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나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며칠 전의 어떤 모임에서 한 분이 대화 중에 이런 말을 꺼냈다. 이 말은 금세 심오한 토론 거리가 되어,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은가?'라는 화두로 집단 토론으로 이어졌다. 젊은 날로 돌아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펄떡이는 생선처럼 싱싱했던 그 시절로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으랴.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분위기가 희한하게 흘러갔다. 다들 회귀를 열렬히 원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회귀를 원한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지나온 삶에서 저지른 수많은 후회스런 일들을 바로잡고 싶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많이 하였던가. 어떤 후회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 그리고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남들에 이끌리거나 떠밀려 살아온 것도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그런 후회나 아쉬움을 일부라도 돌이켜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 것이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갈 때 지금의 후회나 기억 혹은 깨달음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필경 지난 날의 그 어리석은 짓들을 뻔히 되풀이하게 될 것 아닌가. 그 멍청하고 찌질하고 게으르고 비겁하고 모호하기만 했던 그 시절을 어찌 다시 반복한단 말인가. 차라리 예전의 과오를 가슴에 묻어두고 지금의 깨달음으로 남은 미래를 덜 어리석게 살아가는 쪽을 택하리라. 그리고 이 큼 살아서 세상 사는 이치와 문리를 어느 정도 깨치고 보니 이제서야 인생의 맛을 겨우 좀 알고 제법 여유와 요령을 부릴 만하다.
비슷한 이유로 박경리와 박완서 같은 대단한 작가들도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박경리는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하였고, 박완서는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라고 하였다.
만약에 '회귀'가 끝없이 반복된다고 하면 어떨까?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로 무한히 되풀이되는 것이다. 아마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것이 소위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극한의 사유 실험이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긍정하며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주체적인 인간 즉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 중에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대목이 있다. 홀로 깊은 고독에 빠져 있을 때 악마가 다가와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그대는 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셀 수 없이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 아무런 새로운 것도 없고, 모든 고통과 모든 기쁨, 모든 생각과 한숨, 그대 삶에서 말할 수 없이 작거나 큰 모든 것이 반드시 다시 그대에게 돌아올 것이며,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똑같은 순서로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심지어 이 거미와 나무 사이로 비쳐오는 달빛, 그리고 바로 이 순간과 나 자신마저도. 영원한 존재의 모래시계는 다시 뒤집혀지고 또 뒤집혀질 것이며, 그대도 그 속의 먼지 한 알처럼 함께 뒤집혀질 것이다!"
‘위버멘쉬’란 '초인'이라 번역되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주도적인 인간'을 가리킨다. 기존의 도덕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삶과 가치를 창조하며, 고통까지도 긍정할 수 있는 인간상을 뜻한다. 주인으로서의 도덕관으로 무장되어 있어, 자신의 힘과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자기 존재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긍정의 언어로 스스로의 도덕을 지켜나가며, 자기지배력으로 자율적인 삶을 실천한다. 이에 상대되는 개념은 노예 도덕관을 가진 존재들이다.
어떻게 해야 위버멘쉬가 될 수 있을까? 그 핵심은 '어린아이'를 닮는 데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정신적 발전 과정을 '낙타' - '사자' - '어린아이'의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낙타 단계'는 기존 가치와 도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순종적 존재이며, '사자 단계'는 기존 질서에 대해 '아니다!'라고 외치며 반항하는 단계이다. 낙타는 순종하지만 분노를 품고 살고, 사자는 기존 가치를 파괴하기는 하지만 아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마지막이 '어린아이 단계'이다. '어린아이 단계'는 놀이 정신을 무장한 순수한 창조의 경지다. 수없이 실패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금세 다시 도전하며, 고통마저도 쉽게 잊고, 부단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삶 자체를 긍정한다. 니체는 바로 이 '어린아이 단계'가 위버멘쉬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 '어린아이 단계'에 고통의 조건을 추가하였다. "기존 강자를 넘어서려는 선택과 그로 인한 고통마저 충분히 이겨냈을 때, 그 고통을 심지어 즐길 때" 진정한 위버멘쉬가 된다고 하였다.
자 그러면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이 왜 ‘위버멘쉬’의 조건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을 바꾸어보자. “만약 이 삶을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 가지 태도가 있을 것이다. 삶의 허무로부터 회피나 도피를 도모하기도 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수용하며 체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회피나 체념은 실존적이지 못하다. 실존적 인간은 자신의 현실, 선택, 행동을 통해 삶의 의미 즉 본질을 만들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가장 실존적인 인간이기에,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기쁨이나 행복과 같은 모든 긍정적 요소뿐만 아니라 고통, 실패 등의 부정적 요소마저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 사랑한다. 이런 삶의 태도가 곧 니체가 말하는 그 운명애 즉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이다. 사랑해야할 운명에는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도 포함된다. '나의 삶이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여야만 비로소 삶의 허무를 뛰어넘어 자기 삶에 대한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의 시험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운명애(Amor Fati)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생각해보라. 그대가 만약 지금처럼 엉망으로 살아간다면, 네 삶이 다시 반복될 때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건 진정 뜨끔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번 생은 대충 포기하고 다음 생에서 반전을 꽤하고 있었다면, '영원회귀'만큼 큰 좌절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열정을 다해 보듬고 사랑하며 의미를 창조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삶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다시 살아볼 만할 것이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이 삶이 무수히 반복되더라도 다시 이렇게 살기를 원하는가?" 이런 질문을 답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이 삶이 아무리 괴로워도 포기하여서는 안 되며, 이 삶을 더 지독히 사랑하고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여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면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갈 것이다." 이렇게 결심하고 행동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그래서 니체는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라고 하였다. '영원회귀'의 사유 실험은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창조하고, 매 순간을 영원과 같은 의미로 살아가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을 제시한다.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니체의 이 사유 실험을 기억하라. 인생을 다시 되돌려 반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 상상해보라. 지금의 찌질한 삶이 되풀이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아름답게 가꾸면 된다. 그러면 다음 삶도 역시 아름다울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날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가?'라는 화두로 토론한 우리 모임은 매우 '니체'적이었다. '회귀'를 모티브로 하여 과거와 지금의 삶과 그 태도를 스스로 평가해보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꼭 물어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 "똑 같은 삶이 반복된다고 해도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삶이 반복된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니체가 가르쳐준 답은 바로 이것이다. 위버멘쉬(초인)가 되어라. 위버멘쉬는 이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러니 이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그 똑같은 삶으로 돌아가도 좋다.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하기에 나의 매 순간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으니까."
아모르 파티(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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