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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퓌론의 돼지: 폭풍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

by 변리사 허성원 2026. 5. 3.

퓌론의 돼지: 폭풍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

퓌론(약 기원전 360~270년)은 서양 회의주의의 시조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동행해 인도의 벗은 현자들을 만난 뒤 판단 유보(epoché)와 평정(ataraxia)의 사상을 세웠다. 그는 글을 남기지 않았으나, 갑판 위 돼지의 일화가 천년을 넘어 살아남았다.
폭풍 속에서 모두가 떨 때, 갑판 한 구석의 돼지만은 태평하게 먹이를 먹었다. 퓌론은 그 돼지를 가리키며 "현자라면 저 돼지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르침은 네 겹이다. 첫째, 평정은 더 많이 아는 데서가 아니라 안다는 환상을 내려놓는 데서 온다. 둘째, 사람을 흔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판단이다. 셋째, 평정은 무감각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음이다. 넷째, 돼지는 무지로 흔들리지 않지만 현자는 통찰로 흔들리지 않는다.
리더가 가져갈 한 줄. 폭풍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폭풍에 대한 판단은 멈출 수 있다.

I. 신비로운 시조

퓌론(Pyrrhon of Elis, 약 기원전 360~270년)은 서양 회의주의의 시조로 불린다. 그러나 그가 직접 쓴 책은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사상은 제자 티몬(Timon of Phlius)의 풍자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열전』, 그리고 약 500년 후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가 체계화한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90세 가까이 장수했다는 점부터 흥미롭다. 판단을 유보하고 평정에 이른 사람의 삶이 길고 평온했다는 것이, 그의 사상에 대한 일종의 증언이다. 청년기에는 화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데모크리토스 학파의 아낙사르코스(Anaxarchos)를 만나 철학으로 전향했다.

결정적 사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동행이다. 기원전 334년경부터 약 10년간 페르시아, 박트리아, 인도까지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그는 김노소피스타이(Gymnosophistai, '벗은 현자들')라 불리던 자이나교 또는 초기 불교 계열의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과 내면의 평정이 퓌론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엘리스로 돌아온 뒤 그는 평생 가르쳤지만 글을 쓰지 않았다. 시민들은 그를 존경해 최고 사제로 추대했고, 철학자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하는 법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II. 사상의 핵심, 세 물음과 세 답

아리스톤(Aristocles)이 전하는 퓌론의 사상은 세 가지 물음과 세 가지 답으로 정리된다.

첫째 물음. 사물 자체의 본성은 어떠한가? 답은 '무차별'(adiaphora)이다. 사물은 본질적으로 어떠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둘째 물음. 그렇다면 우리는 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답은 '판단 유보'(epoché)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물음. 그러한 태도의 결과는 무엇인가? 답은 '말 못 함'(aphasia)에 이은 '평정'(ataraxia)이다. 마음의 동요가 사라진다.

이것이 퓌론주의의 3단 구조다. 사물은 단정 불가, 판단 유보, 마음의 평정. 인식론에서 출발해 윤리학으로 귀결되는 독특한 구조다. 알기 위한 회의가 아니라 살기 위한 회의인 셈이다.

III. 폭풍 속 돼지

퓌론의 일화 가운데 가장 깊은 가르침을 담은 것이 '돼지의 평정' 이야기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한다.

배를 타고 가다 폭풍을 만났다. 거센 파도와 휘몰아치는 바람 앞에서 동승객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비명을 지르고 신에게 기도하고 짐을 부둥켜안았다. 철학자라 자처하던 자들조차 얼굴이 새파래졌다.

오직 한 마리, 갑판 한 구석의 돼지만은 달랐다. 폭풍 속에서도 태평하게 먹이를 먹고 있었다. 파도가 갑판을 휩쓸고 배가 기울어도 그 돼지는 자기 일에 몰두했다.

퓌론이 동승객들에게 그 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자라면 저 돼지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IV. 돼지가 가르치는 것

이 짧은 일화가 담은 가르침의 결을 풀어 본다.

현자의 평정은 돼지의 무지와 같은 모양을 한다

가장 먼저 충격적인 것은 비유의 대상이다. 퓌론은 인간의 지혜를 신이나 영웅이나 현자가 아니라 돼지에 견주었다. 동양 철학자가 "성인은 어린아이와 같다"(노자)고 한 것과 비슷한 결이지만, 더 도발적이다. 돼지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도 않다. 그저 무지할 뿐이다.

여기에 회의주의의 핵심이 있다. 평정에 이르는 길은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폭풍 속에서 사람들이 떠는 이유는 '이 폭풍이 위험하다'는 판단,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단정, '살아남아야 한다'는 집착 때문이다. 돼지는 그런 판단을 갖지 않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퓌론이 우리에게 진짜 돼지가 되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돼지의 무지가 우연히 도달한 결과다. 현자는 그 결과를 의식적 수련으로 이르러야 한다. 돼지는 모르기에 흔들리지 않고, 현자는 판단을 유보하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도달점은 같되 경로가 정반대다.

외부 사건은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 우리의 판단이 흔든다

폭풍이 사람을 흔드는가, 폭풍에 대한 판단이 사람을 흔드는가. 이것이 퓌론의 두 번째 가르침이다. 같은 폭풍이 돼지를 흔들지 못한 사실은, 폭풍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을 흔드는 힘을 갖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흔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이는 후에 스토아 철학의 핵심 명제로 정식화된다. 에픽테토스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판단이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통찰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부처의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는 가르침과도 통한다.

리더가 위기 앞에서 흔들리는 이유도 이와 같다. 위기 자체가 흔드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재앙으로 단정하는 판단이 흔든다. 같은 사태를 어떤 리더는 기회로 보고 어떤 리더는 절망으로 본다. 외부는 같지만 내부 판단이 다르기에 결과가 다르다.

평정은 무감각이 아니다

여기서 자주 발생하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 돼지의 평정이 곧 무감각이나 무책임은 아니다. 퓌론 자신도 일상에서는 매우 분별 있게 행동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평정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다. 폭풍 속에서 키를 잡아야 하는 선장이 평정을 잃으면 배가 침몰한다. 그러나 평정을 유지하는 선장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자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되 행동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자다.

스토아의 후예들은 이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다. 'a-pathos', 곧 정념의 부재가 아니라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음이다. 동양에서는 부동심(不動心)이라 했다.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돼지의 평정과 현자의 평정이 다른 단 한 가지

퓌론이 정말 가르치고자 한 핵심은 어쩌면 이것이다. 돼지의 평정은 무지에서 온 우연이지만, 현자의 평정은 통찰에서 온 선택이다. 결과는 같아 보여도 그 안에 담긴 자유의 크기가 다르다.

돼지는 폭풍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평정은 한 단계 위의 폭풍, 가령 더 큰 위협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자의 평정은 모든 사건이 본질적으로 무차별하다는 통찰에서 오기에, 어떤 폭풍 앞에서도 동일하다.

여기에 인간의 위엄이 있다. 돼지처럼 평정을 얻은 것이 아니라 평정을 선택한 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갖는다. 회의주의가 단순한 무관심으로 미끄러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V. 시대를 가로지르는 메아리

폭풍 속 돼지의 일화는 후대 사상에 깊은 메아리를 남겼다.

스토아 학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이 정확히 이 가르침이다. "사물 자체는 영혼을 만지지 못한다. 영혼을 흔드는 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황제의 자리에서 매일 외부 압력에 시달리던 그가, 800년 전 갑판 위의 돼지를 떠올린 셈이다.

동양에서는 장자(莊子)가 비슷한 결을 펼쳤다.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지몽이 그 정점이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자리에 서면, 나에 대한 집착도 나비에 대한 집착도 사라진다. 이 자리가 곧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제물(齊物)의 자리이며, 어떤 폭풍도 흔들 수 없는 자리다.

선불교의 임제(臨濟)는 더 격렬한 표현을 썼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자리가 곧 진실이다. 외부 환경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평정이 환경을 의미화한다는 통찰이다.

VI. 리더가 가져갈 한 가지

이 일화에서 리더가 가져갈 가르침을 한 줄로 압축하면 이렇다.

폭풍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폭풍에 대한 판단은 멈출 수 있다.

리더가 마주하는 거의 모든 위기는 사실 두 겹이다. 첫 번째 겹은 사건 자체다. 매출 하락, 인재 이탈, 소송, 평판 위기, 시장 변동. 두 번째 겹은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감정이다. 두려움, 분노, 자책, 절망, 조급함.

대부분의 잘못된 결정은 첫 번째 겹이 아니라 두 번째 겹에서 나온다. 사건 자체가 잘못된 결정을 강요하는 경우는 드물다. 두려움이, 분노가, 조급함이 잘못된 결정을 강요한다. 폭풍에 대한 판단이 폭풍 자체보다 더 큰 위험인 경우가 훨씬 많다.

퓌론의 돼지는 두 번째 겹을 갖지 않은 존재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다. 현자는 두 번째 겹을 내려놓을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다.

리더의 인식론은 이 두 겹의 구별에서 시작된다. 사건은 사건대로 본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판단은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이 판단이 정말 사건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가. 이 판단이 정말 필연적인가, 아니면 다른 판단도 가능한가.

이 잠시의 멈춤이 곧 판단 유보(epoché)이며, 이 멈춤 끝에 평정(ataraxia)이 온다. 그리고 평정 위에서 내려진 결정만이 폭풍 속에서도 배를 항구로 이끈다.

VII. 갑판 위의 한 장면

이 일화가 천년을 넘어 우리에게 도달한 까닭은 단순하다. 갑판 위의 그 장면이 누구에게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폭풍 같은 회의가 몰아치는 이사회. 비명이 오가는 위기 대응 회의. 사방에서 정보가 쏟아지는 협상 테이블. 모두가 흔들릴 때 흔들리지 않는 한 사람이 거기 있다면, 그 한 사람이 바로 배를 구한다.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도, 더 빠른 판단도, 더 강한 의지도 아닐지 모른다. 갑판 한 구석의 돼지를 한 번 떠올리는 것. 폭풍이 본질적으로 나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폭풍에 대한 내 판단이 나를 흔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그 잠깐의 멈춤이 어쩌면 가장 큰 리더십의 자질일지 모른다.

퓌론은 인도에서 돌아와 평생 가르쳤지만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책이 아니라 몇 개의 장면이다. 그 가운데 갑판 위의 돼지가 가장 길게 살아남았다. 이 장면 하나로도 한 권의 책에 맞먹는 가르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