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장례식에서 진보한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은 장례식마다 발전한다"고 했다. 세 경제학자는 이 경구를 실증했다(American Economic Review, 2019). 생명과학계에서 예기치 않게 사망한 거장 452명의 분야를 추적하니, 그들의 협력자에게서는 논문이 20.7퍼센트 줄었지만, 외부인에게서는 논문이 8.6퍼센트 늘었으며 피인용도 높았다. 거장과 그 패거리가 연구비와 학술지를 장악해 진입을 막다가, 그의 죽음이 비로소 문을 연 것이다. 다만 이 게이트키핑은 분야 태동기에는 순기능을 한다. 같은 구조가 특허제도(봉쇄특허와 만료), 기업 승계, 학계 전반에서도 작동한다. 비워야 채워진다.
I. 출발점: 플랑크의 경구와 두 경제학자의 내기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설득하여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그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한다." 이 말은 흔히 "과학은 한 번에 하나의 장례식씩 발전한다(Science advances one funeral at a time)"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전해진다. 거장이 죽어야 비로소 그의 분야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다소 냉소적인 통찰이다.
이 경구를 실증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논문이 Pierre Azoulay(MIT), Christian Fons-Rosen(UC Merced), Joshua S. Graff Zivin(UCSD) 세 경제학자의 공동 연구다. 2015년 NBER Working Paper No. 21788로 발표되었고, 2019년 미국경제학회의 American Economic Review 109권 8호(2889면에서 2920면)에 정식 게재되었다. 경제학 최상위 학술지에 실린 권위 있는 연구다.
연구의 발단은 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2003년, 저자 가운데 두 사람이 어느 저명한 과학자의 강연을 막 듣고 나오던 길이었다. 한 사람은 "저런 천재의 궤도 안에서 일하면 주변 모두의 학문 수준이 올라가니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더 냉소적으로 받았다. "글쎄, 그가 희소한 연구 자원을 잔뜩 빨아들이고 과도한 관심을 독차지하면서, 방 안의 산소를 다 빨아먹을지도 모르지." 거장은 주변을 살리는 산소인가, 아니면 산소를 독점하는 도둑인가. 그 자리에서 "그것은 실증의 문제"라는 응수가 나왔고, 약 15년에 걸친 추적 끝에 답이 나왔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두 사람 모두 옳았다.
II. 설계: 예기치 않은 죽음을 자연 실험으로 삼다
이 연구의 방법론적 핵심은 '예기치 않은 조기 사망'을 분석 대상으로 골랐다는 데 있다. 노환에 따른 자연사는 그 학자의 영향력 쇠퇴 과정과 뒤엉켜 있어, 분야의 변화가 거장의 부재 때문인지 그 이전부터 진행된 쇠락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반면 활동의 정점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은 "거장의 부재"라는 단일 변수만을 깨끗하게 분리해 주는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이 된다.
저자들은 생명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다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난 저명 학자들을 추렸다. 최종 표본은 452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85퍼센트가 70세 이전에 사망했고, 모두 1975년부터 2003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표본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수치가 있다. 이들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으로부터 평균 1,660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은 거물들이었다.
분석의 틀은 비교에 있다. 거장이 사망한 세부 분야(처리군)와, 성격이 유사하되 거장이 죽지 않은 세부 분야(대조군)를 짝지었다. 그리고 거장의 사망 전후로 각 분야에 새로 유입되는 논문의 흐름을 추적했다. 누가 그 분야에 들어오는가, 그리고 누가 떠나는가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보았다. 한쪽은 생전의 거장과 함께 논문을 쓴 적이 있는 협력자(collaborators)이고, 다른 한쪽은 거장과 직접적 인연이 없는 비협력자, 곧 외부인(non-collaborators)이다.
III. 발견: 협력자는 위축되고 외부인은 약진한다
결과는 두 집단에서 정반대로 나타났다.
협력자의 위축
거장과 함께 논문을 썼던 협력자들이 해당 분야에 내놓는 논문 수는 거장의 사망 이후 20.7퍼센트 감소했다. 구심점을 잃은 학파의 위축이다. 더 주목할 점은 양이 아니라 질에 있다.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별과 함께 글을 썼던 모든 이들이, 별이 진 뒤로는 점점 더 적게, 그리고 점점 덜 중요한 연구를 내놓았다." 거장이 그 집단의 창의적 원천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외부인의 약진
반면 그 세부 분야에 새로 진입한 외부인들의 논문은 평균 8.6퍼센트 증가했다. 단순히 빈자리를 메우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새로 유입된 기여들은 피인용 빈도가 유독 높았다. 학계의 동료들이 이 연구들을 유용하다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논문들은 그 분야에서 이전에 활동한 적이 없던 학자들에 의해 쓰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존 경쟁자가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온 것이다.
이단의 주입
새 진입자들이 가져온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아이디어였다. 이들은 그 세부 분야 바깥의 연구를 평소보다 더 많이 인용했고, 오히려 죽은 별의 연구는 덜 인용했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같은 분야이지만, 거기에 다른 아이디어를 주입하고 있는" 양상이다. 분야의 지적 무게중심이 거장의 사망 이전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 효과는 특히 과학적 동력을 잃어가던 세부 분야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한 가지 단서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새 논문들이 더 많이 인용되긴 했으나, 저자들은 이 논문들이 특별히 파괴적(disruptive)이라는 징후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즉 토머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극적인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분야가 무너지거나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진화한다는, 견고하고 점진적인 갱신에 가깝다.
IV. 메커니즘: 거장은 어떻게 분야의 문을 잠그는가
그렇다면 거장이 살아 있는 동안 외부인은 왜 들어오지 않았는가. 저자들의 설명은 진입장벽에 있다.
스타 과학자와 그의 협력자들은 하나의 긴밀한 패거리(clique)를 이룬다. 이 집단은 해당 분야로 들어오는 진입 비용을 높게 설정한다. 그 비용은 여러 통로로 나타난다. 거장의 협력자들이 장악한 심사위원회를 통한 연구비 배분, 곧 재정적 문지기 노릇이 하나다. 패거리 구성원에게 더 쉽게 열리는 학술지 게재 기회가 둘이다. 학회 발표 초청이 셋이다. 외부인은 이 비용이 너무 높다고 판단해 그 분야를 닫힌 곳으로 여기고 물러나 있는다. 그러다 거장의 죽음이 비로소 틈을 열어 준다.
여기서 저자들이 신중하게 짚는 지점이 있다. 이 봉쇄가 반드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잘 자리 잡은 과학자들이 다른 생각을 의도적으로 막으려 하지 않더라도, 긴밀히 연결된 동료 집단은 학술지와 연구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그 결과 외부인이 그 영역에 흔적을 남기기는 구조적으로 더 어려워진다. 악의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저자의 표현이 이 미묘함을 잘 담는다. "그저, 일단 자기 분야의 정상에 안전하게 자리 잡고 나면, 아마 그들은 머물러야 할 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일 뿐이다."
지적 장벽, 사회적 장벽, 자원의 장벽이 모두 진입을 가로막는다. 외부인은 자신의 '이질적인' 아이디어가 지지받고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는, 덜 적대적인 분야에만 들어선다. 논문의 종합적 결론은 이렇게 정리된다. 일단 자기 분야의 정상을 장악한 스타 과학자는 그 지위를 조금 지나치게 오래 붙들고 있는 경향이 있다.
V. 균형: 문지기의 두 얼굴과 생명의 순환
논문은 거장을 일방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 바로 이 균형 감각에 연구의 깊이가 있다.
저명 과학자의 문지기 노릇은 분야의 태동기에는 이로운 속성을 가질 수 있다. 공유된 가정과 방법론 위에서 축적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과학 영역의 지적 진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상(賞)으로 작동하여, 젊은 학자들이 사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적 연구에 뛰어들도록 자극하는 유인이 되기도 한다. 정상에 오르면 그 분야의 지적 의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는 전망, 그것이 과학이라는 제도가 작동시키는 보상 체계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반전이 있다. 죽은 별의 자리로 들어와 분야에 활기를 불어넣은 진입자들은, 그 자신이 미래의 별이 될 가능성이 유독 높았다. 오늘의 외부인이 내일의 별로 자라난다. 저자들은 이를 "과학적 생명의 순환"이라 불렀다. 거장의 퇴장이 다음 거장의 등장을 위한 자리를 비우는 셈이다.
연구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함께 새겨 둘 만하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한 메타과학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과학자는 폭군이 아니라 선의를 지녔으리라 믿고 싶다. 폭군이 더 시끄럽고 기억에 남는 일화를 만들 뿐이다." 거장의 봉쇄 효과가 통계적으로 확인된다고 해서, 모든 거장이 의도적 폭군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경계다.
VI. 확장: 과학 너머에서도 작동하는가
이 논문이 포착한 동학의 본질은 생명과학에 있지 않다. 정상을 장악한 권위자가 자원과 게이트키핑을 통해 새 진입을 막다가, 그가 물러난 뒤에야 외부의 이질적 아이디어가 분야를 갱신한다는 구조 자체에 있다. 인간이 위계와 자원 배분을 갖춘 곳이라면 어디든 같은 드라마가 반복될 여지가 있다.
특허제도와의 동형성
가장 직접적으로 포개지는 곳은 특허제도다. 강력한 원천특허를 쥔 선발 주자가 봉쇄특허(blocking patent)로 후속 혁신을 가로막다가, 그 특허가 만료된 뒤에 비로소 개량발명이 폭발하는 양상은 이 논문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거장의 죽음이 특허의 만료에 대응한다. 둘 다 정상의 비움이 혁신을 푸는 열쇠다.
더 깊은 함의는 제도 설계에 있다. 특허존속기간 20년이라는 장치는, 머물러야 할 때보다 오래 머무는 권리자를 강제로 퇴장시키는 제도화된 장례식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특허가 영구권이었다면 이 논문이 묘사한 봉쇄는 영원히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권리의 유한성이야말로 후속 진입을 보장하는 제도적 안전장치인 셈이다.
기업 조직과 승계
기업에서도 같은 구조가 작동한다. 창업자나 카리스마적 경영자가 오래 군림하면 그의 비전이 곧 조직의 정설이 되고, 이견은 자기검열로 억눌린다. 그가 떠난 뒤에야 묻혀 있던 내부 인재나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가 새 방향을 여는 일이 흔하다. 스타 한 사람에게 권한과 보상이 집중되는 구조, 후계 구도가 봉쇄되는 구조 역시 이 패거리 동학으로 읽을 수 있다. 가족 기업의 승계는 작은 규모로 펼쳐지는 같은 드라마다.
학문 전체로의 확장
학계는 이 논문의 직접 무대였지만, 발견은 생명과학을 넘어 모든 분과에 적용된다. 거장이 장악한 학술지 편집권, 연구비 심사위원회, 박사 배출의 계보가 하나의 당여를 이루어 이질적 방법론의 진입을 막는 구조는 인문학에서 경제학까지 보편적이다.
더 넓은 영역들
조금 더 멀리 가면 적용의 폭이 넓어진다. 예술 사조에서 거장이 지배하는 화풍이나 악파가 그의 생전에는 정설이었다가 사후에 해체되며 새 양식이 열린다. 정치권력에서 장기집권한 지도자가 후계 구도를 봉쇄하다가 퇴장한 뒤 정파가 재편된다. 종교와 사상에서 교조적 권위자가 해석을 독점하다가 그 부재가 새로운 학파를 낳는다. 권위와 자원과 진입장벽이 함께 있는 곳이라면, 플랑크의 경구는 늘 절반쯤 진실이다.
적용할 때의 두 가지 단서
다만 이 동학을 다른 영역에 옮길 때 함께 새겨야 할 경계가 있다. 첫째, 논문 자체가 강조했듯 권위자의 게이트키핑은 분야의 태동기에는 순기능을 한다. 거장은 적폐가 아니라, 태동기의 산소가 성숙기에는 도둑이 되는 시기의 문제로 다뤄야 통찰이 깊어진다. 둘째, 이 발견은 통계적 평균이지 모든 개별 권위자가 폭군이라는 뜻은 아니다. 폭군이 더 시끄러운 일화를 남길 뿐, 대다수는 선의를 지녔으리라는 경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VII. 정리: 플랑크의 경구는 절반쯤 옳았다
이 연구가 플랑크의 경구에 내린 판정은 미묘하다. 거장의 죽음이 분야에 새로운 피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러들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점에서 "과학은 장례식마다 발전한다"는 말은 실증적 근거를 얻는다. 거장이 살아 있는 동안 외부인은 진입을 주저하고, 그 죽음이 닫힌 문을 연다는 동학이 데이터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 발전은 기존 질서를 뒤엎는 혁명의 형태가 아니라, 무게중심을 옮기며 분야를 갱신하는 점진적 진화의 형태였다. 거장은 산소이기도 했고 산소 도둑이기도 했다. 태동기에는 분야를 키우는 산소였고, 정점을 지난 뒤에는 새 진입을 막는 도둑이었다. 두 경제학자의 오래된 내기에서 어느 한쪽만 옳았던 것이 아니라, 같은 인물이 시기에 따라 두 얼굴을 모두 가졌던 것이다.
플랑크의 문장은 이렇게 다시 읽을 수 있다. 과학의 진보가 거장의 장례식을 기다려야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논증으로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가 들어설 자리를 누군가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오래된 이치가,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과학의 한복판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學而 > 토피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화 '콘클라베' (0) | 2026.06.22 |
|---|---|
| 확신은 통합과 관용의 적이다 (0) | 2026.06.22 |
| 노예가 꿈꾸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다. (0) | 2026.06.21 |
| 판도라 상자 신화의 재해석 (0) | 2026.06.20 |
| AI를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 (1) | 2026.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