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學而/토피카

확신은 통합과 관용의 적이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6. 6. 22.

확신은 통합과 관용의 적이다 _ 영화 콘클라베가 회의(懷疑)에 부치는 변호

영화 콘클라베(2024)에서 선거를 주재하는 추기경 로런스는 개막 강론에서 '확신'을 가장 두려운 죄로 지목한다. 확신은 통합의 적이고 관용의 적이라는 것. 내가 절대 옳다고 믿는 순간 타협의 공간은 사라지고, 다른 의견은 견딜 다양성이 아니라 제거할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의 정의마저 뒤집는다. 살아 있는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의심과 손잡고 걷는 데서 나온다. 회의주의는 냉소가 아니라 알고 싶기에 의심하는 정직함이다. 소크라테스와 데카르트, 공자와 장자가 모두 그 자리를 짚었다. 가장 위험한 자는 틀린 자가 아니라 결코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 자다. 다만 의심은 결단의 핑계가 아니다. 흔들리면서도 끝내 결단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회의주의다. 

I. 장면: 선거를 주재하는 자가 확신을 두려워하다

교황이 선종한 뒤,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시스티나 성당에 갇혀 새 교황을 뽑는다. 콘클라베다. 문은 안에서 봉인되고, 흰 연기가 굴뚝에 오르기 전까지 누구도 나갈 수 없다. 영화 콘클라베(2024)는 이 닫힌 방 안의 며칠을 따라간다.

진행을 맡은 사람은 추기경단 단장 로런스(랠프 파인스 분)다. 그는 선거를 공정하게 이끌어야 하는 중립적 사회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신앙 자체가 흔들리는 회의의 인물이다. 방 안의 공기는 이미 갈라져 있다. 한쪽에는 교회를 과거의 절대적 질서로 되돌리려는 강경 보수파가 있고, 다른 쪽에는 개혁파가 있다. 저마다 내가 옳고 내 노선만이 교회를 구한다는 확신으로 무장한 채 표를 센다. 야심과 음모가 신앙의 언어로 포장되는 자리다.

바로 그 한복판, 콘클라베 개막 미사의 강론에서 로런스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낸다. 확신을 가지라가 아니라, 확신을 두려워하라고.

오랜 세월 교회를 섬기며 그가 무엇보다 두려워하게 된 죄는 하나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확신이다.

"Certainty is the great enemy of unity. Certainty is the deadly enemy of tolerance." 확신은 통합의 가장 큰 적이다.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이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정의 자체를 뒤집는다.

"Our faith is a living thing precisely because it walks hand-in-hand with doubt. If there was only certainty and no doubt, there would be no mystery, and therefore no need for faith."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의심과 손을 맞잡고 함께 걷기 때문이다.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믿음도 필요 없을 것이다.

강론의 끝에서 그는 기도한다. 의심하는 교황을 우리에게 주시기를(Let us pray that God will grant us a Pope who doubts).

II. 해부: 확신은 왜 통합과 관용의 적인가

확신은 통합의 적이다.

각자가 자기 확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타협의 공간이 사라진다. 내가 백 퍼센트 옳다고 믿으면 상대는 백 퍼센트 틀린 자가 되고, 남는 것은 설득이나 화해가 아니라 정복뿐이다. 그래서 확신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공동체 차원에서는 분열의 엔진이 된다. 강론이 울려 퍼지는 그 성당 자체가 이 명제의 살아 있는 증거다. 확신에 찬 진영들이 한 방에 모여 있을 때, 그 방은 통합이 아니라 전선(戰線)이 된다. 영화 속 한 인물의 말처럼, 콘클라베는 어느새 전쟁이 되어 있다.

확신은 관용의 적이다.

관용은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여지에서 자란다. 상대가 다른 길을 가도록 허용하는 것은, 나의 진리가 유일한 진리가 아닐 가능성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확신이 그 여지를 닫아버리면 관용은 설 자리를 잃는다. 확신에 찬 자에게 다른 의견은 견뎌야 할 다양성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오류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절정에서 한 추기경이 이교도를 향한 성전(聖戰)을 외칠 때, 그 외침을 떠받치는 것이 바로 의심 한 점 없는 확신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확신이 신앙의 적이다.

이것이 강론의 심장이다. 흔히 신앙을 흔들림 없는 확신과 동일시하지만, 로런스는 정반대로 말한다. 모든 답을 다 안다고 믿는 신앙은 사실 죽은 신앙이다. 더 물을 것이 없고 더 찾을 것이 없으니 멈춰 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의심을 적으로 내쫓지 않고 동반자로 데리고 함께 걷는다. 의심이 있기에 계속 묻고, 계속 찾고, 계속 나아간다. 로런스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절규를 끌어오는 대목은 그래서 대담하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의 그 흔들림조차, 그는 신앙의 결함이 아니라 신앙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읽는다.

III. 변호: 회의주의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걷어내야 한다. 회의(懷疑)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냉소가 아니다.

냉소는 사유의 포기다. 어차피 다 거짓이니 알 필요도 없다는 태도, 그것은 회의의 모습을 빌린 또 하나의 확신일 뿐이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 역시 의심 없는 단정이기 때문이다. 진짜 회의주의는 정반대다. 그것은 알고 싶기 때문에 의심한다. 성급한 결론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신념마저 검증의 대상으로 올려놓는 정직함이다.

서양 철학에서 회의주의는 사유의 출발점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데서 시작했고,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작업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한 점에 도달했다. 의심은 그에게 파괴가 아니라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근대 과학의 정신도 다르지 않다. 과학은 진리를 소유했다고 선언하는 체계가 아니라, 언제든 반증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정적 가설들의 집합이다. 칼 포퍼가 말했듯 반증 가능성이야말로 과학을 미신과 갈라놓는 기준이다. 의심에 열려 있지 않은 명제는 과학이 아니다.

동양의 고전도 같은 자리를 짚는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라 했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모름을 모름으로 끌어안는 정직함이 참된 앎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더 멀리 간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시비(是非)의 칸막이를 세우는 순간 도(道)는 이미 가려진다고 보았다. 분별의 확신이야말로 미혹의 시작이라는 통찰이다.

회의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틀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결코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틀린 사람은 고칠 수 있지만,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 역사의 가장 큰 비극들은 무지에서가 아니라 확신에서 나왔다. 마녀를 불태운 자들도, 이단을 처형한 자들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만큼은 추호도 없었던 적이 없다. 의심할 줄 모르는 선의는 의심할 줄 아는 회의보다 자주 더 잔인하다.

IV. 균형: 의심과 함께 걷되 멈추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회의를 무조건의 미덕으로 그리지 않는다. 로런스의 회의는 우유부단함이나 책임 회피와 종이 한 장 차이이기도 하다. 끝없이 의심만 하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콘클라베는 끝내 한 사람을 교황으로 뽑아야 하는 자리이고, 의심은 그 결단을 영원히 미루는 핑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강론이 가리키는 길은 의심 자체가 아니라 의심과 결단의 공존이다. 의심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결정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끊임없이 검증하면서도 끝내 결단하는 더 어려운 길이다. 확신 없이도 행동하고,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품은 채로도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성숙한 회의주의다. 흔들리지 않아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결단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도 그 균형이다. 닫힌 방은 끝내 흰 연기를 피워 올린다. 확신에 찬 자들이 아니라, 의심을 견디며 제도를 신뢰한 자들이 결국 한 사람을 세운다.

확신은 사유의 종착역이고, 의심은 사유의 출발점이다. 종착역에 너무 일찍 도착한 정신은 더 갈 곳이 없다. 노자는 말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가장 큰 확신으로 떠드는 목소리가 흔히 가장 적게 아는 목소리라는 것을, 닫힌 성당의 그 며칠은 조용히 일러준다.

확신 없이 흔들리며 걷는 길과, 확신에 차서 멈춰 선 자리.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더 믿음이라 불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