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포럼] 조선침략의 전초기지 히젠나고야 성을 가다 _ 1803
(** 2018년 3월에 다녀온 여행 기록이다. 밴드에만 올려두었던 것을 여기에 옮겨둔다.)
*일본#1
- 이순신 장군은 그 자체로서 명실상부한 세계가 인정한 리더십과 병법의 교과서다.
이 분을 가까이 가면 갈수록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경외심만 더해간다.
불패의 23전 전승, 13척의 배로 그 10배가 넘는 적을 완벽히 무찌른 명랑해전, 거기다 충, 효, 애민까지.. 그리고 약간의 인간적인 실수마저 오히려 그의 인간적 완벽함을 증명한다.
- 오늘 이순신 리더십버스 여행을 간다.
이순신 리더십버스는 이부경 이사장이 10수년 전부터 꾸준히 운영해온 이순신 배우기 여행 프로그램이다. 매월 한 차례 서울의 이순신 생가터에서 출발한다.
이 버스는 이순신 유적지를 돌아가며 방문하며, 그때그때마다 좋은 강사나 가이드를 모셔 이순신을 가르침을 전해 듣는다.
우리는 지금 고3인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두 차례 동반하였다. 통영과 진도 각 한 번씩. 아들에겐 평생 잊지못할 배움의 기회가 되었을 거다.
우리는 그 해를 이순신 배움의 해로 정하고, 이순신 버스를 두번 타서 통영과 진도를 견학하고, 그 이후에는 가족여행으로 여수 등을 다녔다. 매 여행 때마다 아들은 이순신의 기록을 잔뜩 출력하여 차안에서 발표를 하곤 했었다.
- 이번 이순신 리더십버스의 목적지는 일본의 규슈에 있는 히젠나고야성과 그 인근 유적지다.
일본은 1591년에 규슈의 히젠나고야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선박을 건조하는 한편 각 다이묘로부터 병력을 차출한다. 그 준비를 바탕으로 1592년 4월에 일제히 부산을 침공하였다.
이번 여행은 그 히젠나고야성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 히젠나고야)는 일본 규슈 지방의 사가현 가라쓰시에 위치했던 옛 성이자 지명이다. ‘히젠’은 예전의 지방명(오늘날의 사가현, 나가사키현 일대)으로, 아이치현의 대도시인 ‘나고야’(名古屋)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히젠나고야라고 부른다.


*일본#2
먼저 가라쓰성을 방문하였다.
가라쓰성은 후쿠오카 공항으로부터 히젠나고야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 가라쓰성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데라자와 히로다카가 1602년부터 건설하여 1608년에 완공하였다. 가라쓰성은 폐성이 된 히젠나고야성에서 가져온 자재로 축조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상징적인 의미로 히젠나고야성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데라자와 히로다카는 1592년에 히젠나고야성을 건설하는 책임자였는데, 그는 도요토미의 사후 도쿠가와 측에 서서 다이묘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면서 파괴된 히젠나고야성의 자재를 옮겨와 가라쓰성을 축조하였다.





가라쓰성이 위치한 가라쓰는 한자로 당진(唐津)이라 쓴다. 우리나라의 당진과 동일한 한자다. 당나라의 물류가 들어오는 곳이라는 의미.
이 가라쓰의 역사는 임진왜란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빈 땅이었다고 한다.
1591년에 도요토미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전국의 다이묘들을 이 인근의 히젠나고야성에 집합시키고, 전쟁이 끝난 후 남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유지해온 것이다.
이 곳의 주요 산물은 도자기이다.
그 도자기는 당연히 조선에서 건너온 이삼평 등을 비롯한 도공들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지고 전승되어 왔다.
이삼평의 유적지는 오늘 방문할 것이다.



가라쓰성 인근에는 바닷가를 따라 멋진 소나무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다.
약 4.5킬로미터에 걸쳐 잘 유지된 방대한 방풍림의 이름은 니지노마쓰바라. 무지개 솔밭이라는 뜻.
당초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데.. 방풍을 포함한 다목적용이었을 거 같다.


*일본#3
임진왜란의 전초기지 히젠나고야성.
히젠나고야성은 파괴된 유적만 남아있고, 그 기록은 유적지에 마련된 박물관에 저장되어 있다.
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건축한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군사와 물자를 가지고 이 곳으로 집합하게 한다. 각 다이묘들의 주둔 영역과 그들이 데리고 온 병력의 수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히젠나고야성은 누가 왜 파괴하였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성을 파괴하며 도요토미의 정책을 비판하여 조선의 마음을 돌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으로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재개되었다.
왜란 후 첫 통신사의 정사는 사명대사가 자임하여, 큰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조선침략이 딱 이 시기에 개시되었다. 1592년 4월13일에 부산 동래성이 공격을 받았으니까. 그 때도 이렇게 벚꽃이 피었을까?
벚꽃은 우리나라로부터 일본에 전달된 것이다. 그 시기는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일본에 벚나무가 없었다.

이 앞바다가 검은 바다라는 뜻의 '현해'이다. 현해탄이란 말이 여기서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원숭이를 닮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말 좀 그렇다.

당시 사용된 왜군의 안택선




저녁 식사는 호텔에서 일본의 전통 식사인 가이세키 요리.
식사가 끝나고 전 해군 제독께서 연주하시는 오카리나 반주에 맞춰 홀로아이랑을 합창하였다. 그 노래가 그토록 가슴 뭉클한 내용을 담고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일본#4
어제 나왔던 대화들 중에서 몇 가지 기억하고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있다.
-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하여 그런 광오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겠다는 계획.
무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정말 대단한 스케일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지, 아니면 2차대전 당시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것 같은 일본인의 본성인지..
- 우리 조선의 당시 국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이 조선침략을 준비한 것은 1591년 가을이고, 출병은 그 이듬해 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1591년 초에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다. 이순신장군은 부임하자마자 거북선을 건조하고 현자총통 등 무기들을 제작하는 등 조선 해군의 전력을 정비한다.
이런 절묘하고 기막힌 타이밍의 역사적 배려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라의 국운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 특히 동래성을 침공하기 하루 전인 4월12일에 이순신 장군은 천자총통, 현자총통 등 모든 포들을 가지고 실전에 대비한 전투훈련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같이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동래성 함락후 불과 23일 후에 벌어진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에서 왜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저 유비무환이라고만 했는데..
도대체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한 대비를 해두었을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이순신장군의 미래를 꿰뚫는 예지적 통찰에 기초한 것이었다.
진정 난세의 리더는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과 통찰력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가.
- 그리고 유성룡의 '수영지절'에 대해서도 시인이자 이순신 연구가이신 조신호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선비는 자신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일본#5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탐낸 일본이 우리 도공들을 대거 끌고가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키고 세계에 그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본 도자기 탐방이다.
이마리를 거쳐 아리타로 이동한다.
이마리는 임진왜란 중에 납치되어온 조선 도공들이 모여살며 도자기를 굽던 마을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라는 번주는 전쟁 중에 조선인에게 못된 짓을 특히 많이 했기로 유명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수많은 도공들을 납치하여온 일이다. 강제로 끌고온 도공들이 달아날 수 없도록 이런 깊은 골짜기인 이마리 마을에 가둬놓았다.
지금 보는 이마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온 동네가 도자기를 굽는 집들이다.





다리에 '도조교'라고 씌어 있다. 도조(陶祖)는 도자기의 할아버지(원조)라는 뜻.
이 다리를 건너면 도산 도공들의 무연고 묘지가 있다.

무연고 묘지..
후손없이 일생을 마감한 조선 도공들의 묘는 500기가 넘는다.
가슴이 아린다.

무연고묘지 안내문



골목 골목 도자기 가게가 아기자기하게 널려 있다.



도자기 요의 분포

여기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번주의 이름을 따서 '나베시마'하는 브랜드로 유통되었다. 일본에서 만든 도자기 중에서 가장 격조가 높았다고..

공중 화장실 앞 벽면의 도자기 장식..
도자기 마을답다.

*일본#6
신이 된 도공, 이삼평.
도자기의 신을 모시는 도산신사.
이 신사에 모신 3명의 인물은, 천왕, 나베시마 나오시게, 이삼평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이삼평을 포함한 도공들을 납치해온 공으로,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원조로서 모셔진 것이다.
이삼평은 충청도 공주 사람으로서, 1596년에 끌려온다. 처음엔 고령토가 없어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다가, 약 20년 후인 1616년에 도광석 산을 발견하여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한다.




주제신(主祭神)이 천황.
상전신(相殿神)으로 이삼평공과 그를 납치해온 나베시마가 표기되어 있다.









도조 이삼평 비

이삼평비에서 내려다본 아리타 마을



이삼평의 14대 후손의 매장
다른 매장들에 비해 초라하다.


이삼평이 도광석을 발견한 곳.
원래는 산이 있었는데.. 도자기를 만드는 데 모두 사용되어 산이 사라진 상태.

*일본#7
이삼평의 삶을 생각한다.
지금 그는 일본 도자기의 시조로서 숭상받고, 도자기 신사인 도산신사에 그 당시의 천황과 함께 신으로 봉헌되어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생시의 그는 난리통에 가족과 생이별하며 수천리 이국에 강제로 끌려와 오지에 갖혀 지내면서 노예처럼 도자기를 구웠고,
옳은 흙을 구하지 못해 원하는 품질의 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갖은 구박을 받다가 끌려온지 근 20년이 지나서야 백도광을 발견하여 백자를 재현함으로써 일본 백자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도자기는 유럽에까지 진출하여 일본 도자기를 세계에 알리고 아리타 지역 및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하였다.
이삼평의 삶을 가만히 짚어보자.
그에게 조선이라는 조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왜 자신의 기술을 원수인 일본을 위해 사용하고 원수를 그토록 이롭게 했을까?
그의 삶은 조선과 일본 중 어디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했을까?
나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삶은 비참하고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 우리는 조선시대 도자기의 장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장인 즉 엔지니어였다. 그에겐 먼 국가보다는 기술자로서의 현실적 역할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도공은 도자기를 구워내야 한다. 그게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수많은 재료를 시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백자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적어도 기술자로서 성공한 것이다.
- 그래서 그는 조선을 버리거나 일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술적 성취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만이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고, 가족과 고향을 찾을 수 없는 그의 절망을 해소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 그래서 나는 그를 깊이 연민하고 엔지니어로서 가슴으로 공감한다.
*일본#8
조선통신사의 마지막 기착지 아이노시마를 가다.
-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강력한 의지로 1607년 처음 파견된다.
그 이후 약 200년간 12차례의 조선통신사 사절이 있었다.
- 조선통신사는 양국 간의 대단히 부담이 큰 외교행사였다.
일단 조선의 참여 인원만 해도 500명 전후였고, 이 통신사를 수발하고 안내하기 위한 일본측의 인원과 물자의 부담은 조선보다 훨씬 컸다.
- 통신사는 이동경로는 한양에서 부산으로, 부산의 자성대에서 대마도로, 대마도에서 아이노시마로, 아이노시마에서 본토로 이어졌다.
- 아이노시마는 규슈 신구항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며 연락선으로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섬에 도착하면 바로 조선통신사에 대한 안내판과 기념비 등이 우리를 반긴다.
이 마을은 주민이 약 250명 정도에 불과하다. 한 때 인구가 많았을 때는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 우리를 안내한 마을 원로는 이 섬이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역사적 장소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너무도 열성적으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설명해주려고 애룰 썼다.
- 통신사는 짧게는 6, 7년 길게는 몇십년만에 다니고, 섬에서 묵는 기간도 하루 정도에 불과하거나 긴 경우에는 20일을 넘게 머물렀다.
그리고 통신사 인원은 근 500명 정도였기에 섬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시에, 후쿠오카 번주가 그 모든 것을 책임지고 부담하였다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가 통신사가 이동하는 길을 따라 다이묘들에게 통신사 접대를 부담지게 하여 그들의 과도한 성장을 억제함으로써 역모를 도모할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500명 규모의 통신사를 수용하기 위한 객사의 규모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객관터 기념비 주변에 무궁화나무를 심어두고 있다. 몇 그루의 자리가 비어있을 부끄러워하며 곧 보충해 심어두겠다고 한다.

















와카미야신사에 있는 당시의 우물이 아직 건재하다.
이 물을 지금도 사용한다고.

일본에서는 아이노시마가 고양이 마을로 유명하다.
고양이가 사람을 겁내지 않고 가까이에서 논다. 그래서 고양이와 놀고 싶어 오는 관광객이 제법 있다.
*일본#9
오늘 오전은 후쿠오카 성터와 성터 내의 홍로관 유적지를 방문.
후쿠오카성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축조.
구로다 나가마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코베기 귀베기 경쟁 등 악랄한 짓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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