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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39 _ 물품의 한(恨)을 아는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3. 12. 9.

물품의 한(恨)을 아는가

 

결국 휴대폰을 바꾸고 말았다. 3년 몇 개월을 썼는데 폴더의 펼침이 조금 불완전하고 화면과 케이스가 좀 깨진 걸 제외하면 기능에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AS센터에 갔더니 고치는 데 근 80만원이나 든단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나를 데려 가서 신제품을 수리비에 훨씬 못 미치는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출시한 지 8개월가량 지났고 추가 약정들이 있기는 하지만, 수리비보다 싼 신품인데 그걸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도깨비 같은 그 유통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품을 수리비보다 싸게 내놓은 건 소비의 합리를 볼모로 하여 사실상 강매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부지깽이 하나라도 그 쓸모를 다할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뼈저린 물자 부족의 시대를 살아왔지 않았던가. 쓸모가 멀쩡히 남은 물건을 버리려면 상당한 심적 저항이 일어난다. 하지만 가만히 둘러보면 이미 이 시대 우리의 소비가 대개 그렇다.

새로운 제품을 마구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떠안기는 이런 소비 폭주의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잔존한 쓸모를 폐기하는 것도 아깝지만, 지구의 유한한 자원을 그렇게 무분별하게 소모해도 되는지, 그 과정에 배출된 탄소와 지구온난화는 괜찮은지 등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과잉 생산을 멈추지 않는다. 생산 폭주는 부득이 소비 폭주로 이어지고 소비 폭주는 결국 사용 수명을 단축시킨다.

제품 수명을 단축시켜 소비를 늘리려는 노력을 '계획적 진부화'라 한다. '계획적 진부화'는 지금의 스마트폰 시장과 같은 성숙된 시장에서 주로 나타난다. 성숙기에는 신규 수요가 줄고 대체 수요가 매출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대체 수요가 늘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대체 욕구를 유발시켜야 한다. 그것은 대체로 성능 저하가 원인일 것이니, 기업은 적절히 때맞춰 성능이 떨어지도록 교묘한 조치를 취해두는 것이다. 한 때 더 튼튼하고 더 오래 쓰는 제품으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고 소비자에게 이득을 주려 했던 순수한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침 '계획적 진부화'에 관한 법원의 판결이 며칠 전에 있었다. 애플이 아이폰의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면서 성능을 고의적으로 저하시켰다는 것을 이유로 소비자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애플은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도 천문학적인 배상금들을 지급한 적이 있다. 애플의 진부화 전략은 수리의 영역에서도 성실히 가동되고 있다. 수리 대상을 소수의 순정품에만 한정하고, 그것을 매우 비싸게 팔고, 다른 정품 기계에 있던 것을 활용하여도 정상 작동을 방해하고, 수리업자를 특허권 침해로 단속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수리 포기와 신품 구입을 유도한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와 관련하여 '리페어 매니페스토'와 같은 시민 저항이 일어나고, 법제화까지도 시도되고 있다.

계획적 진부화의 역사는 근대 비즈니스의 역사와 함께 한다. 120년 이상이 되어도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백열전구가 있다. 셸비 일렉트로닉스라는 회사가 만들어 1901년에 설치한 것인데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리버모어 소방서에 있다. 에디슨이 1881년에 첫 출시한 후 그 당시의 초창기 전구 제조사들은 모두 전구의 수명을 늘리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4GE, 필립스 등 미국과 유럽의 주요 업체들이 모여 '포이보스'란 카르텔을 조직하여, 전구의 수명을 단축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를 '전구 음모'라 한다.

그리고 초기 나일론 스타킹은 강철과 비교될 정도로 질겼다. 구덩이에 빠진 차량을 스타킹으로 견인하는 광고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질긴 스타킹은 제조업자들에게 큰 불만이었다. 이에 듀폰은 햇빛과 산소와 작용하여 올이 쉽게 나가는 소재를 나일론에 추가했고, 스타킹의 매출은 급증하였다.

제품 수명을 줄여 판매를 늘리려는 기업의 본능적인 노력을 마냥 악마시할 수만은 없다. 우리 모두가 각자 나름의 비즈니스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비의 즐거움도 우리 삶에서 주요 부분이 되었기에, 이미 풍요에 익숙해진 우리 소비 행태를 반세기 이전의 그 결핍의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뿌득뿌득 우길 수도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아무리 소비 폭주에 휘말리더라도, 인간, 인간성, 자연, 지구, 미래와 같은 정말 귀중한 가치마저 그 물품들과 함께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도 '계획적 진부화'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수명을 고심하였으리라. 그래서 염색체의 복제를 통해 세포가 재생되도록 하고, 그 염색체의 양 끝에 텔로미어(Telomere)라는 염기쌍을 2000개 배열하여 두었다. 그 텔로미어는 세포 복제가 일어날 때마다 16개씩 사라지며, 그게 짧아지면 세포분열은 멈추고 본격적인 노화와 죽음을 맞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은 죽음이 있기에 그 삶이 아름답고, 그래서 신도 인간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그 쓸모를 충실히 다하고 주인의 애도를 받으며 종말을 맞는 것은 실로 거룩한 일이다. 하지만 쓸모가 멀쩡한 데도 억울하게 폐기된 물품이 있다면, 비록 사물이지만 못 다한 한()이 맺히지 않을 리가 없다. 그 한()은 자원고갈, 지구온난화 등을 통해 우리 환경과 미래를 파괴시키고, 나아가서는 우리 마음속에 탐욕을 자라게 하는 보복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이제 '계획적 진부화' 그 자체를 정말 진지하게 계획적으로 진부화해야 할 때다. 고려장 당한 물품의 한을 잊지 말자.

 

이 사진을 클릭하면 '백년 전구(Centennial Bulb)'가 여전히 작동하는 동영상을 보여주는 홈페이지로 들아갈 수 있습니다.
1962 - Use your Nylons as a tow rope for the car: A test for the fun of it, but which shows the strength of modern stockings. Two girls hand on to either end of a nylon attached to small car. In fact they can pull the car without damaging the stoc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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