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야망
셰익스피어는 야망을 그림자의 그림자(『햄릿』), 도약(『맥베스』), 사다리(『줄리어스 시저』), 단단한 재료(『줄리어스 시저』), 낭비적 식욕(『맥베스』), 군인의 미덕(『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으로 정의했다. 이 여섯 정의는 모두 한 가지 비대칭을 그리며, 그 비대칭이 그대로 다섯 사악함—공허·도약 실패·배신·질식·자기소진—으로 굴절된다. 의미가 곧 운명이다. 출구는 야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 절제와 측은지심을 함께 두는 데 있다. 마키아벨리는 능력의 비례를, 홉스는 권력의 무한 운동을, 한비자는 정치적 약점을, 노자는 욕망 발생 조건의 제거를, 토크빌은 작은 야망의 황량함을, 니체는 자기 극복을, 아렌트는 공적 무대를, 라 로슈푸코는 미덕으로의 위장을 짚었다. 야망은 단죄할 것이 아니라 무엇과 함께 가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I. 셰익스피어 인용 원문 정리
야망에 관해 셰익스피어가 남긴 핵심 구절들을 작품·장면별로 영문 원문과 한국어 번역을 짝지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맥베스』 1막 7장. 도약하는 야망
I have no spur to prick the sides of my intent, but only vaulting ambition, which o'erleaps itself, and falls on the other.
내가 의도의 옆구리를 찌를 박차는 없고, 다만 도약하는 야망뿐, 그것은 제 자신을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떨어진다.
이 구절은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하기 직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내뱉는 독백입니다. spur는 말의 옆구리를 차는 박차이고, vaulting은 말이 장애물을 뛰어넘는 동작에서 온 말입니다. 맥베스는 자기 안에서 박차가 될 만한 정당한 명분은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 능력을 추월하는 도약 욕망만 발견합니다. 그리고 도약하는 말이 안장 반대편으로 떨어지듯, 자기 야망이 결국 자기를 떨어뜨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가는 것이 비극의 형식입니다.
2. 『맥베스』 2막 4장. 자기 양식을 먹는 야망
Thriftless ambition, that wilt ravin up thine own life's means!
낭비적 야망이여, 너 자신의 생명의 양식을 게걸스레 삼키는구나.
던컨 시해 직후 노인과 로스가 자연 질서의 교란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등장합니다. thriftless는 절약할 줄 모르는·낭비하는의 뜻이고, ravin up은 짐승이 먹이를 게걸스레 삼키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life's means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입니다. 야망이 자기를 지탱해주던 양분(신뢰·의리·인격·동맹)까지 먹어치우는 자기파괴적 식욕임을 한 줄로 압축했습니다.
3. 『헨리 6세』 제2부 3막 1장. 미덕을 질식시키는 야망
Virtue is chok'd with foul ambition, and charity chas'd hence by rancour's hand; foul subornation is predominant, and equity exil'd your highness' land.
미덕은 사악한 야망에 질식하고, 자선은 원한의 손에 내쫓기며, 사악한 매수가 만연하고, 형평은 폐하의 땅에서 추방되었다.
글로스터 공작이 부패한 궁정의 실상을 왕에게 고하는 장면입니다. chok'd는 choked의 단축형으로 질식시키다, subornation은 위증 매수, equity는 형평·공정입니다. 야망이 사악해지는 자리가 다른 미덕의 공간을 빼앗는 순간임을 사회 질서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한 사회 안에 자선과 형평이 들어찰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야망이 밀어내고 들어앉으면 미덕은 숨 막혀 죽습니다.
4. 『줄리어스 시저』 2막 1장. 사다리의 비유
But 'tis a common proof, that lowliness is young ambition's ladder, whereto the climber-upward turns his face; but when he once attains the upmost round, he then unto the ladder turns his back, looks in the clouds, scorning the base degrees by which he did ascend.
흔히 입증되는 일이거니와, 낮은 자리는 젊은 야망의 사다리이니, 오르려는 자는 사다리를 향해 얼굴을 든다. 그러나 마침내 꼭대기 단에 닿으면, 그는 사다리에 등을 돌리고 구름 속을 바라보며, 자신이 디뎌 올라온 천한 단들을 경멸한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살해할 명분을 찾는 독백입니다. lowliness는 낮은 신분·겸손, upmost round는 사다리의 가장 윗단, base degrees는 낮은 계급·천한 단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야망의 본질을 시선의 방향 전환으로 압축했습니다. 오를 때의 얼굴과 정점에 도달한 뒤의 얼굴이 같지 않다는 것. 브루투스는 이 분석으로 카이사르를 죽일 명분을 만들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명분 안에 이미 또 다른 야망이 숨어 있음을 독자가 보게 합니다.
5.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단단한 재료
When that the poor have cried, Caesar hath wept: Ambition should be made of sterner stuff: Yet Brutus says he was ambitious; And Brutus is an honourable man.
가난한 자들이 울 때 카이사르도 함께 울었다. 야망은 더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브루투스는 그가 야심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브루투스는 명예로운 사람이다.
안토니우스의 추도 연설 중 가장 유명한 대목입니다. sterner stuff는 더 엄격한·더 단단한 재료입니다. 안토니우스는 반어법을 씁니다. 카이사르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울었다, 그러므로 그는 야망가가 아니다라는 추론을 군중에게 슬그머니 심어놓는 방식입니다. 셰익스피어가 그 반어 뒤에 숨겨둔 진짜 정의는 이것입니다. 진짜 야망가는 울지 않는다. 측은지심과 양립할 수 없는 단단함이 야망의 질료적 본질이라는 것.
6. 『햄릿』 2막 2장. 그림자의 그림자
Guildenstern: Which dreams indeed are ambition, for the very substance of the ambitious is merely the shadow of a dream. Hamlet: A dream itself is but a shadow. Rosencrantz: Truly, and I hold ambition of so airy and light a quality that it is but a shadow's shadow.
길든스턴: 그 꿈이야말로 야망입니다. 야심가의 본질은 한낱 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햄릿: 꿈 자체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 로젠크란츠: 사실입니다. 저는 야망을 너무나 가볍고 허망한 것으로 여기기에,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햄릿이 덴마크는 감옥이라 말하자 두 신하가 받아치는 대화입니다. substance는 본질·실체, airy and light는 공기처럼 가볍고 허망한입니다. 이 짧은 삼중주에서 야망은 실체→꿈→그림자→그림자의 그림자로 두 단계 떨어집니다. 야망가가 좇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반영의 반영이라는 것. 셰익스피어가 야망에 부여한 가장 형이상학적인 정의입니다.
7.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3막 1장. 군인의 미덕
I have done enough; a lower place, note well, may make too great an act: for learn this, Silius, better to leave undone, than by our deed acquire too high a fame when him we serve's away. Caesar and Antony have ever won more in their officer than person. … Ambition, the soldier's virtue, rather makes choice of loss, than gain which darkens him.
나는 충분히 했네. 낮은 자리에서, 명심하게, 너무 큰 공을 세울 수도 있다네. 실리우스, 이것을 배우게. 우리가 섬기는 분이 자리에 없을 때, 우리 행동으로 너무 높은 명성을 얻느니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자기 자신보다 부하를 통해 더 많이 이겼지. … 야망, 곧 군인의 미덕은 자기를 그늘지게 만드는 이익보다 차라리 손실을 택한다네.
파르티아를 정복한 벤티디우스가 부하 실리우스에게 더 큰 공을 추격하지 말라며 건네는 말입니다. the soldier's virtue가 야망과 동격으로 놓이는 점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야망을 조건부로 인정합니다. 위치를 알고 절제할 줄 아는 야망은 미덕이라는 것. 그 조건이 깨지면, 미덕은 즉시 폭군의 자질로 굴절됩니다.
II. 종합 정리. 좀 더 친절한 설명
이 일곱 구절을 한 흐름으로 묶어보면, 셰익스피어가 야망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비로소 또렷이 보입니다. 먼저 야망의 의미를 묻고, 그 다음 야망의 사악함을 묻고, 마지막으로 그 둘이 결국 같은 이야기였음을 깨닫는 순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야망이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에게 야망은 한 가지 얼굴이 아닙니다. 그는 작품마다 다른 비유로 야망을 정의했는데, 이 비유들을 모아보면 신기하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모두 어떤 종류의 비대칭을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그림자의 그림자라는 비유. 야망가가 잡으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반영의 반영입니다.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있는 것. 야망의 본질에 영원한 미달이 새겨져 있다는 진단입니다. 맥베스가 왕좌에 앉고서야 내가 얻은 것이 정말 이것이었나라고 묻는 그 공허는, 야망이 본래 그런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사다리의 비유. 야망가는 위를 봅니다. 그의 시선은 늘 지금 여기가 아니라 아직 아닌 저기를 향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자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오로지 오르기 위한 도구로 환원됩니다. 야망가에게 지금은 언제나 아직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의 박탈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야망 있는 사람이 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 정점에 도달한 야망가가 정작 그 정점에서 또 다른 위를 바라보며 다시 불행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 번째로 도약의 비유. 야망은 걷지 않습니다. 야망은 뛰어넘습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것은 야망의 운동 양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망에는 수단의 부재가 본질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정상적 절차를 거치지 않으려는 욕망. 맥베스는 던컨이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망의 운동 양식이 아닙니다. 야망은 단검을 들게 합니다.
네 번째로 단단한 재료. 야망은 측은지심과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울 때 함께 우는 카이사르의 모습은 야망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안토니우스의 반어가 가리키는 바입니다. 야망은 부드러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부드러움을 그대로 두면 결단의 순간에 손이 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망은 자기 안에서 측은지심을 단단함으로 단련하든가, 아예 추방해버립니다.
다섯 번째로 낭비적 식욕. 야망은 자기를 살려준 양식까지 먹어치웁니다. 맥베스가 왕좌를 얻기 위해 자기를 왕좌 가까이로 끌어올려준 신뢰·의리·인격·동맹을 모두 소진해버린 것처럼. 야망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면모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를 향해 굶주린 것. 끝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는 데까지 가는 식욕.
마지막으로 군인의 미덕.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야망을 단죄만 하지 않습니다. 위치를 알고 절제할 줄 아는 야망은 미덕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다만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이익이 자기를 그늘지게 한다면 차라리 손실을 택할 줄 아는 능력. 이 조건을 충족하는 야망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극히 드뭅니다. 벤티디우스가 거의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2. 야망은 어떻게 사악해지는가
위의 여섯 정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정의 안에 이미 사악함의 씨앗이 심겨 있음이 보입니다.
그림자의 그림자를 좇는 자는 빈손으로 끝납니다. 야망의 존재론적 정의가 그대로 공허라는 사악함으로 변환됩니다. 모든 대가를 치르고 정점에 도달한 자가 마지막에 발견하는 것은 자기가 좇았던 것의 비실재성입니다.
사다리에 시선이 묶인 자는 정점에서 사다리에 등을 돌립니다. 야망의 시간적 정의가 그대로 배신이라는 사악함으로 변환됩니다. 디뎌 올라온 자리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의리도 가질 수 없습니다.
도약하는 자는 자기를 뛰어넘어 떨어집니다. 야망의 운동학적 정의가 그대로 자기파괴라는 사악함으로 변환됩니다. 단계를 건너뛰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가늠을 잃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재료로만 만들어진 자는 다른 미덕을 질식시킵니다. 야망의 질료적 정의가 그대로 질식이라는 사악함으로 변환됩니다. 측은지심·자선·형평이 들어찰 자리를 야망의 단단함이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낭비적 식욕은 결국 자기를 먹어치웁니다. 야망의 자기관계적 정의가 그대로 자기소진이라는 사악함으로 변환됩니다.
군인의 미덕은 조건이 깨지는 순간 폭군의 자질로 변형됩니다. 야망의 직업윤리적 정의가 그대로 변형이라는 사악함으로 변환됩니다.
이 대응이 우연이 아닌 까닭은, 셰익스피어가 야망을 정의할 때 이미 그 정의 안에 사악함의 씨앗을 심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곧 운명입니다. 같은 한 가지가 어떻게 정의되느냐가, 그것이 어떻게 굴절될지를 이미 결정합니다.
3. 출구는 있는가
셰익스피어는 야망의 출구를 완전히 닫아두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하나는 절제로서의 출구. 벤티디우스의 길입니다. 야망 안에 손실을 감수하는 능력이 함께 들어 있을 때, 야망은 미덕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는 파르티아를 정복하고도 더 큰 공을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위계를 그늘지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야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멈출 줄 아는 것이 출구의 열쇠라는 셰익스피어의 통찰입니다.
다른 하나는 측은지심과 함께 가는 단단함. 안토니우스의 반어가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우는 능력과 함께 가는 야망, 가난한 자들과 함께 울 줄 아는 단단함. 단단함이 측은지심을 짓밟는 단단함이 아니라 측은지심을 견디는 단단함일 때, 야망은 사악함으로 굴절되지 않습니다.
두 출구의 공통점은 야망과 함께 무엇이 가는가입니다. 야망 혼자 가면 야망은 반드시 사악해집니다. 야망 곁에 절제가 같이 가거나, 측은지심이 같이 가거나, 디딘 자리에 대한 기억이 같이 갈 때, 야망은 비로소 미덕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4. 정리
야망의 의미와 사악함은 분리되지 않는 한 짝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야망을 어떻게 사악하지 않게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야망의 어떤 면이 사악함으로 굴절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굴절을 막는 길은 야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야망 곁에 무엇을 함께 두는가에 있습니다.
이 통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이렇습니다. 야망을 외부의 악마 탓으로 돌리지 말 것. 야망의 크기가 아니라 야망의 동행을 살필 것. 도약만 있는지 박차도 있는지, 단단함만 있는지 눈물도 있는지, 미래를 향한 시선만 있는지 디딘 자리에 대한 감사도 있는지, 그림자의 그림자를 좇고 있는지 실체에 닿아 있는지, 자기 양식을 먹어치우고 있는지 자기를 기르며 가고 있는지. 사악함과 미덕을 가르는 자리는 야망의 크기가 아니라 야망의 동행에 있다는 것. 그것이 셰익스피어가 다섯 비극과 여러 사극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겁고도 가장 인간적인 통찰입니다.
III. 다른 사상가들의 야망론
야망에 관한 통찰력 있는 다른 관점들도 함께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동서양을 가로질러 야망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람들의 어법을 추려보았습니다.
1. 마키아벨리. 야망은 인간의 자연이다
Lo desiderio dell'acquistare è cosa veramente molto naturale e ordinaria; e sempre, quando gli uomini lo fanno che possono, ne saranno laudati o non biasimati.
얻으려는 욕망은 참으로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능력 안에서 그 욕망을 추구할 때 그는 칭찬받거나 적어도 비난받지는 않을 것이다. (『군주론』 3장)
마키아벨리는 셰익스피어와 정반대 자리에 섭니다. 그에게 야망은 외부의 악마도 아니고 비대칭의 비극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natura)*입니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야망 자체가 아니라 자기 능력 밖의 야망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칼끝은 야망이 아니라 능력 없는 야망을 향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진단은 셰익스피어의 도약하는 야망과 정확히 같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두 사람은 같은 현상을 보고 있지만, 마키아벨리는 그것을 능력의 부족으로, 셰익스피어는 비극의 형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2. 토머스 홉스. 야망은 끝없는 권력욕이다
So that in the first place, I put for a generall inclination of all mankind, a perpetuall and restlesse desire of Power after power, that ceaseth onely in Death.
그러므로 인류 전체의 일반적 경향으로 내가 첫째로 꼽는 것은 권력을 향한 영원하고 쉼 없는 욕망, 오직 죽음에 이르러서만 멎는 욕망이다. (『리바이어던』 11장)
홉스는 야망을 *권력에 권력을 더하려는 욕망(desire of Power after power)*으로 정의합니다. 핵심은 *후속(after)*입니다. 야망가는 권력 하나를 얻는 데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자기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권력을 더 요구하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야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죽음만이 그것을 멈춥니다. 셰익스피어의 그림자의 그림자가 형이상학적 진단이라면, 홉스의 권력에 권력을 더하는 욕망은 정치학적 진단입니다. 둘 다 야망의 영원한 미달을 가리키되, 진단의 어조가 다릅니다.
3. 한비자. 욕망은 군주의 약점이다
君无見其所欲. 君見其所欲, 臣自將彫琢. (『한비자』 「주도」)
군주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드러내지 말라. 군주가 원하는 바를 드러내면, 신하들은 그것에 맞춰 스스로를 깎고 다듬는다.
한비자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야망이 어떻게 이용당하는가를 봅니다. 군주의 야망(권력욕·공명심·인정 욕구)은 신하들이 군주를 조종하는 지렛대가 됩니다. 군주가 원하는 바를 보이는 순간, 신하들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자기를 다듬고, 끝내 군주를 그 욕망에 묶어 조종합니다. 셰익스피어가 야망의 내적 비극을 그렸다면, 한비자는 야망의 정치적 취약성을 그립니다. 같은 비대칭이 안에서 보면 비극이 되고, 밖에서 보면 약점이 됩니다. 한비자의 통찰이 무서운 것은 야망가 자신이 그 약점을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4. 노자. 욕망 없음의 길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도덕경』 제3장)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노자의 처방은 한비자의 진단과 묘하게 닮았지만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한비자는 군주의 욕망을 숨기라고 했고, 노자는 욕망의 대상을 처음부터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야망은 진공에서 생겨나지 않고, 욕망할 만한 것이 눈앞에 제시될 때 발생한다는 것이 노자의 진단입니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야망의 조절이 아니라 야망의 발생 조건을 없애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야망의 비대칭 구조를 그렸다면, 노자는 그 비대칭이 작동할 조건 자체를 거두는 길을 제시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서의 답입니다.
5. 토크빌. 작은 야망의 시대
Ce qui m'inquiète le plus à la longue, ce n'est pas la vue de l'immoralité des grands, c'est celle de l'immoralité menant à la grandeur. Dans les démocraties, le danger n'est pas que l'ambition manque, mais qu'elle soit petite.
내가 길게 보아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위대한 자들의 부도덕이 아니라, 위대함으로 가는 길 자체가 부도덕에 의해 닦이는 광경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험은 야망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고, 야망이 작다는 데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2권)
토크빌은 셰익스피어와 정반대의 걱정을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너무 큰 야망의 비극을 그렸다면, 토크빌은 너무 작은 야망의 황량함을 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 작은 안락을 추구하느라 큰 야망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됩니다. 큰 야망에는 큰 비극이 따르지만, 그 자리에 큰 위대함도 깃들 수 있습니다. 작은 야망만 가득한 사회에는 비극도 없지만 위대함도 없습니다. 이 통찰은 셰익스피어를 보완합니다. 야망의 크기가 아니라 동행이 문제라는 셰익스피어의 진단에, 토크빌은 그러나 작은 야망만 있는 사회는 그 동행조차 잃어버린다는 진단을 더합니다.
6. 니체. 권력에의 의지
Was ist gut? — Alles, was das Gefühl der Macht, den Willen zur Macht, die Macht selbst im Menschen erhöht.
무엇이 선인가. 인간 안에서 권력의 감정, 권력에의 의지, 권력 그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반그리스도』 §2)
니체는 야망에 가장 극단적인 긍정을 부여한 사상가입니다. 그에게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단죄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본질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야망의 비대칭을 비극의 형식으로 그렸다면, 니체는 그 비대칭을 생의 약동(躍動)의 형식으로 그립니다. 같은 사다리, 같은 도약, 같은 단단함을 보면서, 니체는 그것을 위대함의 조건으로 봅니다. 다만 니체에게도 조건은 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권력에의 의지일 때만 그것은 고양입니다.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타인을 짓밟는 권력에의 의지는 그가 *원한(Ressentiment)*이라 부른 추한 변형입니다. 야망을 그토록 긍정한 니체조차 야망의 변형을 경계했다는 점은, 셰익스피어의 진단이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얼마나 깊은 진실을 짚었는지를 새삼 보여줍니다.
7. 한나 아렌트. 야망과 영예의 분리
The Greek polis once was precisely that 'form of government' which provided men with a space of appearances where they could act, with a kind of theater where freedom could appear.
그리스의 폴리스는 바로 그러한 통치 형태였다. 사람들에게 행위할 수 있는 현상의 공간, 자유가 나타날 수 있는 일종의 극장을 제공한 것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
아렌트의 통찰은 야망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야망이 향하는 자리를 묻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야망은 *영예(kleos)*를 향했습니다. 동료 시민들이 보는 공적인 무대에서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 거기서 야망은 사적 권력욕이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하는 동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야망은 공적 무대를 잃고 사적 영역에 갇혔습니다. 사적 영역에 갇힌 야망은 부의 축적이나 사회적 지위 다툼으로 굴절됩니다. 아렌트는 셰익스피어의 통찰에 한 가지 차원을 더 보탭니다. 야망의 사악함은 야망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야망이 향할 무대가 사라진 시대 조건에서도 온다는 것.
8. 라 로슈푸코. 야망의 위장술
L'amour est ordinairement suivi de l'ambition, mais l'ambition est rarement suivie de l'amour.
사랑은 흔히 야망에 자리를 내주지만, 야망이 사랑에 자리를 내주는 일은 드물다. (『잠언과 성찰』 §490)
L'orgueil joue toujours son rôle dans ce que nous appelons humilité.
우리가 겸손이라 부르는 것 안에서도 자존심은 늘 자기 역할을 한다. (§254)
라 로슈푸코는 야망의 위장술을 폭로한 작가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 안에 야망이 숨어 있고, 우리가 겸손이라 부르는 것 안에 자존심이 숨어 있습니다. 그가 야망에 관해 가장 무서운 진실을 짚은 것은 야망이 다른 미덕의 얼굴을 빌려 나타날 때 가장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브루투스가 공화국의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야망을 실현했듯이. 라 로슈푸코의 시선은 그 가면 아래를 들춥니다. 야망이 사악해지는 가장 깊은 자리는 그것이 자기를 미덕으로 위장할 때라는 것.
여덟 통찰의 종합
야망에 관한 이 여덟 통찰을 한 표에 놓으면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마키아벨리는 야망을 자연으로 인정하되 능력과의 비례를 본다. 홉스는 야망을 권력에 권력을 더하는 끝없는 운동으로 진단한다. 한비자는 야망을 정치적 약점이자 조종의 지렛대로 본다. 노자는 야망의 발생 조건 자체를 거두는 길을 제시한다. 토크빌은 작은 야망의 황량함을 경고한다. 니체는 야망을 생의 약동으로 긍정하되 자기 극복을 조건으로 단다. 아렌트는 야망이 향할 공적 무대의 회복을 요구한다. 라 로슈푸코는 야망의 미덕으로의 위장을 폭로한다.
이 여덟 통찰과 셰익스피어의 분석을 함께 놓으면, 야망에 관한 인류의 지혜는 한 자리에 모입니다. 야망은 단죄할 것이 아니라 다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악해지는 자리는 야망의 크기가 아니라 그 동행의 부재이고, 그것이 위대해지는 자리는 야망의 절제·측은지심·자기 극복·공적 지향·정직한 자기 직시 같은 동반자가 함께 있을 때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야망과 무엇이 함께 가는가를 물었다면, 다른 사상가들은 그 함께 가는 무엇의 목록을 각각 한 칸씩 채워준 셈입니다.
'學而 > 토피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문턱의 사람들: 마키아벨리의 관복과 흄의 백개먼 (1) | 2026.05.11 |
|---|---|
| 르쌍티망을 극복하라 (0) | 2026.05.10 |
| 광고인가, 계약인가, 농담인가 (4) | 2026.05.06 |
| 왜 우리는 스스로 줄을 서는가 _ 그람시의 헤게모니 (0) | 2026.05.05 |
| <아테나이30> 테세우스, 영웅의 길을 택하다 (0) | 2026.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