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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 보기를 욕망하는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5. 9. 20.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 보기를 욕망하는가

 

심리적 기원과 진화론적 기반: 인간은 원시시대 이래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교훈이나 이득을 얻어 왔다. 과학저널에 따르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는 경쟁적 공간이므로 경쟁자가 다치면 자신에게 유리하다.[1]. 실제로 인간의 두뇌는 수백만 년간 우리(ingroup) 그들(outgroup) 사이의 경쟁 속에서 진화해 왔는데, 과정에서 공동체에 대한 연민과 적대 집단에 대한 냉혹함(,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일종의 샤덴프로이데) 함께 길러졌다[2]. 이를 통해 유아기에도 사소한 경쟁 상황에서 주변의 불행에 기뻐할 아는 감정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심리학에서는 현상을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부르며, 대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성공감이나 우월감 느끼려는 경향으로 해석한다[3]. 이런 욕망은 자기 보호 본능과 사회적 비교 심리에서 비롯되며,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적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가두 불빛과 음악을 즐기는 축제와 같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공포·고통 같은 극적인 장면에서도 공통된 경험을 나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고대 인류는 공개처형이나 사냥 행사를 마치 축제처럼 여겼는데, 이러한 행동은 집단 결속과 권력 과시의 수단이 되었다. 심리학적으로도 우리 그들 구도 속에서 이타심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공격성이 발달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정치·사회 갈등에서 적대 집단에 대한 샤덴프로이데로 표출되고 있다[2][3]. , 타인의 고통 관람 욕망은 생존 경쟁과 사회적 비교 본능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심리 현상으로 있다.

고통과 관람에 대한 철학자들의 시각

역사적으로 고통의 공개적 관람은 집단 행동의 형태였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고대 인류는 관객을 위한 기민한 배려로 충만하여, 행복을 관경과 축제 없이는 상상할 없었다 지적하며 고대 공개 처형조차축제적 요소 많았다고 언급했다[4]. , 니체에게 공개 처형이나 사냥 구경은 일종의 공동 축제였던 셈이다. 벤야민 바로크 시대 비극(독일 비극의 기원)에서 극적 환희를 강조하는 양상을 관찰했다. 그는 바로크 연극의 과장되고 폭력적인 장면이 역사적 비극을 드러내며 관객의 감각을 자극한다고 보았는데, 특히 형벌과 고문, 죽음 같은잔혹함과 고뇌의 장면 풍부하게 무대에 나타난다고 평했다[5]. 이는 단순한 고전주의적 이상(우아함·조화) 정반대의 미학이다.

푸코 근대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시위 방식을 연구하며, 공개 처형이극장과도 같은 공개 토론의 이었다고 설명했다. 공개 고문은 비밀을 공개하고, 범죄를 죄인의 몸에 재현함으로써 주권자의 복수와 폭력성을 드러내는 의식이었다[6]. , (刑罰) 주권자의 과시였고, 잔혹함은 관객에게 공포와 동시에 일종의 숭배감을 불러일으켰다. 아감벤 이를 확장하여, 주권자가 생사(生死) 권한을 결정하는호모 사케르상태를 분석했다. 그는주권자는 폭력과 사이의 불명료한 경계 지점”(“the point of indistinction between violence and law”) 서서, 식인과 희생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7]. , 평범한 배제된 (homo sacer) 고통 관객이 목격하는 상황은 자체로 정치적이며, 관람자는 체제의 일부가 된다. 지젝 현대 사회에서 폭력 영상의 관람을 비판하며, 대중이 정당성을 느끼는 폭력 속에는 종종 숨은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도 끌리는 잔혹 장면이 이념적 차원에서 어떤 욕망을 대리 만족시키는지 분석하였다(: 적대집단을 향한 증오나 억압된 충동의 표출 ). 종합하면, 철학자들은 모두 고통과 관람의 관계를 폭력과 권력, 공동체 의식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4][6][7].

감정과 윤리: 관찰자의 심리와 책임

타인의 고통을 목격할 관찰자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흔히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부르는 감정은 타인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쾌감이다. 이는상대의 재난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으로 정의되며[3], 종종 겉으로는 죄책감과 내적 갈등을 동반한다. 연구자들은 샤덴프로이데를 느낄 공감능력이 일시적으로 억제된다고 보고한다. 예컨대, 누군가 실패하거나 굴욕감을 당하면, 자신은 위협받는다는 안도감과 자존감 상승을 경험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특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타인의 몰락에서 보상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며[8], ‘정의 실현 감각과 결합되면 부패한 정치인이나 오만한 인물이 몰락했을 쾌감을 느끼는 식으로 나타난다[9]. 이처럼 샤덴프로이데는 일견 자신의 안전과 우월함을 확인시켜 주지만, 곧이어 양심의 가책을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이 비도덕적인 감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는데, 연구자들은 이를인지 부조화 설명하며, 샤덴프로이데가 도덕적 가치와 충돌하여 내적 갈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10]. 한편, 같은 상황에서도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고통받는 타자를 보며나도 저럴 있겠구나하는 동병상련, 혹은 단순한 연민이 솟구치지만, 이와 상반된 샤덴프로이데가 함께 나타나는 복잡한 심리가 관찰자의 마음속에서 교차한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안도와 연민, 권력감과 죄책감이라는 상반된 감정들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관찰자에게는 특권과 책임이 공존한다. 우리는 안전한 위치에서 고통을 목격하지만, 안전함은 다른 이의 희생 위에 있는 면죄부이기도 하다. 수잔 손택은 대중을고통의 관음증적 소비자(citizens of modernity, consumers of violence as spectacle)”라고 비판하며, 관객들이 위험 없는 근접 연습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자 한다 지적했다[11]. , 뉴스와 다큐가 만들어 고통의 이미지를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 현대인은 자칫 냉담하고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전락할 있다. 그녀는 이러한 관찰이 단순한 동정으로 끝나선 되며,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강조했다[12]. 실제로 손택은 우리가 끔찍한 사진을 보았을 사진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게 하라”(“Let the atrocious images haunt us”) 말하며, 장면이 인간이 저지를 있는 잔인함을 상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3]. , 고통의 관람자는 관음이 아닌 성찰적 태도를 가져야 하며, 목격한 고통을 통해 연대와 행동을 모색할 윤리적 책무가 있다. 관객이 그저 채널을 돌려버리는 태도는 비판받아야 하며, 이는 관객이 자신만 고통에서 면해 있음을 인식하고 격차를 메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SNS·미디어 환경 고통 시각화와 대중 심리

현대 미디어 환경은 타인의 고통을 실시간으로 시각화·유통한다. SNS 뉴스는 끊임없이 사고·테러·인권침해 장면을 노출시키는데, 지속적 노출은 감정의 마비(감각 둔화) 이어진다. 심리학자들은 부정적인 뉴스 헤드라인을 반복해서 보게 되면 분노와 공감이 감소하는도덕적 반복 효과 보고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비도덕적 사건 보도가 번째 노출될 때면 사람들은 행동을 처음 봤을 때보다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했다[14]. 이는우리가 끔찍한 일을 알아갈수록, 각자 개별적으로는 신경 쓰게 된다 역설을 보여준다. 실제 연구 결과뉴스 헤드라인을 반복 읽으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느슨해진다 한다[14]. 또한, 끊임없이 부정적 영상에 노출되면 감정적 탈진이 일어나고 공감 능력이 저하된다[15]. 손택도 이미지 과다 연민을 무감각하게 만든다고 우려했다. 그녀는 사진이 전혀 감동시키지 못하게 된다기보다, 무수한 잔혹 이미지를덮어놓고 보아야하는 일상은 오히려 반응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16]. 결국 SNS 시대에 고통 이미지는 확산될수록 충격력이 희석되고,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행동의 동기를 점점 잃는다. 대중은 한편으로는 고통을 함께공유하면서 연대를 느낄 있지만, 반복되는 잔혹성은 연민 피로(compassion fatigue) 초래해 시청자들을 무뎌지게 만든다[16][15].

시대의 통찰과 윤리적 성찰

오늘날 우리는 Stone-Age 심리로 현대 문제를 풀려는 모순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브루노 박사는현대 세계는 옛날보다 협력과 공존이 훨씬 이익이 되는 사회라며, 석기시대의 이상 적합하지 않다 지적했다[17]. , 경쟁 대신 협력을 가르치는 사회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편견을 깨고 타자의 인지적 범주를 변화시키면 상대 집단에 대한 공감이 활짝 열린다고 제안했다[18].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집단에 대해 조금 많은 공감을 시도한다면 인간관계와 갈등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19].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욕망은 근원적으로 인류 공동체의 경쟁 역사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의 악순환을 멈추고자 노력해야 한다. 고통 이미지를 단순히 소비하는 대신, 그를 통해 사회 정의에 기여하고 개인 윤리를 점검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연민을 훈련하고, 사회적 메시지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며, 소외된 고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자세가 시대가 배워야 핵심 교훈이다.

출처: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진화심리학 연구, 심리학 개념 설명, 그리고 니체·벤야민·푸코·아감벤·손택·지젝 등의 저작 해석 등을 종합한 것이다[1][2][4][6][11][10][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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