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홍범도 장군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쓰라고 했다."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놓는 등,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거듭되는 악행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처참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하지만 머잖아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1868년 나는 평양 서문(西門)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태어난 지 칠 일만에 죽고 동냥 젖을 먹으면서 아버지 품에서 자랐습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습니다.
열다섯 살 때 나팔수로 군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사고를 치고 황해도 수안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종이 만드는 지소(紙所)에서 3년간 제지(製紙)노동자로 일하였습니다. 악랄한 지소 주인이 임금을 체불하길래 주인을 때려 죽이고 산골로 숨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금강산에서 중노릇을 하였습니다. 여승을 만나 함께 도망하였습니다.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 들어가 사격연습을 하였습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하는 것을 보았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듣고 산골에서 나왔습니다.
1895년 강원도에서 김수협과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일본놈들이 멘 총을 보니 과연 욕심이 나서 못 견디겠습디다. 김수협과 함께 일본군을 습격하고 총을 빼앗았습니다. 의병을 모집했습니다.
포수와 빈농으로 의병부대를 만들어 의병장 유석진의 부대와 연합하였습니다. 세 차례 전투를 치렀는데 대패하였습니다. 김수협도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나 혼자 살아남아 금광에 숨었습니다. 일본군에게 붙잡힐 뻔한 위기에서 일본군 세 명을 죽였습니다. 산간지방을 다니며 혼자 의병을 하였습니다. 총탄도 떨어지고 신발도 없어 고생만 하다가 농사를 지으며 포수로 살았습니다.
1904년 일본군에게 잡혔지만 6개월 만에 도주에 성공하였습니다. 1907년 사냥꾼들의 총기를 압수하기 시작하자, 다시 의병 활동에 나섰습니다. 북청의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습니다. 서짝골 포수막에서 포수들을 만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1월 휘치령 말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는데 일등 포수들이 여섯 사람이나 죽었습니다. 북청 엄방골에 들어가 포수들에게 총탄을 나눠 주고 베승개덕에서 일본군을 처단하였습니다.
1908년 삼수부사 유등을 처형하고 쑥꽃대에 효수하였습니다. 2월 20일 갑산읍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죽였는데 의병 48명이 전사했습니다. 3월 20일 일진회 간부 임재덕, 김원흥 등이 나의 처를 붙잡아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발가락 사이에 심지를 끼우고 불을 붙였습니다. 부인은 혀를 끊어 자결을 시도하였습니다.
4월 2일 임재덕, 김원흥을 체포하여 처형하였습니다. 일본놈은 남의 강토를 빼앗자고 패악질을 한다지만, 동포를 배신하고 일본의 앞잡이짓을 하는 놈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5월 7일 함남 장진 평풍바위 밑에서 의병 연합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1800여 명의 의병을 11개 중대로 편제하였습니다. 6월 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500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군 107명을 사상시켰고, 아들 양순과 의병 6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병 부대들이 모두 해산하는 상황에서 해외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10월 삼수군에서 야밤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1909년 연해주에 도착하였습니다. 1910년 다시 국내로 진입하여 무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습니다. 무산 왜가림의 일본병참소를 공격하였습니다. 종성에서 포위되어 혼자만 살아남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습니다. 1911년 부두에서 짐꾼 일을 했습니다. 노동회를 결성하고 회원들의 임금을 모았습니다. 금광에서 일하면서 자금을 비축하였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과 동맹국이 된 러시아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금광에서 모은 돈으로 오연발총을 구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인사회당의 당수 이동휘가 '독립군총사령관'으로 나를 임명하였습니다. 상해 임정의 대일선전포고에 호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선언하였습니다.
1920년 6월 7일 나는 봉오동 골짜기에 포위진을 짜고 일본군을 유인하였습니다. 소나기가 막 쏟아지고, 운무가 자욱하게 끼여 앞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선봉으로 올라가던 저희들의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우리 부대는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가 산 정상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10월 김좌진,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에 참가했습니다.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만주에서 무기도 식량도 구하기 어려워 연해주로 이동하였습니다. 1921년 3월 경,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당시 한인무장세력은 총 1900명 정도였습니다. 같은 해 6월 28일, 러시아 정부는 자신의 명령에 협조하지 않는 한인독립군을 진압했습니다. 나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이 개최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하였습니다. 레닌을 면담했습니다. 레닌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1924년 러시아의 한인촌에서 3년간 농사를 지었습니다.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저의 목표는 '조선의 독립'이었습니다. 1934년부터 집단농장 콜호즈에서 수위로 일했습니다. 1937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곳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했습니다.
1920년 6월 7일에 일어난 봉오동 전투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투로 임시정부는 대승리를 쟁취한 우리 독립군을 '아군'으로 불렀다. 대한민국 군대의 승리라는 것이다.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거두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85호에서 봉오동 전투를 조명했다. 신문은 "6월 7일 상오 7시에 북간도의 주둔한 우리 군 700명이 북로사령소재지인 왕청현(汪淸縣) 봉오동을 향하여 행군할 새 불의에 동 지점을 향하는 적군 300명을 발견한지라. 동군을 지휘하는 홍범도, 최명록 양 장군은 직접 적을 공격하여 급 사격으로 적의 120여의 사상자를 출(나오게)케 했다"고 보도했다. 임정은 해당 보도에서도 이들을 '아군'으로 불렀다. 같은해 12월 25일 임정 군무부는 독립신문에 북간도 독립군 승전보를 발표하기도 했다. 봉오동전투의 시작인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에서의 전투 전개, 청산리 일대 독립전쟁에 대해 전반적인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신문에는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했다", "적군의 사망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요, 아군의 사망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 등이 기록돼 있다. 자료=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46년 12월 7일(토), 서울에서 발간된 "어린이 신문" 지면에 박성호 기자가 쓴 글이 발견되었네요. 너무 감동과 전율이 느껴지고 눈물이 맺히려 합니다.
"조선해방을 위하여 몸을 바치신 분들(8)-홍범도 장군" 이게 글의 제목입니다.
해방된 지 16개월 되던 시점, 좌우가 극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날마다 혼란 속에 하루가 저물던 때, 홍범도 장군의 위대한 생애가 아동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귀중한 자료는 남현수 씨가 발굴해서 보내왔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모진 수난과 모욕을 겪으시는 홍범도 장군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 Vladimir Tikhonov(박노자)
1939년3월21일자 크질 오르다 고려극장의 인사 발령서. 홍범도 동무를 임시직 경비원으로 채용하여 월급 100루블을 지급하라는 내용입니다. 발령을 낸 사람은 극장의 지배인인 정후겸이었습니다. 강제 이주 이후 무직자가 된 홍범도 장군을, 고려극장이 이렇게 해서 "구제"한 셈이 됩니다.
참...홍 장군은 힘을 다 해 일제와 싸웠고, 인생 막바지에 레닌의 민족 정책을 사실상 폐지한 스탈린의 반동으로부터 강제 이주라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됐습니다. 이제 와서는 또 윤 정권이라는 최악의 반동으로부터 그 흉상이 "강제 이주 (?)"를 사후적으로 또 다시 당하는 셈입니다. 일제, 스탈린, 그리고 이젠 윤 정권까지...그래도 끝까지 꿋꿋하게 버틴 장군은, 고려 민족의 투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일제도 갔고 스탈린주의도 갔고 윤 정권도 머지 않아 망가질 터인데, 홍 장군은 남을 겁니다. 영원히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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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박노자)
이 분은 학교에서 역사를 제대로 배우셨나, 싶습니다. 1913년에 "소련의 극동지역"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은 1917년 이후, 즉 1922년12월에 결성된 것입니다. 그 정도면 세계사 교과서에서 안나오나요? 이외 일부 기술은 아예 납득이 잘 안갑니다. 홍 장군 관련의 자료는 RGASPI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가 문서보관소)에 있는데, "거금을 주고 구입"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연구자가 신청하면 열람할 수 있고, 대부분의 자료는 이미 기존에 출판된 저서에서 다 영인된 것입니다. 연금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이력서를 작성, 제출하는 것은 구소련에서의 관행이었습니다. 홍범도도 소련의 공민으로서 당연히 한 것이죠. 그 당시 고려인의 다른 혁명 간부들처럼, 그가 소련을 새 조국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새 조국 안에서 고려인들의 조선 혁명 사업이 지원을 받고, 고려인들이 - 뉴라이트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대일본 제국과 달리 - 평등한 공민 신분이 되어 고려어로 교육을 받아 행정, 문화 활동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소련 공민 의식과 조선 해방에의 의지는, 그 분들에게는 전혀 모순될 게 없었던 것이죠. 적어도 1937년 강제 이주까지요. 이건 국내에서 고려인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의 논저에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한데 동아일보는 기사를 내기 전에 기본적 팩트체킨 안하고, 논설 위원이라고 하는 분이 어떤 문제를 다루기 전에 관련 학술 논저를 읽지 않는 것 같아요. 저희 대한민국 언론들의 현 상태가 정말 수치스럽고, 걱정스럽습니다.
무릇 글이란 그것을 쓴 사람의 의식과 관점, 수준 및 됨됨이를 모두 담고 있다. 아울러 써놓은 글을 통해서 글쓴이의 지향성, 가치관, 추구의 목표와 품질까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니 글이란 결코 함부로 써서는 아니될 엄중한 정신적 소산(所産)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독자들을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며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일제말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거기에 영합하고 찬양, 옹호하는 글을 썼던 황민문학인들의 사례를 기억한다. 춘원과 육당, 미당과 파인, 모윤숙과 노천명 등의 글들이 오늘날까지 받고 있는 모진 비판은 바로 한국인으로의 정신적 주체와 중심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소일본인으로서의 모범성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최근 동아일보 논설위원 송평인의 글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나라 언론인으로서의 양심과 정신적 중추를 아주 상실한 상태로 최악의 파괴적 논설을 썼다. 그가 쓴 칼럼 "홍범도가 본 홍범도"(2023.9.6)가 바로 그것이다. 이 천박한 글은 첫째 문장의 기본을 갖추지 못했다. 둘째로 그는 국내의 다수 홍범도 연구자들이 쓴 모든 성과를 한 마디로 일축하며 폄하시키고 있다.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얘기해선 안된다'라는 무례하고 파괴적인 대목이 그것이다. 송평인의 칼럼이야말로 자신이 쓴 표현 그대로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뇌까리고 있는 조악한 문장의 전형이다.
셋째로 송평인은 그 글 전편에서 홍범도 장군의 위상에 대해 소비에트의 특혜를 받으려고 애걸하는 가련한 존재로 왜곡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홍범도 장군을 레닌의 종속적 존재로 폄하시키고 있다. 어찌 홍 장군을 이렇게 모독할 수 있는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미 연구되고 검증된 자유시참변에 대해서도 최근 뉴라이트 계열 악당들의 변조된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즉 참변의 전적인 원인과 책임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홍범도 장군에게 모두 몰아세운다. 뿐만 아니라 기존 연구성과를 모조리 '낭설'이라고 거칠게 규정해버린다. 뻔뻔스럽기 그지 없다.
다음 인용문은 송평인이 위대한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을 서술하며 극악무도한 폄훼와 모욕을 가하는 대목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덕목을 완전히 상실한 자의 용서할 수 없는 망언이다.
1)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영웅으로 불리기에는 수치스럽게도 다시 총을 잡지 못했다.
2)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무장투쟁의 여명으로 착각한 황혼이었다.
3) 이종찬 광복회장은 나라를 잃은 적이 없고 따라서 건국이 뭔 말이냐는 '헛소리'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어놓았다.
4) 홍범도에게 '지옥에나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는 나름 신조의 사나이였다. 다만 대한민국 현충원은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국방부는 더 아니고 육사는 더욱더 아니다.
여러분은 송평인이 마구 뇌까린 이 망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기본을 상실했다. 송평인 같은 비천한 하등인간 때문에 동아일보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송평인 따위로 말미암아 전체 언론인이 함께 싸잡아 욕을 듣고 있다. 진작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무뇌(無腦) 상태의 조중동에 대해 국내 양심적 시민들의 탄식과 울분은 하늘을 찌른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독재권력에 아부하고 서민에게 눈알을 부라리는 양아치 언론이라 비판해온 지 오래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송평인의 악랄하고 파괴적인 문장은 마치 일제말 친일매국노가 쓴 것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일부에서는 송평인이 차기 공천을 노리고 쓴 글이라는 시각도 있다. 송평인은 자기가 뇌까린 쓰레기 같은 칼럼을 통해서 가장 저질스러운 밑바닥 품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송평인이 드러낸 송평인". 인간의 기본적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이런 저질 부류를 동아일보는 대체 몇이나 거느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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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부기관의 공적 문서란 말인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정부기관의 공적 문서란 말인가? 허위와 무지, 그리고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판단의 전제에 놓여 있음을 본다. 첫 번째 의혹은 전적으로 허위의 소산이다. 자유시 참변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러시아어 자료와 일본 쪽 정보 자료, 독립군 당사자 자료를 종횡으로 비교분석한 반병률, 임경석, 윤상원 교수 등의 단행본과 박사학위 논문에 의해 대표된다.
그에 따르면 자유시 참변의 기본 성격은 독립군 부대들의 대통합 방법을 둘러싼 내분이었다. 사망자를 낳은 무장해제 결정의 책임은 고려혁명군 지휘부(칼란다리시빌리,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에게 있었다. 홍범도는 유혈 내분을 낳을 것을 우려해 무장해제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음이 자료상으로 뚜렷하다. 국방부가 제기한 첫 번째 의혹은 전혀 사실의 근거가 없다.
두 번째 의혹은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다. 빨치산이란 말은 러시아어 파르티잔(Партизан)에서 온 외래어로,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무장부대를 가리킨다. 비정규군이란 뜻이다. 1919~1922년 그 용어는 ‘독립군’이나 ‘의병’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빨치산’이란 말을 ‘공산주의 무장부대’로 사용하는 용례는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났음을 유의해야 한다.
세 번째 의혹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 탓에 생겨난 오해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소련공산당은 한국 독립운동의 우군이었다. 레닌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금화 200만루블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그중에서 금화 60만루블이 실제 지급됐음을 상기하자. 독립운동가 다수가 소련 제휴를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권대사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이승만조차 소련의 독립운동 지원을 얻기 위해 밀사 이희경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홍범도 동무가 여러 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 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 부고자 : 크즐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
이 슬픈 기사를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일보 옛날 이름 레닌의 기치 그 어두컴컴한 자료실에서 우연히 찾아내고 나는 울었다. 우리 나이 일흔다섯 대한독립군 총사령 출신 장군께서는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다가 극장에 든 도둑과 싸웠는데 몸 크게 다치셨고 그 후유증으로 앓다가 다소 몸이 회복되자 정미소 일꾼으로 또 일하다가 돌아가시었다