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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읽은책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읽었다

by 변리사 허성원 2017. 9. 30.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던 게 근 10년은 되었나보다. 그 때는 조만간 꼭 다시 읽어봐야지 마음을 먹었었는데 이내 잊고 지금껏 지내왔다. 최근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서 남한산성이라는 단어가 눈에 자주 밟혀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보았다.
'남한산성'은 인조 14년(1636년) 12월14일부터 이듬해 2월2일까지의 약 50일간 일어났던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피난 기록이다. 처음 읽었을 땐 춥고 배고픈 피난 상황과 그 암담한 회색 현실이 시종 답답하고, 특히 주화파와 척화파 간의 공허한 논쟁과 인조의 트릿한 태도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불편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많이 다른 감동을 느꼈다.
 
우선, 다른 옳음들간의 치열한 공방이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
항복하여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파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
사직을 보존할 것인가, 나라의 절개를 지키고 산화할 것인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명분이다. 하나가 옳고 나머지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옳음이다. 다른 옳음 간의 다툼이다. 다른 옳음이 존재하기에 자신의 옳음을 충분히 내세우고 지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옳음이 충분히 저항하여 자신의 옳음을 검증해주지 않았다면 그 결과를 어찌 홀로 오로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적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결국 화친을 했지만, 나라의 절개를 끝까지 지키고자 한 강직한 선비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이 적들에게 선명히 부각되었을 것이다.
 
이게 진정한 정치다. 여러 다른 옳음이 존재하고 서로 인정하여 배려하고 치열하게 공방하고 그러면서 더 상위개념의 선을 추구하는 것. 지금 우리나라의 사드, 전술핵 등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또 한가지 새로운 깨달음. 바로 리더의 의무이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끝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청황제를 알현하며 항복한다.
삼배구고두례는 절을 하며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이를 세 번 반복하는 것.
 
범부라면 그 치욕을 죽음으로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는 그 엄청난 치욕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직을 살려내고 미래를 기약하도록 하는 것이 리더의 의무다.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죽어서 나라가 살 수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리더의 운명이다.
인조의 즉위 과정, 시대 상황 인식, 리더십 등을 생각하면 그를 조금도 편들고 싶지 않지만, 남한산성 피난의 국한된 상황에서만 볼 때 그의 선택은 리더의 운명을 따랐다는 말이다.
 

 

 

그리고 김훈의 간결하고도 서늘한 동양화같은 문체이다.
때론 다소 지루하다 싶을 만큼 세세히 기술하기도 하지만, 군더더기 수식이 없이 건조하면서도 선명하게 판화를 그리듯 쓴다.

그의 글을 배워 따르고 싶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으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세웠다.

자지가 오그라진 수말들이 네 다리를 들어서 허공을 긁었다. 말 다리는 곧 땅 위로 늘어졌다. 말들의 죽음은 느리고 고요했다. 말들은 천천히 죽었고 질기게 숨쉬었다. 옆으로 쓰러져 네 다리를 길게 뻗은 말들도 사나흘씩 옆구리를 벌럭거리며 숨을 쉬었다. 숨이 다한 직후에 묵은똥이 비어져 나오고 오줌이 흘러나오는 소리 외에는, 말들은 죽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울었다. 울음을 멈추고 최명길이 또 말했다.
전하, 뒷날에 신들을 다 죽이시더라도 오늘의 일을 감당하여 주소서.
전하의 크나큰 치욕으로 만백성을 품어주소서. 감당하시어 새 날을 여소서.

이거 보시오. 이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가 아니라 항降이오.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요?
최명길은 김상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임금을 향해 말했다.
예판이 화해할 수 있는 때와 화해할 수 없는 때를 말하고 또 성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명을 황제라 칭하면서 너의 신하와 백성들이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말하라. 또 너희가 나를 도적이며 오랑캐라 부른다는데, 네가 한 고을의 임금으로서 비단옷을 걸치고 기와지붕 밑에 앉아서 도적을 잡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한다. 하늘의 뜻이 땅 위의 대세를 이루어 황재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네가 그 어두운 산골짜기 나라에 들어앉아서 천도를 경영하며 황제를 점지하느냐. 제가 너에게서 비롯하며, 천하나 너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냐. 너는 대답하라.

 

더 서늘한 말이 있다. 죽음과 삶을 놓고 논쟁하는 장면이다.

 

 

위 죽음 논쟁에 앞서 화친과 항복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
김상헌과 최명길의 간언 논쟁은 영화 '남한산성'의 명장면이다.

 

** 병자호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좀 정리해보자.

-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가 즉위한다.
- 1627년 누르하치의 후금이 침공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간다(정묘호란). 형제의 맹약과 볼모 제공으로 화친을 맺는다.
- 1636년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 홍타이지(청 태종)는 아비가 죽자 형들을 죽이고 황제에 올라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오른다. 청은 조선에 군신의 예를 요구하고 이를 거절하자 12월에 침공한다. 왕과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난갔다.
- 1637년 2월 인조는 삼전도에서 투항하여 삼배구고두례를 행한다. 이때부터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의 연호를 따른다. - 1644년 청이 명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 병자호란 그 이후

- 강화조약 : 인조의 삼전도 항복 당시에 체결된 내용은 이렇다. ① 청에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의 연호를 버리고 교호를 끊으며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을 바칠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차자 및 대신의 자제를 볼모로 보낼 것, ④ 성절()·정조()·동지()·천추()·경조() 등의 사절(使)은 명의 예에 따를 것, ⑤ 명을 칠 때 출병()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 군이 돌아갈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1639년)부터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등.

- 청과의 군신관계 : 명의 ‘숭정()’이란 연호를 버리고 의 ‘숭덕()’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청과의 군신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으로 청이 일본에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무려 258년간의 복속. 

- 피납과 환향녀 : 불과 두 달 남짓의 짧은 전란이었지만 임진왜란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청군이 돌아가면서 납치해간 조선인의 수는 수만명에서 많게는 5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납치 상황이 영화 '최종병기 활'의 모티브가 되었다. 피납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화냥년'의 어원이다. 말못할 고초를 겪고 돌아온 그녀들에게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싸늘한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서대문 밖에서 머물었다. 조정은 환향녀들을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냇물에 몸을 씻으면 정절이 회복되다는 것. 그레서 그 내를 '홍제천'이라 부른다. 홍제, 널리 구제하였다는 뜻. 그럼에도 가족들과 사회의 냉대를 받은 환향녀들은 스스로 청으로 다시 넘어가기도 하고 서대문 밖에서 그들끼리 어울려 살거나 창부로 연명하는 길을 걸었다.

- 임경업 장군 : 명을 치기 위해 청의 파병 요청을 받아 출전하였으나 명과의 의리를 지키느라 청에 협력하지 않고 명과 내통하였음이 밝혀져, 체포되어 청으로 압송. 압송 도중에 탈출하여 명에 망명하고 명의 장군이 되지만 1644년 명은 청에 항복하고,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모진 고문 후에 옥사한다.

- 최명길과 김상헌
김상헌(1570~1652)과 최명길(1586~1647)의 나이는 16살 차이가 난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찢어버린 적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대립은 지극하였다.
최명길은 1642년 명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청의 심양에 소환되어 감옥에 갇힌다. 거기에서 김상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다. 운명적 만남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낙향하여 있다가 청의 요구로 1640년 심양으로 압송되지만,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건강 악화로 조선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1643년 다시 끌려갔던 것이다. 김상헌이 심양으로 끌려가면 읊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는 잘 알려져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똥 말똥 하여라.
두 사람은 감옥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은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김상헌은 '양대의 우의를 찾아 따르고(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疑)'라고 읊고, 이에 화답하여
최명길은 '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轉) 나의 도는 둥근 고리와 같아 믿음에 따라 돈다네(隨)'라고 답했다.

또 이런 시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성향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

      최명길 :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水)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

      김상헌 :

성패는 천운에 관련된 것이니(運)
모름지기 옳음()을 헤아려 맡겨야 하리라(歸)
아무리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暮)
치마와 웃옷을 어찌 뒤바꿀 수 있겠는가(衣)
임시방편()은 지혜로운 자도 그르칠 수 있지만(誤)
바른 도리(經)는 모든 사람들이 어기지 못하나니(違)
이치에 밝은 선비께 이 말 전해주시오(士)
시급하다 하더라도 때를 저울질 함에 신중하시라고(機)

 

두 사람은 1645년에 풀려나 모두 서울로 돌아온다. 젊은 최명길은 2년 후 62세의 나이로 사망.
김상헌은 1646년에 인조에 의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도 좌의정으로 불려갔으나 고사하였다. 1652년 82세의 나이로 사망. 조선시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으며, 조선시대 후기 세도가인 안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절개를 지킨 김상헌의 후대는 세도가로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시류를 강조한 최명길의 후손은 변변히 현달하지 못하였다는 점은 새겨 볼만하다.

 

** 작은 나라의 외교
병자호란은, 오랫동안 섬겨온 명에 대해 의리와 명분을 지킬 것인가, 명을 버리고 신흥 강대국 청에 기대어 실리와 생존을 추구할 것인가의 사이에서 겪은 갈등과 외교 전략의 부족, 판단의 지연 등으로 인해 증폭된 참사였다.
어차피 약소국인 조선은 줄타기 외교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동북아 판세를 정확히 읽고 최소의 피해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외교적 전략을 신속히 결정하여 발빠르게 움직였어야 했다. 상황판단의 미비와 전략 의 부재가 엄청난 피해로 귀결된 것이다.
유사한 상황은 250여년 후 청일전쟁 때에도 벌어졌다.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를 기화로 일본이 제물포를 통해 상륙하여 경복궁을 점령한다. 고종은 일본에 항복하고, 중앙의 군대는 일본군과 함께 청을 공격하게 된다. 그런 한편 밀명을 보내 지방군에게는 청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하니, 급기야는 조선군끼리 총뿌리를 겨누어 싸우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병자호란에 못지않게 기가 찬 상황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에서..)
작금의 북한핵과 사드를 둘러싼 국내의 갈등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병자호란과 청일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쟁을 피하며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고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으면서 특히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으면서 국가 이익이 유지 내지 증진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지금 대한민국의 외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자공(子貢)이 필요하다. 공자의 제자인 그는 약소국 노나라의 외교가로서, 진, 제, 오, 월 등 주위 열강들을 주유하며 절묘하게 국가 간 형세를 뒤흔들어 노나라의 안녕을 도모하였다. 자공의 지혜를 빌려오라.- 끝 -

 

* 참고 : 고려의 실리외교

 

**

https://athenae.tistory.com/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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