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절(券四 立節)_설원(說苑) _ 유향(劉向)
** 역문은 동양고전DB에서, 원문은 說苑에서 가져옴.
** 이 卷은 節義를 생명보다 중요시한 사람들의 행위를 모아 밝힌 내용으로 되어 있다.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전통적 관념과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군주에게는 충성하지 않는다는 民本思想의 기초 위에서 忠節을 제시하였다.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에게 충성하며 임금에게 충성하여 진리와 정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절의를 세우는 일임을 천명하였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 昏君을 향하여 두려움 없이 直言하여 匡正함으로써 절의를 다한 대표적인 人物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진리가 제왕이나 권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1. 士有殺身以成仁,觸害以立義,倚於節理而不議死地
士君子之有勇而果於行者,不以立節行誼,而以妄死非名,豈不痛哉!士有殺身以成仁,觸害以立義,倚於節理而不議死地;故能身死名流於來世,非有勇斷,孰能行之?
士‧君子로서 용기가 있고 행위에 과감한 자라도, 節義를 세워 道義를 행하지 않고 명분 없이 함부로 죽으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士는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仁을 이루고, 危害를 무릅쓰고 절의를 세워 志節과 道理에 의거하고 죽을 곳을 따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몸은 죽어도 이름은 후세에 流傳되니, 勇氣와 果斷함이 있지 않으면 누가 능히 이를 행하랴!
2. 不能甘勤苦,不能恬貧窮,不能輕死亡;而曰我能行義,吾不信也
子路曰:「不能甘勤苦,不能恬貧窮,不能輕死亡;而曰我能行義,吾不信也。」昔者申包胥立於秦庭,七日七夜喪不絕聲,遂以存楚,不甘勤苦,安能行此!曾子布衣縕袍未得完,糟糠之食,藜藿之羹未得飽,義不合則辭上卿,不恬貧窮,安能行此!比干將死而諫逾忠,伯夷叔齊餓死于首陽山而志逾彰,不輕死亡,安能行此!故夫士欲立義行道,毋論難易而後能行之;立身著名,無顧利害而後能成之。詩曰:「彼其之子,碩大且篤。」非良篤修激之君子,其誰能行之哉?
子路가 말했다. “애써 부지런히 노력함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가난을 편안히 여기지 않으며,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나는 능히 義를 행할 수 있다.’라고 하면 나는 믿지 못하겠다.”
예전에 申包胥는 秦나라 조정에 서서 7일 동안 晝夜에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고 울어서 마침내 楚나라를 보존하였으니, 애써 부지런히 노력함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했겠는가?
曾子는 베옷과 지스러기 삼을 둔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고, 술지게미와 쌀겨로 지은 밥과 명아주와 콩잎으로 끓인 국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으나, 의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上卿의 벼슬도 사양하였으니, 가난을 편안히 여기지 않았으면 어찌 이를 실천했겠는가?
比干은 죽게 되었으면서도 더욱 충성스럽게 諫하였고, 伯夷‧叔弟는 首陽山에서 굶어죽으면서도 지조가 더욱 드러났으니,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를 실천했겠는가?
그래서 士가 의리를 세우고 道를 행하려고 한다면 어렵고 쉬움을 따지지 말아야 그런 뒤에 능히 실천할 수 있다. 수양하여 몸을 바로 세워 명성을 드러내려 한다면 利害를 고려하지 말아야 그런 뒤에 능히 이루는 것이다. 《詩經》에 “저기 저 사람, 크고 또 독실하네.”라 하였으니, 선량하고 독실하며 수양하고 분발하는 君子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행하겠는가!
3. 由其道,遵其理,尊貴及己,士不辭也
王子比干殺身以作其忠,伯夷叔齊殺身以成其廉,此三子者,皆天下之通士也,豈不愛其身哉?以為夫義之不立,名之不著是士之恥也,故殺身以遂其行。因此觀之,卑賤貧窮,非士之恥也。夫士之所恥者,天下舉忠而士不與焉,舉信而士不與焉,舉廉而士不與焉;三者在乎身,名傳於後世,與日月並而不息,雖無道之世不能污焉。然則非好死而惡生也,非惡富貴而樂貧賤也,由其道,遵其理,尊貴及己,士不辭也。孔子曰:「富而可求,雖執鞭之士,吾亦為之;富而不可求,從吾所好。」大聖之操也。詩云:「我心匪石,不可轉也,我心匪席,不可卷也。」言不失己也;能不失己,然後可與濟難矣,此士君子之所以越眾也。
王子 比干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忠誠을 이루고, 伯夷‧叔弟는 몸을 희생하여 淸廉을 이루고, 尾生은 몸을 희생하여 信義를 이루었으니, 이 세 사람은 모두 천하의 사리에 통달한 사람이다.
어찌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겠는가마는 義理를 세우지 못하고 名聲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士의 수치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품행을 이룩한 것이다. 이를 따라 보건대 卑賤과 가난은 士의 수치가 아니다.
士가 수치로 여기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충성스런 사람을 추천할 때 士로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며, 신의 있는 사람을 추천할 때 士로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며, 청렴한 사람을 추천할 때 士로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자기의 몸에 있으면 좋은 명성이 후세에 전해져서 해‧달과 함께 없어지지 않아 無道한 시대일지라도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며, 부귀를 싫어하고 빈천을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다. 正道를 따르며 도리를 준수하여 尊貴함이 자기에게 미쳐 오면 士는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孔子는 “富를 구하여 얻을 수 있다면 채찍을 잡고 말을 모는 천한 일일지라도 나는 이것 역시 하겠지만, 만일 富를 구하여 얻을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를 것이다.” 하셨으니, 이것이 위대한 聖人의 節操이다.
《詩經》에 “내 마음 돌이 아니기에 굴릴 수가 없으며, 내 마음 자리가 아니기에 말 수가 없다.”라 하였으니, 자기의 마음을 잃지 않음을 이른 말이다. 자기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그런 뒤에 함께 患難을 구제할 수 있으니, 이것이 士‧君子가 일반 사람을 뛰어넘는 까닭이다.
4. 國亡而不知,不智;知而不爭,不忠;忠而不死,不廉
楚伐陳,陳西門燔,因使其降民修之,孔子過之,不軾,子路曰:「禮過三人則下車,過二人則軾;今陳修門者人數眾矣,夫子何為不軾?」孔子曰:「丘聞之,國亡而不知,不智;知而不爭,不忠;忠而不死,不廉;今陳修門者不行一於此,丘故不為軾也。」
楚나라가 陳나라를 토벌하면서 진나라 都城의 西門을 불태우고, 이어 진나라의 항복한 백성을 부려 수리하게 하였다. 孔子께서 마침 이곳을 지나시다가 軾에 기대어 경의를 표하는 예를 행하지 않았는데, 子路가 말했다.
“예의 규정에, 세 사람 앞을 지나면 수레에서 내려 예를 행하고, 두 사람 앞을 지나면 식에 기대어 예를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성문을 수리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軾에 기대어 예를 행하지 않으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들으니 ‘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애통해할 줄 모르는 것은 智慧롭지 못하고, 애통해할 줄 알면서도 抗爭하지 않는 것은 忠誠스럽지 못하고, 충성하면서도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는 것은 剛直하지 못해서이다.’ 하였다. 지금 진나라의 성문을 수리하는 사람들은 이 중 한 가지도 실행한 것이 없다. 나는 그래서 軾에 기대어 행하는 예를 하지 않은 것이다.”
(* 軾 수레 앞턱 가로 댄 나무 식. 옛날 수레의 사람이 타는 곳[車廂] 앞 부분에 설치한 가로막대로, 기대거나 잡고 몸을 숙여 공경을 표시하였다. 여기서는 몸을 숙여 공경을 표시하는 動詞로 쓰였다.)
5. 君子當功以受祿
孔子見齊景公,景公致廩丘以為養,孔子辭不受,出謂弟子曰:「吾聞君子當功以受祿,今說景公,景公未之行而賜我廩丘,其不知丘亦甚矣!」遂辭而行。
孔子께서 齊 景公을 만나시자 景公은 廩丘를 봉양하는 식읍으로 주었는데 孔子는 거절하고 받지 않으셨다. 문에 나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들으니 ‘君子는 공로에 상당해야 녹봉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 경공을 설득하였으나 경공은 시행하지 않고 나에게 廩丘를 주겠다 하니, 그가 나를 알지 못함이 심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직하고 떠나가셨다
6. 受人者畏人,予人者驕人;縱子有賜不我驕也,我能勿畏乎?
曾子衣弊衣以耕,魯君使人往致邑焉,曰:「請以此修衣。」曾子不受,反復往,又不受,使者曰:「先生非求於人,人則獻之,奚為不受?」曾子曰:「臣聞之,受人者畏人,予人者驕人;縱子有賜不我驕也,我能勿畏乎?」終不受。孔子聞之曰:「參之言,足以全其節也。」
曾子가 해어진 옷을 입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魯君이 사람을 보내어 食邑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옷을 수선하기 바라오.” 증자는 이를 받지 않았다. 使者가 돌아갔다가 다시 가서 주었으나 또 받지 않으니, 사자가 말했다. “선생이 남에게 요구한 게 아니라 남이 바친 것인데 어째서 받지 않는 게요?”
증자가 말했다. “나는 들으니 ‘남에게 물건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물건을 준 사람은 남에게 교만하게 군다.’고 합니다. 임금께서는 저에게 주시면서 교만하지 않으셨겠지만 저는 두려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고는 끝내 받지 않았다. 孔子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參이 한 말은 節操를 보전하기에 충분하겠다.”
7. 妄與不如棄物於溝壑,伋雖貧也,不忍以身為溝壑
子思居於衛,縕袍無表,二旬而九食,田子方聞之,使人遺狐白之裘,恐其不受,因謂之曰:「吾假人,遂忘之;吾與人也,如棄之。」子思辭而不受,子方曰:「我有子無,何故不受?」子思曰:「伋聞之,妄與不如棄物於溝壑,伋雖貧也,不忍以身為溝壑,是以不敢當也。」
子思가 衛나라에 있을 때 덧옷이 없는 삼 지스러기를 둔 웃옷을 입고 20일에 고작 아홉 끼만을 먹었다. 田子方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狐白裘를 주려고 하였으나, 그가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때문에 이렇게 말하게 했다. “나는 남에게 물건을 빌려줄 경우엔 즉시 잊어버리고, 나는 남에게 물건을 줄 경우엔 버리는 것과 같이 한다.”
그러나 자사는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전자방이 말했다. “나는 있고 그대는 없는데 무엇 때문에 받지 않소?” 자사가 말했다. “나 伋은 들으니 ‘남에게 함부로 물건을 줄 바엔 물건을 구렁텅이에 버리는 것만 못하다.’라 하였소. 내가 가난하지만 차마 내 몸을 구렁텅이로 만들 수는 없소. 이 때문에 감히 받지 못하는 것이오.”
8. 宋襄公茲父為桓公太子
宋襄公茲父為桓公太子,桓公有後妻子,曰公子目夷,公愛之,茲父為公愛之也。欲立之,請於公曰:「請使目夷立,臣為之相以佐之。」公曰:「何故也?」對曰:「臣之舅在衛,愛臣,若終立則不可以往,絕跡於衛,是背母也。且臣自知不足以處目夷之上。」公不許,彊以請公,公許之,將立公子目夷,目夷辭曰:「兄立而弟在下,是其義也;今弟立而兄在下,不義也;不義而使目夷為之,目夷將逃。」乃逃之衛,茲父從之。三年,桓公有疾,使人召茲父,若不來,是使我以憂死也,茲父乃反,公復立之以為太子,然後目夷歸也。
宋 襄公 玆父가 桓公의 태자가 되었었는데 환공에게 후처가 낳은 아들이 있으니 公子 目夷라고 한다. 환공이 목이를 사랑하니 자보는 환공이 목이를 사랑하는 것은 목이를 태자로 삼으려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요청하였다. “목이를 태자로 세우십시오. 저는 재상이 되어 보좌하겠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무슨 까닭이냐?”
자보는 대답하였다. “제 외삼촌은 衛나라에 있으면서 저를 사랑하는데, 만일 끝내 제가 태자가 되면 위나라에 갈 수가 없을 것이니, 제가 위나라에 발길을 끊으면 이는 어머니를 背反하는 것입니다. 또 제가 목이의 위에 있기에는 才德이 부족함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환공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자보가 강력히 요청하니 환공이 허락하였다. 공자 목이를 태자로 세우려 하자 목이가 사양하며 말했다. “형이 태자가 되고 아우가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바로 합당한 道義인데, 지금 아우가 태자가 되고 형이 그 아래에 있게 되면 이는 도의가 아닙니다. 도의가 아닌데 저를 태자로 삼으신다면 저는 도망치겠습니다.”
그러고는 위나라로 도망치니 자보도 따라가버렸다. 3년이 지나 환공이 병이 들어 사람을 보내 자보를 불러오게 하면서 “만일 오지 않으면 이는 나를 근심으로 죽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이르게 하였다. 자보가 마침내 돌아오자 환공은 그를 다시 세워 태자로 삼으니, 그런 뒤에야 목이가 돌아왔다.
9. 忠不暴君,智不重惡,勇不逃死
晉驪姬譖太子申生於獻公,獻公將殺之,公子重耳謂申生曰:「 為此者非子之罪也,子胡不進辭,辭之必免於罪。」申生曰:「不可,我辭之,驪姬必有罪矣,吾君老矣,微驪姬寢不安席,食不甘味,如何使吾君以恨終哉!」重耳曰:「不辭則不若速去矣。」申生曰:「不可,去而免於此,是惡吾君也;夫彰父之過而取美諸侯,孰肯納之?入困於宗,出困於逃,是重吾惡也。吾聞之,忠不暴君,智不重惡,勇不逃死,如是者,吾以身當之。」遂伏劍死。君子聞之曰:「 天命矣夫世子!」詩曰:「萋兮斐兮,成是貝錦。彼譖人者,亦已太甚!」
晉나라 驪姬가 獻公에게 태자 申生을 讒訴하니 헌공이 신생을 죽이려고 하였다. 公子 重耳가 신생에게 말했다. “이 일은 그대의 죄가 아니니, 그대는 어찌 解明하는 말씀을 드리지 않소? 해명하면 반드시 죄를 면할 것이오.”
신생이 말했다. “안 되오. 내가 해명하면 반드시 여희가 죄를 받을 것이오. 우리 임금님은 늙으셨소. 여희가 곁에 없으면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으시고 음식을 달게 드시지 못하오. 어떻게 우리 임금님이 섭섭한 마음을 품고 돌아가시게 하겠소?”
중이가 말했다. “해명하지 않으려거든 빨리 떠나가는 것만 못하오.” 신생이 말했다. “안 되오. 내가 떠나서 죽음을 면하면 이는 우리 임금님의 惡行을 드러내는 것이오.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면서 제후에게 찬미를 받는다면 누가 나를 즐거이 받아주겠소? 나라 안에 있으면 宗族에게 곤경을 당하고, 밖에 나가 있으면 도망 다니느라 곤경에 처할 것이니, 이는 나의 罪惡을 거듭 더하는 것이오. 나는 들으니 ‘忠臣은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智慧로운 사람은 죄악을 거듭하지 않으며, 勇氣 있는 사람은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소. 이와 같은 상황을 나는 몸으로 감당하겠소.”
그러고는 마침내 劍을 안고 엎어져 자살하였다. 君子는 이를 듣고 “하늘이 정한 命이로구나. 世子여!” 하였고, 《詩經》에는 “알록달록 빛나는 무늬, 조개 문양으로 비단을 짜네. 저 참소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심하구나.”라 하였다.
10. 突受太子之詔,今事終矣,與其久生亂世也,不若死而報太子
晉獻公之時,有士焉,曰狐突,傅太子申生,公立驪姬為夫人,而國多憂,狐突稱疾不出。六年,獻公以譖誅太子,太子將死,使人謂狐突曰:「吾君老矣,國家多難,傅一出以輔吾君,申生受賜以死不恨。」再拜稽首而死。狐突乃復事獻公,三年,獻公卒,狐突辭於諸大夫曰:「突受太子之詔,今事終矣,與其久生亂世也,不若死而報太子。」乃歸自殺。
晉 獻公 때에 선비가 있었으니 이름을 狐突이라 하였는데 太子 申生의 스승[傅]이었다. 獻公이 驪姬를 세워서 夫人으로 삼자, 이 때문에 나라에 많은 우환이 생기니 호돌이 병을 핑계로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6년이 지나 헌공이 참소를 믿고 태자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자가 죽음에 임하여 사람을 보내 말했다.
“우리 임금님은 늙으셨고 나라에는 患難이 많으니, 스승께서 한번 나와서 우리 임금님을 보필해주시면 申生은 죽음을 받아 죽더라도 遺恨이 없겠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절하면서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죽었다. 호돌이 마침내 다시 헌공을 섬겼는데 3년 만에 헌공이 죽었다. 호돌이 여러 大夫에게 하직하면서 말했다. “나 호돌은 태자의 명을 받아 나왔었는데 이제 일이 끝났소. 亂世에 오래 사느니보다 죽어서 태자에게 보답하는 낫겠소.” 그리고는 곧 돌아가서 자살하였다.
11. 使而失命,召而不來,是重過也
楚平王使奮揚殺太子建,未至而遣之,太子奔宋,王召奮揚,使城父人執之以至,王曰:「言出於予口,入於爾耳,誰告建也?」對曰:臣告之,王初命臣曰:「事建如事余,臣不佞,不能貳也;奉初以還,故遣之,已而悔之,亦無及也。」王曰:「而敢來,何也?」對曰:「使而失命,召而不來,是重過也,逃無所入。」王乃赦之。
楚 平王이 奮揚을 시켜 太子 建을 죽이게 했는데, 분양이 이르기 전에 사람을 시켜 알려주며 가게 하니 태자 건은 宋나라로 달아났다. 평왕이 분양을 소환하고 城父에 사는 사람을 시켜 분양을 잡아 오게 하였다. 평왕이 말했다. “태자를 죽이라는 말은 내 입에서 나와 네 귀에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누가 건에게 일러주었느냐?”
분양이 대답했다. “臣이 일러주었습니다. 王께서 처음 신에게 ‘건을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이 하라.’고 명하셨는데, 신이 재주는 없지만 두 마음을 두지 못하기 때문에 왕께서 처음 명하신 대로 봉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태자를 가게 하고 조금 뒤에 뉘우쳤으나 역시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평왕이 말했다. “네가 감히 내 앞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냐?” 분양이 대답하였다. “使命을 받고도 수행하지 못하고, 소환을 당하고도 오지 않으면, 이는 거듭 罪過를 범하는 일이니, 도망쳐도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평왕은 마침내 赦免하였다.
12. 賊民之主,不忠;棄君之命,不信。有一於此,不如死也
晉靈公暴,趙宣子驟諫,靈公患之,使鉏之彌賊之;鉏之彌晨往,則寢門闢矣,宣子盛服將朝,尚早,坐而假寢,之彌退,歎而言曰:「不忘恭敬,民之主也。賊民之主,不忠;棄君之命,不信。有一於此,不如死也。」遂觸槐而死。
晉 靈公이 포악하니 趙宣子(趙盾)가 여러 차례 諫하자, 영공은 〈조선자를〉 혐오하여 鉏之彌를 시켜 죽이게 하였다.
서지미가 새벽에 〈조선자의〉 집에 가보니 침실의 문은 열려 있고, 조선자는 朝服을 잘 차려 입고 朝會에 나가려다가 아직 너무 일러서 앉아 졸고 있었다. 서지미는 그만 물러나와 탄식하며 말했다. “〈집에서도 임금에 대한〉 恭敬을 잊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백성을 위하는 주인이다. 백성을 위하는 주인을 죽이면 忠誠이 아니고, 임금의 명을 저버리는 것은 信義가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 길이 있으니, 죽는 것만 못하다.” 그러고는 마침내 회화나무를 들이박고 죽었다.
13. 我事子而與子殺君,是助子之不義也;畏患而去子,是遁子於難也
齊人有子蘭子者,事白公勝,勝將為難,乃告子蘭子曰:「吾將舉大事於國,願與子共之。」子蘭子曰:「我事子而與子殺君,是助子之不義也;畏患而去子,是遁子於難也。故不與子殺君以成吾義,契領於庭,以遂吾行。」
齊나라에 子蘭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白公 勝을 섬겼는데, 勝이 難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자란자에게 일렀다. “내가 나라에서 큰일을 일으키려고 하니, 그대도 함께하기 바란다.”
자란자가 말했다. “제가 그대를 섬기면서 그대와 함께 임금을 죽이면 이는 그대의 不義를 돕는 것이고, 환난을 두려워하여 그대의 곁을 떠나면 이는 그대의 환난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와 함께 임금을 죽이지 아니하여 저의 義理를 이루고, 이 뜰에서 목을 끊어 저의 義行을 이룰 것입니다.”
(* 契 맺을 계, 끊을 계. 領 거느릴 령, 목 령)
14. 夫仕者身歸於君而祿歸於親
名不可兩立,行不可兩全也
楚有士申鳴者,在家而養其父,孝聞於楚國,王欲授之相,申鳴辭不受,其父曰:「王欲相汝,汝何不受乎?」申鳴對曰:「舍父之孝子而為王之忠臣,何也?」其父曰:「使有祿於國,立義於庭,汝樂吾無憂矣,吾欲汝之相也。」申鳴曰:「諾。」遂入朝,楚王因授之相。居三年,白公為亂,殺司馬子期,申鳴將往死之,父止之曰:「棄父而死,其可乎?」申鳴曰:「聞夫仕者身歸於君而祿歸於親,今既去子事君,得無死其難乎?」遂辭而往,因以兵圍之。白公謂石乞曰:「申鳴者,天下之勇士也,今以兵圍我,吾為之奈何?」石乞曰:「申鳴者,天下之孝子也,往劫其父以兵,申鳴聞之必來,因與之語。」白公曰:「善。」則往取其父,持之以兵,告申鳴曰:「子與吾,吾與子分楚國;子不與吾,子父則死矣。」申鳴流涕而應之曰:「始吾父之孝子也,今吾君之忠臣也;吾聞之也,食其食者死其事,受其祿者畢其能;今吾已不得為父之孝子矣,乃君之忠臣也,吾何得以全身!」援桴鼓之,遂殺白公,其父亦死,王賞之金百斤,申鳴曰:「食君之食,避君之難,非忠臣也;定君之國,殺臣之父,非孝子也。名不可兩立,行不可兩全也,如是而生,何面目立於天下。」遂自殺也。
楚나라에 申鳴이라는 선비가 있어,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봉양하여 효성이 온 초나라에 소문이 났다. 王이 재상을 제수하려고 하자 신명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물었다. “왕이 너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는데 너는 어찌 받지 않느냐?” 신명이 대답하였다. “아버지를 봉양하는 孝子를 버리고 왕의 忠臣이 되면 뭐하겠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가령 국가의 俸祿을 먹고 조정에서 義理를 세워 네가 즐거우면 나는 걱정이 없을 것이니, 나는 네가 재상이 되기를 바란다.” 신명이 “좋습니다.” 하고 마침내 조정에 들어가니, 楚王이 그대로 재상에 제수하였다.
3년이 지난 뒤, 白公이 난을 일으켜 司馬 子期를 죽였다. 신명이 난이 일어난 곳에 가서 죽으려 하니 아버지가 만류하며 말했다. “아비를 버리고 가서 죽으면 그것이 옳겠느냐?”
신명이 말했다. “들으니 ‘벼슬하는 사람은, 몸은 임금에게 귀속시키고 봉록은 어버이에게 귀속시킨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아버지를 버리고 임금을 섬기고 있으니, 임금의 難에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마침내 아버지를 하직하고 難이 일어난 곳으로 가서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백공을 포위하였다. 백공이 石乞에 말했다. “신명은 천하의 勇士다. 지금 군대를 거느리고 나를 포위하고 있으니 나는 어쩌면 좋겠나?” 석걸이 말했다. “신명은 천하의 孝子입니다. 가서 그의 아버지를 武力으로 협박하면 신명이 소문을 듣고 반드시 올 것이니,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와 담판을 하십시오.”
백공이 “좋다.” 하고는 즉시 가서 그의 아버지를 잡아서 무기로 위협하고 신명에게 알렸다. “그대가 나를 도우면 나는 그대와 초나라를 나누어 소유하겠지만, 그대가 나를 돕지 않으면 그대의 아비는 죽게 될 것이다.” 신명은 눈물을 흘리며 응답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의 孝子였으나, 지금은 우리 임금의 忠臣이다. 나는 들으니 ‘남의 밥을 먹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을 위해 죽고, 남의 봉록을 받는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다한다.’ 하였다. 지금 나는 이미 아버지의 효자가 되지 못하고, 바로 임금의 충신이 되었으니 내 어찌 몸을 보전하겠는가?”
북채를 잡고 진격의 북을 쳐서 마침내 백공을 죽였으나 그의 아버지도 죽었다. 왕이 상으로 金 백 근을 주자, 신명이 말했다. “임금의 밥을 먹고 임금의 患難을 피하면 충신이 아니고, 임금의 국가를 안정시킨다 하여 저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효자가 아닙니다. 名分은 두 가지를 같이 세울 수가 없고, 行實은 두 가지를 온전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 산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15. 汝生而有義,死而有名,則五乘之賓盡汝下也
齊莊公且伐莒,為車五乘之賓,而杞梁華舟獨不與焉,故歸而不食,其母曰:「汝生而無義,死而無名,則雖非五乘,孰不汝笑也?汝生而有義,死而有名,則五乘之賓盡汝下也。」趣食乃行,杞梁華舟同車侍於莊公而行至莒,莒人逆之,杞梁華舟下鬥,獲甲首三百,莊公止之曰:「子止,與子同齊國。」杞梁華舟曰:「君為五乘之賓,而舟梁不與焉,是少吾勇也;臨敵涉難,止我以利,是污吾行也;深入多殺者,臣之事也,齊國之利,非吾所知也。」遂進鬥,壞軍陷陣,三軍弗敢當,至莒城下,莒人以炭置地,二人立有間,不能入。隰侯重為右曰:「吾聞古之士,犯患涉難者,其去遂於物也,來,吾踰子。」隰侯重仗楯伏炭,二子乘而入,顧而哭之,華舟後息。杞梁曰:「汝無勇乎?何哭之久也?」華舟曰:「吾豈無勇哉,是其勇與我同也,而先吾死,是以哀之。」莒人曰:「子毋死,與子同莒國。」杞梁華舟曰:「去國歸敵,非忠臣也;去長受賜,非正行也;且雞鳴而期,日中而忘之,非信也。深入多殺者,臣之事也,莒國之利非吾所知也。」遂進鬥,殺二十七人而死。其妻聞之而哭,城為之,而隅為之崩。此非所以起也。
齊 莊公이 莒나라를 치려고 할 때, 五乘으로 봉양하는 賓客을 선출하였으나, 杞梁과 華舟만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도 밥을 먹지 못하니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살아서 道義를 행한 일이 없고 죽어서 좋은 名聲이 없으면, 오승을 탈 수 있는 빈객이 되더라도 누가 너를 비웃지 않겠느냐? 네가 살아서 도의를 행한 일이 있고 죽어서 좋은 명성이 있으면, 오승을 탈 수 있는 빈객이 모두 네 밑에 있을 것이다.”
그러자 빨리 밥을 먹고는 곧 길을 떠났다. 기량과 화주는 함께 兵車를 타고 장공을 모시면서 길을 떠나 莒나라에 당도하니, 거나라 사람들이 맞아 싸움이 벌어졌다. 기량과 화주는 兵車에서 뛰어내려 전투하여 甲首 3백 명을 베어버렸다. 장공이 제지하며 말했다. “자네들이 싸움을 그치면 자네들과 齊나라를 함께 享有할 것이다.”
이에 기량과 화주는 말했다. “임금님께서 오승을 누릴 수 있는 빈객을 선출하였으나 화주와 기량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용기를 輕視한 것이고, 적과 맞서서 危難을 겪고 있는데 利益으로 우리의 싸움을 제지하니 이는 바로 우리의 행위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적진에 깊이 들어가 많은 적군을 죽이는 것은 신들의 일이니, 제나라를 함께 향유하는 이익은 우리들이 알 바 아닙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진격하여 적의 軍陣을 무너뜨리니 적의 三軍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거나라 都城 아래에 당도하니 거나라 사람들이 땅에 숯불을 깔아놓았는데, 두 사람이 한동안 그대로 서 있으면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때 隰侯重은 車右였는데, 나서서 말했다. “나는 들으니 ‘옛날 戰士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헤쳐나간 자는 자기의 몸을 버리어 功을 이룬다.’ 하였소. 오시오. 내가 그대에게 이 숯불을 넘어가게 해주겠소.” 그리고는 습후중이 방패를 잡고 숯불 위에 엎드리자 두 사람이 그 위를 타고 들어가서는, 돌아보며 哭을 하다가 화주가 나중에 그쳤다. 기량이 말했다. “너는 용기가 없느냐? 왜 그리 오래 곡을 하느냐?” 화주가 대답했다. “내가 왜 용기가 없겠느냐! 이 습후중의 용기는 우리와 같은데 우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슬퍼한 것이라네.”
거나라 사람이 말했다. “그대들은 우리를 죽이지 마시오. 그러면 그대들과 함께 거나라를 향유하겠소.” 기량과 화주가 말했다. “祖國을 저버리고 敵國에 귀순하는 것은 충신이 아니고, 임금을 저버리고 賞을 받는 것은 바른 행위가 아니며, 게다가 닭이 우는 새벽에 약속을 하고 한낮에 이를 잊는 것은 信義가 아니다. 敵陣에 깊이 들어가 많은 적군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일이니, 거나라를 향유하는 이익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진격해 싸워 27명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었다.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는 痛哭하니 城이 기울어 모퉁이가 무너졌다. 이는 기량의 아내에 관한 琴曲이 생기게 된 근원이다.
16. 車右可以死左轂,而臣獨不可以死越甲也?
越甲至齊,雍門子狄請死之,齊王曰:「鼓鐸之聲未聞,矢石未交,長兵未接,子何務死之?為人臣之禮邪?」雍門子狄對曰:「臣聞之,昔者王田於囿,左轂鳴、車右請死之,而王曰:『子何為死?』車右對曰:『為其鳴吾君也。』王曰:『左轂鳴者工師之罪也,子何事之有焉?』車右曰:『臣不見工師之乘而見其鳴吾君也。』遂刎頸而死,知有之乎?」齊王曰:「有之。」雍門子狄曰:「今越甲至,其鳴吾君也,豈左轂之下哉?車右可以死左轂,而臣獨不可以死越甲也?」遂刎頸而死。是日越人引甲而退七十里,曰:「齊王有臣,鈞如雍門子狄,擬使越社稷不血食。」遂引甲而歸,齊王葬雍門子狄以上卿之禮。
越나라 군대가 齊나라를 공격해 들어오니 雍門子狄이 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요청했다. 齊王이 말했다. “鼓鐸의 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았고, 화살과 돌을 아직 발사하지 않았으며, 창 같은 긴 무기가 아직 부딪치지 않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 굳이 죽으려 하는가? 이것이 신하된 사람의 예절인가?”
옹문자적이 대답했다. “臣은 들으니, 예전에 王께서 園囿에서 사냥을 하실 적에 수레의 왼쪽 바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車右가 죽겠다고 요청하자, 王께서 ‘그대는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거우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어 우리 임금을 놀라게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王께서 ‘왼쪽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 것은 工師의 죄인데, 그대와 무슨 관계되는 일이 있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거우는 ‘臣은 工師가 수레를 만드는 것은 보지 못했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어 우리 임금을 놀라게 한 것만 보았습니다.’라 대답하고는 마침내 목을 찔러 죽었다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제왕이 말했다. “이런 사실이 있다.” 옹문자적이 말했다. “지금 월나라의 군대가 공격해 왔으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어 우리 임금을 놀라게 한 일이 어찌 왼쪽 수레바퀴보다 못한 일이겠습니까? 거우는 삐걱거리는 왼쪽 수레바퀴 때문에 죽을 수 있었는데, 신만은 침입한 월나라 군대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단 말입니까?”
그러고는 마침내 목을 찔러 죽었다. 이날 월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인솔하고 70리를 퇴각하면서 말했다. “제왕의 신하들이 모두 옹문자적과 같다면 아마도 월나라의 社稷에 祭祀를 받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니, 제왕이 上卿의 禮를 갖추어 옹문자적을 장례하였다.
17. 遁者無罪,則後世之為君臣者,皆入不利之名而效臣遁,若是則楚國終為天下弱矣,臣請死
楚人將與吳人戰,楚兵寡而吳兵眾,楚將軍子囊曰:「我擊此國必敗,辱君虧地,忠臣不忍為也。」不復於君,黜兵而退,至於國郊,使人復於君曰:「臣請死!」君曰:「子大夫之遁也,以為利也,而今誠利,子大夫毋死!」子囊曰:「遁者無罪,則後世之為君臣者,皆入不利之名而效臣遁,若是則楚國終為天下弱矣,臣請死。」退而伏劍。君曰:「誠如此,請成子大夫之義。」乃為桐棺三寸,加斧質其上,以徇於國。
楚나라 사람이 吳나라 사람과 戰爭을 하려고 할 때, 초나라 군대는 적고 오나라 군대는 많았다. 초나라 장군 子囊이 말했다. “우리가 이 오나라를 공격하면 반드시 패배하여 임금은 치욕을 당하고 국토는 줄어들게 될 것이니, 忠臣은 차마 이런 전쟁은 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임금에게 보고하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國都의 교외에 당도하여 사람을 보내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하게 하였다. “臣을 죽여주십시오.”
임금이 말했다. “그대 大夫가 도망쳐 돌아온 것은 국가에 이로움이 있기 때문이오. 지금 보기에 참으로 이로움이 있으니 그대 대부는 죽지 마시오.” 자낭이 말했다. “도망쳐 온 사람을 죄주지 않으면, 後世에 임금의 신하 된 자가 모두 不利하다는 명분을 빌려 신이 도망쳐 온 것을 본받을 것입니다. 이같이 되면 초나라는 마침내 천하의 弱小國이 될 것이니, 신을 죽여주십시오.” 그러고는 물러 나와서 칼을 안고 엎어져 죽었다. 임금이 말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그대 대부의 忠義를 이루어줄 것이오.” 이에 세 치[寸] 두께의 오동나무 棺을 만들어 〈刑具인〉 도끼와 모탕[質]을 그 위에 올려놓고 온 나라 사람들에게 돌려 보여주었다.
18. 廉士不辱名,信士不惰行
宋康公攻阿,屠單父,成公趙曰:「始吾不自知,以為在千乘則萬乘不敢伐,在萬乘則天下不敢圖。今趙在阿而宋屠單父,則是趙無以自立也。且往誅宋!」趙遂入宋,三月不得見。或曰:「何不因鄰國之使而見之。」成公趙曰:「不可,吾因鄰國之使而刺之,則使後世之使不信,荷節之信不用,皆曰趙使之然也,不可!」或曰:「何不因群臣道徒處之士而刺之。」成公趙曰:「不可,吾因群臣道徒處之士而刺之,則後世之臣不見信,辯士不見顧,皆曰趙使之然也。不可!吾聞古之士怒則思理,危不忘義,必將正行以求之耳。」期年,宋康公病死,成公趙曰:「廉士不辱名,信士不惰行,今吾在阿,宋屠單父,是辱名也;事誅宋王,期年不得,是惰行也。吾若是而生,何面目而見天下之士。」遂立槁於彭山之上。
宋 康公이 阿邑을 공격하고 單父 사람들을 도륙하였다. 成公趙가 말했다. “당초에 나는 스스로 事理를 알지 못하여 千乘의 諸侯國에 살고 있으면 萬乘의 天子國이 감히 정벌하지 못하고, 萬乘의 天子國에 살고 있으면 천하 사람이 감히 도모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내가 아읍에 살고 있는데 宋나라가 선보 사람들을 도륙하였으니, 이 때문에 내가 세상에 自立할 수가 없다. 장차 송나라에 가서 宋王을 죽이겠다.”
성공조는 마침내 송나라에 들어갔으나 3개월 동안 송왕을 만나지 못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어찌 이웃 나라에서 온 使臣을 이용하여 송왕을 만나지 않는 게요?” 성공조가 말했다. “안 되오. 내가 이웃 나라에서 온 사신을 이용하여 송왕을 만나 찔러 죽이면 後世의 사신에게 信任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지니고 온 符節의 信憑이 쓸모없게 되면 모두들 ‘성공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할 것이니, 이는 안 되오.”
그러자 어떤 이가 말했다. “어찌 群臣이 隱士를 인도하여 뵙게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찔러 죽이지 않는 게요?” 성공조가 말했다. “안 되오. 내가 군신이 은사를 인도하여 뵙게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찔러 죽이면 후세의 忠臣은 신임을 받지 못할 것이고, 辯士는 관심을 받지 못하여 모두들 ‘성공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할 것이니, 이는 안 되오. 내 들으니, 옛날의 선비는 화를 낼 때면 事理를 생각하고,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義理를 잊지 아니하여, 반드시 정당한 행위로 구할 따름이라 하였소.”
그러고 1년 만에 송 강공이 병들어 죽었다. 성공조는 이렇게 말했다. “淸廉潔白한 선비는 자기의 名節을 욕되게 하지 않고, 誠信한 선비는 자기의 행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아읍에 살고 있는데 송나라가 선보 사람들을 도륙하였으니 이는 내 명절을 욕되게 한 것이고, 송왕을 죽이는 일에 나섰으나 1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했으니 이는 내 행동이 게으른 것이다. 내가 이처럼 하고 산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선비들을 보겠는가!” 그러고는 마침내 彭山 위에 서서 말라 죽었다.
19. 義者軒冕在前,非義弗受;斧鉞於後,義死不避
佛肸用中牟之縣畔,設祿邑炊鼎曰:「與我者受邑,不與我者其烹。」中牟之士皆與之。城北餘子田基獨後至,袪衣將入鼎曰:「基聞之,義者軒冕在前,非義弗受;斧鉞於後,義死不避。」遂袪衣將入鼎,佛肸播而之趙,簡子屠中牟,得而取之,論有功者,用田基為始,田基曰:「吾聞廉士不恥人,如此而受中牟之功,則中牟之士終身慚矣。」襁負其母,南徙於楚,楚王高其義待以司馬。
佛肸(필힐)이 中牟縣을 근거지로 삼아 배반하여 祿邑과 가마솥을 설치하고 말했다. “나를 돕는 사람은 祿邑을 받고, 나를 돕지 않는 사람은 솥에 넣어 삶아 죽이겠다.” 그러자 중모현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도왔다.
城北에 사는 餘子 田基만 남들보다 늦게 도착해서 옷을 걷고 솥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면서 말했다. “나는 들으니 ‘義로운 사람은 軒車와 冠冕을 내 앞에 늘어놓아도 義롭지 않으면 타지 않으며, 형벌하는 도끼를 내 뒤에 들이대도 義로우면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다.’ 하였소.”
그러고는 마침내 옷을 걷고 솥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니, 필힐이 손을 저어 제지하였다. 뒤에 趙簡子가 중모현을 도살하여 그곳을 다시 취하고 功이 있는 사람을 評定할 때 전기를 첫째로 꼽았다.
이에 전기가 말했다. “나는 들으니 ‘청렴결백한 선비는 남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중모를 평정한 공을 받으면 중모의 선비들은 죽을 때까지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오.” 그러고는 마침내 어머니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남쪽 楚나라로 옮겨 가 살았다. 楚王은 그의 義로움을 높이 사서 司馬 벼슬로 대우하였다.
20. 勇士不忘喪其元
齊崔杼弒莊公,邢蒯瞶使晉而反,其僕曰:「崔杼弒莊公,子將奚如?」邢蒯瞶曰:「驅之,將入死而報君。」其僕曰:「君之無道也,四鄰諸侯莫不聞也,以夫子而死之不亦難乎?」邢蒯瞶曰:「善能言也,然亦晚矣,子早言我,我能諫之,諫不聽我能去,今既不諫又不去;吾聞食其祿者死其事,吾既食亂君之祿矣,又安得治君而死之?」遂驅車入死。其僕曰:「人有亂君,人猶死之;我有治長,可毋死乎?」乃結轡自刎於車上。君子聞之曰:「邢蒯瞶可謂守節死義矣;死者人之所難也,僕夫之死也,雖未能合義,然亦有志之意矣,詩云:『夙夜匪懈,以事一人,』邢生之謂也。孟子曰:『勇士不忘喪其元,』僕夫之謂也。」
齊나라 崔杼가 莊公을 시해하였는데, 邢蒯聵가 晉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마부가 말했다.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형괴외가 말했다. “수레를 빨리 몰아라. 내 들어가서 죽음으로 임금께 보답할 것이다.”
그의 마부는 다시 말했다. “임금의 無道한 행위는 사방 이웃 나라 제후까지도 듣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인께서 이런 사람을 위해 죽는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형괴외는 말했다. “좋다. 말을 잘했지만 또한 이미 늦었다. 네가 좀 더 일찍 말해주었더라면 내가 잘 諫했을 것이고,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간하지 못했고 떠나지도 못했다. 나는 들으니 ‘그 사람의 俸祿을 먹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일에 죽어야 된다.’고 했다. 내 이미 亂君의 봉록을 먹었으니, 또 어떻게 현명한 임금을 만나 죽겠느냐?”
그렇게 말하고는 마침내 수레를 빨리 몰아 도성으로 들어가 죽었다. 그의 마부가 말했다. “어떤 사람은 亂君을 두었는데도 오히려 그를 위해 죽었는데, 나는 현명한 주인을 두었으니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마침내 말고삐로 목을 매어 수레 위에서 자살하였다.
君子는 이 소문을 듣고 말했다. “형괴외는 忠節을 지켜 義理를 위해 죽었다고 이를 만하니, 죽는 것은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부의 죽음은 의리에 부합하지는 않으나 역시 志士의 意志가 있다.” 《詩經》에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여, 한 사람을 섬기리!” 하였으니, 형괴외 같은 사람을 이른 말이다. 孟子는 “勇士는 머리를 잃을 각오를 잊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마부 같은 사람을 이른 말이다.
21. 忠臣不事二君,貞女不更二夫
燕昭王使樂毅伐齊,閔王亡,燕之初入齊也,聞蓋邑人王歜賢,令於三軍曰:「環蓋三十里毋入。」以歜之故,已而使人謂歜曰:「齊人多高子之義,吾以子為將,封子萬家。」歜固謝燕人,燕人曰:「子不聽,吾引三軍而屠蓋邑。」王歜曰:「忠臣不事二君,貞女不更二夫;齊王不聽吾諫,故退而耕於野。國既破亡,吾不能存,今又劫之以兵,為君將,是助桀為暴也,與其生而無義,固不如烹。」遂懸其軀於樹枝,自奮絕脰而死,齊亡,大夫聞之曰:「王歜布衣義猶不背齊向燕,況在位食祿者乎?」乃相聚如莒,求諸公子,立為襄王。
燕 昭王이 樂毅를 보내어 齊나라를 토벌하게 하니 齊 閔王이 도망쳤다. 燕나라 군대가 처음 제나라에 들어갔을 때 蓋邑 사람 王歜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합읍의 30리 주위 안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니, 이는 왕촉 때문이었다. 이윽고 사람을 보내어 왕촉에게 이렇게 이르도록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대의 道義를 높이 존경하고 있으니, 내 그대를 장군으로 삼고 그대를 萬戶의 고을에 봉해주겠소.” 왕촉이 연나라 사신에게 확고히 거절하자, 연나라 사신은 다시 위협하는 말을 전했다. “그대가 따르지 않으면 내 삼군을 이끌고 합읍을 도륙할 것이다.”
왕촉은 말했다.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貞女는 두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는 법이오. 齊王이 내가 諫하는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물러나 草野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소. 나라가 이미 결딴나 망하게 되었으나 나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군대로 위협하니 내가 연나라 임금의 장군이 되면, 이것은 桀王을 도와 포악한 짓을 하는 것이오. 이처럼 의리 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삶겨 죽는 것이 낫겠소.”
그러고는 마침내 몸을 나뭇가지에 매달고 스스로 목을 끊어 죽었다. 제나라의 도망쳤던 大夫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왕촉은 그저 平民이건만 의리를 지켜 제나라를 배신하고 연나라로 가지 않았는데, 더구나 벼슬하면서 俸祿을 먹는 우리들이랴!” 그리하여 서로 모여 莒나라에 가서 公子를 찾아 즉위시켜 襄王으로 삼았다.
22. 君道友逆,則順君以誅友;友道君逆,則率友以違君
左儒友於杜伯,皆臣周宣王,宣王將殺杜伯而非其罪也,左儒爭之於王,九復之而王弗許也,王曰:「別君而異友,斯汝也。」左儒對曰:「臣聞之,君道友逆,則順君以誅友;友道君逆,則率友以違君。」王怒曰:「易而言則生,不易而言則死。」左儒對曰:「臣聞古之士不枉義以從死,不易言以求生,故臣能明君之過,以死杜伯之無罪。」王殺杜伯,左儒死之。
左儒는 杜伯과 사이좋은 친구가 되어 함께 周 宣王의 신하가 되었다. 선왕이 죄가 없는 두백을 죽이려고 하자, 좌유가 선왕에게 변론하여 아홉 번 거듭 변론하였으나 선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선왕이 말했다. “임금을 위배하고 친구를 특별히 여기는 것이 바로 너로구나!”
좌유는 대답했다. “臣은 들으니 ‘임금은 옳고 친구가 그르면 임금에게 순종하여 친구를 꾸짖고, 친구는 옳고 임금이 그르면 친구를 따라 임금을 거역한다.’ 하였습니다.”
선왕이 노하여 말했다. “네 말을 바꾸면 살려주겠지만 네 말을 바꾸지 않으면 죽이겠다.” 좌유는 대답했다. “신이 들으니 ‘옛날의 선비는 의리를 위배하면서 사악함을 따르지 않고, 말을 바꾸면서 살기를 구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신은 임금의 잘못을 밝히고 죽음으로써 두백의 無罪를 변론하는 것입니다.” 선왕이 두백을 죽이니, 좌유도 〈따라〉 죽었다.
23.
莒穆公有臣曰朱厲附,事穆公,不見識焉,冬處於山林食杼栗,夏處於洲澤食蔆藕。穆公以難死,朱厲附將往死之。其友曰:「子事君而不見識焉,今君難吾子死之,意者其不可乎!」朱厲附曰:「始我以為君不吾知也,今君死而我不死,是果不知我也;吾將死之,以激天下不知其臣者。」遂往死之。
莒 穆公에게 신하가 있으니, 朱厲附라고 한다. 목공을 섬겼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니 겨울에는 산속에 살면서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고, 여름에는 늪이나 못가에 살면서 마름과 연뿌리를 먹고 살았다. 목공이 患難을 만나 죽었는데, 주여부가 가서 목공을 위해 죽으려 하자 그의 친구가 말했다.
“자네가 임금을 섬겼으나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지금 임금이 만난 환난에 그대가 가서 죽으려고 하니, 아무래도 옳지 않은 듯하네.”
그러자 주여부는 말했다. “처음에 나는 임금이 나를 몰라준다고 여겼으나, 지금 임금이 죽었는데도 내가 따라 죽지 않으면 이는 정말로 임금이 나를 알아본 것이네. 나는 죽어 천하에서 그 신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를 격려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서 따라 죽었다.
24. 子倍自好也,爭王雉必有說,王姑察之
楚莊王獵於雲夢,射科雉得之,申公子倍攻而奪之,王將殺之,大夫諫曰:「子倍自好也,爭王雉必有說,王姑察之。」不出三月,子倍病而死。邲之戰,楚大勝晉,歸而賞功,申公子倍之弟請賞於王曰:「人之有功也,賞於車下。」王曰:「奚謂也?」對曰:「臣之兄讀故記曰:射科雉者不出三月必死,臣之兄爭而得之,故夭死也。」王命發乎府而視之,於記果有焉,乃厚賞之。
楚 莊王이 雲夢에서 사냥하면서 科雉를 쏘아 잡았는데, 申公 子倍가 달려들어 빼앗자 장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大夫들이 이렇게 諫하였다. “자배는 처신을 깨끗이 하며 자신을 아끼는 사람인데, 王께서 잡은 꿩을 강제로 빼앗은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우선 여유를 가지고 살펴보십시오.”
그런 뒤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자배는 병이 들어 죽어버렸다. 邲의 전쟁에서 楚나라가 晉나라에 크게 승리하고 돌아와 戰功을 따져 賞을 줄 때, 신공 자배의 아우가 장왕에게 나아가 상을 내리라고 요청하면서 말했다. “남들은 戰場에서 공을 세웠고, 臣의 형은 왕의 사냥하는 수레 아래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장왕이 물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자배의 아우가 대답했다. “신의 형이 古書를 읽어보니 ‘科雉를 쏘아 잡은 사람은 석 달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죽는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신의 형은 이것을 알고 강제로 王께서 잡은 과치를 빼앗았기 때문에 夭折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은 書庫를 뒤지게 하여 책을 찾아다가 보니, 고서에 정말로 그런 기사가 있기에 곧 후한 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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