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미워하지 마라
우리 직업은 늘 누군가를 위해 법률 행위를 대신하는 운명이다. 일을 하다 보면 분쟁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되고, 분쟁의 상대방과 직간접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분쟁을 대하는 당사자들의 다양한 태도를 보게 된다.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았을 때 대개의 사람들은 먼저 분노부터 한다. 자신의 평온을 깨고 혼란을 안긴 상대가 응당 미울 것이니, 그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당연한 감정일 수 있다. 그 적대감은 상대에 그치지 않고 대리인에게까지 연장되어 투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분쟁 상대를 왜 그토록 쉽게 적으로 규정할까.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끌린다고 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의 사고 시스템이 무척이나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적은 틀렸고 나는 옳다. 적의 손실이 곧 나의 이익이며, 적의 고통은 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면 복잡한 분쟁이 이 단순한 공식으로 명료하게 정리된다.
그러나 이 명료한 미움의 대가는 비싸다. 상대를 무찔러야 할 적으로 못 박는 순간, 더 이상 배울 것도, 양보를 주고받을 것도, 진지하게 설득할 것도, 상대를 헤아리거나 용서를 구할 일도 없어진다. 오직 이기느냐 지느냐만 남는다. 미움은 정당해 보이고, 그 미움을 나름의 논리로 더욱 단단히 정당화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 '대부 3'에서 마이클 콜레오네가 조카에게 남긴 충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이 흐려진다." 영화 대사이지만 오랜 현자들이 여러 형태로 가르쳐주던 지혜다.
미워하는 사람은 상대뿐만 아니라 상황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미움이라는 필터가 모든 것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양보의 신호를 보내도 함정으로 읽히고, 미안하다고 말해도 위선으로 해석된다. 한 번이라도 화를 내본 사람은 안다.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인 뒤 돌이켜보면 그때 상대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심지어는 자신이 한 말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미움이 귀를 막고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분별'이 있다. '상대'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상대와 나 사이에 있다. '문제'와 '상대',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공격해야 할 대상은 문제이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공격해 상대를 이긴들,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고 관계만 처참히 무너진다.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면 구도가 바뀐다. 마주 서서 대립하던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같은 문제를 바라본다. 문제는 둘 사이에 놓인 공동의 과제가 되고, 상대는 적이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잠시 반대 상황을 떠올려보자. 상대가 없는 상황 말이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지독한 번민과 고통을 겪어봤을 것이다. 그런 상황엔 미워할 대상조차 없다. 비난할 상대도, 들어줄 이도, 해결을 요구할 사람도 없다. 그 고독에 비하면 분쟁은 차라리 풍성한 관계의 문제다. 상대가 나를 고소하든 다투든, 그는 적어도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가 반응하고 나도 반응한다.
그러니 상대가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일 수도 있다. 같이 문제를 풀어갈 대상이 있다는 것. 밀고 당기며 답을 찾아볼 파트너가 있다는 것. 이 관점의 전환이 분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당사자가 서로를 문제 해결의 파트너로 여기지 않으면, 결국 소송 등에서 제3자의 손에 문제의 해결이 맡겨진다. 자기 손 안의 답을 놓아버리고 주도권을 남에게 넘기는 것은 비극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해답의 재료가 있다. 과거의 신뢰, 공유한 기억, 서로의 약점과 강점에 대한 이해, 함께 만든 맥락 등. 제3자는 이 재료에 충분히 접근할 수 없다. 어떤 제3자도 당사자보다 더 좋은 답을 내놓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영화 '대부 2'에서는 마이클이 아버지에게 배운 가르침을 전한다. "친구는 가까이, 그러나 적은 더 가까이 두라." 얼핏 얕은 처세술처럼 들리지만 의미는 무겁다. 적을 멀리 두면 그는 상상 속의 괴물이 된다. 멀리 있는 적은 실제보다 훨씬 크고 훨씬 나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가까이 함께하면 적도 달라진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대도 나처럼 불안하고, 억울하고, 지쳐 있다. 층간 소음으로 다투던 윗집 사람도 아이 때문에 지쳐 있고, 기업 간 분쟁의 상대도 나름의 사정과 상처를 안고 있기에 그렇게 외치는 것이다. 가까이 가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면 해답이 보인다. 적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첩보가 아니라 이해의 일이다. 이해한 상대를 계속 미워하기는 어렵다.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때로 더 먼 곳까지 간다. 필요할 때, 진실이 요구할 때, 상황이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 때, 상대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끝까지 자존심을 붙들고 있는 편이 진정한 패배인 경우가 많다. 그 결정적 순간을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것은 약자의 비겁이 아니라 강자의 용기다.
1970년 12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 영웅 추모비 앞에서 예고 없이 무릎을 꿇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 적었다. "독일 역사의 심연 앞에서, 살해된 수백만의 무게 아래, 나는 언어가 무너질 때 인간이 하는 일을 했다." 그 한 번의 무릎 꿇기가 독일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무릎을 꿇음으로써 오히려 일어선 것이다.
분쟁에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늘 지혜로운 싸움법이 아님을 잘 안다. 유도에는 상대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 방향으로 흘려보내 상대 스스로 균형을 잃게 하는 원리가 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상대의 공격 에너지를 내 힘으로 막으려 하면 둘 다 다친다. 그러나 그 힘의 방향을 읽고 살짝 비켜주면, 상대는 자기 힘에 자기가 넘어진다.
분쟁의 대화에서도 같다. 상대가 격앙해 비난을 퍼부을 때 조목조목 반박하면 싸움은 격화된다. 그 순간 한 번 "그렇게 느끼실 만합니다"라고 받아내면, 상대의 힘은 방향을 잃고 가라앉는다. 상대의 거친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하는 대신 그 뒤의 절실함을 묻는 것도 같은 원리다. 상대의 에너지가 그 순간 대립의 재료에서 이해의 재료로 바뀐다. 힘을 흘려보내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가장 세련된 강함이다.
잘 해결되는 분쟁이나 협상은 춤을 닮았다. 한쪽이 다가가면 한쪽이 받아주고, 한쪽이 물러나면 한쪽이 따라간다. 밀고 당기는 사이에 전에 없던 합의가 만들어진다. 이 합의는 누가 이기고 누가 진 결과가 아니다. 둘이 함께 추어낸 하나의 춤이다.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다. 분쟁의 대리인으로 살아오며 본 가장 큰 패자는, 가장 거세게 미워한 사람들이었다. 미움이 그들의 눈을 가렸고, 가려진 눈으로는 자기 손에 이미 쥐어져 있던 좋은 답을 보지 못했다. 반대로 가장 좋은 합의에 도달한 의뢰인들은 어느 순간 상대를 '풀어야 할 사람'에서 '함께 풀 사람'으로 바꿔 보던 이들이었다. 그 전환은 큰 깨달음이 아니라 작은 마음먹기에서 왔다. 미워하지 않기로 하는 마음먹기다.
결국 분쟁은 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미움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의 문제다. 적은 바깥에 있지만, 미움은 안에 있다. 바깥의 적을 이기려는 사람은 안의 미움에 진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이 흐려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답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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