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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적을 미워하지 마라

by 변리사 허성원 2026. 4. 23.

적을 미워하지 마라

_ 상대가 있다는 행운: 분쟁을 춤으로 바꾸는 철학

분쟁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지독히 미워한다. 무찌르고 패퇴시켜야 할 존재. 그러나 이 규정과 미움 자체가 분쟁을 수렁으로 만든다. 대부 3편에서 마이클 콜레오네가 조카에게 남긴 충고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이 흐려진다. 미움은 상대를 해치기 전에 나의 눈을 먼저 흐리게 한다. 한편 상대가 없는 고통을 상상해보라. 혼자만이 겪어야 하는 병, 혼자만이 마주해야 하는 실존의 허무. 그 고독의 깊이 앞에서 상대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축복이다. 더 나아가 상대를 적으로 배척하는 순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자신의 손을 떠난다. 판사, 중재자, 여론, 시간이 대신 결론을 내린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대화의 파트너로 삼을 때 비로소 분쟁은 춤이 된다. 자신의 리듬과 의지로 리드하는 춤. 이 글은 왜 상대가 적이 아니라 춤의 파트너인지, 왜 분쟁은 저주가 아니라 행운인지를 동서양 철학과 역사적 사례를 통해 해명한다.

1. 적이라는 환상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찾았다. 그의 눈에 정치는 결국 누가 나의 적이고 누가 나의 동지인가를 가르는 일이었다. 이 사고는 20세기 전체주의의 토양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인터넷 공론장부터 기업의 경쟁 전략까지 널리 스며들어 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사고는 단순해진다. 적은 틀렸고 나는 옳다. 적은 제거되어야 하고 나는 존속해야 한다. 적의 손실은 나의 이익이다.

그러나 이 명료함은 치명적 대가를 치른다. 적으로 규정된 상대는 더 이상 대화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그에게서 배울 것도, 양보받을 것도, 합의할 것도 없다. 오직 이기느냐 지느냐의 이항만 남는다. 그리고 이 이항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불러온다. 말의 폭력, 법의 폭력, 때로는 물리적 폭력을.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지적한 것처럼, 타자를 인간 이하로 규정하는 언어가 먼저 오고 제거하는 행위가 뒤따른다. 적이라는 단어는 부드러운 외피를 두른 총알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규정이 부정확하다는 데 있다. 분쟁의 상대는 대부분 적이 아니다. 그는 단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 다른 관점에서 같은 상황을 보는 사람, 다른 역사와 배경에서 형성된 사람이다. 그를 적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사태를 단순화하려는 편의일 뿐, 사태 자체의 진실이 아니다.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의 고전 Getting to Yes는 협상의 첫 번째 원칙으로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라고 제시한다. 상대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와 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 간단한 전환이 분쟁의 전체 풍경을 바꾼다.

2. 미움의 독과 거리의 지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3편에서 마이클 콜레오네는 조카 빈센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충고한다. 적을 결코 미워하지 마라. 너의 판단이 흐려진다. 이 한 문장이 대부 삼부작의 핵심 철학을 압축한다. 마피아 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미 수백 년 전에 도달했던 통찰이다.

세네카는 분노론에서 분노를 순간의 광기라고 불렀다. 분노한 사람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면 짐승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그는 썼다. 분노, 증오, 원한은 대상을 향한 감정이지만 실제로 파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미워하는 사람은 상대를 정확히 보지 못한다. 미움의 필터가 모든 신호를 왜곡시킨다. 상대가 양보할 신호를 보내도 공격의 준비로 읽힌다. 상대가 진심을 말해도 술수로 해석된다. 이 왜곡 속에서 내려지는 모든 판단이 이미 틀어져 있다. 마이클 콜레오네의 경고는 정확히 이 지점을 꿰뚫고 있다. 미움은 상대를 겨냥한 화살이지만 시위를 놓는 순간 먼저 내 눈을 쏜다.

니체는 이 상태를 원한이라는 이름으로 해부했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원한에 사로잡힌 자를 반응적 인간이라 불렀다. 그는 창조하지 못한다. 그의 모든 행동은 적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길을 걷지 못하고 적이 만든 길 위를 역방향으로 걸을 뿐이다. 적을 미워하는 순간 나는 그의 하수인이 된다. 그가 나의 시간과 에너지의 용처를 결정하게 된다. 적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정해지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분쟁에서의 진정한 패배다. 상대는 나를 이길 필요조차 없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그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대부 2편에서 마이클은 또 다른 계율을 제시한다. 친구는 가까이, 그러나 적은 더 가까이 두라. 그는 이것이 아버지 비토 콜레오네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처음 듣기엔 교활한 처세술처럼 들린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적을 멀리 두면 그는 미지의 존재가 된다. 미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과장을 낳는다. 멀리 있는 적은 실제보다 크고 무섭게 보인다. 그는 상상 속의 괴물이 된다. 가까이 두면 비로소 그의 실제가 보인다. 그의 두려움, 약점, 욕망, 모순. 그가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임이 드러난다. 이 인식이 분쟁을 관리 가능한 규모로 축소시킨다. 가까이 둔다는 것은 관찰하고 이해하고 대화한다는 뜻이다. 적을 나의 시야 안에 두는 것. 그래야 내가 리드할 수 있다.

이 두 계율은 결합되어 하나의 태도가 된다. 감정적으로는 냉정하게, 관계적으로는 가깝게. 미움 없이 근접하기. 스토아의 아파테이아와 손자의 지피지기가 만나는 지점이 여기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같은 지혜를 변주했다. 지혜로운 군주는 적을 두려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적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 그를 이해한다. 이해는 미움의 반대다. 충분히 이해된 상대는 더 이상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미움은 이해의 실패가 남긴 잔여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이클 콜레오네가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한 시칠리아의 지혜였고, 동시에 동서양의 위대한 전략가들이 공통으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3.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문제의 심연

상대가 있다는 것이 왜 행운인지 이해하려면 반대 상황을 상상해야 한다. 상대가 없는 문제. 혼자만이 겪어야 하는 문제. 카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려낸 부조리가 그런 것이다.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고, 다시 굴러 내려온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는 영원한 형벌. 시시포스에게는 상대가 없다. 오직 바위와 중력이라는 무정한 자연이 있을 뿐이다. 이 고독의 깊이가 시시포스의 고통의 본질이다.

더 가까운 예는 난치병이다. 투병하는 환자가 흔히 토로하는 고통은 통증 그 자체보다 아무와도 나눌 수 없다는 고립감이다. 가족도 의사도 결국은 밖에 있다. 그 몸속의 고통은 오직 환자 자신만이 감당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지적한 것처럼, 죽음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어줄 수 없다. 이 대체 불가능성이 죽음을 실존의 가장 깊은 고독으로 만든다.

노년의 외로움, 탈출구 없는 가난, 이해받지 못하는 정신적 고통. 이 모든 상황의 공통점은 상대의 부재다. 맞서 싸울 누군가가 없다는 것, 대화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 이해받거나 설득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표류해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에게 가장 결정적인 상실은 물자가 아니었다. 동행의 부재였다. 프라이데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크루소의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었다. 상대 없이는 자기 자신조차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고독에 비하면 분쟁은 오히려 관계의 형태다. 상대가 나를 미워해도, 나를 고소해도, 나와 법정에서 다툰다 해도, 그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나에게 반응하고 있다. 나를 무시하지 않고 있다. 분쟁은 역설적으로 연결의 증표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통찰한 것도 이것이다. 두 자기의식이 맞부딪칠 때 비로소 자기의식은 자기가 된다. 상대가 없는 의식은 그저 자기에게 갇힌 고독한 웅얼거림에 불과하다.

4. 타자라는 거울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 전체가 하나의 근본적 실수 위에 세워졌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타자를 자아의 확장으로 환원하는 사고였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아에서 출발해 자아로 귀결된다. 칸트의 초월적 주체도 결국 자기 자신의 구조를 확인할 뿐이다. 레비나스에게 진짜 철학은 다른 곳에서 시작된다.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에서.

타자의 얼굴은 나의 이해를 초월한다. 그 얼굴은 내가 소유할 수도, 분류할 수도, 환원할 수도 없는 무한성의 현현이다. 이 무한성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넘어설 기회를 얻는다. 윤리는 자아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로부터 오는 요구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윤리가 제1철학이라고 선언한 이유다.

이 관점에서 분쟁의 상대는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의 좁은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나에게 동의하는 사람에게서는 배울 것이 없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관점에서, 때로는 나와 반대되는 위치에서, 나에게 저항하는 사람만이 나에게 나 자신의 한계를 보여준다. 상대는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성장의 재료다.

마르틴 부버는 이 통찰을 나와 너의 철학으로 풀어냈다. 부버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만난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대상화의 관계다. 나는 세계를 이용하고 분류하고 지배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다르다. 상대를 대상이 아니라 전체로서,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으로서 만난다. 부버는 이 나와 너의 관계에서만 진정한 삶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관계는 분쟁 속에서도, 어쩌면 분쟁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가능하다. 상대를 나와 너로 만날 때 분쟁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니다. 만남이 된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대화 이론도 같은 지평에 있다. 가다머는 진정한 대화를 지평의 융합으로 묘사했다. 나는 나의 지평을 가지고 있고 상대는 상대의 지평을 가지고 있다. 대화는 이 두 지평이 단순히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확장되며 새로운 지평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상대도 이전의 상대가 아니다. 둘 다 더 넓어진 사람이 된다. 분쟁이 이런 대화의 형태를 띨 수 있다면 그것은 소모가 아니라 창조다.

5. 수동성의 대가

상대를 배척하는 순간 벌어지는 가장 치명적인 일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잃는 것이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화를 포기한 분쟁은 어디로 가는가. 그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법정으로 가는 분쟁을 생각해보라. 민사 소송에서 당사자는 서류를 제출하고 증인을 세우고 변호사를 고용한다. 그러나 최종 판결은 판사가 내린다. 판사는 그 분쟁의 구체적 맥락을 모른다. 당사자들의 관계사를, 그 감정의 결을, 그 일이 벌어진 구체적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판사는 오직 법률 조문과 제출된 증거에 근거해 판결한다. 결과는 이분법이다.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진다. 혹은 어색한 절충이 나온다. 어느 쪽도 만족하지 않는다.

국제 분쟁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거부한 두 나라가 제3국의 중재에, 유엔 결의에, 국제 여론에 운명을 맡긴다. 그 중재와 결의와 여론은 당사국의 구체적 사정을 모른다. 강대국의 이익, 지정학적 계산, 피상적 도덕이 뒤섞인 판단을 내린다. 당사국은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그랬다. 독일은 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일방적 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그 굴욕이 20년 뒤 더 큰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개인의 삶에서도 구조는 같다. 가족 간의 갈등을 대화로 풀지 못하면 결국 결혼이 깨지거나 가족이 흩어진다. 그 결정은 당사자가 내리는 것 같지만 실은 시간과 관성과 우연이 내린다. 회사 동료와의 갈등을 대화로 풀지 못하면 인사이동이나 퇴사로 끝난다. 그 결정도 인사팀이, 혹은 상황이 대신 내린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자기기만이라고 부른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고 타인에게, 운명에게, 역할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태도. 사르트르는 이 태도를 실존의 근본적 불성실로 규정했다.

상대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은 피곤하다.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양보할 것과 지킬 것을 구분하는 일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피곤함을 감수할 때에만 주도권은 자신에게 남는다. 자신의 리듬, 자신의 가치, 자신의 의지가 해결의 방향을 결정한다.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편한 길이 아니라 비겁한 길이다. 비겁함의 대가는 자기 삶의 저자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6. 화이부동, 동양의 조화로운 대립

동양의 지혜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고 말했다. 군자는 조화하되 같지 않고, 소인은 같으나 조화롭지 않다. 이 짧은 문장에 대립과 조화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조화는 차이를 전제로 한다. 모두가 같으면 조화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의 조화는 여러 악기의 다른 음색에서 온다. 요리의 조화는 여러 재료의 다른 맛에서 온다. 차이가 없으면 조화도 없다. 공자가 말한 군자의 태도는 상대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그 차이를 통해 더 높은 질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반대로 소인은 표면적으로는 같은 척하지만 내면에서는 대립한다. 파벌을 만들어 자기편끼리 뭉치고 다른 편을 배척한다. 겉보기에는 통일된 것 같지만 실상은 분열이다.

장자는 더 급진적이다. 제물론에서 장자는 옳음과 그름, 이것과 저것의 구별 자체를 상대화한다. 장자에게 옳음은 언제나 특정 관점에서의 옳음이다. 이 관점을 절대화할 때 분쟁이 발생한다. 장자는 저 유명한 호접몽을 통해 이 점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확신은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옳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틀릴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열어두는 순간 분쟁은 대립에서 대화로 전환된다.

손자병법의 지혜도 같은 맥락에 있다.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가르쳤다.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승리다. 왜 그런가. 싸움 자체가 이미 낭비이기 때문이다. 인명, 재화, 시간, 감정의 낭비. 싸워서 이기더라도 잃은 것을 회복할 수 없다. 진정한 승리는 상대가 스스로 협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를 존중할 때만 가능하다. 상대를 무시하고 굴종을 강요하면 원한이 남고, 원한은 언젠가 더 큰 분쟁으로 돌아온다.

노자의 유약승강 역시 이 지혜를 담고 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물은 가장 부드럽지만 바위를 깎는다. 부드러움은 상대에 맞춰 자신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상대와 맞부딪치지 않고 상대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방향으로 이끄는 능력이다. 일본의 합기도가 이 원리의 무술적 구현이다. 합기도는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지 않는다. 상대의 힘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상대 자신의 힘에 의해 넘어지게 한다. 상대는 파트너다. 그의 힘 없이는 기술이 성립하지 않는다.

7. 춤으로서의 분쟁

춤이라는 은유로 돌아가자. 이 은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분쟁에 관한 근본적 통찰을 담고 있다. 춤에는 몇 가지 본질적 특성이 있다.

첫째, 춤에는 반드시 파트너가 있다. 솔로 댄스조차 공간과 음악이라는 파트너를 전제로 한다. 파트너 없는 춤은 춤이 아니다. 그저 움직임일 뿐이다. 탱고를 생각해보라. 아르헨티나의 탱고 선생들은 탱고에는 세 사람이 춤춘다고 말한다. 리더, 팔로워,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공간. 이 공간이야말로 탱고의 주인공이다. 두 몸이 만들어내는 이 제3의 존재. 분쟁도 마찬가지다. 분쟁이라는 공간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제3의 지대다. 이 지대를 잘 가꾸면 창조가 되고 잘못 가꾸면 파괴가 된다.

둘째, 춤에는 리듬이 있다. 리듬은 일정한 패턴의 반복이다. 분쟁에도 리듬이 있다. 말하고 듣고 반응하고 다시 말하는 왕복의 패턴. 이 리듬이 깨지면 대화는 고성이 되고 싸움이 된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춤을 찬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에게 춤은 가장 세련된 형태의 운명애였다. 무거운 운명을 춤으로 승화시키는 능력. 분쟁이라는 무거움을 춤의 리듬으로 변환시키는 능력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셋째, 춤에서는 리드할 수 있다. 탱고에서 리더는 파트너를 강압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파트너가 그 신호를 읽어 응답한다. 파트너가 응답하지 않으면 리드는 성립하지 않는다. 리드는 쌍방의 협력이다. 그러나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리더다. 분쟁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은 상대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와 조건을 만들어 상대가 자발적으로 건설적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넷째, 춤은 아름답다. 잘 추어진 춤에는 관객조차 숨을 죽이게 만드는 미적 가치가 있다. 잘 해결된 분쟁도 아름답다.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며 차이를 넘어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은 예술이다.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가치다. 이것은 효율의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효율만 생각하면 법정으로 가서 빨리 판결받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효율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문제를 겪었는가, 어떻게 타인과 만났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8. 댄스의 역사

인류사에는 분쟁을 춤으로 바꾼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이 순간들을 살펴보는 것은 추상적 통찰을 구체로 끌어내리는 작업이다.

넬슨 만델라와 F. W. 데 클레르크의 사례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인 예다. 만델라는 27년을 감옥에서 보낸 흑인 운동가였고 데 클레르크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이었다. 이들은 적으로 만났어야 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감옥에서부터 이미 이 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너의 언어인 아프리칸스를 배웠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과 정서를 연구했다. 마이클 콜레오네의 계율을 실천한 셈이다. 적을 가장 가까이 두고 가장 깊이 이해하기. 만델라의 전기작가 앤서니 샘슨에 따르면, 그가 출옥할 때 이미 백인 지도층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만델라는 상대를 적으로 보지 않았다. 함께 남아공이라는 춤을 출 파트너로 보았다. 1993년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만약 만델라가 출옥 후 미움의 길을 걸었다면 남아공은 또 다른 르완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은 그가 미움이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진리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링컨의 사례도 인상적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윌리엄 수어드, 새먼 체이스, 에드워드 베이츠를 각각 국무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당시 정치적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이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은 이 결정을 분석한 저서 라이벌들의 팀에서 링컨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적들을 내각에 끌어들였다고 논증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링컨은 이 원칙을 남북전쟁이라는 위기 앞에서 실천한 것이다. 정적을 내각 밖에 두었다면 그들은 외부에서 링컨을 공격했을 것이다. 내각 안에 두니 그들의 논리와 불만과 야망이 모두 링컨의 시야에 들어왔다. 링컨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판단을 벼리길 원했다. 그 결과 미국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그는 관리해냈다. 정적을 미움으로만 대하는 지도자였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안와르 사다트와 메나헴 베긴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또 다른 경이다. 1977년 사다트는 이집트 대통령으로서 이스라엘 의회를 방문했다. 아랍 지도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랍 세계 전체가 그를 배신자로 비난했다. 그러나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적이 아닌 파트너로 재규정하는 거대한 춤을 시작한 것이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의 중재 아래 사다트와 베긴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협정을 맺었다. 두 사람 모두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81년 사다트는 이 춤의 대가로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가 시작한 춤은 이후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출발점이 되었다.

기업의 세계에도 예가 있다. 1997년 빌 게이츠는 파산 직전이던 애플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두 회사는 소프트웨어 특허 분쟁 중이었고 오랜 기간 치열한 경쟁자였다. 게이츠의 투자는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니었다. 두 회사가 맞물려 있는 생태계에 관한 근본적 인식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게도 애플이 필요했다. 경쟁자의 몰락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었다. 이 판단이 없었다면 애플의 부활도, 그로 인한 수많은 혁신도 없었을 것이다. 2004년 삼성과 소니가 설립한 S-LCD 합작법인도 같은 원리의 산물이다. 두 회사는 디스플레이 시장의 최대 경쟁자였다. 그러나 LCD 패널의 대규모 투자는 한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리스크였다. 두 적이 손을 잡아 서로를 살렸다.

북아일랜드의 굿프라이데이 협정도 빼놓을 수 없다. 수십 년간 피로 물든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은 1998년 상대를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결정에 의해 비로소 해결의 물꼬를 텄다. 신페인당과 얼스터 연합당은 서로를 테러리스트로, 억압자로 불러왔다. 이 호칭을 멈추고 협상 테이블에 앉기까지의 여정이야말로 이 협정의 진짜 서사였다. 조지 미첼 전 미국 상원의원의 인내심 있는 중재가 유명하지만, 진짜 공은 상대를 적이 아닌 파트너로 재규정하기로 결심한 양쪽 당사자들에게 있다.

9. 리드하는 자의 자격

춤을 리드할 수 있는 사람은 몇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이 자격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첫째는 상대에 대한 공부다. 만델라가 아프리칸스를 배웠듯이, 리더는 상대의 언어와 역사와 정서를 공부해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움직일 수는 없다. 공부 없는 리드는 강압이 된다. 강압은 오래가지 못한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계율이 요구하는 구체적 실천이 바로 이 공부다. 적을 가까이 두면 그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 적을 공부하면 그는 더 이상 적이 아니게 된다.

둘째는 감정의 통제다. 미움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말이 여기서 다시 무게를 얻는다. 분노와 증오는 리듬을 무너뜨린다. 미워하는 자는 춤출 수 없다. 그는 매 순간 상대에게 상처 주는 일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발걸음을 잃는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강조한 아파테이아, 정념으로부터의 자유가 여기에 필요하다. 완전한 무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내면의 평정이다. 링컨이 가장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그는 극도의 압박 속에서도 리듬을 잃지 않았다.

셋째는 인내다. 춤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분쟁도 마찬가지다. 사다트와 베긴의 협상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타결되었다고 믿으면 오산이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두 사람은 13일을 함께 있었고, 그 전에 수년의 준비가 있었다. 조급한 사람은 리드할 수 없다. 그는 곧 판을 엎어버리거나 법정으로 달려간다. 리드하는 자는 기다릴 줄 안다.

넷째는 목적의 명료성이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것이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미움 없이 적을 가까이 둔다는 것이 무조건 양보한다는 뜻도 아니다. 진정한 리더는 무엇을 양보할 수 있고 무엇을 양보할 수 없는지 선명하게 안다. 이것이 없으면 춤은 방향을 잃은 표류가 된다. 화이부동이라는 공자의 말이 다시 의미를 얻는다. 조화하되 같지 않다. 상대를 받아들이되 자신을 잃지 않는다.

다섯째는 춤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춤을 춘다고 생각하면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춤 자체를 사랑하면 분쟁은 기회가 된다.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볼 기회. 이 태도의 전환이 궁극의 자격이다. 니체가 운명애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닥쳐온 운명을 저주하지 않고 사랑하는 힘. 분쟁이 닥쳤을 때 그것을 저주하지 않고 춤의 기회로 환영하는 자만이 진짜 리더다.

상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미워하면 그 행운을 놓친다. 멀리하면 그 행운을 놓친다. 그 행운을 알아보는 눈, 미움의 독에 물들지 않는 마음, 적을 가장 가까이 두는 담력, 그것을 아름답게 리드하는 기술. 이 모두가 분쟁을 살아가는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세상의 모든 분쟁이 이런 춤이 된다면 인류사의 많은 비극이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개인의 삶의 많은 고통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적으로 보는 대신 파트너로 보라. 미워하는 대신 이해하라. 멀리 두는 대신 가까이 두라. 판사에게 맡기는 대신 스스로 리드하라. 분쟁을 저주하는 대신 환영하라. 그것이 이 글이 전하고자 한 단 하나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