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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자유의지는 가능한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6. 4. 12.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자유의지는 가능한가

 

(* 스탠퍼드의 신경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30년간의 개코원숭이 연구와 스트레스 생물학을 토대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유전, 호르몬, 환경, 문화에 의해 결정되며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리벳 실험을 비롯한 신경과학적 증거를 동원하고,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이 자유의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반박하며, 응보적 사법을 회복적 정의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철학계의 주류인 양립주의는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서로 다른 차원의 물음이라 반론하고, 결정론자가 "더 나은 사회를 선택하자"고 호소하는 행위 자체가 자유의지를 암묵적으로 전제한다는 역설이 남는다. 이 논쟁은 과학만으로 종결될 수 없으며, 새폴스키의 기여는 결론의 정당성보다 인간 행동의 조건을 직시하게 만든 데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신경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M. Sapolsky, 1957~)는 30년간의 야생 개코원숭이 연구, 스트레스의 생물학, 인간 행동의 다층적 인과 분석을 거쳐 급진적 결정론에 도달했다. 그의 저작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Determined, 2023)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고 선언하며, 사법, 윤리, 종교의 근본 전제를 흔들어놓는다. 그러나 이 선언의 이면에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과연 양립 불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차원의 물음인지를 둘러싼 더 근본적인 쟁점이 놓여 있다. 이는 새폴스키의 이론 체계를 그의 학문적 여정 전체를 따라가며 재구성하고, 그 철학적 함의와 한계를 검토한다.

1. 연구자의 궤적 : 하버드에서 케냐 초원까지

새폴스키는 하버드 대학에서 생물인류학 학사를, 록펠러 대학에서 신경내분비학 박사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케냐 마사이마라 보호구역에서 야생 올리브 개코원숭이(Papio anubis) 무리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이 현장 연구는 이후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동시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물학과 신경과학 교수로 재직하며, 스트레스 호르몬(글루코코르티코이드)의 신경생물학을 연구했다. 매카서 재단 "천재 지원금"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의 학문적 경로는 일관된 하나의 물음을 따라 움직인다. 왜 어떤 개체는 공격적이고 어떤 개체는 그렇지 않은가. 그 차이는 생물학적인가, 사회적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 물음이 개코원숭이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에까지 이르게 된다.

2. 개코원숭이 연구 : "포레스트 트룹"의 문화 전환

새폴스키의 가장 유명한 발견 중 하나는 케냐의 "포레스트 트룹(Forest Troop)"에서 관찰된 문화적 전환이다. 이 사례는 그의 전체 이론 체계에서 핵심적인 경험적 기반이 된다.

1978년부터 관찰을 시작한 이 무리는 전형적인 개코원숭이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수컷들은 서열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웠고, 상위 수컷은 하위 수컷과 암컷에게 일상적으로 공격성을 행사했다. 교과서적인 지배 위계(dominance hierarchy)의 표본이었다.

1983년에서 1986년 사이, 인근 관광 롯지의 쓰레기장에서 결핵에 감염된 쇠고기를 먹은 수컷들이 대거 사망했다. 결정적인 것은, 쓰레기장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공격적인 상위 수컷들이었다는 점이다. 하위 수컷과 암컷은 쓰레기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감염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무리에서 가장 공격적인 수컷의 46%가 사망했다.

이후 무리의 행동 양상이 극적으로 변화했다. 수컷 간 공격 빈도가 급감했고, 상위 수컷이 하위 수컷에게 공격성을 전가하는 행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구성원들은 서로 더 가까이 앉았고, 털 고르기(grooming) 행동이 증가했다. 혈액 분석 결과, 하위 수컷의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다른 무리의 하위 수컷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이것이다. 새폴스키가 1993년에 다시 관찰을 재개했을 때, 원래의 "온순한" 수컷들은 이미 모두 죽거나 떠난 뒤였다. 개코원숭이 수컷은 사춘기에 원래 무리를 떠나 다른 무리에 합류하는데, 포레스트 트룹에 새로 유입된 수컷들, 즉 다른 곳에서 전형적인 공격적 사회화를 거친 수컷들이 이 무리에 들어오면 점차 비공격적 행동 양식을 습득했다. 새폴스키는 이를 두고 "문화의 전승"이라 표현했다. 유전적 변화 없이, 사회적 환경만으로 행동 패턴이 세대를 넘어 유지된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새로 들어온 난폭한 녀석들도 분명 배운다. '여기선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발견은 2004년 PLoS Biology에 아내이자 동료 연구자인 리사 셰어(Lisa Share)와 공동으로 발표되었다. 새폴스키는 이 사례에서 "문화가 생물학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었고, 이것이 이후의 인간 행동 이론으로 이어진다. 문화적 전승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관찰 학습, 암컷의 우호적 수용, 암수 비율 변화에 따른 경쟁 감소 등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으나, 명확한 단일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3. 스트레스와 위계의 생물학

개코원숭이 연구의 또 다른 축은 사회적 위계와 스트레스의 관계다. 새폴스키의 초기 가설은 단순했다. 서열이 높을수록 스트레스가 낮을 것이다. 올리브 개코원숭이는 이런 연구에 이상적인 대상이었다. 먹이가 풍부하고 포식자 위협이 적은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생존 스트레스가 아닌 사회적 스트레스의 효과를 순수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새폴스키의 표현대로, 이들은 "심리사회적 스트레스의 포스터 아이"였다.

초기 20년간의 관찰은 가설을 뒷받침했다. 하위 수컷은 만성적으로 높은 기저 코르티솔 수치, 고혈압, HDL 콜레스테롤 저하, 성장인자 감소, 순환 림프구 감소 등 스트레스의 생리학적 지표를 두루 보여주었다. 반면 상위 수컷은 이런 지표가 낮았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지면서 그림은 복잡해졌다. 1981년에 6마리의 수컷이 연합하여 최상위 수컷을 몰아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불안정한 시기에 상위 수컷들의 코르티솔 수치는 하위 수컷과 동일한 수준으로 치솟았다. 위계 자체보다 위계의 불안정성이 스트레스의 핵심 변수였던 것이다. 1984년 세렝게티 대가뭄 시기에도 모든 서열의 수컷들이 일률적으로 높은 스트레스 수치를 보였다.

더 나아가 이후의 연구들(2011년 Amboseli 연구)은 최상위 알파 수컷의 스트레스 수치가 최하위 수컷만큼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정상에서 지위를 방어하는 비용이 바닥에서 억압받는 비용과 맞먹었다. 오히려 베타 수컷(2위)의 스트레스가 가장 낮았다. 새폴스키는 이를 인간 사회에 비유하며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부통령이 되는 것보다 훨씬 스트레스가 크다"고 평했다.

또한 같은 서열이라 해도 성격 특성에 따라 스트레스 반응이 달랐다. 싸움에서 졌을 때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식하는 수컷, 통제 가능한 상황과 불가능한 상황을 구별하는 수컷, 털 고르기 같은 사회적 분출구를 가진 수컷은 같은 하위 서열이라도 스트레스 수치가 낮았다.

이 연구들의 핵심 함의는 이것이다. 스트레스는 단순히 객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 통제감, 사회적 지지, 분출구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 변수들은 개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부과한 것이다. 여기서 이미 결정론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 경제적 불평등과 건강의 강한 상관관계가 이 논리로 설명된다. 빈부 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전체 인구의 건강 수준이 떨어지는 현상은, 사회적 서열이 생물학적 스트레스 반응을 통해 몸에 직접 각인되기 때문이다.

4. "행동"(Behave) : 시간의 지층으로 읽는 인간 행동

2017년 출간된 "행동: 인간은 왜 최선과 최악의 행동을 하는가"(Behave: The Biology of Humans at Our Best and Worst)는 새폴스키의 이론 체계가 본격적으로 완성된 저작이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구성 원리는 독특하다. 하나의 행동이 발생하는 순간에서 출발하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행동의 원인을 추적한다. Guardian지는 이 책을 "학문 영역들의 기적적인 종합"이라 평했고, Science지는 "규모, 범위, 디테일, 문체 모두에서 예외적"이라 했다.

첫째 지층은 행동 직전 1초 이내다. 편도체(amygdala)의 위협 감지와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의 판단 억제가 밀리초 단위로 교차한다. 편도체는 공포와 공격의 반응을 촉발하고, 전전두엽은 "잠깐, 정말 그래야 하나?"라는 제동을 건다. 새폴스키는 뇌를 세 층위로 나누어 설명한다. 1층(조절 기능), 2층(감정 중추), 3층(고차 인지와 도덕적 추론). 이 세 층위의 상대적 활성도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그 활성도는 당사자가 그 순간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더 이전의 조건들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둘째 지층은 수초에서 수분 전이다. 어떤 감각 자극이 뇌에 입력되었는가. 방 안의 냄새, 상대방의 표정, 배고픔의 정도 같은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뇌의 상태를 조율한다. 새폴스키는 이스라엘의 가석방 심사 연구를 자주 인용한다. 판사들이 식사 직후에 심사한 사건의 가석방률이 식사 전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는 것이다. 혈당 수치가 타인의 운명을 좌우한 셈이다.

셋째 지층은 수 시간에서 수일 전, 즉 호르몬의 영역이다. 테스토스테론은 통상 공격성과 연결되지만, 새폴스키는 이것이 오해라고 강조한다. 테스토스테론은 공격성을 "생성"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공격적 성향을 "증폭"할 뿐이다. 경쟁 상황에서 테스토스테론 급등이 특정 개체의 공격성을 약 20% 높일 수 있다는 2008년 연구가 인용된다. 옥시토신 역시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내집단에 대한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외집단에 대한 적대를 심화시킨다. 도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족적이고 조건적이다.

넷째 지층은 수개월에서 수년, 즉 신경가소성과 만성 스트레스의 영역이다. 만성적 스트레스는 전전두엽 피질의 시냅스를 약화시키고, 편도체의 시냅스를 강화한다. 쉽게 말하면, 오래 스트레스를 받으면 충동 억제 능력은 줄고 위협 반응은 예민해진다. 어린 시절의 학대, 방임, 빈곤은 뇌의 물리적 구조를 변형시킨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fMRI로 확인되는 해부학적 사실이다.

다섯째 지층은 수십 년, 즉 발달기의 경험이다. 태아기의 호르몬 환경, 어머니의 사회경제적 지위, 출생 전후의 스트레스 수준, 청소년기의 전전두엽 성숙 과정이 성인기의 판단 능력과 충동 통제를 형성한다. 전전두엽 피질은 인간의 뇌에서 가장 늦게 성숙하는 영역으로, 대략 25세경에야 완전히 발달한다. 새폴스키는 이를 근거로 청소년 범죄에 대한 성인 수준의 처벌이 신경과학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지층은 수백에서 수천 년, 즉 문화와 진화의 영역이다. 조상이 농경민이었는지 유목민이었는지에 따라 명예 문화(honor culture)의 강도가 달라지고, 이것이 현재의 폭력 범죄율과 상관관계를 보인다. 미국 남부의 명예 문화, 중동의 부족 문화, 동아시아의 집단주의가 모두 수천 년 전의 생존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에 더해, "행동"은 "우리 대 그들(Us vs Them)"의 심리학을 깊이 탐구한다. 신경영상 연구에서 편도체는 다른 인종의 얼굴에 자기 인종의 얼굴보다 더 강하게 반응한다. 이 반응은 임의적 집단 구분(예컨대 셔츠 색깔)만으로도 측정 가능한 편향을 만들어낸다. 편견은 단순히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신경생물학적이다. 다만 새폴스키는 이 반응이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대방과의 공통점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편도체 반응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새폴스키의 요점은, 이 모든 지층이 동시에 작동하며, 어느 하나의 지층에서도 "자유로운 선택"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행동"은 아직 이 결론을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지만, 모든 논증이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운이 좋다면 '신의 은총이 아니었으면 나도 저런 처지였을 것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관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 가설이 된다."

5.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Determined) : 결정론의 전면 선언

2023년 출간된 "Determined: A Science of Life Without Free Will"(한국어판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2025, 문학동네)에서 새폴스키는 "행동"이 암시했던 결론을 정면으로 선언한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미권 전역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을 촉발했다.

그의 결정론은 18~19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고전적 결정론에서 출발하되,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반영하여 수정한다. 라플라스는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아는 초인적 지성이 있다면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새폴스키는 이 극단적 형태의 예측 가능성은 포기하되, 인과적 결정(causal determination) 자체는 유지한다.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새폴스키가 결정론의 핵심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1983년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다. 피험자에게 버튼을 자유롭게 누르라고 하고, 결정의 순간을 보고하게 한다. 피험자들은 대개 손가락을 움직이기 0.2초 전에 결정했다고 응답한다. 그런데 뇌파(EEG) 측정 결과, 피험자가 결정을 자각하기 0.3초 전에 이미 뇌가 행동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행위자가 "나는 지금 누르겠다"고 자각하기 전에 뇌가 이미 작동했다면, 과연 그 결정의 주체는 의식적 자아인가, 아니면 뇌 회로에 축적된 선행 요인들인가.

자유의지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고 여겨지는 세 이론에 대한 반박이 이 책의 전반부를 구성한다.

카오스 이론에 대해서는,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한 의존성이 예측 불가능성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비결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한다. 나비효과는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결과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지, 결과가 원인 없이 발생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수렴(convergence) 현상, 즉 서로 다른 경로가 같은 결과에 도달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근본적 환원주의(radical eliminative reductionism)를 약화시킬 뿐 결정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새폴스키의 비유를 빌리면,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거북 탑 중 어느 쪽이 바닥까지 내려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해서, 당신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창발적 복잡성에 대해서는, 구성 요소들의 상호작용에서 새로운 차원의 속성이 나타난다 해도, 그 시스템이 자신의 구성 요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의식이나 경험 같은 창발적 속성은 "경험과 의미에 대한 능력"이지, "인과 사슬로부터의 이탈 능력"이 아니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미시 세계의 비결정성이 거시 세계의 뇌 활동에서 자유의지로 전환된다는 주장에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본다. 로버트 케인(Robert Kane) 등이 양자적 비결정성이 뇌의 카오스적 과정에 의해 증폭되어 자유의지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새폴스키는 이에 대해 깊이 있게 대응하지 않는다. 이 점은 비판자들이 가장 자주 지적하는 약점이기도 하다.

6. 개념의 지형 :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대립 개념인가

새폴스키의 논증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관계에 대한 개념적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이 둘은 양극단처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차원의 물음에 속한다.

결정론(determinism)은 세계의 인과 구조에 관한 존재론적 주장이다. 모든 사건은 선행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상대 개념은 비결정론(indeterminism), 즉 원인 없이 발생하는 사건이 있다는 주장이다.

자유의지(free will)는 행위자의 능력에 관한 주장이다.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실제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가, 혹은 자기 행동의 진정한 원천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것의 상대 개념은 부자유(unfreedom), 필연(necessity), 혹은 피동성(passivity)에 가깝다.

이 두 차원의 교차에서 세 가지 주요 입장이 성립한다.

양립불가론(incompatibilism)은 결정론이 참이면 자유의지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 안에서 다시 갈린다. 결정론이 참이므로 자유의지가 없다는 쪽이 경성 결정론(hard determinism)이고, 새폴스키가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결정론이 거짓이라는 쪽이 자유의지론(libertarianism)이며, 로버트 케인 같은 철학자가 대표적이다. 여기서의 libertarianism은 정치적 자유지상주의와는 무관한 철학 용어다.

양립주의(compatibilism)는 결정론이 참이더라도 자유의지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대니얼 데닛이 대표적이다. 이 입장에서 자유의지의 반대는 결정론이 아니라 "강제(coercion)"나 "강박(compulsion)"이 된다. 밧줄에 묶여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과 자기 성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둘 다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더라도 질적으로 다르다. 양립주의자에게 자유란 "인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외적 강제의 부재"를 뜻한다.

현재 철학계의 약 60%가 양립주의를, 약 11%만이 경성 결정론을 지지한다. 새폴스키가 비판받는 핵심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결정론을 증명하면 자유의지가 자동으로 부정된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은 양립불가론을 이미 받아들인 상태에서만 성립하는 논증이다. 양립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새폴스키는 "뇌가 인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훌륭하게 증명했을 뿐이지, "자유의지가 없다"를 증명한 것이 아니다.

양립주의의 핵심 반론은 이렇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지 않은 두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밧줄에 묶여 있어서 구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서 구하지 않았다. 두 경우 모두 행동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전자는 면책되고 후자는 비난받는다. 결정되어 있다는 것과 강제되어 있다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새폴스키는 이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었던 것 자체가 그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선행 원인들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 이 지점에서 논쟁은 평행선을 그린다.

7. "새폴스키 역설" : 결정론자의 자기모순

과학 저술가 존 호건(John Horgan)은 새폴스키의 입장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을 "새폴스키 역설(Sapolsky Paradox)"이라 명명했다. 그 핵심은 이렇다. 새폴스키는 자유의지에 대한 논증들을 신중하게 검토한 뒤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논증들을 비교 검토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행위 자체가 자유의지의 가장 전형적인 발현이 아닌가.

호건은 이렇게 정리한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정하기 위해 찬반 논증을 저울질했다면, 당신은 자유의지가 있음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이 책을 읽고 새폴스키에게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의식적 숙고를 거쳐 판단을 내린 행위 자체가 자유의지의 증거라는 것이다.

새폴스키 자신은 이 역설을 14세 때의 경험으로 설명한다. 그 시기에 겪은 일종의 지적 위기를 통해 자유의지와 신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잃었다는 것이다. 즉, 그의 결정론적 확신 자체도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숙고 끝에 도달한 자유로운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응답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만, 동시에 자기 논증의 설득력까지 결정론적으로 해소해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결정론이 참이라면,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설득되는 것 역시 결정된 것이며, 설득되지 않는 것 또한 결정된 것이다. 논증의 의미 자체가 무력화된다.

또한 호건은 새폴스키가 자유의지를 "없다"고 증명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연속적 스펙트럼 위에 있음을 보여준 것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요람에서 침을 흘리던 시기에 자유의지는 제로였고, 노년에 치매가 오면 다시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 사이에서 자유의지의 정도는 시간, 상황, 개체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한다. 백인 남성 교수인 새폴스키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여성은 선택의 폭이 현격하게 다르다. 자유의지는 "있다/없다"의 이분법이 아니라 "많다/적다"의 그러데이션이라는 것이다.

8. 사법, 도덕, 종교에 대한 함의

새폴스키의 결정론이 가장 직접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곳은 사법 제도다. 그의 주장을 단계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의 기반이 무너진다. 응보적 정의는 행위자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그런 "대안적 선택"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았다면, 처벌의 도덕적 근거가 사라진다.

둘째, "감옥과 범죄라는 개념을 폐지"하고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대중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격리는 필요하지만, 그것은 "처벌"이 아니라 "격리"여야 한다. 전염병 환자를 격리하면서 그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하지 않는 것과 같은 논리다.

셋째, 새폴스키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 전환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다. 뇌전증 환자는 오랫동안 "악마에 씐 존재"로 억압받았지만,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질환자로 재인식되었다. 조현병도 마찬가지다. 새폴스키는 범죄자에 대해서도 동일한 인식 전환이 가능하다고 본다.

넷째, 이 전환이 비단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자유의지를 전제하는 응보적 정의 체계 하에서도 인류는 심각한 과오를 저질러왔다. 정신질환자 격리, 인종에 기반한 차별, "마녀" 처형 등은 모두 행위자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 위에서 "정당하게"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새폴스키 자신도 이 전환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인간에게는 "누군가를 처벌할 때 느끼는 강렬하고 복잡하면서 종종 보람을 느끼는 감정"이 있다. 이 응보 본능은 진화적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게임이론적 분석에서도 응보(punishment)는 협동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정론자의 논증만으로 이 본능이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정론의 프레임 안에서는 이 응보 본능 자체도 결정된 것이므로, 그것을 비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해진다. 이 순환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한지는 새폴스키 자신도 완전히 해명하지 못한다.

종교적 함의도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자유의지는 원죄, 구원, 심판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없다면, 죄의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결정론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지만, 거기서도 신의 주권이라는 초월적 행위주체가 전제된다. 새폴스키의 결정론은 그런 초월적 행위주체마저 제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신학적 결정론과도 질적으로 다르다.

9. 비판의 지형

새폴스키에 대한 비판은 크게 네 방향에서 온다.

첫째, 철학적 비판이다. 노트르담 대학의 존 마틴 피셔는 이 책이 "자유의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지 않다"고 평했다. 새폴스키는 양립주의 철학자들의 정교한 논증에 충분히 응답하지 않으며, 자유의지의 정의를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설정한 뒤 그것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피셔는 또한 새폴스키의 내적 비일관성도 지적한다. 책의 한 곳에서 새폴스키는 "이 책의 목표는 자유의지가 없음을 설득하는 것, 혹은 적어도 일반적으로 가정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쓴다. "없다"와 "훨씬 적다"는 전혀 다른 주장인데, 새폴스키는 이 차이를 해명하지 않는다.

Atlantic지의 키에런 세티야(Kieran Setiya) 역시 새폴스키가 과학 서술에서는 탁월하지만 철학적 문헌을 사실상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사건인과적, 행위자인과적, 비인과적 등 다양한 자유의지론이 존재하는데, 새폴스키는 이 중 어느 것에도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둘째, 과학적 반론이다. 신경생물학자 케빈 미첼(Kevin Mitchell)은 "Free Agents: How Evolution Gave Us Free Will"(2023)에서, 진화가 유기체에게 점차 더 큰 행위주체성(agency)을 부여해왔으며, 인간의 의사결정 능력은 결정론의 프레임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반론한다. 진화는 유기체가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셋째, 방법론적 비판이다. 윤리학과 사회연구소의 아담 피오바르치(Adam Piovarchy)는 새폴스키의 근본적 실수가 "자신의 문제가 순수하게 과학적이라고 가정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유의지 문제는 과학적 데이터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개념적, 규범적 차원이 동시에 개입한다. 과학이 "뇌가 이렇게 작동한다"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자유의지가 없다"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자기 적용의 비판이다. 결정론이 참이라면 새폴스키가 이 책을 쓴 것도 결정된 것이고, 독자가 이 책에 설득되거나 설득되지 않는 것도 결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논증"이나 "설득"이라는 행위 자체의 의미가 사라진다. 비난도, 칭찬도, 후회도, 보상도 의미를 잃는다. 새폴스키는 이 귀결을 정면으로 수용한다. "맞다. 비난도 없고, 보상도 없고, 후회도 없다." 그러나 이 수용이 과연 인간적으로 유지 가능한 태도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선이 많다.

10. 철학사적 맥락과 동양 철학의 시선

자유의지 논쟁은 서양 철학사의 가장 오래된 주제 중 하나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미세한 이탈(clinamen)을 통해 결정론에서 벗어나려 했고, 스토아학파는 운명론을 수용하되 내적 태도의 자유를 강조했다.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무지에서 오는 환상"이라 불렀고, 칸트는 현상계에서의 인과적 결정과 예지계에서의 자유를 구분하여 양자를 양립시키려 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원하는 것 자체를 원할 수는 없다"고 말하여 결정론과 주관적 자유감의 괴리를 정확히 포착했다. 사르트르는 이 모든 흐름에 맞서 자유의지를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으로 선언했다.

새폴스키는 이 긴 계보의 최신 지점에 서 있되, 순수 사변이 아니라 신경과학의 실증 데이터를 무기로 삼는다는 점에서 선행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보기에, 데이터가 아무리 많아도 개념적 분석 없이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뇌가 의식보다 먼저 작동한다"는 리벳 실험의 발견이 곧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과 동치되는지는 여전히 열린 물음이다. 의식적 자각과 자유의지가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자유의지는 의식적 자각보다 넓은 개념인가. 리벳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전자에 대한 의문이지, 후자에 대한 부정이 아닐 수 있다.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이 논쟁은 또 다른 결을 드러낸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은 모든 존재가 원인과 조건의 연쇄 속에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에 가깝다. 그러나 불교는 이 연쇄를 자각하는 것 자체를 해방의 계기로 삼는다.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앎에서 발생하는 이욕(離欲)과 무집착이 변화의 기점이 된다. 결정론을 인정하면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 역설적 구조는, 새폴스키가 결정론을 수용하면서도 "더 인도적인 사회"를 호소하는 것과 묘한 공명을 이룬다.

유가(儒家) 전통에서 맹자는 인간에게 선험적 도덕 판단 능력(양지양능, 良知良能)이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이 발현되려면 안정적 물질 조건(항산항심, 恒産恒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일정한 생업 없이 일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선비만이 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은, 경제적 조건이 도덕적 행위를 결정한다는 새폴스키의 주장과 놀라울 정도로 겹친다. 다만 맹자는 그 결정력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고유한 도덕적 싹(사단, 四端)이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전면적 결정론과는 거리를 둔다. 맹자의 입장은 오히려 양립주의에 가깝다. 조건이 행동을 형성하되, 도덕적 능력 자체는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시선은 이 논쟁에 또 다른 차원을 추가한다. 장자는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묻는 것 자체가 인위적 분별의 산물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지인(至人)에게는 자아가 없고, 신인(神人)에게는 공적이 없고, 성인(聖人)에게는 이름이 없다."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해소하면, 자유의지의 유무 자체가 더 이상 의미 있는 물음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결정론도 자유의지론도 아닌, 물음 자체의 해소라는 제3의 길이다.

11. 새폴스키와 개코원숭이 : 이론과 경험의 아이러니

새폴스키의 작업 전체를 조감하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눈에 들어온다. 포레스트 트룹의 사례는 "문화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결정론의 증거로 제시되지만, 동시에 "문화가 바뀌면 행동도 바뀔 수 있다"는 변화 가능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새폴스키 자신도 이 연구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낙관론을 이끌어낸다. "만약 개코원숭이에게도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면, 인간에게 행동적 유연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정론의 프레임 안에서 이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발생"이다. 포레스트 트룹이 평화로워진 것은 구성원들이 평화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격적 수컷의 사망이라는 우연한 사건이 사회 구조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변화는 일어나지만, 그것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조건의 산물이다.

이 구분이 새폴스키 결정론의 핵심이다.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원천을 행위자의 내부(의지)에서 외부(조건)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동이 완료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호소는 누구에게 향하는 것인가.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누군가"가 전제되지 않으면, 호소 자체가 공허해진다. 그 "누군가"의 행동 역시 결정되어 있다면, 호소는 그저 인과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다.

새폴스키는 이 순환을 인정하면서도 빠져나가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 책을 쓰는 행위 자체가 인과 사슬의 일부로서 독자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의 논증이 독자를 설득하는 것도 결정된 것이지만, 바로 그 결정된 과정을 통해 사회가 조금 더 관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만, 일상적 직관과는 크게 충돌한다.

12. 종합 평가 :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새폴스키의 작업은 네 가지 차원에서 평가될 수 있다.

과학적 성취로서, 그의 기여는 탁월하다. 개코원숭이 연구에서 시작하여 스트레스의 신경내분비학, 행동의 다층적 인과 구조, 문화의 생물학적 기반에 이르기까지, 30년에 걸친 연구는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넓혔다. "행동"은 그 자체로 행동과학의 기념비적 종합이며, "Determined"의 과학 서술도 위트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철학적 논증으로서, 그의 결정론은 과학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되, 개념적 정밀함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자유의지의 정의를 양립불가론에 유리하게 설정한 뒤 결정론의 증거를 제시하는 구조는, 양립주의와의 진정한 대결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뇌가 인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서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추론에는, 과학이 메울 수 없는 개념적 간극이 남아 있다.

실천적 제안으로서, 응보에서 회복으로의 전환이라는 그의 주장은 결정론의 논리적 귀결이라기보다, 하나의 윤리적 호소에 가깝다. 그리고 그 호소의 설득력은, 역설적이게도 결정론의 프레임보다는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에 의존한다. 결정론자가 "더 나은 세계를 선택하자"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부정한 바로 그 행위주체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게 된다.

지적 자극으로서, 이 작업의 가치는 결론의 정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성립한다. 새폴스키는 인간 행동의 원인을 지금까지 가장 폭넓고 세밀하게 추적한 연구자 중 하나이며, 그의 작업은 자유의지에 대한 안이한 확신을 흔들어놓는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든 없다고 믿든, 그것이 얼마나 많은 조건에 의해 제약되고 형성되는지를 직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 역설이야말로 자유의지 논쟁이 과학만으로 종결될 수 없는 이유이며, 새폴스키의 작업이 논쟁을 끝내기보다 더욱 풍요롭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자유의지가 가능한지를 묻는 물음은, 아마도 인간이 인간인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자유의지의 가장 은밀한 증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