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이용한 거짓", 폴터링(paltering) 기법 _ 클린턴 사례
_ 진실을 이용한 거짓
'폴터링(paltering)'은 사실인 진술을 무기로 듣는 사람을 잘못된 결론으로 이끄는 화법, 곧 진실 호도의 기술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 "들이마시지 않았다", "is의 의미가 무엇이냐"가 대표 사례다. 거짓말은 아니되 진실도 아닌 회색지대를 노리는 기교다. 한비자의 명실 검증과 와일드의 풍자가 일찍이 그 위선을 짚었다. 이런 '진실 호도'는 법망은 용케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신뢰의 망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거짓말은 들통나면 끝장이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인 진술을 무기로 삼아 듣는 사람을 잘못된 결론으로 인도하는 화법, 영어로 paltering(폴터링), 우리말로 옮기면 '진실 호도(糊塗)'의 기술이다.
I. 클린턴이 보여준 두 장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진실 호도 화법의 교과서적 사례를 남겼다. 한 번은 가벼웠고, 한 번은 대통령직이 걸렸다.
1992년, 마리화나
대선 캠페인 도중 옥스퍼드 유학 시절 마리화나 사용 여부를 추궁받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영국에 있을 때 한두 번 마리화나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들이마시지는 않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I didn't inhale)."
피웠지만 들이마시지는 않았다. 마리화나의 약리 효과는 폐로 흡입해야 비로소 발현된다. 그러니 들이마시지 않았다는 말은 약리적으로는 사용한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형식적으로는 사용 사실을 인정한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인한 화법이다. 누구나 즉각 어색함을 감지할 수 있는 진술이었다. 거짓말이라 단정하긴 어렵고, 진실이라 받아들이긴 더 어려운 회색 지대. 이 한 문장은 미국 정치 코미디의 영원한 자산이 되었다.
훗날 2000년 MTV 인터뷰에서 그는 한 발 더 물러섰다. "들이마시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사실은 들이마시는 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들이마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들이마실 줄 몰랐다는 것이다. 변명이 또 다른 폴터링으로 이어진 셈이다.
1998년, 르윈스키
진짜 무대는 6년 뒤에 펼쳐졌다. 발단은 르윈스키가 아니라 폴라 존스(Paula Jones)였다. 아칸소 주지사 시절 호텔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며 1994년 클린턴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여성이다. 존스 측 변호인단의 전략은 클린턴이 부하 직원과 성적 관계를 맺는 패턴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고, 그 일환으로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캐묻는 증언이 진행되었다. 1998년 1월 17일, 클린턴은 이 증언녹취(deposition)에서 선서하에 르윈스키와의 성관계를 부인했다. 이것이 결정적 함정이었다. 일반적 거짓말이 아니라 법정 위증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다.
증언녹취 직후인 1월 21일 워싱턴포스트에 르윈스키 스캔들이 폭로되었고, 1월 26일 백악관에서 그 유명한 손가락 흔들기 기자회견이 열렸다.
"저는 그 여성, 르윈스키 양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I did not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at woman, Miss Lewinsky)."
그러나 파란 드레스의 DNA가 발견되자 클린턴은 8월 17일 입장을 바꾼다. 르윈스키가 보관해 둔 그 드레스에서 클린턴의 DNA가 검출되어, 더 이상 부인이 불가능해진 시점이다. 그날 그는 대배심 증언을 한 뒤 저녁에 대국민 연설에 나섰다.
"저는 르윈스키 양과 부적절한(not appropriate) 관계를 가졌습니다. 사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진짜 압권은 같은 날 대배심 증언에서 나왔다. 폴라 존스 사건 증언녹취 자리에서 그의 변호사 로버트 베닛(Robert Bennett)이 르윈스키의 진술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르윈스키 양은 진술서에서 대통령과의 사이에 어떠한 형태의 성관계도 없다(there is absolutely no sex of any kind in any manner, shape or form, with President Clinton)고 밝혔습니다." 클린턴은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으면서 이 진술을 정정하지 않았다. 대배심에서 이를 추궁받자 그가 내놓은 답이 그 유명한 변명이었다.
"'is'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It depends on what the meaning of the word 'is' is)."
논리는 이러하다. 'is'는 현재형이므로, 그 진술이 이루어진 1998년 1월 시점에 관계가 현재진행 중이 아니었다면 그 진술은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그 시점에는 관계가 끝난 상태였으므로, 베닛의 진술은 형식적으로 참이라는 것이다.
또 한 겹의 우회로가 있었다. 'sexual relations'의 정의 문제다. 폴라 존스 사건 증언에서는 이 용어가 미리 정의되어 있었는데, 그 정의는 "타인의 신체 부위와 접촉하면서 성적 욕망을 일으키거나 만족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였다. 클린턴은 이를 자신이 능동적으로 만진 경우로만 한정 해석했다. 즉 자신이 받은 행위는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좁혀 빠져나가는 기법, 법률 해석의 엄격해석(strict construction) 원리를 일상 언어에 동원한 것이다.
II. 이 화법의 이름
이런 화법은 학문 분야마다 각각의 이름을 갖는다.
가장 정확한 영어 용어는 paltering(폴터링)이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토드 로저스(Todd Rogers) 교수와 동료들이 2017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Artful Paltering: The Risks and Rewards of Using Truthful Statements to Mislead Others"라는 논문에서 학술 개념으로 정립했다. 흥미롭게도 이 논문의 도입부 사례가 바로 클린턴의 'is' 발언이다. 폴터링이라는 학술 개념 자체가 클린턴 화법을 설명하기 위해 다듬어진 셈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16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옛 영어 동사 palter다. "말을 모호하게 하다, 잔꾀를 부리다"라는 뜻이다. paltry(하찮은)와 같은 어원이라 본래 단어 자체에 쩨쩨하다는 경멸적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2막 1장에서 브루투스가 음모자들에게 "약속을 한 비밀 로마인이라면 잔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secret Romans that have spoke the word and will not palter)"라고 외치는 대목이 있다. 거짓말은 아니되 약속을 흐리고 비틀어 빠져나가려는 행위가 palter다. '맥베스'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맥베스가 자신을 속인 마녀들을 가리켜 "이중 의미로 사람을 갖고 노는 농간꾼들(juggling fiends... that palter with us in a double sense)"이라 부른다. 같은 단어가 셰익스피어에게서 정치적 음모의 맥락과 운명의 농간 맥락에서 동시에 등장한다.
법률 영역에서는 위증 회피적 답변(perjury-evasive testimony) 또는 좁은 의미의 mental reservation(심중 유보)이라 부른다. 후자는 17세기 예수회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개념인데, 박해받는 자가 박해자에게 진실을 다 말하지 않고도 거짓말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였다. 박해자가 "당신은 가톨릭 신부인가"라고 물을 때, 마음속으로 '내일은 아니다'라는 단서를 붙이고 입으로 "아니다"라고 답하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식의 논리다. 파스칼이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결의론(casuistry)이다.
수사학과 논리학에서는 라틴어 개념 쌍으로 다룬다. suggestio falsi(거짓의 암시), suppressio veri(진실의 은폐). 전자는 직접 거짓말은 아니지만 거짓 인상을 심는 것, 후자는 결정적 정보를 숨김으로써 오해를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어로는 마땅한 단축어가 없다. '얼버무리기'는 모호함은 잡지만 참 진술이라는 핵심을 놓친다. '궤변'은 거짓 결론을 참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라 방향이 반대다. '교언'은 매끄럽게 꾸민 말이라는 점은 비슷하나 참 진술의 무기화라는 측면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기망'은 사기죄 구성요건으로 쓰이는 법률 전문용어라 일상에 들이기 무겁다. '반쪽 진실'은 의미상 가깝지만 paltering의 적극성을 다 담지 못한다.
이 글에서는 폴터링이라 부르면서 '진실 호도'라 의미를 풀기로 한다. 풀로 발라 덮는다는 호도(糊塗)의 본래 뜻이, 거짓을 짓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향하지 못하게 흐리는 paltering의 본질을 비교적 잘 담아낸다.
III. 클린턴 논리의 해부
폴터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두 가지다.
함의와 진리치의 분리
영국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Paul Grice)가 정립한 개념인데, 발화의 진리치(truth value, 엄밀한 의미에서의 참 거짓)와 화용적 함의(implicature, 맥락에서 전달되는 의미)는 다르다. 같은 문장이라도 사전적 의미에서 참인지를 따지는 차원과, 실제 대화에서 어떤 메시지로 전달되는지를 따지는 차원이 갈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저녁 식사 어떠셨어요?"라고 물었는데 "음식이 따뜻했어요"라고 답한다면, 사전적 진리치는 그저 음식의 온도에 관한 참인 진술이다. 그러나 함의는 분명하다. "맛은 별로였다"는 뜻이다. 일상 대화는 진리치가 아니라 함의에 의지해 흘러간다. 폴터링은 진리치를 지키면서 함의 차원에서 거짓을 전달한다.
"한두 번 시도했다"는 진리치상 참일 수 있다. 그러나 함의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보다 훨씬 자주 사용했다면, 진리치는 지켜지되 함의 차원의 기만이 성립한다. 듣는 사람은 함의에 의지해 추론하므로, 함의 차원의 거짓은 거짓말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양화사와 한정어의 조작
'sexual relations'를 좁게 정의하기, 'is'를 순간시제로 한정하기, 'new taxes'에서 'new'를 강조하기. 모두 양화의 범위를 의도적으로 좁혀 빠져나갈 구멍을 남기는 기법이다. 양화(quantification)는 어떤 진술이 적용되는 범위를 가리키는 논리학 용어다. "모든 학생이 시험에 합격했다"와 "어떤 학생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양화의 범위가 다르다. 폴터링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양화의 범위를 슬쩍 좁혀, 좁힌 범위 안에서만 참인 진술을 만든 뒤, 듣는 사람은 그것을 일반적 진술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기법이다.
IV. 한국 정치사의 사례들
한국 정치사에도 폴터링의 풍부한 보고가 있다.
'기억에 없다' 답변
청문회의 단골 답변 형식이다.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상태를 부정한다. 한국 위증죄는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처벌하므로, 기억이 없다는 진술은 그 자체로는 거짓 진술이 아니다. 다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다"는 함의가 전달된다. 사실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의혹을 잠재우는 효과를 노린다. 진실 호도의 가장 표준적 형태다.
'그런 사실 없다'
이 표현의 묘미는 '그런'이라는 지시어의 모호성에 있다. 어떤 구체적 사실을 부인하는지 불명확하게 만들어 두면, 나중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의혹의 핵심을 정면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이다. 클린턴의 'sexual relations' 정의 좁히기와 같은 구조를 한국어 지시어로 구현한 셈이다.
'개인적 후원으로 알았다, 단체 자금인지 몰랐다'
쪼개기 후원 사건에서 정치인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한 답변이다. 돈을 받은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 그 돈의 출처에 대한 인지만 부정한다. 정치자금법은 단체 자금임을 알고 받은 경우를 처벌하는데, 알았는지 여부의 입증 책임이 검찰에 있다는 법리적 약점을 정확히 겨냥한 화법이다. 받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의 위험은 회피하고, 인지 차원에서 빠져나간다.
본인과 가족의 분리 화법
박연차 게이트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본인 수수와 가족 수수를 분리해 답한 화법이 있다. 가족이 받은 것은 사실로 확인됐고 본인 수수는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실을 분리하면 형식적으로는 거짓이 아니면서 책임의 무게는 가벼워 보이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사건의 다른 측에서도 후일 한 정치인이 "본인이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라고 발언했는데, 이 역시 가족 수수까지는 부정하지 않으면서 본인 수수만 부정하는 분리 화법이었다. 형식 진실과 본질 진실의 거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다.
'그 발언의 본 취지는 그게 아니었다'
직설적 발언이 문제가 되었을 때의 정형화된 변명. 발언 자체는 부인하지 않되 그 의미를 사후적으로 재정의한다. 함의의 적극적 재구성을 통해 책임 영역을 좁히는 기법이다.
V. 왜 만들어지고, 왜 먹히는가
법률적 토양
폴터링이 가장 발달하는 곳은 법정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Bronston v. United States(1973) 판결이 결정적이었다. 영화 제작사 사장 새뮤얼 브론스턴은 회사 파산 절차의 채권자 심리에서 선서를 한 뒤 채권자 변호사로부터 다음 질문을 받았다. "스위스에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는 "아니오"라고 답했다. 이어 "가져 본 적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회사가 취리히에 약 6개월간 계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답변 자체는 모두 사실이었다.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 5년 동안 제네바에 스위스 계좌를 운용해 18만 달러 이상을 출입금했다는 사실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위증죄로 기소되어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무죄를 선고했다. 핵심 판시는 이러했다. 답변이 문자 그대로 참이고 다만 비응답적이거나 부정적 함의로 오도하는 것이라면, 위증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추궁자가 후속 질문으로 명확히 할 책임이 있다.
이 판례 이후 미국 법정에서 증인은 "정확히 묻지 않은 것에 답할 의무가 없다"는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것이 클린턴식 화법의 법적 토양이 되었다. 클린턴 자신이 예일 로스쿨 출신 변호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화법은 Bronston 원칙에 정통한 자의 의도적 활용이었다.
한국 형법의 위증죄(제152조)는 "허위의 진술"을 처벌하는데, 판례는 이를 "기억에 반하는 진술"로 비교적 넓게 해석한다. 즉 진술 전체의 인상을 통해 기억에 반하는 사실을 전달했다면 처벌 가능성이 열려 있어, 영미법보다는 폴터링을 어느 정도 포섭하는 셈이다. 이런 사정이 한국어에 paltering의 별도 어휘가 없는 한 원인일 것이다. 처벌하지 못하는 것을 적어도 명명하여 비판하려는 시도가 영어권에서 이 단어를 학술 개념으로 끌어올린 동력이라 볼 수 있다.
논리적 구조
폴터링은 일상 언어의 협력 원리를 무기로 삼는다. 그라이스가 말한 협력의 원칙(Cooperative Principle)은 화자가 상황에 적합한 분량과 진실을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는 묵시적 약속이다. 듣는 사람은 이 약속을 전제로 추론한다. 폴터링은 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면서, 상대가 여전히 그 약속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신뢰를 무기로 신뢰를 배반하는 구조다.
사회적 환경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한몫한다. 30초 사운드바이트 시대에는 발언 한 토막이 반복 재생되며, 그 토막이 형식적으로 참이기만 하면 거짓말쟁이 낙인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 시대에는 그 압박이 더 커진다. "그가 X라고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영구히 보존되므로, 그 발언이 기술적으로는 참이어야 한다는 압박이 화자에게 가해진다.
토드 로저스의 실험 결과는 흥미롭다. 폴터링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거짓말보다 윤리적으로 덜 나쁘다고 평가하지만, 그것을 당한 사람은 거짓말과 거의 동등하게 나쁘다고 평가한다. 화자와 청자 사이에 도덕적 인식의 큰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격차가 폴터링이 반복되는 한 원인이다. 화자는 '나는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라는 자기 정당화 속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관점
칸트는 거짓말을 무조건적으로 금했지만, 동시에 말하지 않을 권리는 인정했다. 폴터링은 이 둘 사이의 회색지대를 노린다. 진술하되 진실의 일부만 진술함으로써, 거짓말의 금지와 침묵의 권리를 동시에 우회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칸트적 관점에서 폴터링은 거짓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거짓말의 핵심 악은 거짓 진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합리적 행위자로 대우하지 않는 것에 있다. 즉 상대의 판단 능력을 도구로 삼아 자기에게 유리한 결론으로 끌고 가는 행위가 본질적 악이다. 폴터링은 바로 이 일을 한다. 상대가 정상적 협력의 원칙을 따라 추론할 것을 알면서, 그 추론을 잘못된 결론으로 인도한다.
동양 사상의 관점
한비자(韓非子)의 '간겁시신(姦劫弑臣)'편은 제목 그대로 "간사함, 위협, 시해의 신하"를 다룬다. 간(姦)은 간사함, 겁(劫)은 위협, 시신(弑臣)은 임금을 시해하는 신하라는 뜻이다. 한비자는 이 편에서 권력 주변의 신하들이 어떻게 군주를 흔들고 결국에는 시해에까지 이르는지를 분석한다.
이 편의 핵심 통찰 가운데 하나는 화술의 문제와 닿아 있다. 한비자는 명실(名實)을 따져 시비를 정하고 참험(參驗)을 통해 언사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신하의 말이 명목(겉으로 내세우는 형식)과 실질(실제 그 말이 가리키는 사태)에서 일치하는지를 가려내고, 여러 증거를 대조하여 그 말의 진위를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주의 판단을 흐리는 화법이 권력 주변에서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폴터링이 정확히 명목은 참이되 실질은 거짓인 화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명실을 따져야 한다는 한비자의 처방은 2300년 뒤 클린턴식 화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비자의 더 큰 통찰은 폴터링이 권력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정직하게 말했을 때 화자가 큰 손해를 입는 구조에서는 폴터링이 자연스럽게 발달한다. 클린턴이 처했던 상황도 정확히 그러했다. 진실은 탄핵으로 직결되고, 거짓말은 위증죄로 직결되는, 양쪽 출구가 막힌 권력의 함정.
공자는 '논어' 자로편에서 흥미로운 평가를 남겼다. "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말은 반드시 신의 있게 하고 행동은 반드시 결단 있게 하니, 융통성 없는 소인이로다)." 형식적으로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실질적인 의(義)에 부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폴터링은 이 가르침의 정반대 자리에 있다. 형식적 진실에는 매달리되 실질적 의는 저버리는 행위, 곧 형식과 본질을 거꾸로 뒤집은 화법이다.
VI. 와일드의 한 줄, 진실의 두 얼굴
오스카 와일드는 1895년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1막에서 등장인물 알저논(Algernon)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거의 순수하지 않으며 결코 단순하지 않다(The truth is rarely pure and never simple)."
이 한 문장은 폴터링의 본질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폴터링하는 자가 가장 즐겨 인용하는 변명이기도 하다. 와일드의 위트는 이 두 얼굴을 동시에 빚어낸 데 있다.
대사의 직접 맥락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 와일드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알저논과 잭(Jack)은 친구 사이인데, 잭은 시골에서는 'Jack'이라는 이름을, 도시에서는 'Ernest'라는 이름을 쓰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알저논이 이를 추궁하자 잭이 자신의 사정을 길게 설명하고는 마지막에 "이것이 순수하고 단순한 진실의 전부일세(That, my dear Algy, is the whole truth pure and simple)"라고 말한다. 이때 알저논이 받아치는 대사가 바로 그 유명한 한 줄이다. 즉 와일드는 이 명제를 거짓말쟁이의 자기 변호에 대한 또 다른 거짓말쟁이의 응수로 배치했다. 두 거짓말쟁이가 진실의 복잡성을 들먹이며 서로의 거짓을 두둔하는 구조다.
두 단어, pure와 simple
이 문장에는 두 개의 부정 단어가 정교하게 짝을 이룬다.
순수하다(pure)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진실이 순수하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입에 올리는 진실이라는 것에 늘 다른 것들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화자의 의도, 청자의 기대, 사회적 맥락, 발언의 시기. 이런 것들이 진실에 묻어들어 진실 그 자체와 진실의 표현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단순하다(simple)는 한 가지 면만 있다는 뜻이다. 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말은, 어떤 사실이든 한 각도에서 보면 참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마리화나를 한두 번 시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마약 사용 경력이 거의 없다"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강도의 비대칭
원문을 자세히 읽으면 흥미로운 차이가 보인다. 순수에는 "거의(rarely) ~ 않다"라는 약한 부정을, 단순에는 "결코(never) ~ 않다"라는 강한 부정을 붙였다. 진실이 순수할 가능성은 가끔이라도 열어두지만, 단순할 가능성은 완전히 닫아둔 것이다.
폴터링하는 자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비대칭이다. 그들은 진실의 복잡성을 들이대면서, 진실의 비순수성에는 침묵한다. 자기가 보여주는 사실이 순수한 진실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청자가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라며 청자를 탓한다. 자신이 흐려 놓은 진실을 청자의 이해 부족으로 떠넘기는 셈이다.
거짓말쟁이의 입을 빌린 풍자
가장 무서운 부분은 따로 있다. 와일드는 이 명제를 진심으로 옹호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거짓말쟁이가 자기 변호용으로 쓰는 전형적 수사를 풍자하기 위해 쓴 것이다. 작품 전체가 거짓과 가장과 이중생활로 굴러가는 코미디이고, 알저논 자신도 'Bunbury'라는 가공의 친구를 만들어 사교 모임을 빠져나가는 인물이다. 그런 자가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단순치 않다는 말 자체가 단순하지 않게 작동한다는 이중 풍자. 와일드는 이미 130년 전에 폴터링의 위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거짓말쟁이가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라고 말할 때, 그가 진짜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의 거짓을 진실의 복잡성 뒤에 숨기는 것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진실이 복잡하다는 사실은 진실을 향한 노력의 출발점이지, 진실로부터 도망갈 면허가 아니다. 폴터링은 정확히 이 면허를 자기에게 발급하는 행위다.
클린턴이 'is의 의미'를 들고 나왔을 때, 그가 의지한 것은 정확히 와일드가 풍자한 그 수사였다. 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 사전적 의미와 맥락적 의미가 갈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기 변호의 도구로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와일드의 본의는 그 반대였다. 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인식은 진실을 더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요청이지, 진실을 더 교묘하게 회피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다.
VII. 정교함의 역설
클린턴 사례가 흥미로운 것은, 폴터링이 너무 정교했기 때문에 오히려 실패했다는 점이다. "is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표현은 즉각 미국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Clintonian'이라는 형용사가 사전에 등재되어 진실을 회피하는 교묘한 화법을 뜻하게 되었다.
이는 폴터링의 근본적 약점을 보여준다. 너무 노골적이면 청자가 함의 차원의 기만을 감지하고, 화자의 정직성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형식적 방어선마저 도덕적으로는 무너진다.
정치인의 화법을 분석할 때 던져야 할 질문은 "그가 거짓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진실을 향해 나아갔는가"다. 폴터링은 항상 후자의 질문 앞에서 무너진다.
진실을 호도하는 자는 거짓말의 죄를 짓지 않으려다 정직의 덕을 잃는다. 법망은 빠져나갈 수 있어도 신뢰의 망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클린턴이 1998년 8월 17일 결국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라고 인정해야 했던 이유다. 법적으로는 폴터링이 통할 수 있어도, 정치적·도덕적으로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풀로 발라 덮으면 잠시는 가려진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종이는 들뜬다. 가려진 자리는 결국 더 추하게 드러난다. 폴터링의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결국 자신의 진실까지 가려 버린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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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hale'>
클린턴이 1992년 대선 캠페인 중에 한 발언의 정확한 영어 원문은 이렇다.
"When I was in England, I experimented with marijuana a time or two, and I didn't like it. I didn't inhale, and I never tried it again."
이 가운데 한국어로 옮길 때 가장 까다롭고 또 가장 유명해진 단어가 inhale이다.
inhale의 정확한 뜻
inhale은 라틴어 in(안으로) + halare(숨쉬다)에서 왔습니다. 글자 그대로 "숨을 안으로 들이마시다"라는 뜻이다. 그 반대말은 exhale, 즉 '숨을 내쉬다'이다.
영어에서 inhale은 두 가지 결을 가진다.
첫째, 일반적 호흡 동사로서 그냥 "들이마시다, 흡입하다"입니다. 신선한 공기를 inhale한다, 깊이 숨을 inhale한다 등으로 쓴다.
둘째, 흡연 맥락에서 매우 특수한 의미가 있다. 담배든 마리화나든, 입에 연기를 머금는 것과 그 연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이는 것은 다른 행위다. 입에만 머금고 곧바로 내뱉으면 약리 효과가 거의 없고, 폐로 빨아들여야 니코틴이든 THC든 혈류로 흡수된다. 영어 흡연 문화에서 inhale은 바로 이 후자, 즉 "폐로 빨아들이다"를 가리키는 용어다. 흡연 초보자가 inhale하지 못해 기침만 하다가 그만두는 일도 흔하다.
클린턴이 노린 의미의 분리
클린턴은 정확히 이 두 의미의 틈을 노렸다.
"experimented with marijuana"는 마리화나에 손댔다는 사실 인정한다. 한두 번 시도했다는 것까지 인정한다.
그러나 "I didn't inhale"이라고 함으로써 "폐로 빨아들이지는 않았다"고 단서를 단다. 이 말의 함의는 분명하다. 마리화나의 약리 효과를 본 적이 없다, 즉 실질적으로 마약 사용자였던 적이 없다.
여기서 폴터링이 작동합니다. inhale하지 않고 마리화나를 피웠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은 하다. 입에만 머금고 내뱉을 수는 있으니까. 그러니 그 진술은 이론상 거짓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마리화나를 일부러 피우면서 그 효과를 보지 않으려 했다는 주장은 누가 들어도 어색하다. 마리화나를 손에 든 사람은 효과를 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입에 머금다 뱉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어 선택의 정교함
이 발언이 폴터링의 교과서적 사례로 남은 이유는 inhale이라는 단어 선택의 정교함 때문이다.
만약 그가 "I didn't really smoke it(진짜로 피우지는 않았다)"이라고 했다면 거짓말이 됐을 것이다. smoke는 흡연 행위 전반을 가리키는 일반어이기 때문이다. 입에 댄 이상 smoke한 것이 된다.
만약 "I didn't enjoy it(좋아하지 않았다)"이라고만 했다면 약리 효과를 본 사실은 인정한 셈이 된다.
inhale은 이 둘 사이의 매우 좁은 틈을 정확히 짚어낸 단어였다. 흡연이라는 일반 행위와 그 약리적 핵심 동작을 분리시키는, 흡연 문화권에서만 유효한 미세한 구분을 동원한 것이다.
부산물로 남은 표현
이 발언 이후 영어권에서 "I didn't inhale"은 그 자체로 관용구가 되었다. "기술적으로는 사실일지 모르나 본질을 회피하는 변명"을 가리키는 정형화된 표현이다. 무언가에 손댔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적 의미는 부인하는 모든 화법이 "I didn't inhale" 식 변명이라 불린다.
훗날 2000년 MTV 인터뷰에서 클린턴이 "들이마시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사실은 들이마시는 법을 몰랐을 뿐이었다(When I said I didn't inhale, I was telling the truth, I just didn't know how to inhale)"고 한 말도 같은 단어 inhale을 둘러싸고 한 단계 더 후퇴한 변명이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단어 하나를 놓고 8년에 걸쳐 변명이 진화한 셈이다.
inhale 한 단어가 미국 대선 후보의 마약 의혹을 비껴가게 했고, 결국 미국 정치 화법사에서 가장 유명한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단어 선택이 곧 전략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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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클린턴의 "It depends on what the meaning of the word 'is' is" 발언은 폴터링 역사에서 가장 정교하고 가장 악명 높은 단어 분석이다. 한 음절짜리 단어 하나를 두고 벌인 언어학적 곡예라 할 만하다.
발언이 나온 정확한 맥락
이 발언은 1998년 8월 17일 클린턴이 대배심에 출석해 한 증언에서 나왔다. 검사 측은 클린턴을 그 자체로 추궁한 것이 아니라, 7개월 전인 1월 17일 폴라 존스 사건 증언녹취 자리에서 그의 변호사 로버트 베닛(Robert Bennett)이 한 발언을 추궁했다.
그날 베닛은 르윈스키의 진술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Counsel is fully aware that Ms. Lewinsky has filed an affidavit which they are in possession of saying that there is absolutely no sex of any kind in any manner, shape or form, with President Clinton."
(르윈스키 양은 진술서에서 대통령과의 사이에 어떠한 형태의 성관계도 없다고 밝혔음을 변호인 측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 진술이 이루어지는 동안 클린턴은 같은 자리에 동석하고 있었으나 정정하지 않았다. 8개월 뒤 대배심 검사가 추궁했다. "이 진술은 완전히 거짓 아닙니까?"
이에 대한 클린턴의 답변이 그 유명한 한 줄이다.
"It depends on what the meaning of the word 'is' is. If the—if he—if 'is' means is and never has been, that is not—that is one thing. If it means there is none, that was a completely true statement."
(그것은 'is'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is'가 '있다 그리고 한 번도 있은 적 없다'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한 가지 이야기이고, 만약 그것이 단지 '지금 없다'를 의미한다면 그 진술은 완전히 참이었다.)
'is'라는 단어의 문법적 분석
영어의 be 동사 현재형 'is'는 한국어 화자에게는 단순해 보이지만, 시제와 상(aspect)의 측면에서 여러 의미를 가진다.
첫째, **순간 현재(instantaneous present)**다. 발화 시점 바로 그 순간의 상태를 가리킨다. "지금 여기에 책이 있다(There is a book here)"의 'is'가 이런 용법이다. 발화 순간에 한정된 진술이다.
둘째, **지속 현재(durative present)**다. 일정 기간에 걸친 지속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의사다(He is a doctor)"의 'is'가 이렇다. 그가 의사라는 상태가 발화 시점을 포함한 일정 기간 지속됨을 뜻한다.
셋째, **일반적·항상적 현재(generic/habitual present)**다. 시간 한정 없이 일반적으로 그러함을 가리킨다. "지구는 둥글다(The earth is round)"의 'is'가 이렇다.
넷째, **보고 현재(reportive present)**다. 진술서나 보고서 등에서 사실 관계를 진술할 때 쓰는 용법으로, 통상 진술 작성 시점 또는 진술이 다루는 시간 범위 전체에 걸쳐 적용된다.
베닛의 발언 "there is no sex"의 'is'를 자연스러운 영어 화자는 어떻게 이해할까. 르윈스키의 진술서가 다루는 것은 클린턴과의 관계 전반이므로, 통상의 화자는 이 'is'를 보고 현재 또는 지속 현재로 해석하여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있은 적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일반적 부정 진술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클린턴이 'is'에 가한 의미 압축
클린턴의 변명은 이 다층적 의미 가운데 순간 현재만을 골라낸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is'는 발화 순간의 상태만 가리킨다. 베닛이 "there is no sex"라고 말한 1998년 1월 17일 그 순간, 클린턴과 르윈스키 사이에 진행 중인 관계는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97년에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순간을 기준으로 보면 "no sex"는 사실이다. 베닛의 진술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위증을 방치한 것이 아니다.
이 논리의 정교함은 무서울 정도다. 영어 시제의 가장 좁은 해석을 끌어와, 일반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의미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만들어낸 것이다.
왜 이 변명이 폴터링의 정수인가
이 발언이 폴터링 역사에 길이 남은 이유는 세 가지다.
- 언어학적 정교함
be 동사 시제의 미묘한 의미 차이를 정확히 짚어내 자기 변호의 도구로 만들었다. 영어 문법학자가 강의실에서 다룰 만한 미세한 구분을 정치인이 위증죄 회피의 무기로 동원한 것이다. 클린턴이 예일 로스쿨 출신 변호사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변호사이자 한때 법학 교수였던 인물이, 변호사들에게 답하면서 변호사 특유의 단어 분해 기법을 펼친 장면이다.
- 진리치와 함의의 완벽한 분리
베닛의 진술은 클린턴이 주장하는 좁은 의미에서는 진리치가 참일 수 있다. 그러나 통상의 청자가 받아들였을 함의 차원에서는 명백히 거짓이었다. 클린턴은 이 분리를 극단까지 밀고 갔다. "나는 진리치를 지켰다, 함의 차원의 오해는 듣는 자의 책임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 Bronston 원칙의 자각적 활용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Bronston 판결은 "문자 그대로 참이지만 비응답적인 답변"은 위증이 아니라 추궁자의 책임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클린턴은 이 원칙을 정확히 알고 활용했다. 즉 자신의 답변이 어떤 의미 해석에서든 진리치를 지키는 한 위증죄가 성립하지 않음을 계산하고 들어간 것이다.
한국어로 옮길 때의 어려움
이 변명을 한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어 '이다, 있다, 없다'는 영어 'is'만큼 시제가 정밀하게 분화되지 않는다. 한국어 "그런 일이 없다"는 통상 과거와 현재를 함께 부정하는 일반적 진술로 받아들여지지, 발화 순간만을 가리키는 진술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영어의 'is'가 다층적이기 때문에 클린턴 같은 변명이 가능했고, 한국어에서는 같은 변명이 통하기 어렵다.
물론 한국어에서도 변형된 폴터링은 가능하다. "현재로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라거나 "지금 시점에서는 무관하다"는 식의 한정 부사를 끼워 넣어 같은 효과를 노릴 수 있다. 그러나 영어 'is'가 보여준 무방어적 단어 하나의 다층성은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기 어렵다.
한 단어가 일으킨 파장
"It depends on what the meaning of 'is' is"는 즉각 미국 사회의 농담거리가 되었다. 코미디언들의 단골 소재였고, '클린턴식 화법(Clintonian)'이라는 형용사가 사전에 등재되었으며, 토드 로저스가 2017년 폴터링이라는 학술 개념을 정립할 때 도입부 사례로 삼은 것이 바로 이 발언이었다.
한 음절 단어 하나의 의미를 분해하여 위증죄를 회피하려 한 시도. 그것이 너무 정교했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 사회 전체가 그 정교함을 조롱했고, 결국 클린턴은 그날 저녁 대국민 연설에서 "관계는 부적절했고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해야 했다. 'is' 한 단어가 정치인의 운명을 한 자리에서 들어 올리려다 같은 자리에서 떨어뜨린 셈이다.
법망은 빠져나갔으나(클린턴은 위증죄로는 유죄를 받지 않았다) 신뢰의 망은 빠져나가지 못한 폴터링의 결말. 'is'라는 가장 단순한 단어가 가장 복잡한 변명의 무대가 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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