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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 #140 기꺼이 경계에 서라

by 변리사 허성원 2023. 12. 16.

기꺼이 경계에 서라

 

자네, ()를 아는가?” 연암 박지원이 역관 홍명복에게 한 질문이다. 연암은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 축하 사절단을 따라 북경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그때의 기록이 열하일기의 첫 부분에 해당하는 도강록이다. 사절단은 의주에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등 열흘간이나 지루하게 머물다가, 드디어 홍수로 물이 불어 물살이 거세진 강을 건넌다. 대륙으로 가는 연암은 적잖이 설레고 들뜬 듯하다. 노참봉, 정진사, 노복 등과 수다스럽게 가벼운 말들을 나누다가, 뜬금없이 홍명복에게 도를 아느냐고 물었다.

연암의 생뚱맞은 질문에 홍명복이 당황하며 무슨 말인지 반문하자,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라는 건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쪽 언덕에 있다네(道不難知 惟在彼岸). .. 이 강은 바로 저쪽과 우리가 만나는 경계에 있지. .. 물가의 언덕과 같이, 도는 다른 데에서 구할 게 아니고, 바로 그 경계에 있는 것이라네(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지적 유희를 즐기는 연암의 짓궂은 모습이 그려진다.

"()는 경계()에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경계'라고 옮긴 한자 '즈음 제()'는 그 훈대로 시간적 혹은 공간적 '무렵'이나 '언저리'를 뜻하지만, ''이나 '변두리' 혹은 '사이''만남'의 뜻으로도 쓰인다. 연암이 한 말에서는 그 전후 맥락으로 보아 '사이' '경계'라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그리고 '()'라는 것은 가벼이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잘 알려진 대로  대충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 혹은 우주의 질서나 자연 법칙을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땐 삶의 본질이나 그를 따르는 길을 의미한다. '()'는 역시 노자나 장자에 기대어보아야 하겠지만, 이들에게서 '()가 경계에 있다'와 연결되는 말은 본 기억이 없다.

'도는 경계에 있다'고 했을까? 그 말을 할 때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은 곧 나라 간의 경계였고, 이쪽의 조선에서 저쪽의 청나라 땅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조선에서만 살아온 연암에겐 청이라는 대국으로 들어가는 가슴 벅찬 순간이다. 엄청난 낯선 문물에 문화적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을 수도 있고, 이쪽에서 익숙하고 옳았던 모든 것들이 저쪽에서 온통 그릇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쪽에서의 좁은 소견으로 저쪽의 문물을 다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겠다는 다짐도 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경계'는 이 세상의 끝인 동시에 저 세상의 시작이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단순히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이 아니다. 그곳은 인종, 인간, 사상, 문화, 철학, 관점 등 온갖 다름이 만나고 공존하는 장소인 동시에, 그 특별한 상황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우물 속에 살면서 우물을 모두 말할 수 없고 더욱이 바깥세상을 더 말할 수 없으니, 바깥에 나가야만 비로소 우물과 그 바깥을 모두 말할 수 있다. 연암은 드디어 그 바깥을 향한 경계에 선 것이다. 그 경계를 통해서만 서로 다른 양쪽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경지에 들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바로 거기에 도가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부즉불리(不卽不離)'를 언급하였다. 서로 같아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상이한 가치들이 서로 같아지지도 분리되지도 못하고 공존하는 상황, 그것이 바로 도()의 상황이다. 한 가지 동일한 것만이 존재하거나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유일의 진리나 절대적인 가치를 독단 즉 도그마라 한다. 다름의 존재를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는 도그마는 소통을 막는 벽을 세우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래서 도는 경계에 서서 여러 다른 옳음들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 조화를 도모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그래서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 _ 도덕경)고 하였다.

그리고 '경계'는 모든 것의 ' 한계'이기도 하다. 그 한계는 시간적, 공간, 정신적 혹은 기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인류는 부단히 그 한계를 무너뜨리려 도전하여 왔다. 인간의 도전에 의해 극복되어버린 경계는 문턱, 임계점 혹은 변곡점이라 불리게 되며, 그를 통해 수많은 지리적, 기술적 혹은 지적 신세계가 개척되고 확장되었다. 그래서 경계에서는 모든 변화가 시작하고, 창조나 탄생이 일어난다. 만물의 근원인 도는 필시 '경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앎과 모름의 사이에도 '경계'가 존재한다. 그 경계는 새로운 지식들 간의 충돌이며, 그 지적 불편은 의문을 일으켜 질문을 유발하고, 질문은 지식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지식을 다시 창조한다.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 경계는 그저 벽에 불과하지만, 질문은 그 벽을 눞여 깨달음의 다리를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공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소크라테스도 같은 취지의 소위 '무지의 지'를 말하였다. 도는 역시 앎과 모름의 경계에도 존재한다.

앎이란 건 풍선과 같다. 앎이 커지면 커질수록 모름과의 경계는 더욱 길어지고 넓어지는 법이다. 모든 것의 경계에서는 다 그러하다. 이쪽이 커지면 저쪽도 더 커지거나 많아진다. 그래서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는 한 장()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고 하였던가. 도는 결국 경계에서 만나지만 같아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가치 사이의 불가피한 마찰이고 저항이며 갈등인 동시에, 그들의 공존과 포용이며 조화이고, 배움과 깨달음이며 창조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바로 '도(道)'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온갖 다름과 갈등 속에서 조화와 창조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부득이 도가 존재하는 경계를 부단히 만날 수밖에 없. 그런데 여러 인간이 있다. 경계를 모르는 자, 피하는 자, 기다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경계를 먼저 찾아가 기꺼이 그곳에 서려는 자가 있다.

 

** 蛇足

'제(際)'를 '즈음'으로 할지 '사이'나 '경계'로 할지 고심했었다.
결국 '경계'라고 풀어놓기는 했지만 그에 감춰진 정서가 충분히 느껴지지 않은 듯하여 아쉬웠다.
어떤 말로 풀든 '제(際)'에는 '설렘'이라는 감정이 들어 있어야 한다.
설렘이 없으면 도(道)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진정한 '제(際)'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도가 존재하는 '제(際)'라면 이런 때 이런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연암이 압록강을 건널 때처럼, 첫 직장에 출근할 때, 처음 해외 출장을 나갈 때, 벼르고 벼른 창업을 결심할 때, 새로운 프로젝트의 뚜껑을 열 때, 맞선을 보러 나갈 때, 사립문을 열고 먼동이 트는 아침을 맞을 때, 새 책의 첫 표지를 열 때, 영화관에서 첫 장면이 시작할 때, 해변에 이르러 탁 트인 바다를 보는 순간, 연암이 탁트인 요동 벌판을 바로 볼 때, 며칠을 끙끙 앓으며 고심하던 화두가 확 풀리며 깨달음을 얻을 때, 첫 아이가 태어날 때, 아주 오랜만에 고향 마을의 입구에 들어설 때, ..

배움이란 것도 그렇다. 배움은 새로이 만나는 '모름'에 대한 호기심이나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그 짜릿한 지적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인간을 성장시키고 그를 행복하게 해준다. 그것은 지적인 '제(際)'이다. 

그러니.. 도(道)에는, 경계에는, 변화에는, 설렘이 함께 하여야 한다. 

**
애벌레의 죽음은 나비의 탄생이다.

 **
모든 출구는 어딘가의 입구다.

 

 

**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_ 論語 爲政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줄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거든요. 즉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못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지의 지 (플라톤 『향연』 (해제), 2005., 김인곤)

 

** <도강록(渡江錄) 중에서>
(* 한국고전종합DB의 번역 내용을 내 나름으로 좀 수정하였음.)

내가 홍군(洪君) 명복(命福)

(우두머리 역관)

 더러,
“자네, 도(道)를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또,
 도(道) 란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언덕에 있다네.”(道不難知 惟在彼岸)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쪽과 우리가 만나는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천하 사람에게 두루 적용되는 만물의 만물의 법칙(法則)이라네. 물가의 언덕과 같은 것이지. 도를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것이라네.”(非此之謂也。此江乃彼我交界處也。非岸則水。凡天下民彛物則。如水之際岸。道不他求。卽在。)
(* : 떳떳할 이, 떳떳한 도리, 변하지 않다. 際 : 변두리, 가, 끝, 즈음, 만나다)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_ 함민복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