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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67 연암 박지원의 아타락시아, 명심(冥心)

by 변리사 허성원 2024. 6. 13.

연암 박지원의 아타락시아, 명심(冥心)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론(Pyrrhon)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중에 극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 배에 탄 다른 승객들은 배가 뒤집어질 두려움과 절망으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피론은 침착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에게 배에 있는 돼지를 가리키며 보라고 했다. 돼지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유유히 자신의 먹이를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피론의 돼지처럼 외부 상황에 초연한 마음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타락시아를 궁극적인 쾌락이요 행복이라 여겼다. 이성적 인식에 기초하여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내면의 평온을 유지하는 자율적인 마음의 평정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아타락시아' 체험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등장한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를 위한 사신 일행을 따라 중국을 여행하고 온 기록이다. 사신 일행이 황제를 알현하러 북경에 도착하였을 때 황제는 이미 만리장성 밖 피서지인 열하로 떠나있었고, 날짜를 촉박하게 정하여 사신 일행을 열하로 불렀다. 이에 일행은 인원을 줄여서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였는데, 큰 비에 물이 불어난 강물을 아홉 번씩이나 건너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 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기록’ 즉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이다.

이 글에서 연암은 ‘명심(冥心)’이라는 말을 썼다. 이는 ‘깊고 고요한 마음’ 혹은 ‘그윽한 마음’을 가리킨다. 이 ‘명심(冥心)’이 곧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아타락시스이다.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읽어보자. 일부 내용은 내 나름으로 의역하였고 분량도 약간 줄여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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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돌에 부딪치며 다툰다. 놀란 물너울, 화난 물기둥, 애원하는 여울이 달리고 부딪고 뒤집어지며, 흐느끼고 울부짖으면서 금세라도 만리장성을 부수어버릴 기세다. 전차, 기마, 대포, 북이 만 대씩 모여 소리를 내어도 그 압도적인 소리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모래 위에 거대한 돌들과 강둑에 어둡게 늘어선 버드나무는 마치 물귀신과 강의 신이 사람 놀리기를 경쟁하는 듯하다.

‘이곳은 옛날 전쟁터라 강물이 운다’고 한다. 하지만 강물소리는 그것을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산 속의 우리 집 문 앞에 큰 개울이 있어, 여름철 소나기가 지나갈 때마다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 전차, 기병, 대포, 북 소리를 내내 들었다. 한번은 문을 닫고 누워 소리들을 비교하며 들어보았다. 깊은 숲 소나무의 퉁소 소리가 나면 듣는 이의 마음이 맑을 때이고,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이면 듣는 이가 화난 것이고,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울어대면 듣는 이가 교만한 것이고, 온갖 악기가 번갈아 울려대면 듣는 이가 노한 것이고, 천둥과 우레가 치면 듣는 이가 놀란 것이고, 찻물 끓이는 소리는 듣는 이가 풍취를 즐기는 것이고, 거문고가 음률은 듣는 이의 마음이 애절한 것이고, 문풍지에 이는 바람소리는 듣는 이가 의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리를 바르게 듣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이미 품은 생각으로 인해 귀가 그런 소리를 만들어주는 것일 뿐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강 하나를 아홉 번 건넜다. 강은 변방 밖에서 나와 만리장성을 뚫고, 유하, 조하, 황화, 진천 등의 여러 물줄기를 만나, 밀운성 아래를 거쳐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 백하를 건넜는데, 바로 이 강의 하류다. 요동 땅에 들어서기도 전에 한여름이라 불볕 속에 가는데 갑자기 큰 강을 앞에 맞닥뜨렸다. 아마도 천리 밖에 폭우가 내렸나 보다.

물을 건널 때 모두 머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하늘에다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물이 휘감아 돌며 용솟음치는 것을 보면, 몸은 거슬러 오르는 것 같고 눈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작스런 어지럼증으로 굴러 떨어져 물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머리를 쳐든 것은 하늘에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눈으로 느낀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는 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요동의 들은 평평하고 넓어 물이 노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요하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밤이 아닌 낮에 건넜기 때문이다. 낮에는 물이 눈에 보이니까 위태로움이 온통 눈에 쏠리니, 눈 가졌음을 걱정할 판인데 어찌 귀에 들리는 것이 있겠는가. 내가 밤중에 강을 건너보니, 눈은 위태로움을 보지 못하고, 위태로움은 오직 들리는 것에만 쏠려, 귀로 느끼는 무서움으로 걱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명심(冥心)한 자 즉 ‘마음이 그윽한 자'는 눈과 귀가 누(累)가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마부가 다쳐 뒷 수레에 태웠기에, 나는 말의 재갈을 느슨하게 하여 강물에 떠서는 안장 위에 무릎을 굽혀 발을 모았다. 떨어지면 강물이니, 물을 땅으로 삼고, 물을 옷으로 삼고, 물을 몸으로 삼고, 물을 성정(性情)으로 삼으리라는 마음으로, 한번 떨어져도 좋다는 각오를 하자, 드디어 내 귀속에는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도 근심 없이 일상처럼 편히 지내는 듯하였다.

옛날에 우(禹)임금이 황하를 건널 때 황룡이 배를 떠받쳐서 지극히 위태로웠으나, 마음속으로 삶과 죽음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 용이건 지렁이건 크든 작든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소리와 색은 바깥에서 오는 것인데, 이 바깥의 것들이 늘 눈과 귀를 어지럽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인생이 이 세상을 건너갈 때, 그 험하고 위태롭기가 강물보다 더 심할 것이니, 보고 듣는 것이 매번 병폐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또 산중으로 돌아가거든, 앞 개울소리를 다시 들고 증험해보리라. 그리하여 제 몸 건사하는 약빠름을 가지고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신하는 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리라.

 

<챗GPT의 해설> 이 그림은 피론주의 철학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피론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론이 창시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PIRRHO HELIENSIS PLISTARCHI FILIUS"라는 라틴어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피론, 엘리스 출신, 플리스타르코스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림에서 배는 격랑에 휩싸인 채로 항해하고 있습니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절망하는 모습이지만, 일부는 침착하고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피론의 회의주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피론은 세상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고요함과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라틴어 문구 "OPORTERE SAPIENTEM HANC ILLIUS IMITARI SECURITATEM"은 "현명한 사람은 그(피론)의 평정을 모방해야 한다"는 의미로, 피론의 철학적 태도를 따를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그림은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불안과 혼란에 빠지기보다는,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피론주의는 삶의 다양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가르침으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평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통찰을 제공합니다.

 

**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원역문
(* 한국고전 종합DB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기초로 하여 나름의 의역을 가한 것임.)

河出兩山間 觸石鬪狠 其驚濤駭浪憤瀾怒波哀湍怨瀨 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萬架 戰鼓萬坐 未足諭其崩塌潰壓之聲 沙上巨石屹然離立 河堤柳樹 窅冥鴻濛 如水祗河神爭出驕人 而左右蛟螭試其挐攫也

강물이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돌에 부딪치며 다툰다. 놀란 물너울, 화난 물기둥, 애원하는 여울이 달리고 부딪고 휘감겨 뒤집어지며, 흐느끼고 울부짖고 소리쳐 부르짖으면서 금세라도 만리장성을 부수어버릴 기세다. 전차, 기마, 대포, 북이 각기 만 대씩 모여 소리를 내어도 그 압도적인 소리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모래 위에 거대한 돌들이 거리를 두고 우뚝 서있고 강둑에는 버드나무가 어둡게 늘어서 있다. 마치 물귀신과 강의 신이 사람 놀리기를 경쟁하는 듯하고, 좌우에서는 이무기들이 사람을 낚아채려는 듯하다.

 或曰此古戰場 故河鳴然也 此非爲其然也 河聲在聽之如何爾 余家山中 門前有大溪 每夏月急雨一過 溪水暴漲 常聞車騎砲鼓之聲 遂爲耳崇焉 余嘗閉戶而臥 比類而聽之 深松發籟 此聽雅也 裂山崩崖 此聽奮也 群蛙爭吹 此聽驕也 萬筑迭響 此聽怒也 飛霆急雷 此聽驚也 茶沸文武 此聽趣也 琴諧宮羽 此聽哀也 紙牕風鳴 此聽疑也 皆聽不得其正 特胸中所意設 而耳爲之聲焉爾

어떤 이가 ‘이곳은 옛날 전쟁터라 강물이 운다”고 한다. 하지만 강물소리는 그것을 듣는 사람의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산 속의 우리 집 문 앞에 큰 개울이 있어, 여름철에 갑작스런 소나기가 지나갈 때마다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 전차, 기병, 대포, 북 소리를 내내 듣다보면 귀가 먹먹해진다. 내가 한번은 문을 닫고 누워 소리들을 비교하며 들어보았다. 깊은 숲 소나무의 퉁소 소리가 나면 듣는 이의 마음이 맑은 것이고,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이면 듣는 이가 화난 것이고,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울어대면 듣는 이가 교만한 것이고, 온갖 악기가 번갈아 울려대면 듣는 이가 노한 것이고, 천둥과 우레가 치는 소리는 듣는 이가 놀란 것이고, 찻물 끓이는 소리는 듣는 이가 풍취를 좋아하는 것이고, 거문고가 음률이 들리면 듣는 이의 마음이 애절한 것이고, 문풍지에 이는 바람소리는 듣는 이가 의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이미 생각을 품은 바 있기에 귀가 그런 소리를 만들어주는 것일 뿐이다.

今吾夜中一河九渡 河出塞外 穿長城 會楡河潮河黃花鎭川諸水 經密雲城下爲白河 余昨舟渡白河 乃此下流 余未入遼時 方盛夏 行烈陽中 而忽有大河當前 赤濤山立 不見涯涘 蓋千里外暴雨也 渡水之際 人皆仰首視天 余意諸人者 仰首黙禱于天

지금 나는 밤중에 강 하나를 아홉 번 건넜다. 강은 변방 밖에서 나와 만리장성을 뚫고, 유하, 조하, 황화, 진천 등의 여러 물줄기를 만나, 밀운성 아래를 거쳐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 백하를 건넜는데, 바로 이 강의 하류다. 내가 요동 땅에 들어서기도 전에 한여름이라 불볕 속에 가는데 갑자기 큰 강을 앞에 맞닥뜨렸다. 붉은 물결이 산처럼 서있어 강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천리 밖에 폭우가 내렸나 보다.

渡水之際 人皆仰首視天 余意諸人者 仰首黙禱于天 久乃知渡水者 視水洄駛洶蕩 身若逆溯 目若沿流 輒致眩轉墮溺 其仰首者非禱天也 乃避水不見爾 亦奚暇黙祈其須臾之命也哉

물을 건널 때 모두 머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하늘에다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휘감아돌며 용솟음치는 것을 보면, 몸은 거슬러 오르는 것 같고 눈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작스런 어지럼증으로 굴러 떨어져 물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머리를 쳐든 것은 하늘에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겨를에 그 순간의 목숨을 빌고 있겠는가.

其危如此而不聞河聲 皆曰遼野平廣故水不怒鳴 此非知河也 遼河未嘗不鳴 特未夜渡爾 晝能視水 故目專於危 方惴惴焉 反憂其有目 復安有所聽乎 今吾夜中渡河 目不視危 則危專於聽 而耳方惴惴焉 不勝其憂

눈으로 느낀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는 듣지 못하고서, 모두들 말하길, “요동의 들은 평평하고 넓어 물이 노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물을 알지 못한 탓이다. 요하가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밤에 건너지 않았을 뿐이다. 낮엔 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태로움이 온통 눈에 쏠려 두려워 벌벌 떨게 되니, 도리어 눈을 가졌음을 걱정할 판인데, 어찌 귀에 들리는 것이 있겠는가. 지금 내가 밤중에 강을 건너보니, 눈은 위태로움을 보지 못하고, 위태로움은 오직 들리는 것에만 쏠려 귀로 느끼는 무서움으로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吾乃今知夫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그윽한 자(명심자冥心者)'는 눈과 귀가 누()가 되지 않고, 눈과 귀를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아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今吾控夫足爲馬所踐 則載之後車 遂縱鞚浮河 攣膝聚足於鞍上 一墜則河也 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於是心判一墮 吾耳中遂無河聲 凡九渡無虞 如坐臥起居於几席之上

지금 내 마부가 발을 말에 밟혀서 뒷 수레에 태웠기에, 나는 말의 재갈을 느슨하게 하여 강물에 떠서는 안장 위에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니, 물을 땅으로 삼고, 물을 옷으로 삼고, 물을 몸으로 삼고, 물을 성정(性情)으로 삼으리라는 마음으로,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드디어 내 귀속에는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니,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도 근심 없이 편한 자리에 앉거나 누워 일상처럼 지내는 듯하였.

昔禹渡河 黃龍負舟 至危也 然而死生之辨 先明於心 則龍與蝘蜓不足大小於前也 聲與色外物也 外物常爲累於耳目 令人失其視聽之正 如此 而況人生涉世 其險且危 有甚於河 而視與聽 輒爲之病乎 吾且歸吾之山中 復聽前溪而驗之 且以警巧於濟身 而自信其聰明者

옛날에 우(禹)임금이 황하를 건널 때 황룡이 배를 떠받쳐서 지극히 위태로웠으나, 마음속으로 삶과 죽음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 용이건 지렁이건 크든 작든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소리와 색은 바깥에서 오는 것인데, 이 바깥의 것들이 늘 눈과 귀를 어지럽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인생이 이 세상을 건너가는 데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롭기가 강물보다 더 심할 것이니, 보고 듣는 것이 매번 병폐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또 산중으로 돌아가거든, 앞 개울소리를 다시 들고 증험해보리라. 그리하여 제 몸 건사하는 약빠름을 가지고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신하는 자들에게 깨우침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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