절하며 말했다. “그대는 어버이가 계시니 나는 그대를 연루시킬 수가 없다.” 이에 사마는 말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나면 저도 도망쳐서 우리 어버이를 피신시킬 것이니 당신은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러고는 곧 칼로 장막을 찢고 취해 자빠진 병졸 사이로 인도하여 빠져나와 서로 나뉘어 떠나니, 원앙이 마침내 돌아와 보고하였다.

13. 中行君眾人畜臣,臣亦眾人事之;智伯朝士待臣,臣亦朝士為之用。

智伯與趙襄子戰於晉陽下而死,智伯之臣豫讓者怒,以其精氣能使襄主動心,乃漆身變形,吞炭更聲,襄主將出,豫讓偽為死人,處於梁下,駟馬驚不進,襄主動心,使使視梁下得豫讓,襄主重其義不殺也。又盜,為抵罪,被刑人赭衣,入繕宮,襄主動心,則曰必豫讓也,襄主執而問之曰:「子始事中行君,智伯殺中行君,子不能死,還反事之;今吾殺智伯,乃漆身為癘,吞炭為啞,欲殺寡人,何與先行異也?」豫讓曰:「中行君眾人畜臣,臣亦眾人事之;智伯朝士待臣,臣亦朝士為之用。」襄子曰:「非義也?子壯士也!」乃自置車庫中,水漿毋入口者三,日以禮豫讓,讓自知,遂自殺也。

智伯이 趙襄子와 晉陽城에서 싸우다가 죽으니, 지백의 신하 豫讓이 분노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자신의 精氣가 襄子의 마음을 움직여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여겨, 마침내 몸에 옻을 발라 형체를 변경하고 숯불을 입에 물어 목소리를 바꾸고 벙어리가 되었다.

양자가 出行하려 할 적에 예양은 거짓으로 죽은 사람처럼 꾸며 다리 아래에 있었는데, 駟馬가 놀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양자는 마음이 움직여 느낌이 들자 사람을 보내 다리 밑을 살펴보게 하여 예양을 잡았으나 양자는 그의 義理를 존중하여 죽이지 않았다. 예양은 또 도둑질을 해 죄를 지어 붉은 죄수복을 입고 양자의 궁중에 들어가 집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양자는 이번에도 마음이 움직여 느낌이 들자 “틀림없이 예양일 것이다.” 하고 양자가 잡아다가 물었다.

“그대는 처음에 中行君을 섬겨 智伯이 중항군을 죽였는데, 그대는 그를 위해 죽지 않고 도리어 지백을 섬겼다. 지금 내가 지백을 죽이자, 이내 몸에 옻을 발라 문둥이가 되고 숯불을 입에 물어 벙어리가 되어 寡人을 죽이려고 하니 어째서 앞의 행동과 다른가?”

예양은 대답했다. “중항군은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였으니 나도 보통 사람의 신분으로 섬겼고, 지백은 나를 조정의 士로 대하였으니 나도 조정의 士 신분으로 그에게 쓰임이 된 것이오.”

양자는 “의리에는 맞지 않으나 그대는 壯士로구나!” 하고는 스스로 車庫 안에 들어가 3일 동안 물도 입에 대지 않으면서 예양에게 敬意를 표하니, 예양이 이를 알고 마침내 자살하였다.

14. 事君以死,事主以勤,為之賜之多也

晉逐欒盈之族,命其家臣有敢從者死,其臣曰:「辛俞從之。」吏得而將殺之,君曰:「命汝無得從,敢從何也?」辛俞對曰:「臣聞三世仕於家者君之,二世者主之;事君以死,事主以勤,為之賜之多也。今臣三世於欒氏,受其賜多矣,臣敢畏死而忘三世之恩哉?」晉君釋之。

晉나라가 欒盈의 종족을 축출하면서 그의 家臣들에게 감히 그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죽이겠다고 명령하였다. 그의 가신이 “辛兪가 따라갔다.” 하자, 관리가 신유를 잡아다가 죽이려고 하였다. 晉君이 물었다. “너희에게 난영을 따르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네가 감히 따른 것은 무슨 이유이냐?” 

신유가 대답했다. “臣은 들으니, 3대에 걸쳐 그 大夫家의 가신이 된 사람은 그 大夫를 임금으로 모시고, 2대에 걸쳐 가신이 된 사람은 그 대부를 主人으로 모신다고 합니다. 죽음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근면으로써 주인을 섬기는 것은 그에게 받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은 3대째 欒氏를 모시고 있으니 받은 것이 많습니다. 신이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여 3대에 받은 은혜를 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진군은 신유를 석방하였다.

15. 良與客狙擊秦皇帝於博浪沙

留侯張良之大父開地相韓昭侯、宣惠王、襄哀王。父平相釐王、悼惠王。悼惠王二十三年平卒,二十歲秦滅韓,良年少未宦事韓。韓破,浪家童三百人,弟死不葬,良悉以家財求刺客刺秦王,為韓報仇,以大父、父,五世相韓故,遂學禮淮陽,東見滄海君,得力士為鐵椎,重百二十斤,秦皇帝東遊,良與客狙擊秦皇帝於博浪沙,誤中副車,秦皇帝大怒,大索天下,求購甚急,良更易姓名,深亡匿,後卒隨漢報秦。

留侯 張良의 할아버지 開地는 韓나라 昭侯‧宣惠王‧襄哀王의 재상이 되었고, 아버지 張平은 釐王‧悼惠王의 재상이 되었다. 도혜왕 23년에 장평이 죽고, 장평이 죽은 뒤 20년에 秦나라가 韓나라를 멸망시키니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벼슬하여 韓나라를 섬기지 못했다. 韓나라가 파멸했을 때 장량의 집에는 3백 명의 奴僕이 있었는데 아우가 죽었는데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량은 집안의 재물을 모두 털어 刺客을 구해 秦王을 죽여 韓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이는 자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5대 동안 韓나라의 재상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淮陽에서 禮를 배우고 동쪽에 가서 滄海君을 만나 力士를 얻고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쇠망치를 만들었다. 秦始皇이 東方을 巡遊하였는데, 장량이 자객과 함께 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저격했다가 잘못하여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副車]를 맞히고 말았다.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온 천하에 크게 수색을 벌이고, 현상금을 걸어 매우 급하게 자객을 잡으러 나섰다. 장량은 성명을 바꾸고 깊은 곳으로 도망쳐 숨었다가 후일 마침내 漢나라를 따라 秦나라를 멸망시켜 보복하였다.

16. 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鮑叔死,管仲舉上衽而哭之,泣下如雨,從者曰:「非君父子也,此亦有說乎?」管仲曰:「非夫子所知也,吾嘗與鮑子負販於南陽,吾三辱於市,鮑子不以我為怯,知我之欲有所明也;鮑子嘗與我有所說王者,而三不見聽,鮑子不以我為不肖,知我之不遇明君也;鮑子嘗與我臨財分貨,吾自取多者三,鮑子不以我為貪,知我之不足於財也。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士為知己者死,而況為之哀乎!」

鮑叔이 죽었을 때 管仲이 深衣의 앞섶을 걷어 올려 띠에 꽂고 통곡하여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그를 시종하는 사람이 물었다. “이 사람은 君臣과 父子 사이가 아닌데, 이렇게 비통해하는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까?”

관중은 말했다. “자네는 알지 못한다. 내가 일찍이 포숙과 함께 南陽에서 봇짐장사를 할 때 내가 세 차례나 저자에서 모욕을 당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表明하려고 하는 뜻이 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포숙이 일찍이 나와 세 차례 王에게 遊說하여 세 번 다 따라주지 않았으나 포숙은 나를 賢明치 못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현명한 임금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포숙이 일찍이 나와 함께 財物을 두고 돈을 나눌 적에 내가 세 번이나 많이 가졌으나 포숙은 나를 貪慾스럽다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재물이 부족함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니,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기도 하는데, 하물며 그를 위해 애통해하는 일이겠느냐!”

17. 子必不絕趙祀,朔死且不恨。

晉趙盾舉韓厥,晉君以為中軍尉;趙盾死,子朔嗣為卿。至景公三年,趙朔為晉將,朔取成公姊為夫人,大夫屠岸賈,欲誅趙氏,初趙盾在夢見叔帶持龜要而哭甚悲,已而笑拊手且歌,盾卜之占,垂絕而後好,趙史援占曰:此甚惡非君之身,及君之子,然亦君之咎也。至子趙朔,世益衰,屠岸賈者,始有寵於靈公,及至於晉景公,而賈為司寇,將作難,乃治靈公之賊以至,趙盾遍告諸將曰:「趙穿弒靈公,盾雖不知猶為首賊,臣殺君,子孫在朝,何以懲罪,請誅之!」韓厥曰:「靈公遇賊,趙盾在外,吾先君以為無罪,故不誅;今諸君將誅其後,是非先君之意而後妄誅;妄誅謂之亂臣,有大事而君不聞,是無君也。」屠岸賈不聽,厥告趙朔趨亡,趙朔不肯,曰:「子必不絕趙祀,朔死且不恨。」韓厥許諾,稱疾不出,賈不請而擅與諸將攻趙氏於下宮,殺趙朔、趙括。趙嬰齊,皆滅其族;朔妻成公姊有遺腹,走公宮匿,後生男乳,朔客程嬰持亡匿山中,居十五年,晉景公疾,卜之曰:「大業之後不遂者為祟。」景公疾問韓厥,韓厥知趙孤在,乃曰:「大業之後,在晉絕祀者,其趙氏乎!夫自中行衍皆嬴姓也,中衍人面鳥喙,降佐殷帝太戊及周天子,皆有明德,下及幽厲無道,而叔帶去周適晉,事先君文侯,至於成公,世有立功,未嘗有絕祀;今及吾君獨滅之,趙宗國人哀之,故見龜策,唯君圖之。」景公問曰:「趙尚有後子孫乎?」韓厥具以實對,於是景公乃與韓厥謀立趙孤兒,召而匿之宮中,諸將入問疾,景公因韓厥之眾,以脅諸將而見趙孤,孤名曰武,諸將不得已乃曰:「昔下官之難屠岸賈為之,矯以君令,并命群臣,非然孰敢作難,微君之疾,群臣固且請立趙後,今君有令,群臣之願也。」於是召趙武、程嬰遍拜諸將軍,將軍遂返與程嬰趙武攻屠岸賈,滅其族,復與趙武田邑如故。故人安可以無恩,夫有恩於此故復於彼;非程嬰則趙孤不全,非韓厥則趙後不復。韓厥可謂不忘恩矣。

晉나라 趙盾이 韓厥을 천거하니 晉君이 中軍尉로 삼았는데, 조돈이 죽자 그 아들 趙朔이 계승하여 卿이 되었다. 景公 3년에 이르러 조삭은 진나라의 장군이 되었고, 晉 成公의 누이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는데, 大夫 屠岸賈가 趙氏를 誅滅하려고 하였다. 

애초에 조돈이 살아 있을 때 꿈에 叔帶가 손으로 허리를 잡고 매우 슬피 哭하다가 이윽고 웃고 손뼉을 치면서 또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조돈이 占을 치자 점에 나타난 균열이 끊어졌다가 뒤에 좋아졌다. 조씨의 史官 援이 占兆를 이렇게 풀이하였다. “이 점은 매우 나쁘니 主君의 신상에 응험하지 않으면 주군의 아들에게 응험이 미치겠지만 이는 주군의 과오로 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 조삭에 이르러 家世가 더욱 쇠약해졌다. 屠岸賈는 처음에 靈公의 총애를 받았는데, 晉 景公 때에 이르러 도안가를 司寇로 삼았다. 난을 일으키려고 할 때 영공을 시해한 賊을 다스리면서 조돈에 연루시키고 여러 장수에게 두루 알리며 말하였다. “趙穿이 영공을 시해할 때 조돈은 이를 알지 못했으나 그래도 逆賊의 우두머리요.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그의 자손이 조정에 있다면 어떻게 죄 있는 사람을 懲罰하겠는가? 그들을 誅殺할 것을 청하오.”

이에 韓厥이 말했다. “영공이 적에게 해를 당할 때 조돈은 도망쳐 外地에 있었으니, 우리 先君께서 그는 죄가 없다 하였소.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았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그의 後代를 죽이려고 하니 이는 선군의 뜻이 아닌데 함부로 죽이는 것이오. 함부로 죽이면 이를 亂臣이라 하고 큰일을 저지르면서 임금께 보고하지 않으면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도 도안가는 따르지 않았다. 한궐이 조삭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말했으나 조삭은 따르려 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기필코 趙氏의 제사를 단절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도 유감이 있지 않을 것이오.” 한궐은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고 병을 핑계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도안가는 임금에게 요청하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여러 장수와 下宮에서 조씨를 공격하여 趙朔‧趙同‧趙括‧趙嬰齊를 죽이고 그들의 종족을 모두 멸하였다. 조삭의 아내 成公의 누이는 遺腹子를 임신하고 있어서 公宮으로 달아나 숨어 있다가 나중에 아들을 낳으니, 젖먹이 때에 조삭의 門客 程嬰이 이 아이를 데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15년이 지난 뒤에 晉 景公이 병들어 점을 치니, 점괘에 “大業의 후예로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빌미가 되었다.”라 하였다. 경공이 급히 한궐에게 묻자, 한궐은 조씨의 孤兒가 살아 있음을 알고 대뜸 말했다.

“大業의 후예로 晉나라에 있으면서 제사가 끊어진 것은 아마 조씨일 것입니다. 中衍으로부터 모두 嬴氏인데, 중연은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로 탄생하여 殷帝 太戊를 돕고 周 天子까지 도와 모두 밝은 德行이 있었습니다. 아래로 내려와 幽王‧厲王의 無道한 때에 이르러 叔帶가 周나라를 떠나 晉나라로 와서 先君 文侯를 섬겼고 成公대에까지 대대로 세운 功이 있어서 일찍이 제사가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임금대에 이르러 유독 조씨의 종족을 멸하니 나라 사람들이 애통해합니다. 그래서 점괘에 나타난 것이니, 군주께서는 고려하십시오.”

이에 경공이 물었다. “조씨는 아직 후대 자손이 있소?” 한궐이 사실대로 빠짐없이 대답하였다. 이에 경공이 한궐과 함께 조씨의 고아를 세우기로 謀議하고 불러다가 宮中에 숨겨두었다. 여러 장수가 들어와 문병하자, 경공이 한궐의 병력을 이용하여 여러 장수를 협박해서 조씨의 고아를 가서 보게 하니 고아의 이름을 武라 하였다. 여러 장수는 부득이 말했다. “종전의 下宮에서 있었던 난은 도안가가 주관하여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아울러 群臣을 호령한 것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난을 일으키겠습니까? 임금께서 병이 나지 않았으면 群臣이 본디 조씨의 후손을 찾아 세울 일을 요청하려 했는데, 지금 임금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니 群臣의 소원입니다.”

이렇게 하여 趙武와 程嬰을 불러와서 여러 장수에게 두루 절을 올리게 하였다. 장수들이 마침내 돌아가서 정영‧조무와 함께 도안가를 공격하여 그의 종족을 멸하고 다시 조무의 田地와 采邑을 원래와 똑같이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곳에서 은혜를 베풀면 저곳에서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영이 있지 않았으면 조씨의 고아는 보전되지 못했을 것이고, 한궐이 있지 않았으면 조씨의 후예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니, 한궐은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18. 蘧伯玉得罪於衛君 走而之晉

蘧伯玉得罪於衛君 走而之晉 晉大夫有木門子高者 蘧伯玉舍其家. 居二年 衛君赦其罪而反之 木門子高使其子送之 至於境. 蘧伯玉曰 鄙夫之 子反矣. 木門子高後得罪於晉君 歸蘧伯玉 伯玉言之衛君曰 晉之賢大夫木門子高 得罪於晉君 願君禮之. 於是衛君郊迎之 竟以爲上卿.

蘧伯玉이 衛君에게 죄를 얻어 달아나 晉나라로 가니, 진나라 大夫 중에 木門子高라는 사람이 있어서 거백옥이 그의 집에 묵었다. 2년이 지난 뒤에 衛君이 그의 죄를 사면하고 衛나라로 돌아오게 하자, 목문자고는 그의 아들에게 거백옥을 전송하여 국경까지 가게 하였다. 거백옥이 말했다. “내가 스스로 갈 테니 자네는 그만 돌아가라.” 

후일 목문자고가 晉君에게 죄를 얻어 거백옥에게 돌아오자, 거백옥은 衛君에게 말했다. “진나라의 賢大夫 목문자고가 晉君에게 죄를 얻어 〈위나라에 왔으니,〉 군주께서는 禮遇하십시오.” 이에 衛君이 郊外에 나가 맞이하여 마침내 上卿으로 삼았다.

19. 嬰不肖,罪過固其所也,而士以身明之,哀哉!

北郭騷踵見晏子曰:「竊悅先生之義,願乞所以養母者。」晏子使人分倉粟府金而遺之,辭金而受粟。有間,晏子見疑於景公,出奔,北郭子召其友而告之曰:「吾悅晏子之義而嘗乞所以養母者。吾聞之曰:養其親者,身更其難;今晏子見疑,吾將以身白之。」遂造公庭求復者曰:「晏子天下之賢者也,今去齊國,齊國必侵矣,方必見國之侵也,不若先死請絕頸以白晏子。」逡巡而退,因自殺也。公聞之大駭,乘馳而自追晏子,及之國郊,請而反之,晏子不得已而反之,聞北郭子之以死白己也,太息而歎曰:「嬰不肖,罪過固其所也,而士以身明之,哀哉!

北郭騷가 晏子의 집에 가서 안자를 만나 말하였다. “저는 선생의 道義를 좋아하오니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안자가 사람을 시켜 창고의 곡식과 府庫의 돈을 나누어주게 하자, 그는 돈은 사양하고 곡식만 받았다. 얼마 뒤에 안자는 景公에게 의심을 받아 도망쳐 달아났다.

북곽소는 그의 친구를 불러 말했다. “나는 안자의 도의를 좋아하여 언젠가 그에게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달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나는 들으니 ‘어버이를 봉양하게 해준 사람에게는 자신의 몸으로 그의 患難을 대신 막아야 한다.’ 하였다. 지금 안자가 경공에게 의심을 받고 있으니 나는 내 몸으로 그의 억울함을 밝혀야 되겠다.”

그러고는 마침내 경공의 宮廷에 나아가 말을 전달할 사람을 찾아 말했다. “안자는 천하의 賢人입니다. 지금 齊나라를 떠나 있으니 제나라는 반드시 다른 나라의 侵攻을 받을 것입니다. 앞으로 다른 나라의 침공을 당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먼저 죽는 것만 못하니, 저의 목을 끊어 안자의 억울함을 밝히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대로 자살하였다.

경공은 이 일을 듣고 크게 놀라 역말을 타고 직접 안자를 쫓아가 國境에서 그를 따라잡아 그에게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안자는 부득이 돌아와서 북곽소가 죽음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밝혔다는 말을 듣고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나는 不肖하니 죄를 받는 것이 당연한데, 선비가 자신의 몸으로 나의 억울함을 밝혔으니 슬픈 일이다.”

20. 且敬太甚必有故

吳赤市使於智氏,假道於衛,甯文子具紵絺三百製,將以送之,大夫豹曰:「吳雖大國也,不壞交假之道,則亦敬矣,又何禮焉!」甯文子不聽,遂致之吳赤市。至於智氏,既得事,將歸吳,智伯命造舟為梁,吳赤市曰:「吾聞之,天子濟於水,造舟為梁,諸侯維舟為梁,大夫方舟。方舟,臣之職也,且敬太甚必有故。」使人視之,視則用兵在後矣,將亦襲衛。吳赤市曰:「衛假吾道而厚贈我,我見難而不告,是與為謀也。」稱疾而留,使人告衛,衛人警戒,智伯聞之,乃止。

吳나라의 赤巿이 晉나라 智氏에게 사신 갈 때 衛나라에 길을 빌려 지나갔는데 위나라 大夫 甯文子가 모시와 細葛布 3백 制를 마련하여 보내주려고 하였다. 大夫 豹가 말했다. “오나라가 大國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와 국토가 맞닿아 있지 않으니, 길을 빌려준 것만으로도 敬意를 표한 것인데 또 무슨 禮物을 보낸단 말이오?”

甯文子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즉시 준비한 예물을 보내주었다. 오나라의 적불이 지씨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일을 마치고 오나라로 돌아가려고 할 때 智伯이 배다리를 만들라고 명하였다.  오나라의 적불은 말했다. “나는 들으니, 天子는 물을 건널 때 배다리를 만들고, 諸侯는 네 척의 배로 다리를 만들며, 大夫는 두 척의 배를 이어서 건넌다고 한다. 두 척의 배를 이어 건너는 것이 나의 신분에 맞고, 그것도 과분하게 敬待하는 것이니,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필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살펴보니 後面에 전쟁을 할 군대를 배치하여 위나라를 습격하려는 것이었다. 오나라의 적불이 말했다. “위나라는 나에게 길을 빌려주고 많은 선물까지 주었는데, 내가 위나라에 災難이 닥칠 것을 알면서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는 지백의 계책에 참여한 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는 병을 핑계로 머물면서 사람을 위나라에 보내 알려주니, 위나라 사람이 警戒를 강화하였다. 지백은 이 소식을 듣고 이내 위나라를 습격하려던 계획을 중지하였다.

 

21. 以奩飯與一鮒魚。其祝曰:下田洿邪,得穀百車,蟹堁者宜禾

楚魏會於晉陽,將以伐齊,齊王患之,使人召淳于髡曰:「楚魏謀欲伐齊。願先生與寡人共憂之。」淳于髡大笑而不應,王後問之,又復大笑而不應,三問而不應,王怫然作色曰:「先生以寡人國為戲乎?」淳于髡對曰:「臣不敢以王國為戲也,臣笑臣鄰之祠田也,。臣笑其所以祠者少而所求者多。」王曰善,賜之千金,革車百乘,立為上卿。

楚나라와 魏나라 사람이 晉陽에서 會盟하여 齊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니, 齊王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淳于髡을 불러오게 하여 말했다. “초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를 토벌하려고 謀議하니, 선생은 寡人과 근심을 함께하기 바라오.”

순우곤이 크게 웃기만 하고 대답하니 않으니, 왕이 다시 물었으나 또 크게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세 번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왕은 발끈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선생은 과인의 나라를 가지고 장난으로 삼는 것이오?”

이에 순우곤은 대답했다. “臣은 감히 大王의 나라를 가지고 장난으로 삼지 못합니다. 신이 웃은 것은, 신의 이웃 사람이 農地를 향해 제사 지내는데 한 그릇의 밥과 한 마리의 붕어를 祭物로 써서 기도하면서 ‘낮은 곳의 나쁜 농지에는 백 수레의 곡식을 얻게 하시고, 높은 곳의 농지에는 벼가 잘 자라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그의 제사 지내는 제물은 적은데 요구하는 것이 많은 것을 웃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좋소.” 하고는 4金과 兵車 백 乘을 하사하고, 당장 上卿으로 삼았다.

22. 夫樹桃李者,夏得休息,秋得食焉。樹蒺藜者,夏不得休息,秋得其刺焉。

陽虎得罪於衛,北見簡子曰:「自今以來,不復樹人矣。」簡子曰:「何哉?」陽虎對曰:「夫堂上之人,臣所樹者過半矣;朝廷之吏,臣所立者亦過半矣;邊境之士,臣所立者亦過半矣。今夫堂上之人,親郤臣於君;朝廷之吏,親危臣於眾;邊境之士,親劫臣於兵。」簡子曰:「唯賢者為能報恩,不肖者不能。夫樹桃李者,夏得休息,秋得食焉。樹蒺藜者,夏不得休息,秋得其刺焉。今子之所樹者,蒺藜也,自今以來,擇人而樹,毋已樹而擇之。」

陽虎가 衛나라에 죄를 얻어 북쪽에 가서 趙簡子를 만나 말했다. “지금부터 이후로 다시는 사람을 배양하지 않겠습니다.” 조간자가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양호가 대답했다. “朝堂 위에 있는 사람은 제가 배양한 사람이 절반이 넘고, 朝廷의 관리는 제가 배양한 사람이 역시 절반이 넘으며, 邊境의 將士는 제가 배양한 사람이 역시 절반이 넘습니다. 지금 조당 위에 있는 사람은 직접 임금에게 저를 배제하였고, 조정의 관리는 직접 法으로 저를 위협하였으며, 변경의 장사는 직접 武力으로 저를 협박하였습니다.”

이에 조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어진 이라야 능히 은혜를 갚지,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은혜를 갚지 못하는 것이오. 복숭아와 자두를 심은 사람은 여름에 그 아래에서 쉬고 가을에 그 과실을 먹을 수 있으나, 찔레를 심은 사람은 여름에 그 아래에서 쉬지 못하고 가을에 그 가시를 얻게 되는 것이오. 지금 그대가 심은 것은 찔레이고 복숭아와 자두가 아니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사람을 가려서 배양하고 이미 배양하고 나서 가리지 마시오.”

23. 君之寵此子也,又且以誰之父殺之乎?

魏文侯與田子方語,有兩僮子衣青白衣,而侍於君前,子方曰:「此君之寵子乎!」文侯曰:「非也,其父死於戰,此其幼孤也,寡人收之。」子方曰:「臣以君之賊心為足矣,今滋甚,君之寵此子也,又且以誰之父殺之乎?」文侯愍然曰:「寡人受令矣。」自是以後,兵革不用。

魏 文侯가 田子方과 말을 나눌 때 푸른 옷과 흰 옷을 입은 두 어린아이가 임금의 앞에서 모시고 있었다. 전자방이 물었다. “이 아이는 임금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입니까?” 文侯가 말했다. “아니오. 그의 아비는 전쟁에서 죽었으니, 이 아이는 그의 어린 고아요. 그래서 寡人이 거두어 기르는 것이오.”

전자방이 말했다. “臣은 임금께서 그렇게 사람을 죽였으면 마음에 만족하시리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더욱 심하십니다. 임금께서 이 아이들을 사랑하시니 장차 또 누구의 아비를 죽이시렵니까?” 

이 말을 듣고 문후는 가엾어하면서 말하였다. “寡人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전쟁을 하지 않았다.

 

24. 今又吮之,安知是子何戰而死

吳起為魏將,攻中山,軍人有病疽者,吳子自吮其膿,其母泣之,旁人曰:「將軍於而子如是,尚何為泣?」對曰:「吳子吮此子父之創而殺之於注水之戰,戰不旋踵而死;今又吮之,安知是子何戰而死,是以哭之矣!」

吳起가 魏나라 장군이 되어 中山國을 공격할 때 軍人 중에 腫氣를 앓는 자가 있었는데 오기가 직접 그 고름을 빨아내니, 그의 어머니가 흐느껴 울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장군이 그대의 아들을 이처럼 돌봐주는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오히려 흐느껴 우는 게요?”

그 어머니가 대답했다. “吳子가 이 아이의 아버지 상처를 빨아주어 涇水의 전쟁에서 죽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발을 돌릴 틈도 없이 대번에 전사하였소. 그런데 지금 또 아이의 종기를 빨아내었으니 이 아이가 어느 전쟁에서 죽을지 어찌 알겠소? 이 때문에 내가 흐느껴 우는 것이오.”

25. 吾自知吾嘗相六七年未嘗荐一人也;吾嘗富三千萬者再,未嘗富一人;不知士出身之咎然也

東閭子嘗富貴而後乞,人問之,曰:「公何為如是?」曰:「吾自知吾嘗相六七年未嘗荐一人也;吾嘗富三千萬者再,未嘗富一人;不知士出身之咎然也。孔子曰:『物之難矣,小大多少各有怨惡,數之理也,人而得之,在於外假之也。』」

東閭子가 일찍이 富貴를 누리다가 뒤에 빌어먹고 살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公은 어쩌다가 이와 같이 되었소?”

그는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안다오. 내 일찍이 6, 7년 동안 宰相을 지냈으나 한 사람도 추천하지 못했고, 내 일찍이 두 차례 3천만의 富裕함을 누렸으나 한 사람도 부유하게 해주지 못했소. 이는 士이면서 獻身할 줄을 몰랐던 탓에 이렇게 된 것이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事物이란 헤아리기 어렵다. 크고 작고 많고 적음에 각기 원한과 싫어함이 있는 것은 운명의 규칙이니, 사람이 이를 얻는 것은 外物을 빌려 쓰는 데 달려 있다.”

26. 人奪女妻,而不敢怒;一抶女,庸何傷!

齊懿公之為公子也,與邴歜之父爭田,不勝。及即位,乃掘而刖之,而使歜為僕;奪庸織之妻,而使織為參乘;公游於申池,二人浴於池,歜以鞭抶織,織怒,歜曰:「人奪女妻,而不敢怒;一抶女,庸何傷!」織曰:「孰與刖其父而不病,奚若?」乃謀殺公,納之竹中。

齊 懿公이 公子였을 때 邴歜의 아버지와 田地를 빼앗으려 다투다가 이기지 못했다. 즉위한 뒤에 그 아버지의 시체를 파내어 발목을 자르고 병촉을 마부[僕]로 삼았으며, 庸織의 아내를 빼앗고 용직을 參乘으로 삼았다.

懿公이 申池에서 놀 적에 이 두 사람도 신지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병촉이 말채찍으로 용직을 치자 용직이 노하였다. 병촉이 물었다. “남이 네 아내를 빼앗아가도 감히 노하지 않더니 너를 한 번 친 것이 뭐가 해로우냐?” 그러자 용직이 대답했다. “자기 아버지의 발목을 잘랐는데도 원한 품지 않는 것과 비교하여 어떠하냐?” 두 사람이 마침내 의공을 계획적으로 弑害하여 시체를 대밭 속에 버렸다.

27. 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

楚人獻黿於鄭靈公,公子家見公子宋之食指動,謂公子家曰:「 我如是必嘗異味。」及食大夫黿,召公子宋而不與;公子宋怒,染指於鼎,嘗之而出,公怒欲殺之。公子宋與公子家先遂殺靈公。子夏曰:「春秋者,記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者也;此非一日之事也,有漸以至焉。」

楚나라 사람이 鄭 靈公에게 큰 자라를 바쳤는데, 公子家가 靈公을 뵙게 되었다. 公子宋의 食指가 움직이니 공자가에게 말했다. “내 손가락이 이 같으면 반드시 특별한 음식을 먹게 된다.”

영공이 大夫들과 자라 요리를 먹을 적에 공자송을 부르기만 하고 요리는 주지 않았다. 공자송이 노하여 솥 안에 손가락을 넣어서 맛을 본 다음 나가버리자, 영공이 노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공자송과 공자가가 선수를 쳐서 영공을 시해하였다.

子夏는 말했다. “《春秋》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며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며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일은 하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변화하여 그런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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