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學而/토피카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5. 2. 7.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_  신경림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
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

 

**
"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신경림의 시에서 이 문구를 처음 접하고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참 묘한 말이다. 

'길을 잃는다'는 말 그 자체는 대단히 부정적인 말이다.
통상의 경우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소극적으로 당하게 되는.. 정서적으로 무척 불편한 상황이다.

그런데 시는..
자신의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의지로 스스로 '길 잃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느긋히 즐기고 있다.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본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의미를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거두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구걸도 해본다. 
동전 던져주는 이들의 손은 검고 거칠다.
그들이 무슨 뜻으로 적선을 하는지 굳이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그 따뜻한 마음만, 세상이 아직도 살 만한 곳이라는 것만.. 느끼면 되지.

그 느긋한 여유를 즐기는 장면이 머리 속에서 선히 그려진다.

**
가끔 길을 잃어보시는가?

우리가 일상의 삶을 열심히 사는 이유는 아마도..
가끔 길을 잃어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가보지 않은 장소,
겪어보지 않은 경험,
감히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
생소한 지식의 세계,
새로운 사람들..

이런 짜릿한 것들은..
당연하게도 이미 알고 있는 길이나 익숙한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모르는 길일수록 그곳에 더 강한 쾌감이 있다.
생판 모르는 길에서 사정없이 길을 잃고 헤맨 후에야 비로소 단전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희열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알 수 없다.

길을 잃어보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자유다.
자유가 없는 자는 길을 잃어보지 못한다.
자유 없는 길 잃음은 방황이다.

그나마 우리가 아는 길만을 열심히 다니는 이유는..
길을 잃어볼 수 있는 자유를 조금씩 저축해두기 위해서이다.

 

2017. 8. 28. 길상사에서 강의를 하고, 법정스님이 계셨던 소박한 진영각 툇마루에 앉아보았습니다.

반응형

'學而 > 토피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대학 랭킹 _ 네이처 인덱스  (0) 2025.02.11
<AGI 시대 북콘서트> 참관기  (3) 2025.02.08
길몽 매매문서 _ 박황희  (1) 2025.02.05
친구를 떠나보내며..  (0) 2025.02.03
'쌍권총 크롤리'와 '알 카포네'  (2) 2025.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