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뭣이 중한데..
누구에게나 칭송받는 사람(鄕原)은 덕의 도둑이다.
鄕原德之賊也(향원덕지적야).
_ 논어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선악 판단이 분명치 못하다는 의미이다.
항상 남의 기준이나 가치 평가에 맞춰 위선적으로 살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런 두루뭉술한 사람은 자신에게도 세상 사람들에게도 결코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존재다움을 나타내는 덕(德)이 있다.
자신의 존재다움을 선명히 하지 못하면 그 덕을 해치는 법이다.
#1
통영항에 거북선이 있다. 관광이나 교육을 위해 전시해둔 것이다.
전시용이라 그 자리에 영원히 정박하고 있어야 할 운명이다.
통영항은 주위의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천연요새라 거북선은 어떤 파도에도 안전할 것이니
그 소재와 관리가 미치는 한 천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안전한 팔자는 거북선이 원하는 것일까?
거북선은 본래 전투함이다.
거센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여 적을 싸워 물리치는 것이 본래의 운명이다.
그런데 이제 구경꺼리가 되어 잔잔한 항구에서 안전하게 지낸다.
안전과 천수를 누리겠지만 항해를 떠날 수도 왜적을 만나 싸울 수도 없다.
움직이지도 싸우지도 못하는 거북선은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안전한 항구의 거북선은 그래서 그 적들에게도 안전하다.
#2
요즘 특허 결정을 받아내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특허가 잘 나오지 않는다며 고객들로부터 불만이나 항의를 적지 않게 받는다.
출원인들은 대체로 그저 특허를 쉽게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특허를 받고자 하는 목적을 생각해보자.
당연히 내가 개발한 기술을 타인이 모방하거나 도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특허의 본질, 즉 특허의 미덕은 넓고 강한 힘으로 침해를 쉽게 포착하여 배제할 수 있는 침해배제력에 있다.
강한 특허는 그 권리가 미치는 영역이 넓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심사에서 참조되어야 할 선행기술이 많아진다.
그러니 강한 권리를 추구하면 심사과정에서의 저항이 크고 심사관과의 논리적 다툼이 치열하고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특허를 받지 못할 리스크도 커지게 된다.
반면 약한 특허는 심사 과정에서 비교적 심사관의 저항이 적고 특허 결정을 받아내기가 쉽다.
그래서 거친 바다가 강한 뱃사람을 만들듯, 강한 특허가 되기 위해서는 강한 심사의 시련을 거친다고 생각해도 좋다.
강한 특허는 기술의 도용이나 회피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여 시장을 폭넓게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지만,
약한 특허는 경쟁자들에 의한 기술의 모방과 회피가 쉬워,
때론 멀쩡히 특허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시장에서 그들의 모방제품과 치열하게 경쟁하여야 하는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다.
내가 쉽게 받은 특허는 적에게도 회피가 쉬운 특허다.
#3
특허 받기가 어려워진 것은 최근의 특허청의 소위 ‘품질중심’ 심사정책에도 그 이유가 있다.
‘품질중심’ 심사는 ‘등록된 특허는 쉽게 무효가 되지 않는 안정적인 권리’라는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은 품질의 특허'는 ‘무효로부터 안전한 특허’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과연 특허가 추구하여할 최선의 가치가 '안전'이어야 할까?
특허침해의 공격을 받은 침해자의 방어는 거의 예외 없이 두 가지 주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특허의 권리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비침해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특허가 당초 잘못 등록된 것이라는 ‘무효 주장’이다.
이 두 주장 중 어느 하나만 제대로 입증하면 침해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 ‘무효주장’은 특허청 심사의 신뢰성에 불가피하게 관련된다.
그래서 ‘특허 무효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면 특허청의 입장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넓고 강한 권리는 참조될 선행기술의 폭이 넓으니 아무래도 무효의 논의나 그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반면 약한 권리는 당연하겠지만 무효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하다.
그러니 ‘안전한 특허’ 심사 정책은 불가피하게 심사를 까다로워지게 유도하게 되고, 이는 결국 좁고 약한 특허를 양산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심사과정에서 장래의 무효 논쟁을 고려해서 충분히 다양한 선행기술 자료를 제시하여 특허 등록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 출원인은 심사관에 의해 유도되는 ‘무효 안전’ 범위 내로 권리를 한정해서 특허 등록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좁혀진 권리는 때론 종이호랑이보다 못할 수 있다.
특허의 운명은 전투함과 같다.
비즈니스의 바다를 항해하며 적과 싸우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래서 전투함의 진정한 미덕은 강한 전투력에 있다.
전투함이 항해나 전투 과정에 침몰할 위험도 있지만,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항구에 숨어있을 수는 없다.
무효를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안전한 특허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전투함이 아니라 전시함을 만들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허에 있어서 ‘안전성’과 ‘공격력’(침해배제력)은 모두 추구하여야 할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함께 추구하기에는 곤란한 양립불가의 가치이다.
하지만 특허의 본질을 생각하자. 특허에서 도대체 뭣이 중한지.
복도에 걸어두는 장식적인 목적이라면 어찌 하더라도 좋다.
하지만 특허를 진정한 비즈니스의 무기로 삼고자 한다면, 상충되는 두 가치 중에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취하고 무엇을 희생시켜야 하는지.
어떠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특허라는 무기의 공격력을 거세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그런 터무니 없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우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고 무효심판만 제기되면 형편없이 나가떨어지는 그런 특허를 양산하자는 말이 아니다.
심사의 질을 높여 제대로 걸러진 특허가 나오도록 하는 노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전투력과 안전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이 중한지 그 우선순위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기억하라. 무효로부터 안전한 특허는 적에게도 안전하다는 것을.
**
이 글은 2016년 당시 최동규 특허청장의 다음 기고 글을 보고 반박하여 쓴 글이다.
**
적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자는
친구를
만들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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