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 및 휘기에이아와 파나케이아를 비롯한 모든 신들을 증인으로 하여, 나의 최선의 능력과 판단으로 아래 서명된 선서와 서약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작성한 최초의 의사 윤리 선서의 첫머리다.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인 의술의 신 아폴론에 이어 언급된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는 아폴론의 아들이니, 부자가 나란히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던 셈이다. 이 문구는 현재 전 세계 의과대학 졸업자들이 사용하는 '제네바 선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들어있지 않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테살리아의 공주인 코로니스에게서 태어났다. 코로니스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들였으나, 그에게서 버림받을까 두려워 인간과 결혼하려다 아폴론의 누이인 아르테미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죽은 코로니스를 화장하기 직전에 헤르메스가 나타나 그녀의 배를 가르고 아스클레피오스를 꺼내주었다. 헤르메스는 그를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족 현인 케이론에게 맡겼다. 케이론은 자신이 아폴론으로부터 전수받았던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의술을 물려주었고, 심지어 아테나 여신이 준 메두사의 피를 이용하여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 등과 같이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스클레피오스는 사람의 죽음을 지연시키는 의술의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물은 그가 지니고 다닌 지팡이다. 거기에는 뱀이 한 마리 감겨 있다. 뱀은 낡은 허물을 벗고 피부를 재생하는 생명체이기에, 젊음을 되찾거나 노화를 벗어나는 재생, 불사 혹은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고 뱀은 수시로 거듭 새로이 태어나므로 생명의 영속을 위한 변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도 변화는 생명과 같다. 뱀처럼 육신의 변화를 불가하지만 그 정신은 부단히 변화하여야만 그 영혼의 건강과 성장을 유지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이렇게 말했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못하는 정신은 더 이상 살아있는 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노인이나 환자의 걸음을 지탱하는 실용적인 기능(cane)을 하지만, 목동이나 여행객 등이 자신의 존재를 보이는 상징적인 기능(staff)도 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후자에 해당한다. 이런 상징적인 지팡이는 보행 지지와 함께, 그것을 가진 사람의 권위나 지혜를 의미하기에 종교 지도자, 마법사, 현자들이 주로 들고 다녔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는 질병에 걸린 사람을 지켜준다는 의미에다, 의술에 대한 신뢰와 그 권위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혼동되는 또 하나의 지팡이가 있다. 그건 헤르메스가 가지고 다니는 카두세우스(Caduceus)이다. 카두세우스는, 뱀이 한 마리 감겨져 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달리, 지팡이의 상단에 날개가 달려 있고 그 아래에 교미를 하고 있는 한 쌍의 뱀이 서로 교차하여 감고 있다.
카두세우스의 주인인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인 동시에 전령이며, 여행, 상업, 협상, 언변 등을 관장하는 올림포스 주신 중 하나다. 그리고 온갖 갈등을 은밀히 해결하면서 거짓말, 사기 혹은 도둑질 등의 영역까지도 관장하고, 죽은 자를 지하세계로 안내하는 일도 하였다. 그래서 카두세우스는 신의 권위를 보이는 지팡이에다 여행을 뜻하는 날개가 있고, 혀 놀림을 멈추지 않는 교활한 두 뱀이 야합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있다. 이에 카두세우스는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과 물류 혹은 여행뿐만 아니라 야합과 도둑질 등에 관한 지극히 세속적인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카두세우스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혼동되어 의학 혹은 의술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1902년 미국 육군 의무 장교가 의무팀의 상징으로 카두세우스를 사용한 이후 적잖은 의료기관이 이를 따르고 있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전문 의료 협회는 그 62%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상업적 의료 기관은 76%가 카두세우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Wikipedia).
우리나라 의학, 의료 분야의 기관이나 단체에서도 카두세우스를 쓰는 곳과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쓰는 곳이 혼재되어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최근까지 카두세우스를 쓰다가 이를 폐기하였고, 국군의무사령부 등 군 소속은 대체로 카두세우스를 로고의 심볼로 쓰고 있다. 그 외 대부분의 의사나 의학 단체의 심볼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다.
의술은, 신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언급된 바와 같이,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료 분야에서, 상업, 사기 등과 연관된 헤르메스의 상징물인 카두세우스가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당연히 비판이 있었다. 스튜어트 타이슨은 '월간과학'라는 잡지에 기고한 '카두세우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큰 길과 시장의 신으로서 무엇보다 상술과 두터운 지갑의 수호자이니, 떠돌이 세일즈맨에게나 딱 맞는 수호신이다. 그는 신들의 전령으로 지상에 평화를 빙자한 죽음을 가져다주고, 그의 매끄러운 언변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뒤집기도 한다. 그러니 그의 상징물은,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의사에게보다는, 국회의원, 돌팔이 의사, 책장사, 외판원에게나 더 맞지 않겠는가? 헤르메스는 죽은 자를 지하 세계로 안내하는 자이니, 그의 상징물은 병원차보다는 장의차에게나 더 어울릴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카두세우스는 그저 뱀의 수만 다른 것이 아니다. 널리 많은 사람을 위하는 고결한 뜻의 상징인가 혹은 사적인 이로움을 좇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인가에 그 차이에 있는 것이다. 이는 어찌 의사들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공통체 속에서 삶과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단히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스클레피오스 지팡이의 가치인가, 카두세우스의 가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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