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를 배달시켜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페이스북에서 얼핏 본 이 영국 속담이 머리에 꽂혔다.
우유라는 것은 건강식품의 상징이다. 칼슘, 단백질, 영양의 대명사다. 그런데 그 우유를 돈 주고 사서 마시는 사람보다, 새벽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남의 집 앞에 우유를 놓고 가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건강을 사려는 자보다 건강을 파는 자가 더 건강한 것이다.
역설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건강의 본질은 섭취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가 몸을 만든다. 우유 한 잔의 영양보다 새벽 두 시간의 걸음이 더 강력한 약이다.
그러나 이 말의 사정거리는 건강론에 그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arete)이란 지식이 아니라 습관(hexis)'이라고 했다. 용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용감한 것이 아니다. 두려운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나아간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다.
우유를 아는 것과 새벽에 걷는 것, 그 차이가 곧 앎과 덕의 차이다.
이 격언은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을 돈으로 산다. 헬스장 회원권, 유기농 식품, 고가의 영양제, 명상 앱 구독권. 건강을 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산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건강을 파는 쪽, 즉 공급자가 더 건강하다는 역설은 반복된다. 헬스 트레이너가 회원보다 건강하다. 요리사가 미식가보다 체력이 좋다. 농부가 유기농 소비자보다 튼튼하다. 이들은 건강을 목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건강은 부산물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이 구조를 정면으로 다뤘다. 소유 양식(having mode)의 인간은 건강을 소유하려 한다. 좋은 음식, 좋은 약, 좋은 장비를 갖추면 건강해질 것이라 믿는다. 존재 양식(being mode)의 인간은 살아 있는 활동 자체가 곧 건강이다. 배달부는 건강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 더 깊은 철학적 주제가 있다. 행복, 건강, 의미 같은 것들은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달아나는 속성을 가진다.
빅터 프랭클은 이것을 "의미에의 의지"로 설명했다. 행복을 직접 목표로 삼으면 행복해지지 않는다. 어떤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할 때 행복은 부수적으로 찾아온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건강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영양제를 먹고 보충제를 챙기는 사람보다, 새벽 배달이라는 노동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건강이 부산물로 주어지는 법이다.
존 스튜어트 밀도 자서전에서 비슷한 고백을 했다. 행복을 직접 겨냥하지 말라. 행복 이외의 어떤 목적에 헌신하라. 그러면 그 과정에서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우유 배달부는 건강을 겨냥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걸었고, 걷는 동안 건강해졌다.
이 원리는 다양한 영역에 적용된다.
교육 분야에서, 학원비를 많이 쓰는 부모보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부모가 교육 효과가 높다. 교육을 구매한 것과 교육을 행한 것의 차이다. 사교육 시장이 거대해질수록 학력 성취가 비례하지 않는 현상은 이 역설의 교육판이다.
경영 분야에서, 경영학 교과서나 컨설팅 보고서를 사서 읽는 CEO보다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는 CEO가 회사를 더 잘 안다. 도요타의 "겐치겐부쓰(現地現物, 현장에서 현물을 보라)" 원칙이 이것이다. 정보를 소비하는 것과 현실을 체험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러 다닌다고 해서 글쓰기가 쑥쑥 느는 것이 아니다. 헤밍웨이는 "글쓰기의 비결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는 것"이라 하였다. 강좌를 아무리 들어도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한 자라도 더 써본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리더십 책을 읽고 리더십 강의를 들으러 다닌 사람보다 작은 구멍가게 같은 팀이라도 이끌어 본 사람이 리더십을 더 잘 안다.
정리해보자. 우유를 배달시켜 먹는 사람은 건강을 소유하려는 사람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은 건강함 그 자체를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 귀한 것들은 겨냥할 때가 아니라 다른 무엇에 몰두할 때 대체로 부수적으로 슬며시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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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Autobiography) 5장 "A Crisis in My Mental History: One Stage Onward"에 나오는 대목.
"I never, indeed, wavered in the conviction that happiness is the test of all rules of conduct, and the end of life. But I now thought that this end was only to be attained by not making it the direct end. Those only are happy (I thought) who have their minds fixed on some object other than their own happiness; on the happiness of others, on the improvement of mankind, even on some art or pursuit, followed not as a means, but as itself an ideal end. Aiming thus at something else, they find happiness by the way."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나는 행복이 모든 행위 규범의 시금석이자 삶의 궁극 목적이라는 확신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다만 이제는 이 목적이 그것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않을 때에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무엇에 마음을 고정시킨 사람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타인의 행복이든, 인류의 개선이든, 혹은 어떤 예술이나 탐구이든, 그것을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상적 목적으로 삼아 따르는 사람 말이다. 그렇게 다른 무엇을 겨냥하며 살아갈 때, 사람은 그 길 위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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