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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61 특허통수권⑩ 특허는 비움과 버림으로 얻음을 구한 것이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4. 5. 13.

특허통수권⑩  특허는 비움과 버림으로 얻음을 구한 것이다

 

“배움을 행하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날로 버리는 것이다. 버리고 또 버리면 ‘무위(無爲, 할 일 없음)’에 이르나니, ‘무위(無爲, 하지 않음)’함으로써 ‘불위(不爲, 하지 못함)’가 없게 된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_ 도덕경 제48장).”

이 문장은 도덕경 중에서 널리 알려진 내용 중 하나다. '배움(學)'과 '도(道)', 더함과 버림, 무위(無爲)와 불위(不爲)를 말하며, 알듯 모를 듯 많은 생각 거리를 주지만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다양한 해석이 있고, 어느 것을 보아도 그 뜻이 명확히 와 닿지는 않는다. 

여기서 '배움'을 발명으로 '도'를 특허로 대치해보았더니, 발명과 특허의 개념과 그들 간의 관계를 좀 색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해석이 원래 도덕경의 문언을 이해하는 데에도 나름의 도움이 될 듯하다.

발명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다. 인간이 누리는 온갖 물질문명의 산물들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해결해야할 문제도 끝없이 만들어낸다. 그 자체에 내재된 문제일 수도 있고, 인간의 욕구가 더 커지고 더 까다로워진 데에서 생겨난 것도 많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창출된 새로운 기술 수단이 바로 발명이며, 인간이 지적 노력에 의해 배우고 익혀서 창안해낸 성과물이다. 그래서 발명을 한다는 것은 배움을 깊이 행하는 과정이다.

등산에 비유한다면, 발명 행위는 산의 정상을 향한 새로운 길을 내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인류는 끝없이 새로운 과제를 추구하고 그 해결의 길을 배우고 찾아낸다. 완전히 새로운 길일 수도 있고, 기존 길과 나란히 가거나 교차 혹은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길도 있다. 모든 길은 다들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 빠르거나 더 편하거나 더 좋은 모습을 가지거나 그저 그냥 기존 것과 다르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리하여 길 즉 발명은 날로 늘어난다.

이러한 발명을 보호하는 것이 특허다. 특허는 발명이 포함된 일정 영역을 둘러싸서 타인의 무단 사용을 금하는 울타리와 같다. 울타리는 곧 성(城)이다. 특허가 구축한 성은 배타적 지배력의 경계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은 그 성주만이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성곽의 외부는 성주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한다. 성은 그 내부 공간이 넓을수록 좋은 성이다. 그래서 변리사는 발명자의 발명을 바탕으로 최대한 넓은 특허의 땅의 만들어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전문가다. 가끔 송곳조차 꽂기 어려울 정도로 터무니없이 좁은 권리범위를 가진 부실한 특허도 만나기도 한다.

특허의 땅은 가능한 넓어야 하지만 욕심껏 마음대로 넓힐 수는 없다. 내 땅이 공유지나 타인의 사유지를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유지라면 세상에 일반화된 관용 기술이며 사유지는 앞선 남의 특허다. 이들의 영역까지 무단으로 차지하려는 특허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특허출원은 당연히 심사과정에서 걸러져 특허를 받지 못하지만, 간혹 심사 과정의 오류로 특허 등록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 그 특허는 무효사유를 가지고 있어, 작은 외력에도 쉬이 무너질 수 있는 부실한 성곽을 가진 특허가 되는 것이다.

좋은 특허를 취득한다는 것은 결국 비움과 버림의 예술이다. 발명자의 발명은 대체로 문제해결을 위한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기술수단이다. 그것은 길이니 곧 선이다. 이에 반해 특허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면적을 가진 땅 즉 면이다. 그래서 특허출원을 할 때는, 먼저 발명이라는 그 구체적인 해결 수단으로부터 상위 개념인 추상적인 발명 사상을 도출한다. 발명 사상은 온갖 다양한 실시형태로 구현될 수 있기에, 구체적인 해결수단으로서의 선이나 길이 아니라 관념적 이론으로서 그보다 훨씬 넓은 면이나 공간의 모습이다. 그 발명 사상이 포괄하는 최대한의 기술 공간의 땅을 상정하여야 한다. 즉 특허의 성이 포용하게 될 기술 지배력의 공간을 최대한 넓게 비워내는 것이다. 성 내부의 비움은 곧 기술 사상의 채움이다.

'비움'을 통해 특허 지배력의 공간이 대충 정해지면,  그 경계를 따라 특허 성곽의 주춧돌을 놓아본다. 그런 다음 특허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을 배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공유지 기술이나 사유지 기술이 인접하여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특허가 그들에 간섭된다면 해당 기술 영역이 성 내부가 아닌 바깥에 존재하도록 성곽을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지배해서는 안 되는 기술 영역을 버리는 ‘버림’ 과정이다. 이에 의해 임시로 놓은 성곽의 주춧돌은 점차 성 내부를 향해 후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내부의 '비움'과 바깥의 '버림'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면, 더 이상 버릴 게 없는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른다. 이 상태의 특허는 그 발명이 포괄할 수 있는 가장 넓고도 강한 권리가 된다. 그런 강한 권리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無爲) 그 힘을 누리지 못할 일이 없다(無不爲).

특허의 경계 즉 성곽은 가짐과 버림의 경계다. 그래서 특허를 취득한다는 것은, 내부에 대한 지배력 확보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외부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동시에 천명하는 행위가 된다. 성곽 내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동시에, 성곽 외부에서의 자유로운 이용을 허용한다는 뜻을 온 세상이 공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권리 취득과 권리 포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바깥의 지배력을 버리지 않고는 내부의 지배력을 얻을 수 없다. 그러기에 특허증은 권리증인 동시에 권리포기증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의 말씀에 빗대어 다시 정리해보자. 발명은 길이니 날로 더해가고, 특허는 성이니 안의 ‘비움’과 바깥의 ‘버림’을 통해 '얻음'을 구한 것이다. 비움과 버림의 최적 균형을 이루어야만 특허는 그 발명에 대해 최적의 넓고도 강한 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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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행하는 것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날로 버리는 것이다.
버리고 또 버리면 '해야할 게 없음'(無爲)에 이르게 되어,
하지 않음(無爲)으로써 하지 못함(不爲)이 없게 된다.
장차 천하를 취하고자 한다면,
항상 무사(無事, 부림이나 강제가 없음)로써 하여야 하고,
유사(有事)하다면(부림이나 강제가 있다면) 천하를 얻기에 족하지 않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將欲取天下也 恒无事 及其有事也 又不足以取天下矣
_ 老子 '道德經' 4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