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學而/토피카

영화 '콘클라베'

by 변리사 허성원 2026. 6. 22.

콘클라베

닫힌 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의례를 그린 영화 콘클라베는 확실성에 대한 거부를 핵심에 둔 종교 정치 스릴러다. 단장 로렌스가 죽은 교황의 콘클라베를 집전하며 트랑블레의 성직매매, 아데예미의 과거를 폭로하고 유력 후보들이 차례로 무너진다. 로렌스는 확실성이야말로 신앙의 적이며 의심하지 않는 자는 신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숭배한다고 강론한다. 광장 폭발 직후 적대를 선동하는 테데스코를 베니테스가 반박하며 선출되고, 그가 인터섹스라는 비밀이 마지막에 드러난다. 영화는 권력과 신성, 확실성과 신앙, 정체성과 경계를 가로질러 확실성의 패배를 그린다.

I. 죽은 교황과 여덟 명의 추기경

에드워드 베르거가 연출하고 로버트 해리스의 2016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콘클라베는 2024년에 공개되었다. 콘클라베는 추기경단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를 가리킨다. 라틴어 cum clave, 곧 열쇠로 잠근다는 말에서 나왔다. 문이 잠기는 순간부터 영화의 거의 모든 사건은 시스티나 성당과 추기경들의 숙소인 산타 마르타의 집이라는 닫힌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영화는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한다. 추기경단 단장인 토마스 로렌스가 서류 가방과 주케토를 움켜쥔 채 황급히 바티칸으로 걸어 들어오는 첫 장면은 그가 처한 긴장과 동요를 압축한다. 랄프 파인스가 연기한 로렌스는 선거를 관리하고 집전하는 행정가의 자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콘클라베가 끝나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베니테스에게 털어놓는다.

후보들의 진영은 분명하게 갈린다. 스탠리 투치가 연기한 미국 추기경 벨리니는 동성결혼과 여성 서품에까지 열려 있는 개혁파다. 로렌스의 본래 표심은 그에게 있다. 그 맞은편에는 세르조 카스텔리토가 연기한 이탈리아 추기경 테데스코가 있다. 그는 콘클라베가 봉쇄된 뒤 거리낌 없이 인종주의적이고 반동적인 견해를 쏟아낸다. 존 리스고가 연기한 캐나다 추기경 트랑블레와 루치안 음사마티가 연기한 나이지리아 추기경 아데예미가 각자의 자리를 노린다. 그리고 투표 직전, 카불에서 사목하다 온 정체불명의 멕시코 추기경 베니테스가 합류한다. 카를로스 디에스가 연기한 인물이다. 죽은 교황이 비밀리에 임명했기에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정치 스릴러의 외형을 띤다. 그러나 그 외형 안에 신앙과 의심, 권력과 진실,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닫힌 방은 그 질문들이 압축되는 실험실이다.

II. 의례의 외피와 권력의 민낯

콘클라베가 가장 먼저 드러내는 것은 신성의 언어로 수행되는 세속 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추기경들은 성령의 인도를 구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표를 계산하고 동맹을 맺고 상대의 약점을 폭로하는 일이다. 베르거 자신이 이 영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장적 사회에 관한 이야기라고 규정한 바 있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엄숙한 의례, 붉은 카속의 정연한 행렬, 손으로 쓴 투표용지를 제단에 봉헌하는 동작은 모두 신성한 권위의 외피다. 막스 베버의 용어를 빌리면 카리스마적 권위의 외피다. 교황권은 본래 베드로에게 직접 위임된 신성한 권능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카리스마적 권위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 외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의 일상화, 곧 신성한 권위가 제도와 절차로 굳어지는 과정이 콘클라베라는 의례 그 자체다. 성령의 선택이라는 수사와 다수표 확보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인간의 야망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 간극은 곧 구체적인 사건으로 드러난다. 로렌스는 죽은 교황의 숙소에서 트랑블레가 표를 사기 위해 성직매매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죽은 교황이 마지막 면담에서 트랑블레를 질책했고 그에 관한 보고서가 은폐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아데예미는 과거에 수녀 샤누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두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무너진다. 로렌스는 수녀 아그네스의 도움으로 그 일이 트랑블레의 공작이었음을 암시하는 단서까지 캐낸다. 가장 신성해야 할 선거가, 실은 폭로와 공작과 거래의 장이다.

III. 의심의 윤리: 확실성에 대한 거부

콘클라베의 사상적 핵심은 로렌스가 첫 미사에서 행하는 강론에 있다. 그는 확실성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한다. 의심이 없다면 신앙도 없으며, 의심하지 않는 자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숭배하는 것이라는 취지다. 이 강론은 영화 전체의 좌표를 설정하는 동시에, 확신에 찬 후보들에 대한 조용한 반격이기도 하다.

이 의심은 데카르트적 의심과 결이 다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곧 doute méthodique는 의심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기획이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그 종착지다. 데카르트에게 의심은 확실성에 이르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로렌스의 의심은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확실성 자체를 영구히 유보하는 태도다. 그는 의심 안에 머무는 것이 신앙의 진정한 형태라고 본다.

여기서 영화는 키르케고르에 가까워진다. 쇠렌 키르케고르에게 신앙은 객관적 확실성의 반대편에 있다. 그는 신앙을 객관적 불확실성을 무한한 열정으로 붙드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신앙은 이성으로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도약으로 건너는 일이다. 흔히 신앙의 도약이라 번역되는 이 관념의 핵심은, 신앙이 의심을 제거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끌어안은 채 성립한다는 데 있다.

영화는 이 통찰을 인물 배치로 형상화한다. 확실성을 주장하는 테데스코는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신을 숭배하는 자다. 그에게는 도약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이 확실한 자에게 믿음은 불필요한 잉여다. 반면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로렌스, 그 약함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로렌스가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로 떠오른다. 진정으로 믿는 자는 끝내 흔들리는 자다.

IV. 비밀투표와 진실의 폭로

콘클라베의 형식적 핵심은 비밀투표다. 추기경들은 손으로 쓴 투표용지를 제출하고, 그 결과는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흰 연기로만 외부에 전달된다. 누구도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볼 수 없다. 비밀이 보장될수록 외부 권력의 개입은 차단되고, 추기경 개개인의 양심은 고립된 자유 안에 놓인다.

그러나 이 비밀의 구조 안에서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권력은 금지하는 권력만이 아니라 진실을 생산하는 권력이다. 그는 근대 서구인을 고백하는 동물이라 불렀다. 진실을 말하라는 명령, 자기 내면을 언어로 드러내라는 명령이 권력의 핵심 기제라는 것이다. 콘클라베에서 모든 후보는 결국 고백의 자리로 끌려간다. 트랑블레의 성직매매가, 아데예미의 과거가 차례로 폭로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폭로를 주도하는 자가 다름 아닌 로렌스라는 점이다. 그는 죽은 교황의 숙소를 뒤지고 정보 접근 권한을 얻어 진실을 캐낸다.

권력투쟁의 무기는 폭력이 아니라 진실의 폭로다. 가장 깊은 비밀을 가진 자가 무너지고, 자기 약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로렌스가 기도의 위기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 그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신뢰의 근거로 만든 것과 같은 논리다. 비밀투표라는 침묵의 구조 안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진실의 언어로 결판난다.

V. 폭발과 연설: 적과 동지의 구별이 무너지는 순간

최종 투표를 앞두고 광장에서 폭탄이 터진다. 닫힌 방 안으로 외부의 폭력이 침투한다. 베르거는 이 테러의 정체를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가가 아니라, 그 사건이 추기경들 안에서 무엇을 끌어내는가다.

테데스코는 즉각 그것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적 적대의 근거로 삼는다. 그의 연설은 외부의 적을 명확히 지목함으로써 내부의 결속을 다지려는 시도다. 카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로 지목한 적과 동지의 구별, 곧 Freund und Feind를 절대화하는 행위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베니테스가 일어선다. 그는 그러한 증오의 언어가 극단주의자들의 수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반박한다. 폭력에 폭력으로, 적대에 적대로 응답하는 것은 교회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조용하고 단호한 호소가 콘클라베의 흐름을 결정한다. 가장 강경하게 적을 규정하던 테데스코가 무너지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물인 베니테스가 떠오른다. 슈미트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자가 패배하고, 그 논리 자체를 거부한 자가 승리한다. 영화는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절대화하는 충동 자체를 의문에 부친다.

VI. 결말의 전복: 인터섹스 교황

여러 라운드의 투표 끝에 유력 후보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두 명의 다크호스가 떠오른다. 교황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로렌스 자신과, 조용하고 원칙 있는 태도로 표를 모은 베니테스다. 광장의 폭발 이후 베니테스의 연설이 결정타가 되어, 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는 인노첸시오라는 이름을 택한다. 순수와 무구를 뜻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직전, 로렌스는 베니테스의 마지막 비밀에 닿는다. 베니테스가 스위스의 한 병원에서 받으려다 취소한 의료 시술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베니테스는 자신이 인터섹스로 태어났음을 밝힌다.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을 남성으로 알고 살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차량 폭탄에 부상당했을 때의 검진으로 비로소 자신에게 자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으려다 취소했다. 신이 만든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로렌스는 충격을 받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베니테스는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최초의 교황이 된다.

베니테스가 로렌스에게 건네는 말이 이 결말의 열쇠다. 자신은 확실성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는 말이다. 이 발언은 두 겹의 의미를 갖는다. 신앙의 차원에서 그는 의심을 끌어안은 자이고, 존재의 차원에서 그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확실성 사이에 사는 자다. III장에서 로렌스가 설파한 의심의 윤리가, 베니테스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로 육화된다.

가장 신성한 권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장적 제도의 정점이, 실은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본질에 묶이지 않는다. 베니테스는 평생 남성으로서 신부와 추기경의 역할을 수행해 왔고, 그 권위는 신체의 어떤 본질에서가 아니라 그 수행 자체에서 나왔다. 비밀이 밝혀진 뒤에도 그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이 만든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그의 말은, 인간이 만든 범주를 신의 무한한 창조 앞에서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VII. 닫힌 방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콘클라베의 닫힌 방은 결국 우리 시대의 우화다. 영화가 던지는 함의는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권력과 신성의 관계다. 가장 신성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인간은 권력을 욕망한다. 성령의 선택이라는 수사 아래에서 표를 사고 비밀을 폭로하고 동맹을 거래한다. 영화는 그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욕망을 정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역설적이게도 의심이라고 답한다.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는 의심,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는 의심만이 권력을 신성에 가까이 데려간다. 테데스코의 확신이 패배하고 로렌스와 베니테스의 의심이 승리한 것은 그 대답의 영화적 형상화다.

둘째, 확실성과 신앙의 관계다. 확실성을 향한 욕망이 어느 때보다 강한 시대에, 영화는 의심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확신에 찬 자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숭배한다. 진정으로 믿는 자는 끝내 흔들리는 자다. 이는 신앙의 영역을 넘어, 모든 종류의 독단에 대한 경계로 확장된다.

셋째, 정체성과 경계의 관계다. 베르거가 폭탄 테러를 배경에 흐릿하게 배치하고 그 정체를 끝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24년이라는 시점, 고조된 정치적 양극화의 한복판에서, 영화는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절대화하는 충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묻는다. 그리고 인터섹스 교황이라는 결말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 범주, 곧 한 사람이 남성인가 여성인가라는 물음마저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신성한 자리조차 생물학적 본질에 묶이지 않는다.

확실성은 권력의 언어이고, 의심은 신앙의 언어다. 닫힌 방은 그 둘이 충돌하는 자리였다. 문이 다시 열리고 흰 연기가 피어오를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새 교황의 탄생이 아니라 확실성의 패배다.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교황, 의심을 끌어안은 교황, 확실성들 사이에서 사는 법을 아는 교황. 그것이 콘클라베가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