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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返俗謠(반속요) _ 여승 설요

by 변리사 허성원 2024. 4. 5.

꽃 피고 그 향기 날리어 마음 속이 설레어대니, 
어찌 할거나~ 어찌하란 말인가 이 청춘을.

瑤草芳兮思芬蘊(요초방혜사분온)
蔣奈何兮是靑春(장내하혜시청춘)

 

** (다른 번역들을 참고하여 나름 달리 번역해보았습니다)

<返俗謠(반속요)>

                                                  _ 여승 설요

구름같은 마음이 되어 생각은 맑고 곧은데
적막한 골짝기에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
꽃 피고 그 향기 날리어 마음 속이 설레어대니, 
어찌 할거나~ 어찌하란 말인가, 이 청춘을.

化雲心兮思淑貞(화운심혜사숙정) 洞寂寞兮不見人(동적막혜부견인)
瑤草芳兮思芬蘊(요초방혜사분온) 將奈何兮是靑春(장내하혜시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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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설요(薛瑤)는 당나라에서 태어난 신라 이주민 2세이다. 아버지는 설승충, 혹은 설영충인데 당 고종 때 신라에서 당나라로 이주했다. 설요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신라왕 김씨의 후손인데 신라왕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설’국을 식읍(食邑)으로 봉해주고 설을 성씨로 삼게 했다고 하였다. 설승충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당에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다. 좌무위장군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즉위 전 당나라에서 받았던 것으로 외국인에게는 최고위직이었다. 설요는 좌무위장군인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15세 되던 해 설요는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아버지 설승충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설요는 돌연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다. 설요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좌무위장군이었던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이주민으로서의 삶이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혹은 아버지의 죽음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구도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후 6년을 설요는 절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설요는 돌연 환속을 결정했다. 그리고 하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반속요(返俗謠)’, 즉 세속으로 돌아오면서 쓴 노래라는 뜻이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적막한 산사 생활에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보고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설요는 21세였다. 설요는 어린 시절 미모가 뛰어나 선자(仙子)로 불렸다고 한다. 얼굴이 아름답고 시를 쓸 정도로 감성이 풍부했던 설요로서는 적막한 산사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산 후 설요는 병부상서인 곽진(郭震)의 소실이 되었다. 곽진은 고위 관리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다. 곽진은 시를 이해하는 설요를 매우 아꼈다. 693년 2월 17일 설요가 통천현(通泉縣)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곽진은 매우 슬퍼하며 고국이 멀어 도달하지 못할까 하여 통천현 혜선사(惠善寺) 남원에 빈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로 유명한 문사 진자앙(陳子昻)으로 하여금 설요의 묘지명을 짓게 하였다. 진자앙이 쓴 설요의 묘지명이 진자앙의 문집을 비롯한 여러 문헌 자료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국여성인물사전] 126. 설요(薛瑤)

설요(薛瑤)는 당나라에서 태어난 신라 이주민 2세이다. 아버지는 설승충, 혹은 설영충인데 당 고종 때 신라에서 당나라로 이주했다. 설요의 묘지명(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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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글 모음 청장관전서 제54권 '앙엽기(盎葉記)'에도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전당시(全唐詩)》의 소전(小傳)에,

“설요(薛瑤)는 동명국(東明國) 사람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승충(承沖)의 딸인데 곽원진(郭元振)에게 시집가 첩(妾)이 되었다.”

하고, 당 나라 진자앙(陳子昂)이 지은 관도곽공희설씨묘지(館陶郭公姬薛氏墓誌)에,

“희인(姬人)의 성은 설씨(薛氏)로 동명국왕(東明國王) 김씨(金氏)의 자손이다. 옛날 김왕(金王)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설(薛)에 봉하였으므로 따라서 설(薛)로 성을 하였는데, 대대로 김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 그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는 모두 김왕의 귀신(貴臣)과 대인(大人)이고 아버지는 승충(承沖)인데, 당 고종(唐高宗) 때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 나라에 들어가니 황제가 그의 공을 찬양하여 좌무위장군에 임명했다.” 진자앙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왕(東明王) 고주몽(高朱蒙)이니, 여기에 ‘동명국왕 김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금와(金蛙)가 주몽(朱蒙)을 낳았기 때문에 진자앙이 김씨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대저 설(薛)은 신라의 대성(大姓)이요, 김(金)도 신라왕의 성이다. 당 나라 무덕(武德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 4년(621)에 신라 사람 설계두(薛罽頭)가 배를 타고 당 나라에 들어갔는데, 태종(太宗) 때에 와서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에 제수되고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주필산(駐蹕山) 아래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니 태종이 옷을 벗어 시체를 덮어주고 대장군을 제수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둘째 아들이다. 나이 23세 때 당 나라에 들어갔고 고종(高宗) 때 당 나라 군사를 따라 함께 백제를 정벌하였으며, 뒤에 벼슬이 주국(柱國)에까지 이르렀고 당 나라에서 죽었다.

진자앙이 말한 설승충은 아마 신라 사람 설계두가 승충으로 이름을 고친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진자앙은 ‘설에 봉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옛고을에는 본래 설로 고을 이름을 한 적이 없었음에랴. 그렇다면 고종 때 무위(武衛)의 직에 제수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김인문과 함께 귀국했다.’ 하였으니, 김인문이 당 나라에 들어간 시기는 아마 태종 때인가 싶고, 또 ‘황제가 그의 공을 찬양했다.’ 하였으니, 설계두가 당 나라 군사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가 가상히 여겼던 것이며, 여기에 말한 황제는 태종이라고 생각된다. 묘지(墓誌)에 또,

“희인(姬人)은 어려서 얼굴빛이 옥과 같았고 젊어서 호를 선자(仙子)라 하였다. 15세 때 아버지 대장군이 죽자 머리를 깎고 출가(出家)하여 보수보살(寶手菩薩)을 보고 6년 동안 관심(觀心)하였으나 청련(靑蓮)이 나타나지 않자 이에 노래를 부르기를, 《전당시》에 “일설에는 반속요(返俗謠)라 한다.” 하였다.

뇌 끊으려고 정숙을 생각하여 / 化雲心兮思淑貞
적멸의 이치 통하려 하나 보살은 보이지 않고 / 洞寂滅兮不見人
꽃다운 풀에 향기만 그윽하니 / 瑤草芳兮思氛氳 (《전당시》에는 분온(芬蒕)으로 되어 있다.)
장차 어떻게 할거나 이 청춘을 / 將奈何兮靑春

하고, 드디어 속세로 돌아와서 우리나라 곽공(郭公)에게 시집왔는데, 장수(長壽 측천 무후(則天武后)의 연호) 2년(693), 곧 계사년 2월 17일에 통천현(通泉縣)의 관사(官舍)에서 죽었다.” 진자앙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19년(645)에 설 장군이 죽었고 주필산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그 당시 희인의 나이 15세였으니, 그는 신묘년에 출생하였다. 곧 설 장군이 당 나라에 들어간 지 10년 만에 비로소 이 딸을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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