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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읽은책

[읽은책] 채식주의자 _ (+ 한강 작가와 노벨상 수상)

by 변리사 허성원 2024. 10. 12.

[읽은책] 채식주의자 _ (+ 한강 작가와 노벨상 수상)

 

#1
<출판사의 작품 소개 글> 
(* 줄거리는 이걸로 거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는 ‘영혜’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은 영혜를 둘러싼 세 인물인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에서 서술되며 영혜는 단 한번도 주도적인 화자의 위치를 얻지 못한다.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부장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저항하며 금식을 통해 동물성을 벗어던지고 나무가 되고자 한 영혜가 보여주는 식물적 상상력의 경지는 모든 세대 독자를 아우르며 더 크나큰 공명을 이루어낼 것이다.

폭력과 아름다움의 처절한 공존
여전히 새롭게 읽히는 한강 소설의 힘


2007년 창비에서 출간된 『채식주의자』는 2010년부터 일본, 중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꾸준히 번역 출간돼왔으며 2015년 문학의 명문 출판사인 포르토벨로가 영어판을 낸 뒤 영국 포일스(Foyles)서점에서 소설분야 톱10에서 1위에 오르는 등 화제를 모았다. 2016년 미국 최대 출판그룹 중 하나인 펭귄랜덤하우스 그룹의 문학전문 임프린트 호가드(Hogarth)에서 미국판이 출간된 이후에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시카고트리뷴』 『라이브러리저널』 등을 비롯해 다수의 유력 매체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출판전문지 『퍼블리셔스위클리』는 ‘2016년 봄, 가장 기대되는 주목할 소설’ 중 첫째로 『채식주의자』를 꼽기도 하는 등 빠르게 화제의 중심에 올라선 바 있다. 그리고 드디어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세계적인 작품으로 자리했다.

『채식주의자』의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이 뇌리에 박힌 영혜는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혀 육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리고자 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이에 못마땅한 장인이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2부 「몽고반점」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아내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나’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나’는 결국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한 뒤 비디오작품을 촬영하고 다음 날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한다.

3부 「나무 불꽃」은 가족들 모두 등 돌린 영혜의 병수발을 들어야 하는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각인된 폭력의 기억 때문에 철저히 육식을 거부한 채로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다른 생명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본질에 대해 쉼 없이 질문하며 ‘고통’에 대해 천착해온 작가는 이번 개정판을 출간하며 “고백하자면 이 책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 하지만 귀밑머리가 희어지고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은 지금, 나에게는 이 소설을 껴안을 힘이 있다.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을”(새로 쓴 작가의 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대단한 국가적인 경사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은 두 번째이고, 문학상은 최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해마다 외국인들의 노벨 문학상 작품을 번역본으로만 읽어왔다.
노벨상이 발표되고 나면, 그 작가의 책이 서점에 신속히 배포되고, 우린 습관적으로 사다 읽었다.
그런데 이제는 외국어가 아닌 순 우리말로 씌어진 노벨 문학상 작품을 원문 그대로, 그야말로 원서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어찌 국가적인 경사가 아니겠는가?

근데 그 경사스런 수상 뉴스를 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상에나.. 이 대단한 한강 작가의 책이나 글을 본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는 안되지.
그래서 노벨상 발표를 들은 다음날 새벽에 급히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그러고는 마치 벼락치기 시험 준비를 하듯이..서둘러 읽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상 선정의 변을 이렇게 표현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

삶의 연악함을 폭로하는 시적 산문이라는 말에는 수긍이 간다.
심리와 상황의 표사가 수려하다. 주인공 영혜는 자기 표현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자신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간다.

그런데.. 나같은 이공계 출신에게는 논리와 입출력이 분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법이다.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분명히 와닿지 않는다.

영혜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인혜는 왜 그토록 번민하는가.
역시 좀 어렵다.

작가는 아마도 독자들의 머리를 학대하고 싶은 듯하다.
중간 중간에 여러 단서들이 나오기는 한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당한 폭력의 기억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다.


#3
<소설의 답을 찾는다고?>

이 소설을 읽고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해답을 굳이 찾으려 노력했던 것은..
내가 아직까지 근대소설에 익숙한 낡은 사고의 보유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그 점을 지적해준 김명인 교수의 말씀이다. 글 전문은 저 아래에 첨부하였다.

김명인 교수님의 글은 이렇게 나를 깨쳐 주었다.

"하지만 확실히 황석영은 한강에 비해 낡았다. 그는 알다시피 정통 리얼리즘 작가다. 그리고 그만큼 근대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라는 뜻이다. 근대소설은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이며 이미 그 여정을 알고 떠나는 주체의 여행이다.  ..

하지만 한강의 소설들은 이와 다르다. 그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의 세계에서 보장받지 못해 소멸해가는 소수자 여성의 존재성을 스스로 식물이 됨으로써 겨우 지켜낸다. 그리고 이처럼 주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마멸되어가는 여성 등 소수자들의 존재성이 거대한 국가폭력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들이 바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나는 그것을 ‘기억과 애도의 정치학’이라고 부른 바 있다.

한강의 소설은 루카치가 말한 근대장편소설의 미달태이고 기본적으로 루카치가 단편소설을 이야기할 때 겨우 인정해준 ‘서정시‘적인 성격을 가진다.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가 하나의 장편서사라기보다는 몇개의 작은 서사들의 연쇄로 이어진다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사실과 몽환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 등이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는 ‘미숙한 주체’들의 산문형식이다. 하지만 그 ‘미숙성’에서 새로운 언어가, 형식이, 사상이 탄생한다.

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이런 형식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 대부분이 젊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으로 표상되어온 한국문학의 고질적 남근주의, 가부장주의에 대한 집단적 반란이라 할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4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들>

**
"고기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냄새가 나."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못 봤어? 나 샤워했어. 어디서 냄새가 난다는 거야?"
그녀의 대답은 진지했다.
"....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원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 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
고개를 외틀어 그녀를 외면하며, 영혜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이상 냉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간이 훌쩍 흐른 뒤에여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냐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살아본 적이 있다'는 것은 어떤 개념일까? 작가는 이에 답을 주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제대로 살아본 사람은 누구일까?)

**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인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께를 붙든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무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5
<김명인 교수의 노벨상 선정에 대한 감상> _ 241011 페북

훌륭한 번역을 통해 세계의 독자들이 비로소 한국문학이라는 두꺼운 책의 한 페이지를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나는 이것이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한다. 한강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의 성취는 한국 근현대문학이라는 풍요로운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풍요로운 토양이라는 것은 반어이다. 한국문학의 풍요로움이란 식민지-전쟁-분단-냉전-군사독재-압축성장-민주화-극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한 완강한 가부장주의라는, 근대세계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역경을 다 거쳐온 한국현근대사라는 척박한 흐름 위에서 얻어진 역설적인, 문학적 풍요이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의 남한의 소설문학으로만 한정하더라도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 이문구, 조정래, 황석영, 김원일, 현기영, 조세희 등의 남성작가들과 박경리, 박완서, 오정희 등의 여성작가들이 이뤄온 성취는 세계근대문학의 지형도에서 영미권이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 어떤 곳의 문학적 성취와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 중에서 최인훈,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현기영, 박경리, 박완서 정도는 한국어라는 핸디캡이 없었다면 벌써 노벨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작가들이었다. 다만 한국어라는, 서구어로 번역되어야만 하는 소수어로 쓰였다는 것, 게다가 노벨상의 국제정치학상 한국의 배당율이 워낙 낮았다는 것 등 악조건만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간 한국문학이 노벨상을 못 받아 문제였던가, 오히려 문학 생태계의 지속적 열화가 더 문제였지 않은가.

하지만 마침내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우선 한국문학이 한국의 문화적 위상 제고에 따라 번역보급의 문제를 극복하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의 배당율도 높아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 적절한 때에 한강이라는 묵직한 작가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부커상, 메디치상 등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아온 준비된 후보였다.

그러면 왜 황석영이 아니고 한강이었을까? 황석영 자신이 고은과 더불어 오랫동안 노벨상에 공을 들여온 것은 좀 씁쓸하지만 다 아는 사실이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황석영은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작가로서 군림해왔기 때문에 그가 한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더라도 하등 이상할 일이 없다.

하지만 확실히 황석영은 한강에 비해 낡았다. 그는 알다시피 정통 리얼리즘 작가다. 그리고 그만큼 근대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라는 뜻이다. 근대소설은 성숙한 남성성의 형식이며 이미 그 여정을 알고 떠나는 주체의 여행이다. 황석영의 대표작인 <객지><삼포가는 길>의 주인공들은 내일을 모르나 작가는 그들이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 방황은 사실은 계산된 방황. 여행이 끝날 줄 알고 떠나는 여행이다. 근작들인 <손님><철도원 삼대>에 이르면 죽은자들이 무시로 등장하여 산자들을 이끄는 초현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 속 인물들의 운명은 선험적 진리가 견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이래 근대소설의 전형적 상황이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들은 이와 다르다. 그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게다가 한강 소설들의 여성인물과 여성화자들은 오래도록 확고한 진리의 세계(근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으로 그들의 언어는 늘 진리에서 비껴난 형식으로 발화되고 전달된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의 세계에서 보장받지 못해 소멸해가는 소수자 여성의 존재성을 스스로 식물이 됨으로써 겨우 지켜낸다. 그리고 이처럼 주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마멸되어가는 여성 등 소수자들의 존재성이 거대한 국가폭력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들이 바로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이다. 나는 그것을 기억과 애도의 정치학이라고 부른 바 있다.

한강의 소설은 루카치가 말한 근대장편소설의 미달태이고 기본적으로 루카치가 단편소설을 이야기할 때 겨우 인정해준 서정시적인 성격을 가진다.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가 하나의 장편서사라기보다는 몇개의 작은 서사들의 연쇄로 이어진다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사실과 몽환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 등이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는 미숙한 주체들의 산문형식이다. 하지만 그 미숙성에서 새로운 언어가, 형식이, 사상이 탄생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이런 형식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 대부분이 젊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으로 표상되어온 한국문학의 고질적 남근주의, 가부장주의에 대한 집단적 반란이라 할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강은 1970년생으로 이러한 당대 주류 한국소설의 리더, 맏언니의 자리에 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우연인지 모르나 한강의 이러한 문학적 위상을 귀신같이 알아채서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의의이다. 아마도 한 10년 후를 전후해서 한국은 다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영광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토록 사람들을 들들볶아서 유지되는 한국사회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역량이 충분히 확대재생산 가능하다고 본다.

드디어 노벨상 수상작을 원어로 읽는, 아니 심지어 이미 읽은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어떤 트위터러의 촌평에 미소지으며

 

#6
<노벨문학상 한강의 언어들, 어디서 헤엄쳐 왔나> 중에서 _ 한겨레

"한국문학이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펼쳐진다. 언젠간 걷게 되리라 다들 열망하긴 했다. ‘변방의 언어’였던 한글의 공표 기념일 이튿날인 10일 밤(한국시각) 작가 한강(54)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려왔다. “한국 문학작품과 함께 자랐다”고 스웨덴 한림원에 공표한 한강이 막을 올린 세계는 일단 이런 것이다.
국내 최초 노벨 문학상, 아시아 최초 여성 노벨 문학상, 121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다섯번째로 젊은 작가…."

"작가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와 소설로 아울러 등단(1993·1994년)했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출간한 때가 불과 스물다섯 나이인 1995년이었다. 첫 책에 수록된 단편들 대개가 어둡다. 당시 한겨레와 인터뷰한 작가는 ‘젊은 작가가 왜 그리 슬픈 이야기만 쓰냐’는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슬픈 게 좋지 않아요?” 시로 등단한 지 20년 만인 2013년 내놓은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속 12편의 연작시 ‘거울 저편의 겨울’의 지배적 정서다. 인간 사회, 인류 보편의 ‘추위’에 휩싸인 곡진한 공감.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특히 최신작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어떤 소설도 아래 시들의 감성을 지울 수 없다.
“추운 곳/ 오래 추운 곳// 너무 추워/ 눈동자들은 흔들리지 못해/ 눈꺼풀들은/ (함께) 감기는 법을 모르고//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거울 속에서/ 네 눈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너는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거울 저편의 겨울’ 부분)"

" 그 아버지 한승원을 빼고 한강을 말하긴 어렵다. 한때 낮 교사 밤 작가로, 새벽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자명종도 없이 깨어 글을 쓰던 이다. ‘늘 피곤하시다’는 인상으로 딸에게 각인될 만큼 성실했음에도, 초등생 한강은 한 반 정원 60명 중 급식비를 내지 못해 도시락을 싸간 3명 중 하나였다. 전남 장흥 출신 한승원은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대하소설 ‘동학제’, 비구니를 주인공 삼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구도 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 등으로도 알려졌지만, 다수의 작품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민초들의 한과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 그럼에도 이번 노벨 문학상은 실상 ‘1기 한강’에 대한 평가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한 계절의 한강이 상을 받은 것이다. 이제 작가는 겨울에서 여름, 나아가 봄으로 자신을 전개시키고자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후 “이젠 봄으로 들어가고 싶다. 역사적 소설은 그만 쓰겠다”며 “좀 더 개인적인, 생명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한다”고 말한 대로다."

 

노벨문학상 한강의 언어들, 어디서 헤엄쳐 왔나

한국문학이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펼쳐진다. 언젠간 걷게 되리라 다들 열망하긴 했다. ‘변방의 언어’였던 한글의 공표 기념일 이튿날인 10일 밤(한국시각) 작가 한강(54)이 2024년 노벨 문

n.news.naver.com

 

#7
<2016년 KBS 인터뷰>

 

#8
<매일경제 인터뷰> 창밖은 고요합니다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 김유태 기자의 인터뷰 기사는 노벨상이 수상이 결정된 즉시 신문에 실렸다.
그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절묘했다. 노벨상 수상 발표가 있기 직전에 수상 여부를 모른 상태에서의 인터뷰였으니, 한 마디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기자 인생에 이만큼 짜릿한 경험을 다시 겪기 어려울 것이다.
그 타이밍보다 정작 멋진 것은 인터뷰의 내용이다.
기자의 질문은 그 품질이 우리가 통상 보아오던 그런 통속적인 수준이 아니다. 시쳇말로 넘사벽의 고퀄이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물론 그 정신세계마저 훤히 꿰뚫고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질문의 언어 그 자체도 그저 자신의 언어를 쓴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감각과 시적 취향에 동조하도록 조율된 듯하다. 마치 명창과 고수가 절묘하게 호흡을 맞추듯.
작가의 답변 못지않게 기자의 질문이 돋보이는 기가 막힌 현문현답의 인터뷰를 경험해 보시라.) 

―선생님 소설의 시원(始原)은 '붉은 닻'일 겁니다. 갯벌에 점점 잠기던 녹슨 붉은 닻들의 풍경은, 훗날 선생님 소설에 등장할 인물들을 전부 예고하는 하나의 선언적인 메타포로 남게 됐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효용을 다하고 방치된 것들, 변색되다 침잠하는 가련한 생들에 대한 기억이랄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에 입사해 일하던 때 영종도로 직원 수련회를 갔는데, 해 질 무렵 썰물이 빠져나간 모래펄에 녹슨 닻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단편집 '여수의 사랑'에 묶인 소설들을 쓰던 시기에는 고단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떠나기를 몰래 꿈꾸고, 저마다 홀로 피로와 시련을 감당해 내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2016년 부커상 수상 즈음 인터뷰에서 "인간이란 주제는 제가 지금까지 소설을 쓴 동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을 소설이란 형식으로 '거는' 것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선생님의 과거 말씀(작가의 말 등)을 되짚어보면 작가가 소설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작가를 잉태하는 것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생각하고 서성이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길을 잃고 우회하고 되돌아오고…. 그런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고 지금도 느낍니다. 그렇게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의 힘, 다시 말해 세상에서 소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거칠고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서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읽고 있는 소설 속 사람이 되어보며 자신으로부터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반복하면 자아에 틈이 벌어지면서 투명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요. 그렇게 소설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마지막 질문이 가장 멋지다. 기자의 진정한 내공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쩌면 이 질문을 드리기 위한 인터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필하시는 순간, 선생님이 보시는 '골방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집필 공간으로서의 물리적 풍경이 아니라 '쓰고 있는 순간에 선생님께서 보시는 상태의 정신적인 풍경'이 궁금합니다. 누가 지나가고, 누가 말을 거는지,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심장 속, 아주 작은 불꽃이 타고 있는 곳. 전류와 비슷한 생명의 감각이 솟아나는 곳.

 

#8-1.
<매일경제 김유태 기자가 쓴 위의 인터뷰는 노벨문학상 발표와 함께 즉시 특종이 되었다. 그에 대한 기자의 후기.>

>>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꺼냈다. 그분이 최근까지 읽었다고 소개해주신 책. 서문을 읽으며 전율했다. 샬란스키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잊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어느 정도는 조망이 불가능한 스스로의 아카이브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영원히 보존되지 못한다 해도, 어떤 것들은 다른 것보다 오래 보존된다... 쓰는 행위를 통해 아무것도 되찾을 수도 없다 해도, 모든 것을 경험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는 있다...""

"인터뷰 질문이 좋았다는 분들도 있었고 신문에 쓰기엔 너무 현학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사실 그분에게서 뭔가를 '이끌어내려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질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분의 단편과 장편, 작가의 말까지 전권을 모두 다시 읽었고(거짓이 아니다...) 주말 이틀 동안 질문지를 써내려갔다. 독자로서의 연서에 가까운 편지 한 장, 질문 두 장, 그리고 부끄러워 밝힐 수 없는 자료가 담긴 또 두 장.
그렇게 다섯 페이지에 준비한 질문 13개를 고봉밥처럼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그분의 문(門)을 열어야만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어떤 책인가요?'와 같은 수준의 저급한 질문을 던졌다간 그분이 그나마 여신 창문을 꽁꽁 닫으리라는 판단에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질문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시간이 허락되어 리라이팅을 했다면 오히려 인터뷰 기사를 망쳤으리란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

https://blog.naver.com/yujmmm/223618007109

 

매일경제 김유태/주진오/한강 인터뷰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전해진 바로 다음날, <매일경제>에 장문의 서면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더...

blog.naver.com

 

#8-2.
김유태 기자의 '인터뷰의 기술'을 별도로 정리해두었다.

https://athenae.tistory.com/448271

 

[잡학잡식] 인터뷰의 기술 _ 한강 작가 인터뷰 기사를 보고

[잡학잡식] 인터뷰의 기술 _ 한강 작가 인터뷰 기사를 보고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확정되었다는 뉴스가 나온 바로 다음 날,매일경제에 한강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김

athenae.tistory.com

 

#9.
<특집 다큐멘터리>

KBS가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한강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특집 다큐멘터리https://www.youtube.com/watch?v=iYVzcI0QIFY

 

#10
황석영의 축하 글
역시 멋진 선배 작가입니다.

 

#11.
<세계일보 기사> _ 241014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돼온 한국 문단의 거목 황석영 작가 역시 “놀랐다. 그리고 아주 기쁘다”며 축하의 말을 발표했다. “무엇보다도 한강의 작품들이 억압과 폭력 아래 스러진 사람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깊은 상흔을 어루만지고 기억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와 다른 어느 누군가의 작품에 주어지지 않아서 더욱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사지원, 2024.10.12)

심지어 대표적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도 이튿날 이례적으로 논평을 내고 한강 작가의 대표작과 작품 세계를 간략히 분석한 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일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단순히 대한민국 국적의 작가의 수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문학 본연의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일원으로서 분명한 몫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작가 개성에 대한 문학적 보상이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화의 토양을 일궈온 수많은 작가들의 땀이 스며있는 성과이기도 하다. 한국작가회의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인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을 담아 축하한다.”

 

#12
한강 작가 대단하군요.
작사, 작곡에 직접 노래까지 부릅니다. 자작곡의 수가 여럿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CGP1dwZ7lI

 

#13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70qM07SzWgU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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